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니. 박 회장 칠순 잔치에서 딱 한 번 봤었나? 그것도 살짝 얼굴만 비추고 갔었지?박수아는 해외 유학파로 아이비리거라는 신분에 꽤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고 말끝마다 자신의 독립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학비와 생활비는 전부 박씨 일가의 돈이었지만 말이다.대충 시간을 계산해 본 소은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올해쯤에 졸업이든가?여자친구라고??한편, 박수아도 소은정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차가운 분위기에 자기주장 확실한 이목구비, 질투 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모였다.그런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익숙하지?그리고 다음 순간, 뭔가 떠올린 박수아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더니 눈이 커다래져서는 물었다.“혹시 새언니?”그래 이름이 소은정이었나? 예리가 오빠랑 같이 찍힌 사진을 보내준 적이 있었지. 사진 속 소은정은 박수혁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을 보낸 박예리는 소은정을 항상 촌닭이라며 무시했고 결혼으로 신분 상승한 천박한 계집이라며 모욕까지 서슴치 않았다.그리고 딱 한 번 큰할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만났을 때도 소은정은 가족들 앞에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그런 여자였다.할아버지도, 고모도... 다들 싫어했었지. 아예 존재감이 없는 여자였는데 왜 이렇게 많이 바뀐 거지?비록 그녀가 등장하고부터 소은정은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지만 미간 사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과 당당한 시선에 오히려 왠지 그녀가 고개를 숙여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새언니라는 호칭에 전동하의 입가에 걸려있던 형식적인 미소마저 자취를 감추었다.그제야 가만히 있던 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박수아 씨. 아무리 해외에 있었다지만 그쪽에서도 기사는 볼 수 있지 않나요? 나랑 박수혁 대표 이혼 기사가 한동안 포털 사이트 화면을 가득 채웠던 걸로 아는데... 새언니라는 호칭 좀 불편하네요.”소은정의 깔끔한 선긋기에 전동하의 표정을 힐끗 살핀 박수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전동하의 말에 박수아, 소은정 모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특히 박수아는 모욕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박수혁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박대한의 손녀로서 어딜 가나 대접 받으며 살아온 인생이었다.저딴 이혼녀 때문에 지금 나한테 망신을 주는 거야?전동하에게 품었던 조금의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입술을 꽉 깨문 박수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하,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두 분 즐거운 식사 되세요.”말을 마친 박수아는 바로 레스토랑을 나가버렸다.입맛 다 버렸네...하이힐 굽으로 바닥을 쾅 내리친 박수아는 뭔가 생각난 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어? 기섭 선배 번호 아니에요? 저 기섭 선배 학교 후배 박수아예요...”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많이 지친 듯한 전인국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아... 기섭이가 지금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라. 무슨 일이죠?”그의 질문에 박수아가 다시 매서운 눈빛으로 다시 레스토랑을 올려다 보았다.전동하, 소은정... 날 그딴 식으로 모욕했다 이거지?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뭔가 다짐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쉰 박수아가 입을 열었다.“아, 전 회장님이시군요. 저도 선배 상황...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누가 선배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제가 알아낸 것 같은데요...”한편, 홱 돌아서서 룸을 나가는 박수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은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뭐,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박예리보다는 많이 낫네. 그래 봤자 표정을 숨기는 건 아직 많이 서툰 것 같지만... 그런데 혹시... 에이, 설마.고개를 살짝 저은 소은정은 다시 전동하를 바라보았다.식어버린 차를 쏟아버리고 따뜻한 차를 따라주던 전동하도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두 사람... 뭐 진행 중인 프로젝트 있는 거 아니에요? 나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그녀의 질문에 전동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다른 차로 움직이고 있어요. 차까지 같이 타는 건 내가 불편해서... 항상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제야 전동하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SC그룹 건물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잠시 후,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은정은 마침 1층으로 내려온 한시연과 마주친다.묘한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능글맞게 농담을 건넸다.“설마... 우리 오빠 도시락 챙겨주려고 온 거예요?”소은정을 만날 줄은 몰랐는지 살짝 놀라던 한시연이 미소를 지었다.“오늘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실력 발휘 좀 해봤어요.”“오빠도 오랜만에 과식했겠네요. 그릇까지 다 먹어버린 건 아니죠?”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던 한시연이 뭔가 말하려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소은정,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오전에 말했던 보고서나 올려.”소은호의 목소리에 소은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설마... 통화 중이었어요?”한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은정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윽, 다 들었겠네.“그럼 힘내요, 아가씨...”소은정의 어깨를 두드리던 한시연이 자리를 뜨고 혼자 남겨진 소은정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더니... 천사 같던 새언니가 변했어!!밍기적대며 엘리베이터에 탄 소은정이 사무실로 향하려던 그때 그녀를 기다리던 소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은정,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아, 밀린 업무가 많아서.”뻔뻔한 대답에 피식 웃던 소은호의 표정이 곧 진지하게 굳었다.“S시 프로젝트 말이야. 전체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긴 한데 방금 전에 원자재에 문제가 생겼다고 연락이 왔네. 무슨 상황인지 직접 가봐야 할 것 같긴 한데...”“내가 갈게!”소은정이 눈동자를 반짝였다.“네가 가도 되긴 한데... 조심해. 난 오후에 바로 프랑스로 출장가봐야 해. 프랑스 지사 회계 감사에 문제가 좀 생겨서...”소은호가 건넨 파일을 받은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장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어휴, 골치 좀 아프겠네. 오빠가 일부러
“나랑 같이 가요. 은정 씨 혼자 보내려니까 마음이 안 놓여요.”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참나. 내가 뭐 놀러가요? 일 때문에 가는 건데 남자친구랑 같이 가면 직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말은 안 해도 다들 비웃을 걸요? 그러니까 얌전히 집에서 기다려요. 내가 문자도 전화도 자주 할게요...”두 사람의 달콤한 통화에 우연준은 귀라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연애를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그게 우리 대표님에게도 적용이 될 줄이야. 일적으로는 어찌 보면 냉정하기까지 한 소은정의 부드러운 모습에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우연준이었다.한편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기분이 좋아진 전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풉, 그래요. 그럼 내가 데려다주는 건 괜찮죠?”“됐거든요? 이제 곧 떠나야 해요...”그녀가 통화를 끝냈을 땐 우연준은 이미 짐 정리를 마친 뒤였다.사무실에 준비된 휴식실에서 옷 몇 벌과 필요한 파일, 노트북까지 깔끔하게 챙긴 우연준을 향해 소은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수고하셨어요, 우 비서님.”어휴, 기분이 많이 좋으신가 보네. 우리 대표님.“별말씀을요. 차량 대기 중입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실 거죠?”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잠시 후, 이미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최성문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차량이 천천히 움직이고 우연준은 바로 이건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팀장님, 대표님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쪽 상황은 어떻습니까?”우연준의 질문에 이건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분명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거든요? 1기 건설은 끝났고 2기 시작을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저희 원자재가 포름알데히드 기준치를 초과했다는 뉴스가 터졌지 뭡니까...?”이건의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던 소은정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이 팀장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원자재 자체에 정말 문제 없는 거 맞나요?”그녀의 질문에 한숨을 푹 내쉰 이건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맹세코 원자재 자체에는 문제가
“아니요. 지금은 저희 쪽 연락은 일체 받지 않고 있습니다.”이건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어찌 되었든 십여 년간 기업을 위해 일한 몸, 단순히 경력으로 치면 소은정의 대선배급인데 무슨 문제만 생기면 그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얼굴이 화끈거렸다.하지만 이런 상황을 숨길수록 문제가 더 커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소은정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빌미를 제공했다는 그 일용직 노동자는요?”소은정의 목소리가 확연히 차가워졌다.“아, 그 사람 신변은 확보한 상태입니다. 사건 발생 후 공사를 중단하고 바로 그 노동자의 행방부터 찾았거든요.”“알겠습니다.”이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은 소은정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어쩌면 하루도 속 편할 때가 없냐...한편, 태블릿으로 메일을 확인하던 우연준이 그녀에게 뭔가를 보여주었다.“폭로 글에 첨부된 사진입니다. 정식 기사가 아니라 SNS 계정에 폭로글과 사진을 게시했는데 지금 조회수가 20만을 넘어가고 있습니다...”조잡하게 제작된 영상에는 건축 자재의 사진과 함께 “SC그룹, 이런 건축 자재 정말 괜찮은 겁니까?”라는 글이 첨부되어 있었다.그리고 현장 노동자와의 대화가 담긴 영상이 이어졌다.“이런 게 싸니까 뭐... 대기업이라고 별수 있나? SC 말고 다른 기업들도 다 써...”짧은 영상이었지만 파장을 일으키기엔 충분했고 댓글창은 더더욱 가관이었다.“하, 있는 놈들이 더한다더니. 그깟 돈 좀 아끼겠다고 사람 목숨으로 장난을 쳐?”“SC그룹도 이런 짓을 한단 말이야? 하, 내가 산 아파트에도 문제 있는 거 아니야?”“평생 집 하나 장만하는 게 꿈인 서민들에겐 너무 충격적인 소식이네요. 애들 키우는 집도 많을 텐데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거죠?”“하, 집 살 돈 없어서 다행이다...”댓글을 확인하던 소은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유독물질 기준치 초과”, 소비자의 건강과 직결되는 논란이니 말 한, 두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원자재들 전부 재점검 들
또각또각.하이힐 소리와 함께 차가운 표정의 소은정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우연준과 최성문이 그녀의 양옆을 빈틈 없이 지키고 부랴부랴 뒤를 따르며 눈치를 살피는 이건은 차마 말 조차 건넬 수 없었다.잠시 후, 회의실로 들어가려던 소은정이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허름한 옷차림, 새카만 낯빛, 방금 전 영상 속 노동자였다.깡마른 몸에 잔뜩 겁을 먹은 얼굴...억한 심정으로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말없이 회의실로 들어간 소은정이 책상 위에 펼쳐진 자료를 쭉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아까 회의실 앞에 서 있던 사람... 맞죠? 들어오라고 해요.”잠시 후, 노동자가 쭈볏거리며 회의실로 들어오고 소은정의 기세에 눌려 차마 의자에 앉지도 못하자 이건이 눈치를 주었다.“본사 소은정 대표님이세요.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는지 솔직하게 말씀드려요.”“그게...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취해서 한 말인데...”남자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술자리에서 별 생각없이 한 말 때문에 작업반 반장, 대리, 팀장부터 대표라고 불리는 여자까지 만나게 되다니.나이는 어리지만 차가운 포스를 내뿜는 소은정의 모습에 남자의 가슴이 불안감으로 콩닥거렸다.한편, 불안한 건 이건도 마찬가지였다.남자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는 소은정의 모습에 이건이 잔뜩 굳은 얼굴로 남자를 다그쳤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지금 김재한 씨 때문에 우리 그룹이 입은 손실이 얼만 줄인지 알아요? 며칠간 공사 중단 때문에 입은 손실만 10억이 넘습니다. 그걸 김재한 씨가 책임질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근거도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 다입니까? 무고죄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있어요!”어마어마한 손해 금액과 법적 책임이라는 단어에 김재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게...”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은정이 우연준에게 눈치를 주고 그녀의 뜻을 알아챈 우연준이 이건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
소은정의 말에 흠칫하던 김재한이 벌떡 일어섰다.“물론입니다. 그럼 저 계속 일할 수 있는 겁니까?”김재한의 반응에 이건이 헛웃음을 지었다.마음속으로는 백 번도 넘게 자르고 싶었지만 이번 사건이 그저 이름 없는 기자의 정의감 넘치는 폭로가 아니라는 걸 이건도 알고 있었다.눈에 보이는 건 전부 미끼일 뿐, SC그룹을 노리는 더 큰 세력의 음모임이 분명하니 괜히 해고했다가 억하심정으로 그쪽 편에 붙으면 상황이 더 악화될까 봐 억지로 참고 있는 중이었다.그런데 뻔뻔하게 계속 여기서 일하겠다고? 나 참, 낯짝도 두껍지...이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몇 달 전, 소은정이 지성그룹 프로젝트를 맡겨줄 때만 해도 십여 년간의 직장 생활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거라 생각했다. 이 기회만 제대로 잡으면 승진은 물론이고 임원까지 노려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고가 끝없이 터지니 조카 뻘인 대표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한편, 김재한의 질문에 소은정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입니다. 김재한 씨의 결백이 밝혀진다면 회사 측에서도 김재한 씨를 해고할 이유가 없겠죠.”소은정의 말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던 김재한이 한 발 다가서려 했지만 그녀의 곁을 지키던 최성문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남자의 매서운 눈초리에 겁을 먹은 김재한이 부랴부랴 뒤로 물러섰다.“아, 죄... 죄송합니다. 너무 기뻐서 그만... 솔직히 며칠 동안 저도 마음 고생이 심했습니다. 회사에서 소송이라도 걸면 어쩌나 싶어서... 대표님, 뭐든 시키는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자르지만 말아주세요... 제가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한가득입니다.”그제야 긴장이 풀린 건지 김재한은 급기야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소송이라뇨. 김재한 씨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것뿐인데요 뭘.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이상 공사는 잠시 중단될 겁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도 최대한 상황을 수습할 테니 곧 재개될 거예요. 동료분들께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김재한이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겨우 몇 마디 말 때문에 노동자들을 자른다면 회사 측에 불만이 생기는 건 둘째치고 정말 의도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은 이들과 한편을 먹고 현장에서 장난질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대표님은 거기까지 내다보셨구나.이건은 처음 소은정을 만났을 때 어린 여자애가 뭘 알면 얼마나 알겠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회장님도 소은호 대표님도 자기 딸이라서, 자기 여동생이라서 회사 전체를 맡긴 게 아니셨어. 소은정 대표님은 충분히 리더라 불릴 자격이 있는 분이야.소은정을 바라보는 이건의 눈빛에 존경심이 더 추가되고 방금 전까지 절망감으로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소은정이라면 정말 이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지금 가장 시급한 건 기자를 찾는 겁니다. 도대체 누구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한 건지.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요.”이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래서... 찾았나요?”“아니요.”실망스러운 대답에 소은정의 미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이 팀장님, 지금 저랑 밀당하시는 겁니까?”오빠가 직접 왔으면 당신 백 번도 넘게 잘렸어...소은정의 날카로운 시선에 흠칫하던 이건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기자의 행방은 못 찾았지만 영상을 올린 채널에 남긴 정보로 단서를 하나 찾아내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도움이 될지...”너무 사소한 것이라 처음부터 보고하지 않은 것인데 소은정의 표정을 보아하니 뭐라도 말해야 할 듯 싶었다.이건은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말을 이어갔다.“전의 게시물을 확인해 보니 제품 홍보도 한 것 같더군요. 뭐 매출은 딱히 안 좋은 것 같았지만요. 그리고 이번 폭로 영상이 대박을 친 뒤로 제품 홍보 영상은 전부 지웠습니다.”이건의 설명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제품이요? 어느 회사 제품이죠?”“태한그룹이 출시한 전자제품이었습니다...”하지만 고개를 젓던 이건이 말을 이어갔다.“그저 우연일 겁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