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징인의 그 말은 진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만약 진윤이 더 심하게 나선다면, 허징인도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는 결심으로 전면전을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하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상혁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진윤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아는 건, 우리 딸은 생전에 당신 같은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에요. 그러니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허징인은 차분하게 대응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향 한 번 올리고 바로 떠나겠습니다.”진윤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보안팀에게 물러서라고 지시하며 허징인이 향을 올리게 했다.허징인은 향을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너무 일찍 떠나버렸네요. 정말 안타깝습니다.”그 말을 들은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진윤의 손은 분노로 인해 꽉 쥐어져 있었고, 눈에는 강렬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하연은 조용히 속삭였다.“혹시 사모님이 허징인이 딸을 죽인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걸까요?”사실 그전까지 하연도 같은 생각이었다.하지만 오늘 장례식에서 허징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의 혐의를 상당 부분 씻어내는 듯 보였다.진짜 범인이라면 이렇게 당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었다.상혁은 하연의 손을 가볍게 쥐며 안심시키듯 말했다.“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의심을 품는 게 당연해.”허징인은 향을 올리고 나서 더 이상 자리를 오래 지키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상혁과 하연 역시 음식을 먹지 않고 조용히 낮은 자세로 장례식을 빠져나갔다.그러나 부상혁 대표와 최하연 사장이 함께 있는 모습은 결국 매체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뒷모습만 담긴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부 대표님.”차 앞에서 누군가 상혁을 불렀다.원신민이 즉각 앞으로 나와 막아섰다.“허징인 씨, 지금 부 대표님께서는 바쁘
“정 사장님은 DL그룹의 핵심 인재입니다. 사모님께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저와 정 사장님의 관계를 추측하며 선을 넘으시는 건 지나칩니다. 이제 돌아가십시오.”상혁은 단 한 번도 허징인의 말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은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출발해.”차량이 빠르게 움직였고, 하연은 백미러 너머로 점점 멀어지는 허징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은 이내 아주 작은 점으로 사라졌다.하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허징인이 나중에 당신한테 증거를 보내겠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성의’를 보일까요?”상혁은 미소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나한테만 보내지 않을 거야. 아주 많은 사람들이 허징인의 ‘성의’를 확인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이틀 후, 서여은의 잡지에 실린 한 기사가 모든 이목을 사로잡았다.[자산 10억의 DL그룹 지사장, 불륜 의혹 제기!]기사에는 흐릿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호텔 복도에서 한 여성을 껴안고 있는 정규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성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이 기사는 순식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상혁은 사무실에서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다.“정 사장을 본사로 불러와. 반드시 해명을 들어야겠어.”...동남아에서 급히 귀국한 정규인은 사무실에서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이 사진은 AI로 합성된 겁니다! 절대 제 사진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를 모함하려고 이런 짓을 한 거예요!”상혁은 천천히 눈을 들어 정규인을 응시했다.“정 사장님, 아직도 그런 연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상혁은 서랍에서 사진 한 묶음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 사진들은 모자이크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이 소문이 퍼지기 전에 제가 미리 알아내 막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언론의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을까요? 정 사장님 우리 아버지께는 뭐라고 설명할 실 건데요?”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규인에게 다가가며 차가
허징인은 미소를 지었다. “부부는 원래 한 나무에 깃드는 새와 같다고들 하죠. 하지만 부 대표님도 아실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결혼은 사랑보다는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게다가,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요.” ...과거에도, 정규인은 다른 여자와의 사진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허징인은 그 뉴스를 보고 충격으로 멍해졌다. 남편은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왔고, 지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정말로 술에 취해 작업 당한 거야. 그 여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 제발 날 용서해줘, 여보.” 허징인은 한때 분노로 집 안의 모든 것을 부수며 울부짖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잖아. 평생 나만 사랑해준다고!” 정규인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너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문제는, 특히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피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해줘.” 그의 목소리에는 죄책감과 함께 야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결국 정규인은 다시 허징인에게 애원했다.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허징인은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뒤에는 가족과 양가 부모님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혼이라는 선택지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며칠 뒤, 정규인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나만 부탁하자. 내일 기자회견에 나와서 이 일을 해명해줬으면 해. DL그룹 본사에서도 이 사안을 설명해야 해.” 그는 체면이 필요했고, 허징인은 처음으로 남편의 불륜 문제를 공개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 일이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이후로도 정규인의 불륜 사건은 계속 이어졌고, 다만 언론이 아닌 그녀의 핸드폰 알림으로 조용히 찾아왔다. ...허징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부대표님께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정규인과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우리 둘 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함께 DL그룹에 들어가 미래를 꿈꾸며 나아갔죠. 결혼 후 저는 가정을 위해 한 발 물러섰고, 남편은 앞에서 능숙
“부 대표님, 부 대표님이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유혹과 남자가 바람을 피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죠. 그럼 대표님은요? 혹시 그런 적 있으신가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허징인은 나이가 더 많았지만, 상혁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존댓말을 썼다. 상혁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제 마음은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즉, 자신은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정규인도 저와 결혼할 때 사랑한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그 후 10여 년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엉망이었어.’ ...지금 차 문은 열려 있었고, 바깥에서 들리는 똑딱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연이 일을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상혁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문서를 들고 걸어오는 하연은 여전히 소녀와 여인의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참으로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문득 말을 꺼냈다. “만약 최악의 상황에서 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고 하면, 그때 제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운다면, 그 상대는 반드시 최하연일 거예요.” 허징인은 입을 떼려다 멈췄다. 상혁의 말투는 단호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요즘 들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부상혁과 최하연은 다시 화해했고, 곧 다시 함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상혁도 이 사실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하연이 차에 다가왔을 때, 허징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하연은 문서를 덮으며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상혁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녀를 반쯤 안으며 말했다. “문서를 보면서 걸으면 어떻게 해. 잘 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우리 회사 쪽에서 급하게 처리 일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하연은 그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살짝 가슴선을 드러냈고, 상혁은 장난스레 물었다. “색깔은?” 하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그의 손을 쳐냈다. “안 입었어요!” 상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상혁과 하연의 약혼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은 모두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약혼이 결정된 이상, 번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씨 가문에서도 반대 의견은 없었고, 어쩌면 감히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저녁 식탁에서 상혁이 드물게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저와 하연이 약혼하게 되었습니다.”순간 식탁 위의 젓가락들이 멈췄다. 송혜선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갑작스럽네요. 둘이 헤어졌다고 들었는데요?” 상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 외부 소문을 들으셨나 봅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네가 가정을 이루고 자리 잡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네 어머님 쪽도 이미 알고 계셔? 최씨 가문에서도 반대는 없었고?” 부동건은 식탁에 앉아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하연이는 진숙이가 키운 아이야. 진숙이도 기뻐할 일이지 반대할 일은 없을 거야. 다만 최씨 가문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거야. 그 가문은 과거에도 항상 자신들의 가문이 주도권을 잡아오면서 살아왔지. 지금도 하민과 하연이 이끌면서 더 번창하고 있다. 네가 이런 관계를 잘 조율할 수 있겠니?”부동건은 하연에 대해 별다른 반대는 없었다. 하연은 반쯤 자신의 딸처럼 여겨졌고, 과거 두 사람을 반대한 이유는 상혁의 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장애물이 사라졌다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상혁은 단호히 말했다. “제가 하연이하고 약혼하려고 하는 건, 저희 관계가 더 나아가고 가까워지고 싶어서이지, 가문 간의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송혜선은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관계는 불가피하게 얽히게 될거야.” 상혁은 차분히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지금 저희 약혼에 의견이 있으신가요?” 송혜선의 뒤에 서 있던 조봉규가 송혜선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모르겠어요! 고나희가 우리와 관련된 많은 일을 알고 있었잖아요. 혹시 모든 내용들을 기록해둔 건 아닐까요?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면 우린 큰일 날 겁니다.” 정규인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동안 둘이 손을 잡고 DL 그룹에서 상당한 부당한 이익을 취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불법적인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 흔적들이 한순간에 빛을 보게 된다면, 그들에겐 끝없는 나락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상무님, 잊지 마세요. 고나희의 죽음은...” “그만해요!” 남준은 거칠게 말을 끊었다. 그의 눈에는 불꽃 같은 분노가 번뜩였고,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며 날카로워졌다. “지금 상황이 충분히 복잡합니다. 정 사장님,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습니까? 부상혁이 곧 최씨 가문의 지지를 받아 약혼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DL 그룹의 미래 실권자가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보아하니, 이제 우리에게는 승산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정규인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고, 두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저도 더 이상 도박할 수 없어요. 최근에 제 모든 일이 폭로된 건 부상혁이 우리를 견제하려는 신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무님, 혹시 부상혁이 이미 우리가 계획했던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부남준은 정규인을 쏘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마치 단검처럼 날카롭게 빛났고, 얼굴에는 혐오와 피로가 가득 서려 있었다. “정 사장님, 그 입 잠시만이라도 좀 닫아 주실래요. 지금 우리 그렇게 여유롭게 추측이나 할 시간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남준의 말에 정규인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날이 선 유리처럼 위태로웠고, 조금만 건드려도 산산이 부서질 듯했다....한낮의 겨울 햇살 아래, 남준이 흔들의자에 누워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바로 정다영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부남준의 약혼식은 대단히 성대했다. 정씨 가문은 이 결혼을 매우 중시했기에 준비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송혜선은 원래 약혼식에 직접 참석하려 했으나, 출발 전 넘어지는 바람에 큰 위기를 겪었다. 만약 조봉규가 곁에 없었다면 태아를 잃을 뻔했다. 부동건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서 태교나 해.” “남준이 약혼식인 큰 행사인데, 어머니로서 참석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송혜선은 억울한 듯 반박했지만, 부동건은 사적인 의도가 있는 듯 대답을 피했다. “예법은 모두 갖췄어. 집사가 경험도 풍부하니 걱정하지 마. 이 정도 일은 실수 없이 처리할 거야.” 송혜선은 분노로 인해 어지러움에 휩싸일 지경이었다. 정신을 다잡은 그녀는 조봉규에게 화를 쏟아냈다. “내가 넘어진 거, 당신이 밀어서 넘어진 거 아니야?” 조봉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급히 부인했다. “내가? 말도 안 돼! 내가 왜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해?” 송혜선은 이를 악물며 낮게 중얼거렸다. “참나! 그럼 분명히 누군가가 날 해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은 증거가 없지만 난 절대 이대로 당하지 않을 거야!”...정씨 가문에 예물을 전달하러 갔을 때, 예법은 철저히 갖춰졌지만 부씨 가문의 두 어른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지철 부부는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남준이, 네가 아무리 DL그룹 이사회에서 하위권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우리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게 아니냐?” 정다영의 어머니 하미주는 불만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남준은 얕은 미소를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곁에 있던 집사가 대신 나섰다. “사모님께서는 태교 중이시고, 부 회장님께서는 중요한 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저를 통해 예를 갖추셨습니다. 결혼식 때는 꼭 참석하시겠다고 전하셨습니다.” 하미주의 불만을 눈치챈 정다영이 바로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엄마, 남준 씨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줄지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상혁은 나가기 전, 노크하듯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남준, 축하한다. 약혼, 행복하길.” 남준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상혁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쥔 듯한 모습이었다. “형은 언제 형수님 댁으로 예물을 보내나요?” “다음 달. 약혼식도 다음 달로 잡았다. 그때 제수씨 데리고 와서 축하해줘.” 남준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네 물론 그렇게 해야죠.” 남준의 사무실에서, 정규인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수천억의 구멍을 제가 어떻게 메우라는 겁니까? 도대체 회장님께서 어디서 이런 소식을 들으신 거죠?” 남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정 사장님 주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정규인은 충격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잃었다. “제 주변에요?”...DS그룹 쪽에서는 하연은 요즘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손이현과 자주 부딪쳤다. 늘 일부러 피했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이현은 먼지를 뒤집어쓴 듯 급히 찾아왔고, 정태훈이 이현을 막아섰다. “한 상무님, 여기서 뭘 하십니까?” 이현은 급하게 들고 온 재킷을 벗어 손에 쥔 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하연을 향해 물었다. “하연 씨, 제가 들었는데, 약혼한다면서요?” 하연은 순간 멍해졌지만, 숨길 이유는 없었다. “네, 부상혁하고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현은 거의 좌절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저를 기다려주지 않은 거죠? 저도 충분히 하연 씨한테 어울 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요.” 하연은 천천히 걸어가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무얼요? 부상혁과 같은 위치에 서는 걸요?” “하지만 사랑이란 건 저울과 같잖아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버렸어요.”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불길한 예감이 부동건의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는 조진숙을 매섭게 응시하며, 진실을 쫓아가려 했다.“빚은 갚아야 하고, 사람을 죽였으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지. 이번엔, 저승사자라도 그 애를 못 구해.”조진숙은 단도직입적으로 진실을 꺼내놓았다.“당신이 그 귀하디귀한 막내아들이, 고경수 딸을 죽였어. 그 교통사고, 전부 부남준이 계획한 일이야.”“지금은 모든 증거가 경찰 손에 들어갔고, 고경수 집안도 전부 알아버렸어. 딸을 먼저 보낸 부모가, 가만히 있겠어? 반드시 그 애한테서 정의의 심판을 받아내겠지.”부동건의 몸이 비틀거렸다.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충격이 가득했다.“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남준에 대한 부동건의 인식은 그저 ‘야망이 좀 있는 아들’일 뿐이었다. 부동건이 동남아시아 사업권을 남준에게 통째로 넘겨준 것도, 송혜선과 남준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려 했던 것도, 다 막내아들을 위해서였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어떻게 그런 짓을...?’“그뿐만이 아냐. 약혼식 당일에 하연이를 납치했다는 사실도 몰랐지? 상혁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면, 최씨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망신당했을지 그건 알고 있어?”조진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건... 너무 심각해.’ 그 어떤 상황도 예측하지 못했던 부동건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미친 자식...!”부동건은 책상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흔들리는 가슴과 거칠어진 숨결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하지만 조진숙은 그런 전남편을 보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형사사건이야. 증거도 확실하고, 죄도 여러 개. 법대로라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당신의 막내아들 부남준이가 어떤 판결을 받게 될지...”부동건은 몇 걸음 뒷걸음치더니,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굴엔 절망과 피로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