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은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랑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낮았지만, 운명처럼 하연은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인물과 마주쳤다. “최하연 씨, 또 만나네요.” 정다영은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상혁은 그 시점에서 업무 전화를 받고 아직 레스토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연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가볍게 웃었다. “다영 씨, 식사하러 오셨나요?” “네, 남준 씨도 곧 올 거예요.” 다영의 말투에는 은근한 자랑과 함께 도발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난번 하연이 한 말을 의식한 듯, 남준과 다영의 관계가 진지하다는 걸 강조하려는 듯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영을 지나쳤다. 레스토랑의 뒤뜰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을 알리듯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트리에는 종과 소원 카드가 가득 걸려 있었다. 하연은 트리 쪽으로 걸어가, 발끝으로 살짝 들며 카드를 구경했다. 상혁은 트리 그림자 속에서 여전히 전화를 받고 있었고, 그의 모습은 가을과 겨울의 기운이 묻어났다. 그가 하연을 알아보고 손짓하며 곧 끝난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작은 돌멩이가 깔린 길을 걸으며 몰래 다가가 깜짝 놀래키려 했다. 나무가 시야를 가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하연이가 갑자기 뛰쳐나왔을 때, 상혁은 막 전화를 끊었다. “부...” 그녀의 목소리와 동시에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 “형님.” 그곳에 있던 사람은 바로 부남준이었다. 그가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연이 나오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남준은 즉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조심해.” 하연은 순간 멍해졌다. “너...” 상혁도 하연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나 왔어?” 하연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대답했다. “배가 고파서요. 당신을 빨리 데리고 가려고 나왔죠.” 남준은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부상혁...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남준은 눈앞에서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깊게 응시하다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 의사 분...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 고마워요.”“별말을. 우리 어머니가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네 어머니께 상처를 줬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이때 정다영이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가왔다.“남준 씨, 부 대표님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상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이분은 누구? 남준아, 인사를 시켜줘야지?”다영은 옆의 남준을 조심스레 살피며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남준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정다영 씨예요. 다영 씨의 아버지는 정지철 대표님이라고, DL그룹의 이사 중 한 분이신데, 형도 알고 계실 겁니다.”다영은 바로 그 말을 이어받으며 인사했다.“부 대표님, 안녕하세요.”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안녕하세요. 정다영 씨, 정말 소문대로 단아하고 예의 바르시네요. 남준아, 정다영 씨에게 잘해줘. 두 사람이 잘되서 결혼식에서 술 한잔하는 날을 기대하고 있을게.”상혁과 하연이 떠나자, 남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정다영 씨,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말을 거신 거죠? 설마 일부러 남들이 우리 사이를 오해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죠?”다영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당황한 나머지 변명하기 시작했다.“아니에요, 정말 그런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따뜻한 실내, 하연은 바닥에 깔린 방석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송혜선이 애인을 곁에 두면, 두 사람에게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상혁은 고기를 굽기 위해 셔츠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리며 대답했다.“예전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모든 패가 다 드러난 상태라, 그 둘이 사람들 눈앞에서
다영은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남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조심스러움이 서려 있었지만, 그 안에서 다영은 예상치 못한 감정을 발견했다.그것은 다름 아닌... 부러움이었다.‘부러워하고 있는 거야?’“남준 씨,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약혼 일정만 확정되면 아버지께서도 남준 씨를 전폭적으로 도울 거라고요.”다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속에는, 만약 남준이 상혁과 하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는 거라면 자신들도 언제든지 그런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정씨 가문은 그동안 부남준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남준이 부씨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언제나 차남이라는 이유로 상혁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송혜선의 임신으로 남준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질 가능성이 커졌고, 이는 부씨 가문뿐 아니라 DL그룹 내에서도 그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터였다.정씨 가문 역시 이 결혼이 손해 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남준은 시야에서 상혁과 하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다영을 흘끗 바라보았다.눈앞의 다영은 여전히 깔끔하고 단아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 예의와 교양을 갖춘 그녀는, 결혼 상대로서 이상적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남준과 어머니 송혜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완벽한 상대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막상 결혼이 성사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 남준은 문득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우리 결혼하면, 다영 씨도 이제 정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가 아니라 우리 집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해요.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요?”남준이 무심하게 물었다.“괜찮아요. 정다영으로 사는 것보다, 부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다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남준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답답하게 짓누르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자신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허징인의 그 말은 진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만약 진윤이 더 심하게 나선다면, 허징인도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는 결심으로 전면전을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하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상혁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진윤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아는 건, 우리 딸은 생전에 당신 같은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에요. 그러니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허징인은 차분하게 대응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향 한 번 올리고 바로 떠나겠습니다.”진윤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보안팀에게 물러서라고 지시하며 허징인이 향을 올리게 했다.허징인은 향을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너무 일찍 떠나버렸네요. 정말 안타깝습니다.”그 말을 들은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진윤의 손은 분노로 인해 꽉 쥐어져 있었고, 눈에는 강렬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하연은 조용히 속삭였다.“혹시 사모님이 허징인이 딸을 죽인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걸까요?”사실 그전까지 하연도 같은 생각이었다.하지만 오늘 장례식에서 허징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의 혐의를 상당 부분 씻어내는 듯 보였다.진짜 범인이라면 이렇게 당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었다.상혁은 하연의 손을 가볍게 쥐며 안심시키듯 말했다.“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의심을 품는 게 당연해.”허징인은 향을 올리고 나서 더 이상 자리를 오래 지키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상혁과 하연 역시 음식을 먹지 않고 조용히 낮은 자세로 장례식을 빠져나갔다.그러나 부상혁 대표와 최하연 사장이 함께 있는 모습은 결국 매체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뒷모습만 담긴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부 대표님.”차 앞에서 누군가 상혁을 불렀다.원신민이 즉각 앞으로 나와 막아섰다.“허징인 씨, 지금 부 대표님께서는 바쁘
“정 사장님은 DL그룹의 핵심 인재입니다. 사모님께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저와 정 사장님의 관계를 추측하며 선을 넘으시는 건 지나칩니다. 이제 돌아가십시오.”상혁은 단 한 번도 허징인의 말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은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출발해.”차량이 빠르게 움직였고, 하연은 백미러 너머로 점점 멀어지는 허징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은 이내 아주 작은 점으로 사라졌다.하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허징인이 나중에 당신한테 증거를 보내겠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성의’를 보일까요?”상혁은 미소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나한테만 보내지 않을 거야. 아주 많은 사람들이 허징인의 ‘성의’를 확인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이틀 후, 서여은의 잡지에 실린 한 기사가 모든 이목을 사로잡았다.[자산 10억의 DL그룹 지사장, 불륜 의혹 제기!]기사에는 흐릿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호텔 복도에서 한 여성을 껴안고 있는 정규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성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이 기사는 순식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상혁은 사무실에서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다.“정 사장을 본사로 불러와. 반드시 해명을 들어야겠어.”...동남아에서 급히 귀국한 정규인은 사무실에서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이 사진은 AI로 합성된 겁니다! 절대 제 사진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를 모함하려고 이런 짓을 한 거예요!”상혁은 천천히 눈을 들어 정규인을 응시했다.“정 사장님, 아직도 그런 연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상혁은 서랍에서 사진 한 묶음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 사진들은 모자이크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이 소문이 퍼지기 전에 제가 미리 알아내 막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언론의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을까요? 정 사장님 우리 아버지께는 뭐라고 설명할 실 건데요?”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규인에게 다가가며 차가
허징인은 미소를 지었다. “부부는 원래 한 나무에 깃드는 새와 같다고들 하죠. 하지만 부 대표님도 아실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결혼은 사랑보다는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게다가,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요.” ...과거에도, 정규인은 다른 여자와의 사진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허징인은 그 뉴스를 보고 충격으로 멍해졌다. 남편은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왔고, 지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정말로 술에 취해 작업 당한 거야. 그 여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 제발 날 용서해줘, 여보.” 허징인은 한때 분노로 집 안의 모든 것을 부수며 울부짖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잖아. 평생 나만 사랑해준다고!” 정규인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너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문제는, 특히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피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해줘.” 그의 목소리에는 죄책감과 함께 야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결국 정규인은 다시 허징인에게 애원했다.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허징인은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뒤에는 가족과 양가 부모님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혼이라는 선택지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며칠 뒤, 정규인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나만 부탁하자. 내일 기자회견에 나와서 이 일을 해명해줬으면 해. DL그룹 본사에서도 이 사안을 설명해야 해.” 그는 체면이 필요했고, 허징인은 처음으로 남편의 불륜 문제를 공개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 일이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이후로도 정규인의 불륜 사건은 계속 이어졌고, 다만 언론이 아닌 그녀의 핸드폰 알림으로 조용히 찾아왔다. ...허징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부대표님께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정규인과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우리 둘 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함께 DL그룹에 들어가 미래를 꿈꾸며 나아갔죠. 결혼 후 저는 가정을 위해 한 발 물러섰고, 남편은 앞에서 능숙
“부 대표님, 부 대표님이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유혹과 남자가 바람을 피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죠. 그럼 대표님은요? 혹시 그런 적 있으신가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허징인은 나이가 더 많았지만, 상혁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존댓말을 썼다. 상혁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제 마음은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즉, 자신은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정규인도 저와 결혼할 때 사랑한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그 후 10여 년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엉망이었어.’ ...지금 차 문은 열려 있었고, 바깥에서 들리는 똑딱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연이 일을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상혁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문서를 들고 걸어오는 하연은 여전히 소녀와 여인의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참으로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문득 말을 꺼냈다. “만약 최악의 상황에서 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고 하면, 그때 제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운다면, 그 상대는 반드시 최하연일 거예요.” 허징인은 입을 떼려다 멈췄다. 상혁의 말투는 단호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요즘 들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부상혁과 최하연은 다시 화해했고, 곧 다시 함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상혁도 이 사실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하연이 차에 다가왔을 때, 허징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하연은 문서를 덮으며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상혁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녀를 반쯤 안으며 말했다. “문서를 보면서 걸으면 어떻게 해. 잘 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우리 회사 쪽에서 급하게 처리 일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하연은 그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살짝 가슴선을 드러냈고, 상혁은 장난스레 물었다. “색깔은?” 하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그의 손을 쳐냈다. “안 입었어요!” 상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상혁과 하연의 약혼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은 모두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약혼이 결정된 이상, 번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씨 가문에서도 반대 의견은 없었고, 어쩌면 감히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저녁 식탁에서 상혁이 드물게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저와 하연이 약혼하게 되었습니다.”순간 식탁 위의 젓가락들이 멈췄다. 송혜선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갑작스럽네요. 둘이 헤어졌다고 들었는데요?” 상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 외부 소문을 들으셨나 봅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네가 가정을 이루고 자리 잡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네 어머님 쪽도 이미 알고 계셔? 최씨 가문에서도 반대는 없었고?” 부동건은 식탁에 앉아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하연이는 진숙이가 키운 아이야. 진숙이도 기뻐할 일이지 반대할 일은 없을 거야. 다만 최씨 가문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거야. 그 가문은 과거에도 항상 자신들의 가문이 주도권을 잡아오면서 살아왔지. 지금도 하민과 하연이 이끌면서 더 번창하고 있다. 네가 이런 관계를 잘 조율할 수 있겠니?”부동건은 하연에 대해 별다른 반대는 없었다. 하연은 반쯤 자신의 딸처럼 여겨졌고, 과거 두 사람을 반대한 이유는 상혁의 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장애물이 사라졌다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상혁은 단호히 말했다. “제가 하연이하고 약혼하려고 하는 건, 저희 관계가 더 나아가고 가까워지고 싶어서이지, 가문 간의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송혜선은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관계는 불가피하게 얽히게 될거야.” 상혁은 차분히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지금 저희 약혼에 의견이 있으신가요?” 송혜선의 뒤에 서 있던 조봉규가 송혜선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