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았으면 하연은 뭔가 이유를 붙여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문이 막혀 주제를 돌렸다. “오빠, 주씨 가문 쪽에도 허락을 받았어요?” 이런 가문에서 자연스럽게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가족들의 동의를 얻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예전처럼 주씨 가문이 관대하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될 거야.” 하경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선 자리였잖아.” 하연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오빠,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주슬기 씨가 상혁 오빠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고, 오빠는 내 친오빠잖아요...” 하경은 하연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 마.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네 편이야.” 하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고, 대신 억지로 웃음만 지어 보였다....며칠 후, 송혜선은 병원에서 퇴원했다. [회장님, 저 이 상태로는 보름, 아니 열흘도 혼자 있는 건 불안해서 안되겠어요. 집에 의사 선생님 한 분이 계속 대기하게 하면 안 될까요?] “알고 있어. 이미 연락해뒀으니 집에 가서 푹 쉬기만 하면 돼.” 부동건은 전화를 받으며 바쁜 목소리로 답했다. 송혜선은 옆에서 사과를 깎던 부남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 말은 곧 상혁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상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을 보고받고 있었다. “진행 상황은 순조롭습니다. 이미 부씨 가문 본가로 성공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상혁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융위원회에서 오늘 임시 회의가 열렸는데요. 명단을 보니 왕씨 가문의... 아, 한명준 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혁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람이 왜 거기에 포함 되 있는 건데?” “지금 양국 간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맡고 있어서입니다. 한명준 씨는 이제 왕씨 가문으로 돌아가 신분 상승을 했으니, 명단에 들어가 있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원신민은 자세히 설명을
공장은 대부분 외곽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수백 묘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루었다. “부 대표님, 주 대표님, 보시다시피 이 공장은 이미 규모를 갖추었고, 지난 몇 년간의 성과는 누구나 인정할 만합니다. 올해 우리 시의 GDP에 기여한 비중도 상당할 겁니다.” 한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자랑스러운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참관하는 동안 눈여겨볼 점이 많았고, 하연은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꼼꼼히 메모를 남겼다. “조 사장님의 말씀, 제가 금융위원회 위원장님께 꼭 전하겠습니다.” 부 대표의 말에 한 사장은 얼굴이 환해지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부 대표님, 과찬이십니다. 저희는 부 대표님의 인정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영광입니다.” 너무 노골적인 아부에 하연은 차오르는 웃음을 억누르느라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옆에 있던 손이현이 하연을 흘끗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HD그룹의 프로젝트는 남산에 있습니다. 공장은 이미 기본적인 규모와 초석은 잘 갖춰졌으니, 나중에 하연 씨가 한 번 방문해서 조언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연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 HD그룹은 업계 선배이고, 저희 회사는 이 분야에서는 아직 신입이라 드릴 조언이 없을 것 같아요.” 이현이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전적으로 맡은 것이고, HD그룹 본사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에 하연은 약간 놀라 눈길을 돌렸다. 이현이 독립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하연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드려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지나치게 눈길을 끌었다. 마침 이 장면을 스치듯 목격한 상혁이 시선을 돌려 말했다. “최 사장님.” “네!” 하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상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이어갔다. “조 사장님이 방금 설명한 이 기계의 개념에
집을 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무도 하연을 못 찾고 있을 때, 오직 상혁만은 하연을 꼭 찾아냈다. 하연은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날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에요?” “널 잘 아는 게 나쁜 일이야?” “나도 내 사생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오빠한테 그런 말을 다 하네.” 상혁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연은 과거를 떠올렸다. 이제 와서 보니, 자신은 진짜 상혁의 앞에서는 정말로 숨길 수 있는 게 없었다. “부 대표님, 자료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주슬기가 다가오며 공손하게 말하며 일하는 중에는 철저히 선을 지키고 있었다. 하연은 눈치껏 한발 물러섰다. 그런 하연의 옆으로 손이현이 다가왔다. “여기에 오니까 옛날 추억들이 많이 떠오르죠?” “당연하죠 여기서 자랐으니, 잊을 수가 없죠.” 하연은 담담히 말했다. “예전에 제가 이곳을 하연 씨에게 넘기려 했는데, 하연 씨가 거절했었죠.” “지금도 거절할 거예요. 그땐 그때였고, 지금은 또 지금이니까요.” 하연은 두 손을 난간에 얹으며 말했다. “원 비서가 지적한 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에요. 수정하면 해결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두 사람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치 예전에 소울 칵테일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 이현은 눈썹을 살짝 들며 물었다. “왜요? 제가 걱정돼서 그래요?” “손 선생님,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한명준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많은 걸 잃게 될 거예요.” 하연은 진지했다. “그렇게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요.” 이현 역시 진지하게 답하면서 속으로 덧붙였다. ‘이게 하연 씨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야.’ “윗선에서는 정태산 어르신께서 뒤를 봐주실 테니까, 당신이 돌아가는 건 간단할 수도 있겠네요.” 하연의 말에 이현은 한낮의 강렬한 햇볕 아래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 없이 침묵했다. 방풍재킷을 걸친 그의 모습은 여전
레스토랑은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랑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낮았지만, 운명처럼 하연은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인물과 마주쳤다. “최하연 씨, 또 만나네요.” 정다영은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상혁은 그 시점에서 업무 전화를 받고 아직 레스토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연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가볍게 웃었다. “다영 씨, 식사하러 오셨나요?” “네, 남준 씨도 곧 올 거예요.” 다영의 말투에는 은근한 자랑과 함께 도발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난번 하연이 한 말을 의식한 듯, 남준과 다영의 관계가 진지하다는 걸 강조하려는 듯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영을 지나쳤다. 레스토랑의 뒤뜰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을 알리듯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트리에는 종과 소원 카드가 가득 걸려 있었다. 하연은 트리 쪽으로 걸어가, 발끝으로 살짝 들며 카드를 구경했다. 상혁은 트리 그림자 속에서 여전히 전화를 받고 있었고, 그의 모습은 가을과 겨울의 기운이 묻어났다. 그가 하연을 알아보고 손짓하며 곧 끝난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작은 돌멩이가 깔린 길을 걸으며 몰래 다가가 깜짝 놀래키려 했다. 나무가 시야를 가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하연이가 갑자기 뛰쳐나왔을 때, 상혁은 막 전화를 끊었다. “부...” 그녀의 목소리와 동시에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 “형님.” 그곳에 있던 사람은 바로 부남준이었다. 그가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연이 나오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남준은 즉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조심해.” 하연은 순간 멍해졌다. “너...” 상혁도 하연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나 왔어?” 하연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대답했다. “배가 고파서요. 당신을 빨리 데리고 가려고 나왔죠.” 남준은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부상혁...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남준은 눈앞에서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깊게 응시하다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 의사 분...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 고마워요.”“별말을. 우리 어머니가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네 어머니께 상처를 줬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이때 정다영이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가왔다.“남준 씨, 부 대표님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상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이분은 누구? 남준아, 인사를 시켜줘야지?”다영은 옆의 남준을 조심스레 살피며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남준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정다영 씨예요. 다영 씨의 아버지는 정지철 대표님이라고, DL그룹의 이사 중 한 분이신데, 형도 알고 계실 겁니다.”다영은 바로 그 말을 이어받으며 인사했다.“부 대표님, 안녕하세요.”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안녕하세요. 정다영 씨, 정말 소문대로 단아하고 예의 바르시네요. 남준아, 정다영 씨에게 잘해줘. 두 사람이 잘되서 결혼식에서 술 한잔하는 날을 기대하고 있을게.”상혁과 하연이 떠나자, 남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정다영 씨,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말을 거신 거죠? 설마 일부러 남들이 우리 사이를 오해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죠?”다영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당황한 나머지 변명하기 시작했다.“아니에요, 정말 그런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따뜻한 실내, 하연은 바닥에 깔린 방석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송혜선이 애인을 곁에 두면, 두 사람에게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상혁은 고기를 굽기 위해 셔츠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리며 대답했다.“예전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모든 패가 다 드러난 상태라, 그 둘이 사람들 눈앞에서
다영은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남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조심스러움이 서려 있었지만, 그 안에서 다영은 예상치 못한 감정을 발견했다.그것은 다름 아닌... 부러움이었다.‘부러워하고 있는 거야?’“남준 씨,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약혼 일정만 확정되면 아버지께서도 남준 씨를 전폭적으로 도울 거라고요.”다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속에는, 만약 남준이 상혁과 하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는 거라면 자신들도 언제든지 그런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정씨 가문은 그동안 부남준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남준이 부씨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언제나 차남이라는 이유로 상혁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송혜선의 임신으로 남준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질 가능성이 커졌고, 이는 부씨 가문뿐 아니라 DL그룹 내에서도 그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터였다.정씨 가문 역시 이 결혼이 손해 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남준은 시야에서 상혁과 하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다영을 흘끗 바라보았다.눈앞의 다영은 여전히 깔끔하고 단아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 예의와 교양을 갖춘 그녀는, 결혼 상대로서 이상적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남준과 어머니 송혜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완벽한 상대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막상 결혼이 성사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 남준은 문득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우리 결혼하면, 다영 씨도 이제 정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가 아니라 우리 집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해요.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요?”남준이 무심하게 물었다.“괜찮아요. 정다영으로 사는 것보다, 부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다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남준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답답하게 짓누르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자신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허징인의 그 말은 진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만약 진윤이 더 심하게 나선다면, 허징인도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는 결심으로 전면전을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하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상혁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진윤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아는 건, 우리 딸은 생전에 당신 같은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에요. 그러니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허징인은 차분하게 대응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향 한 번 올리고 바로 떠나겠습니다.”진윤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보안팀에게 물러서라고 지시하며 허징인이 향을 올리게 했다.허징인은 향을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너무 일찍 떠나버렸네요. 정말 안타깝습니다.”그 말을 들은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진윤의 손은 분노로 인해 꽉 쥐어져 있었고, 눈에는 강렬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하연은 조용히 속삭였다.“혹시 사모님이 허징인이 딸을 죽인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걸까요?”사실 그전까지 하연도 같은 생각이었다.하지만 오늘 장례식에서 허징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의 혐의를 상당 부분 씻어내는 듯 보였다.진짜 범인이라면 이렇게 당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었다.상혁은 하연의 손을 가볍게 쥐며 안심시키듯 말했다.“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의심을 품는 게 당연해.”허징인은 향을 올리고 나서 더 이상 자리를 오래 지키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상혁과 하연 역시 음식을 먹지 않고 조용히 낮은 자세로 장례식을 빠져나갔다.그러나 부상혁 대표와 최하연 사장이 함께 있는 모습은 결국 매체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뒷모습만 담긴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부 대표님.”차 앞에서 누군가 상혁을 불렀다.원신민이 즉각 앞으로 나와 막아섰다.“허징인 씨, 지금 부 대표님께서는 바쁘
“정 사장님은 DL그룹의 핵심 인재입니다. 사모님께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저와 정 사장님의 관계를 추측하며 선을 넘으시는 건 지나칩니다. 이제 돌아가십시오.”상혁은 단 한 번도 허징인의 말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은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출발해.”차량이 빠르게 움직였고, 하연은 백미러 너머로 점점 멀어지는 허징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은 이내 아주 작은 점으로 사라졌다.하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허징인이 나중에 당신한테 증거를 보내겠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성의’를 보일까요?”상혁은 미소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나한테만 보내지 않을 거야. 아주 많은 사람들이 허징인의 ‘성의’를 확인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이틀 후, 서여은의 잡지에 실린 한 기사가 모든 이목을 사로잡았다.[자산 10억의 DL그룹 지사장, 불륜 의혹 제기!]기사에는 흐릿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호텔 복도에서 한 여성을 껴안고 있는 정규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성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이 기사는 순식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상혁은 사무실에서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다.“정 사장을 본사로 불러와. 반드시 해명을 들어야겠어.”...동남아에서 급히 귀국한 정규인은 사무실에서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이 사진은 AI로 합성된 겁니다! 절대 제 사진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를 모함하려고 이런 짓을 한 거예요!”상혁은 천천히 눈을 들어 정규인을 응시했다.“정 사장님, 아직도 그런 연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상혁은 서랍에서 사진 한 묶음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 사진들은 모자이크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이 소문이 퍼지기 전에 제가 미리 알아내 막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언론의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을까요? 정 사장님 우리 아버지께는 뭐라고 설명할 실 건데요?”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규인에게 다가가며 차가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