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나 믿지? 나랑 엄마 지금 이 모양 이 꼴 된 거, 다 저 여자가 한 짓이야.”서영은 서준이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수애도 일어나서 계속 말하려다, 갑자기 흥분하면서 쓰러졌다. 옆에 있던 서영이 이수애를 얼른 부축했다.하연은 오래전부터 이수애와 서영의 이런 속임수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상대를 비웃는 하연의 말투에는 당당함이 배어 있었다.“맞아, 내가 그랬어.”하연은 이 사람들과는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 몸을 돌려 대기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서준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하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떨어져서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비켜.”초주검이 된 이수애와 서영의 모습을 본 서준은 하연에게 기울었던 마음의 저울추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언제까지 화만 내고 있을 거야?”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연은 이것이 근래에 들은 것 중 가장 웃긴 농담이라고 느꼈다.“내가 무슨 화를 냈다고 그래?”“내가 당신 여동생과 어머니한테 손찌검을 당한 거, 이혼 전에 당신 집에서 괴롭힘당했던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고?”“정말 다정한 효자 나셨네.” 하연은 어이없어 고개를 저었다.“내가 뭐 하러 저런 더럽고 역겨운 사람들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겠어?”“그렇게 고상하신 분이 손버릇은 아주 나쁘네!”서영은 또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가 기절한 이수애를 일으켜 세웠다.“당신들 스스로 이렇게 화를 자초하잖아, 더러운 파리처럼 계속 내 주변을 맴돌면서 괴롭히는데, 내가 당신들 마음까지 헤아려줘야 하는 거야?”“식구들 단속 잘 해. 동네 창피하게 나와서 웃음거리 되지 말고.”하연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동자로 서준을 째려보았다.“다시 한번 이렇게 제멋대로 무례하게 행동하면, 그때는 변기 물 세례로 끝나지 않을 거야.”서준은 여전히 커다란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차가운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그래도 한때는 부부 사이였는데, 이렇게까지 듣기 거북하게 말해
운석은 이전에 껄렁껄렁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하연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보아하니 손수건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하연이 정색하며 말했다.“물론이죠, 울지도 않았으니까요.”“지난번처럼 예쁘게 우는 모습일 것 같아 오늘은 특별히 손수건 두 장 준비했는데.”운석은 손수건을 하나 더 꺼내며 눈웃음을 지었다.“어때요, 나 배려심 끝판왕입니다.”하연은 D국 옥상에서 있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자신이‘원수' 앞에서 운 거였다. 그렇게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게 거의 없는 일이라 그 날의 기억이 몹시 불편했다.“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운석 씨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운석은 하연과 다투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내가 잘못 안 거 맞아요.”운석은 하연의 불편한 얼굴을 보면서 이전에 울었던 것도 서준 때문이었을 거라고 추측했다.“내가 가서 한 대 때려줄까요?” 운석이 이 말을 물었을 때 그 눈빛은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심지어 허공에 주먹질까지 했다.“말만 하세요, 뭐든 가서 시키는 대로 다 할 거니까.”“한서준이랑 친구겠지만, 한서준 편만 안 들면 돼요.” 하연은 운석의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운석은 자신을 믿으라며 가슴을 힘껏 두드렸다. 그 진동 때문에 두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내가 명색이 정의의 사도인데, 내 친구라고 편들 수는 없습니다!”하연을 보는 운석의 눈빛에는 마치 여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는 기사 같은 비장감이 돌았다.하연의 아름다움은 장미처럼 가시가 돋혀 있다. 운석은 하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기로 했다.정색을 하는 운석이 너무 웃겨서 하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말 아무 말 대잔치네요.”“원하는 거 저한테 말만 하세요.”운석이 발걸음을 내디디며 하연의 곁에 섰다.“말만 번지르르하긴.”하연은 계속 운석을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미간에 웃음기가 있다는 것이다.‘오늘 내 편을 드는 걸 보니 눈이 삔 한서준보다 백배 낫네
“바빴어요.” 하연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조진숙과 하연의 어머니는 매우 사이좋은 친구였다. 하연의 부모가 사망한 후부터 줄곧 조진숙과 부동건 부부가 하연 남매들을 돌보았다. 하연이 성인이 되고 나서야 조진숙은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다.조진숙은 하연의 어린 시절 내내 엄마 역할을 대신해왔다. 하연은 일찍이 조진숙을 진짜 가족처럼 생각했다.하연은 사방을 바라보며 조진숙을 향해 음흉하게 웃었다.“이모, 동건 삼촌은 왜 안 오셨어요?”“오거나 말거나!”조진숙은 화가 난 척했다.“그 사람 얘기는 하지도 마.”“오.” 하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웃음을 참았다.조진숙과 부동건 부부는 애증의 관계이다. 같이 있을 때는 싸우고, 떨어져 있으면 상대방을 걱정했다. 젊었을 때 화가 나서 잠시 이혼한 적이 있었다. 부동건은 이혼한지 얼마 안되어 바로 후회하고, 아내만 생각하고 아내만 쫓아다니는 아내 바라기 생활을 시작했다.DL그룹 사업도 내버려두고 이제 갓 성년이 된 아들 부상혁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그러고 나서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와이프를 쫓아다니게 되었다.“이것아, 너 이혼한 거 하민이한테 다 들었어.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결혼을 장난으로 여기다니.” 조진숙은 하연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따뜻한 눈빛으로 하연의 작은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이모가 애초에 어떻게 너를 가르쳤지? 괴롭힘을 당하면 반드시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해. 너는 이 조진숙의 보물이야. 네 뒤에 DL 그룹과 최씨 집안이 있다는 걸 잊지 마.“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말 안 한 거예요.”하연은 조진숙의 팔을 좀 더 꼭 껴안고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잘못했다는 거 이제 알아요.”하연은 약한 모습이 없는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가족 앞에서 이런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조진숙은 하연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모, 왜 그래요?”조진숙은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 당시 NW그룹이
‘어디서든 마주친다니...’“서준 씨, 이번에 나를 보러 와줘서 정말 기뻐.”혜경이 부드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서준은 자신의 손을 잡고 싶다는 혜경의 말을 피했다. “저쪽에 사업 파트너가 있는데, 가서 얘기 좀 하고 올게.” 서준은 차가운 말투로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혜경은 기분이 나빠졌다. F국으로 온지 이미 두 달이 지나가지만 서준은 좀처럼 혜경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려운 기회를 얻은만큼 서준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아이를 위해서라도 좀 더 가까워지면 좋잖아!’혜경은 달갑지 않은 얼굴로 서준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뜻밖에도 하연이 맞은편에서 우아한 자태의 중년 여성과 동행하고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혜경은 입꼬리를 구부리고 웃으며 배를 일부러 내밀어 황후마마처럼 하연 앞으로 왔다.“어떻게 어딜 가도 네가 꼭 있냐?”하연은 혜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사돈 남 말 하시네.”혜경이 이를 악물었다.“나는 정말 너를 이해할 수 없어. 이혼할 때는 그렇게 쿨한 척해놓고, 지금은 또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서준 씨를 귀찮게 하고 있잖아, 정말 끈질기네.”조진숙은 둘의 대화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하연에게 물었다.“하연아, 이 사람이 네 결혼 파토낸 세컨드야?”“이봐요, 아줌마, 말 참 고약하게 하시네.”조진숙은 처음으로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하연아, 이모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니?”조진숙은 고급 화장품 ME그룹의 창업자로, 안티에이징 비법으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나가면 모두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젊은 미모의 소유자인데 오늘 뜻밖에도 이런 소리를 듣게 되었다.“이모가 제일 예뻐요. 쟤 입이 너무 구리네.”하연은 혜경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웃었다.“나에게 한서준은 쓰레기보다도 못한 물건이야.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네.”“너!” 혜경의 목소리가 살벌해졌다.하연의 시선은 여전히 그림을 향해 있었다.“보는 사람이 많아. 망신당하지 않
“사과하라고요!”“헛소리 그만 하라고요!” 혜경은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나는 명문가 집안 사람이에요, 내가 왜 당신 같은 아줌마에게 사과해야 하죠? 미쳤어요?”“팍!”조진숙은 참을 수 없었다. 조진숙이 혜경에게 달려 들었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혜경의 따귀를 세게 걷어 올렸다.“교양 없긴!”조진숙은 혜경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났다. 한 대 때리고 난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한번 더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혜경은 이번에는 재빨리 피했다.하연은 조용히 조진숙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작은 소리로 조진숙에게 말했다. “이모, 완전 멋있어요.”“그럼, 이런 거 치우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조진숙이 웃으며 말했다.“이모가 있으니까 너는 가만히 내 옆에 서 있기만 하면 돼.”조진숙이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보고, 하연은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동자 속에 조진숙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굳이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조진숙은 어려운 상황에서 아무 이유 없이 기꺼이 하연을 위해 나섰다.조진숙의 손아귀 힘이 매우 세서 혜경은 넘어지려던 몸을 한쪽의 기둥을 짚고서야 지탱할 수 있었다.따귀 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혜경은 얼굴을 가리고 그 자리에 있던 큰오빠 민우진을 불렀다. 혜경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조진숙을 가리키며 울며불며 하소연했다.“큰오빠, 이 사람이 나를 때렸어!”우진은 여동생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혜경을 도와 나서려 했다. 우진은 자신의 여동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상대가 누군지 똑똑히 보았다. 우진의 노기등등한 얼굴은 순식간에 알랑거리는 웃음으로 바뀌었다.‘이런 거물의 미움을 살 수 없지.’“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한 것 같네요. 당장 나가겠습니다. 기분 푸시고요!”우진은 조진숙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바짝 엎드려 사과했다.“오빠가 무슨 사과를 해! 저 사람
혜경은 한번도 우진에게 이렇게 큰소리로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다. 갑자기 난처한 얼굴로 불쌍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자세는 여전히 뻣뻣했다.다른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은데, 하물며 그 상대는 하연이었다.지금 F국에 머물러 B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직 이 여자의 하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혜경은 서준을 발견하고 서준 쪽으로 다가왔다.혜경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하연을 향해 걸어갔다가 아주 가까이 가서 멈춰 섰다.하연은 혜경을 위아래로 한 번 보고 경계했다.“또 뭘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반짝이는 눈동자를 한 혜경이 마치 배수진을 친 듯 모질고 차가운 소리로 웃었다.“최하연, 이건 다 네가 나를 괴롭히려고...”“아...”혜경이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뒤로 넘어져 옆에 있는 꽃병에 부딪혔다.사람 키 절반 정도 높이의 거대한 꽃병이 쓰러지면서 혜경과 함께 넘어졌다. 그 틈을 타 혜경은 기둥에 부딪힌 뒤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하연은 눈앞의 이 장면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여전하네, 민혜경...’서준은 앞으로 나아가서 혜경을 일으켜 세우고 차가운 목소리로 우진을 책망했다.“왜 혜경이 옆에서 혜경이를 보호하지 않으신 겁니까?” 우진은 안색이 어두워서 혜경을 보았다.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일단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면 단지 이런 식으로 속이는 가식적인 행동은 식구들끼리는 잘 알고 있지만, 밖에서 직접 거짓말이라고 폭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서준은 차가운 눈으로 하연을 흘겨보았다.“어떻게 지금 임산부에게 손을 댈 수 있지?”서준은 하연을 대할 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와 복잡한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하연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하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비록 한걸음 물러 서서 자기 가족을 대신해 사과한다 하더라도 하연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을 기세였다.조진숙은 서준을 알아보고, 서준이 혜경을 보호하려는 것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목소리 톤도 점차 높
“그럼 귀국해서 이틀 정도 있다가 기일 지내고 돌아와.”혜경의 언니인 혜주와 서준의 형인 명준 때문에 서준은 혜경에 대해 줄곧 저자세를 유지하며 모든 것을 다 덮어왔었고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혜경은 배를 쓰다듬으면서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이번에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B시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이 괴상한 곳에 혜경은 잠시도 있고 싶지 않았다.‘최하연, 목숨까지 잃게 되면서 내 남자한테 어떻게 꼬리치는지 두고 보자.’...하연은 사람들을 몰아내고 나서 언짢았던 기분이 좀 풀렸다. 조진숙과 한참동안 조진숙의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조진숙은 하연과 이야기를 마친 후 전화를 걸어 대형 백화점의 문을 닫게 했다. 조진숙과 하연 단 두 사람만의 쇼핑을 위한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또 한참동안 쇼핑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하연은 소파에 누워 기진맥진하여 말했다.“이모, 과연 말라카 해협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여자다워요. 오늘 이모의 놀라운 체력에 감탄했어요.”조진숙은 가사 도우미에게 사온 명품들을 걸라고 분부하고 웃으며 말했다.“몇 년 동안 너에게 옷 한 벌 못 사줬네. 이번에는 예쁜 걸로 몽땅 사줄 거야. 내일 다른 백화점 가서 또 쇼핑하자.”100평의 거실은 각양각색의 정장과 보석 장신구로 가득하였다. 하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 정도 양이면 매장을 차릴 만큼 충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얼굴에 백화점에 또 가야 할 힘든 표정을 띄며 물었다.“더 사야 돼요?”“물론이지.”“저 곧 B시로 돌아가요, 다 입을 시간도 안될 것 같은데.”“그럼 보내줘야지. 아니면 네 방 특별히 꾸며놓고 옷 놔둘 테니까 시간 날 때 돌아와서 입어.”하연은 도저히 조진숙을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달콤한 ‘부담감'이었다!조진숙은 아직 꺼내지 않은 중요한 일이 생각나서, 서둘러 하연 곁에 앉았다.“하연아, 여기 며칠만 더 있어라, 상혁이가 내일쯤 돌아올 건데, 시간 내서 같이 만나자.”하연은 조진숙의 부탁에 이러지도 저
하연이 체육관에 도착했다.하연은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성의 매니저에게 차 열쇠를 넘겼고 즉시 하성이 예약해둔 VVIP석으로 왔다. 무대와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전체 체육관 스탠드는 파란색 현수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파란색은 하성 팬클럽을 상징하는 색이다. 위에는 하성의 예명인 ‘사이먼’이 적혀 있다.조명이 어두워지자 팬들은 손에 든 형광봉을 흔들며 한동안 체육관 전체가 푸른 바다처럼 보였다.체육관 전체를 뒤흔드는 음악이 하연의 심장을 울렸다. 칼군무를 추는 백댄서들 사이에서 한눈에 하성이 보였다.방금 빠른 리듬의 댄스곡을 끝냈다. 하성은 숨을 헐떡이며 무대 중앙에 서서 시그니처 포즈를 취했다. 이때 하성을 향해 엄청난 카메라 플래쉬 세례가 이어졌다. 하성은 흡사 음악의 제왕 같았다.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하성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큰 소리로 외쳤다.“사이먼! 사랑해!”“너 아니면 결혼 안 해!”하성은 하연을 보고 매력이 넘치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고, 그게 카메라에 포착되어 즉시 전광판으로 전달되었다. 무대 아래의 소녀팬들은 더욱 흥분해서 소리지르고, 기절할 정도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하성은 맥의 위치를 확인했는데 눈빛에서 눈부신 광채가 번쩍였다.“여러분, 저는 오늘 매우 기뻐요. 왜냐하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와있기 때문입니다.”“아!!!”소녀팬들이 모두 들끓기 시작했다.‘누구야? 과연 사이먼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굴까?’미친 듯한 함성이 사라진 후, 이렇게 큰 경기장이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모두들 마치 신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하성의 말을 경청했다.하성의 긴 손가락은 첫 번째 줄 방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나의 작은 공주, 최하연!”카메라는 사람들 속에서 하성이 가리키는 대상을 바쁘게 찾다가 결국 하연의 위치를 찾아 화면을 고정시켰다. 하성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는 무대에서 순식간에 하연에게로 옮겨졌고, 스크린에는 하연의 차갑고 귀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
“이 정도의 약점을 부남준이 쉽게 너를 놓아줄 하연 없을 텐데?”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연지는 급히 상혁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 재무 보고서에는 부남준과 다른 이사들, 특히 정규인과의 결탁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어요.” 상혁은 정규인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눈을 들었다. “어디에 있지?” “제 금고 안에 있어요.” “원신민.” 원신민이 재빨리 다가와 연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서 가져오지.” “대표님...” 상혁은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들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일면서 머리카락이 재가 되어 날아갔고, 연지는 공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신민이 연지의 입을 재빨리 막아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한 움큼만 탔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황연지,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연지는 공포에 질린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하연은 다영과 헤어진 뒤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한 차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상혁이 항상 타고 다니고 있는 차였다. 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왔다. “부상혁 대표님께서 모시길 원하십니다.” 하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게 칠해진 방탄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향이 피워져 있었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듯한 상쾌한 향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그녀는 한순간에 상혁의 품에 안겨버렸다. 남자의 강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마자 차가 출발하면서 뒤로 밀리는 힘 때문에 하연은 더욱 상혁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떴다. “내 회사
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다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혁도 역시 그런 혼인의 필요가 없었다. 부남준은 달랐다. 그는 차남이었고, 어머니 집안의 지원이 없었기에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영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만약에 남준 씨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거리를 두세요.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말이에요.” ‘이미 오해는 깊어진 것 같아.’하연은 무력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문제는 부남준이 나랑 거리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정다영 씨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미래는 정다영 씨가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하연이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부남준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부남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다영 역시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둘은 주차장의 동남쪽 모퉁이에서 발생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끔찍할 정도로 붉게 번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남자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를 시켜서 덫을 놓았냐?”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연지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소문을 들었고, 오랫동안 지시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덫을 놓고 복수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를 듣고 상혁은 고개를 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연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고, 한쪽은 차갑고, 다른 쪽은 뜨거웠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남자야, 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리기가 두려운 거야?” 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림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기 두려우면, 내가 대신 그려줄까?” “날 놔!” 하연은 힘을 주어 저항하다가 잉크병을 쳐서 넘어뜨렸고, 남준은 즉각 그녀를 보호하려 하며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잉크는 그의 옷에 쏟아졌다. 하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그곳에 서 있는 정다영을 보았다. 정다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준 씨...” 남준은 다영을 보자마자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다영 씨는 여기 왜 왔어요?” 그는 마치 무언가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다영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몸에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남준 씨도 드셔보라고 하셨어요.”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선물을 내밀었다.사실 이 핑계는 다영이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다른 여자가 남준과 친밀한 화면을 목격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이 비서, 정다영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저... 남준 씨...” 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떠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준 씨, 이분은 누구세요?” 하연은 남준과 엮이기 싫어 얼른 그를 밀어내고는 빠르게 나와서 말했다. “정다영 씨, 우리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 하연이는 다영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다영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이따가 회의가 있어요. 먼저 옷을 갈아입고 갈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
연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 잘못이에요.” 남자 직원은 바로 반발했다. “뭐가 연지 씨의 잘못이에요? 연지 씨가 뭘 잘못했는데요? 연지 씨가 피해자잖아요.” 연지는 남자 직원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해요, 이분은 DS 그룹의 최하연 사장님이에요.” “최... 최...?” 남자 직원은 다시 하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고, 연지를 데리고 가려 했다. “자, 내가 널 처리해 줄게요.” 이 상황이 되니 하연은 마치 권력을 휘두르는 자, 강압적인 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하연의 머릿속이 아파지며, 그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잠깐 서봐요. 황연지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여기서 딱 정확히 말해 봅시다. CCTV를 확인하면 다 알 수 있잖아요.” 연지는 사과하며 말했다. “최 사장님, 제 잘못이에요. CCTV까지는 필요 없어요. 죄송해요, 제가 당신까지 다치게 했네요.” “너...” 하연은 더 화가 났다. ‘차라리 황연지가 맞서 싸우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사과하니 마치 내가 진짜 잘못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주변의 많은 시선들이 하연에게 집중되자, 하연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요. 기왕 내가 날 무서워한다면... 좋아요!!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게 맞다고 치자. 아무튼 CCTV는 반드시 봐야겠어요!” 멀리서 상혁이 이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선 무슨 일이야?” 원신민이 발돋움하며 말했다. “무슨 소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층은 부남준의 영역이었다. 상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연지는 불쌍한 얼굴로, 머리에 커피가 묻어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이때, 부남준 사람들 속에서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하연은 남준과 마주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정말로 나타났다. “CCTV를 확인하면 되잖아. 확인해.”
“이건 도 잘 몰라요.” 정민의 권한은 고위급 기밀에 알 수 없었다. 하연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증거를 정태훈에게 넘기자, 태훈이 바로 ‘까마귀’를 찾으러 갔다. 마침내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 땅은 DS그룹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까마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일로 인해 정민도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하연이 정민을 다시 찾으러 갔을 때, 정민은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예전에 만났던 정민을 아는 ‘여자 동료’가 하연에게 말했다.“정민 언니... 고향으로 돌아갔어. 마치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도망치듯이 갔다던데. 그쪽 정민 언니의 사촌이라고 했잖아, 정말 몰랐어?” 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말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어요.” “정민 언니의 옛 애인 ‘까마귀’가 지금 언니를 온통 찾아다니고 있으니 빨리 도망가야지.” 하연은 그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씁쓸하게 웃었다.“...”하연은 DL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안내데스크 직원이 하연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으며 말했다. “최 사장님, 누구를 찾으셨나요?” 하연은 입을 열었다가 망설이며 말을 바꿨다. “부남준 상무님을 뵈러 왔어요.” 직원은 곧바로 부남준의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고, 하연이는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상무님은 아직 바쁘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연은 대기실에서 부남준의 사무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하연이 그날 부씨 가문 저택의 서재에서 본 부건국이었다. 부남준은 부건국에게 친절한 듯 보였지만, 부건국은 다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부씨 가문 가족이 부남준을 이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점차 돌아오고 있음을 의미했고, 부남준이 DL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시선을 돌린 하연은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못된 장난을 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우리 졸업 날짜가... 며칠이더라?”그 말에 상혁의 평온했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얼굴에 잠시 분노가 스쳐 갔다. 하연은 그의 반응을 보며 장난기가 잦아들었다.“농담이에요. 나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하연은 그제야 상혁을 달래듯 메모장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순간을 잠시나마 밝게 비추는 듯했다.“내가 한명준의 선물을 받을 뻔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우리 넷째 오빠가 있잖아요. 오빠가 내가 고생하는 걸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연은 이미 이득을 본 주제에 오히려 얄밉게 굴며, 일부러 두 사람이 감정이 깊어지던 때 사용했던 애틋한 호칭으로 상혁을 불렀다.상혁의 몸도 순간에 마치 굳혔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그가 준 땅이 절대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조사 결과, 그 땅은 이 도시에서 악명 높은 깡패, 별명 ‘까마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연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땅이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을 줄은 몰랐다.정태훈이 말했다. “그 사람, 까마귀는 굉장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땅이 값어치 있다는 걸 알고 계속 내놓지 않으려 합니다.” 상혁이 준 주소는 ‘까마귀’의 애인의 집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도록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그곳은 마치 사창가 같은 장소였다. 남녀가 뒤섞여 있었고,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정민 언니 만나러 왔어요.” 길가에 서 있던 여자는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민 언니? 무슨 일로 찾는 거야?” “저는 정민 언니의 친척입니다. 좋은 거래를 소개해 드리려고 왔어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
상혁은 한 손으로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사실 꽤 좋은 거래였어. 아쉽네.” 이 순간, 그가 사업을 하는 사람의 태도로 하연의 말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말문이 막힌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하연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상혁의 눈에 잠깐 비쳤는지, 결국 그는 약간의 연민을 보였다. “부남준을 만났어?” 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네 몸에서 부남준이가 좋아하는 남자 향수가 나네. 오늘 부남준이 정다영 씨와의 만남은 순조로웠나?”하연은 상혁이 모든 걸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 당신이 주선한 거였어요?” 상혁이 모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다영 씨는 재능 있는 남자를 좋아해. 이 사회에서 부남준은 정다영 씨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하연은 드디어 기억났다.“정다영의 아버지가 지금도 DL그룹의 이사였고, 정다영과 부남준의 결혼은 부남준에게 득이 될 뿐이야.” “왜 굳이 스스로 적을 만들어요?”상혁은 하연의 다리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아직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은 듯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어.”하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생각에는 정다영이 부남준과 결혼하면 두 집안이 단단히 결속되고, 상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국 가족의 지지가 없이는 부남준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혁은 하연을 지나쳐 서류를 들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어. 이제 돌아가.” 그는 밤새도록 잠을 잤고, 이미 시간이 늦었지만 하연은 움직이지 않고 의자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상혁이 이미 계획을 세운 것 같다면, 하연도 자신이 정다영을 굳이 경고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일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조승원이 계약을 취소했고, 지금 하연에게 남은 시간에 새로운 땅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손이현은 하연이가 굴복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