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아, 빨리 출발해!”하연은 바로 앉아 엑셀을 밟았고 하연의 은회색 차량은 재빨리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도중에 하성은 휴대전화를 들고 끊임없이 실시간 검색 인기 검색어 순위를 확인하면서 수시로 하연에게 보여주었다.“봐라, 어떤 사람은 네가 나랑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 여친이래.”“그리고 이거, 우리 둘은 M국에서 만났고, 첫눈에 반했고, 사랑이 뜨겁게 불타올랐대.”“이것은 더 말도 안돼. 네가 우리 엄마가 어릴 때 돈 주고 사온 민며느리래.”하연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네티즌들 상상력 정말 대단하다.”“그리고...”“또 뭐 있어요?”“그리고 너 욕하는...”하연은 하성을 향해 흉악한 표정을 살짝 지었다.“한 대 콕 때려주고 싶다!”유려한 곡선의 차체가 멋진 스포츠카가 야경 속을 달리고 있다.갑자기 난데없이 건축자재를 싣고 가는 화물차 한 대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면서 하연의 스포츠카의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속도가 매우 빨라서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핸들을 세게 꺾으며 끼어든 차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눈앞의 한 줄기 흰 빛이 스쳐 지나갔다.하연은 온몸에 털이 곤두서고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두려움이 머리속으로 파고들었다.화물차가 하연의 차를 세게 들이받았다!“빵!”큰 충격으로 에어백이 터져 하연의 뒤통수가 의자 등에 심하게 부딪혔다.하연은 차량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에어백과 좌석 사이에 끼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사고 당시 스포츠카의 앞부분이 눈 앞에서 부딪혀 반쯤 움푹 들어가 도로 중간에 흔들리면서 멈췄다.화물차는 일정 거리만큼 후진했다가, 다시 하연의 차를 세게 들이받았다!그 후, 말없이 차량 기사는 도망치고 말았다.‘이건 살인이야!’뒤따르는 연예기자들은 휘발유가 연료통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는 폭발 위험이 자신에게 미칠까 봐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일부 기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떨며 병원 구급차에 전화를 걸었다.희뿌연 먼지가
“가족분들, 서둘러 주세요! 저는 다시 한번 상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의사가 상혁을 향해 말했다. 서준을 힐끗 쳐다본 상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최대한 서준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 남편일 뿐이야.’ 서준의 눈동자가 상혁을 향했다. ‘저 남자, 혈액형 같은 개인적인 정보까지 다 알고 있잖아?’서준은 속이 쓰리는 듯했다.“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입니까?”“그쪽은 알 필요 없습니다.” 상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이제 그만 돌아가 주시죠.”“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서준은 술이 조금 깬 듯했다. 상혁이 긴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며 피곤함을 내비쳤다.“깨어난다고 해도 그쪽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제가 아무리 전 남편이라지만, 설마 당신보다 못하겠습니까?” “알면 됐습니다.”“그쪽, 확실히 저보다는 못하니까요.”두 사람의 강렬한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하지만 상혁의 기세는 조금도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기세등등해지는 듯했다. 상혁의 기세에 움츠려든 서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하연 씨만 괜찮다면 그만입니다.”“제가 여기 있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상혁이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으며 말했다. ...이틀 후.하연이 눈을 뜨자, 목에 깁스를 한 채 서 있는 하성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다행이다! 드디어 깨어났구나!”하연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하성은 드디어 졸이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빠, 우리를 구해줬던 그 사람, 누구예요?” 하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어지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하연의 머릿속은 위험을 무릅쓰고 곧 폭발할 차량에서 자신을 안아 구출해 준 그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분명 처음 본 사람이었어.’ “상혁이잖아!”“진숙이 이모의 큰 아들, 기억 안 나?” 하연이 급히 일어나며 하성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 있어요?”“아침 일찍 갔어, 회사에 일이 좀 있다더
하연이 미소를 지으며 하성을 흘겨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아무 말도 안 했어.”“내 험담을 하는 거라면, 나한테 들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가흔이 경고했다.수다쟁이 하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바람을 좀 쐬고 올게.”하성은 가흔 앞에서 다시 시크해졌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병실의 문을 연 하성이 문밖에 서있던 서준과 마주쳤다.웃음기가 사라진 하성의 얼굴에는 차가운 긴장만이 맴돌았다. 하성이 병실의 입구를 막아선 채 목소리를 높였다.“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준의 비서가 하성에게 과일 바구니를 건네자, 하성이 입을 열었다.“하연 씨한테 전해주세요.”“당장 꺼지지 못해?!”하성이 손을 내저었다.“우리 하연이는 네 까짓 게 주는 하찮은 물건 따윈 필요하지 않아.”“하연 씨, 깨어났습니까?”서준은 하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이런 겉치레뿐인 남자는 우리 하연이와 어울리지 않아.’ ‘반대로 상혁이는...’서준이 위기의 낌새를 알아차렸다. “깨어났어요. 아주 잘된 일이죠. 충분한 대답이 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하성의 뒤에 있던 가흔이 말했다. 가흔은 하성과 함께 병실의 입구를 막고 섰다.“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이 말을 마친 서준이 발길을 돌렸다.화가 난 하성이 서준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하연이를 돌보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야! 네 까짓 게 감히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찌질한 새X 같으니라고!” 가흔이 하성을 잡아당겼다.“소리 낮추세요. 하연이, 안정이 필요해요.” 하성이 나지막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 네 말이 맞아.”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저녁 무렵.하연을 만나기 위해 병실을 방문한 조진숙이 하연에게 종이봉투를 건넸다. “상혁이가 너에게 전하라고 하더구나.”하연이 조진숙이 건넨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의 안에는 민혜경이 누군가에게 검은 돈을 건네는 사진이 들어 있었
하연이 기자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러분께서 많은 응원을 보내주신 덕분에, 저는 이미 회복되었습니다.”“그리고, 이번 교통사고에 관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우리나라의 법이 아무런 죄가 없는 선량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나쁜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믿는다는 겁니다.”기자들이 하성에게 물었다. “인터넷에 이번 교통사고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사이먼 씨가 특별히 모든 일을 제쳐둔 채, 최하연 씨의 곁을 지켰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최하연 씨와 무슨 관계인지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두 분, 가까운 사이입니까?” 하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사이먼 씨와 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당분간 어떠한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기자들이 하나둘씩 철수할 준비를 했다.한쪽에 서서 하연의 말을 듣고 있던 서준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서준은 하연에게 직접 상혁, 그리고 사이먼과 무슨 사이인지 묻고 싶었다.서준의 호기심 역시 언론 기자들에게 뒤지지 않았으나, 하연이 차갑게 돌아서 자리를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같은 날 저녁.서준이 HT그룹으로 들어섰다.서준은 경찰서에서 하루 종일 혜경의 일을 처리한 탓에 대단히 피곤한 듯했다. 혜경은 보석금을 지불한 후, 조사를 기다리면서도 심하게 울기만 했다. 때문에 더 이상 조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찰관들은 혜경을 민씨 가문으로 돌려보냈다.‘분명, 지금쯤 집안이 난리가 났을 거야.’서준은 이수애와 한서영이 자신의 귓가에 대고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한동안 자신의 사무실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의 문을 열고, 불을 켠 서준이 민씨 가문의 어르신인 민진현이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준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혜경의 일을 떠올리고는 왜 민진현이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납득하게 되었다. “민 회장님, 안녕하십니까.”민진현
저녁 아홉 시.하연과 여은이 파티 장소에 나타났다. 이 파티는 문화계 회사의 거물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물론, 친한 친구를 데리고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연은 매끄러운 짙은 녹색 원단에 주름이 하나 없는 우아한 리본 롱드레스를 입어, 출중한 몸매 라인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비록 아무런 보석도 착용하지 않았으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쇄골만으로도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을 뽐내기 충분했다.하연은 대단히 빼어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기에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파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위클리 뉴스의 편집장인 여은의 기세에 경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연을 사이먼의 스캔들 상대로 만들고 싶어 하였으나, 위클리 뉴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탓에 감히 나서지는 못하는 듯했다.여은은 시종일관 냉랭한 태도를 유지했다. 다른 사람이 술을 권해올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연이 그런 여은을 도와 그 사람들을 상대했다. “네가 있으니까 조금 더 오래 있을 수 있겠어. 평소 같았으면 사진만 찍고 돌아갔을 거야.”하연의 붉은 입술에 웃음이 번졌다.“편집장님의 많은 사랑 부탁드리겠습니다.”바로 이때, SN미디어의 사장, 송승헌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송승헌의 배는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비록 양복을 차려입은 채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키가 너무도 작았던 탓인지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입은 듯했다. “오, 이분은... 요 며칠 실시간 검색어를 뜨겁게 달궜던 최하연 씨 아니십니까?”송승헌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두 사람에게 인사를 표한 후, 단숨에 잔에 있던 샴페인을 모두 마셔버렸다. 여은은 실눈을 뜬 채 송승헌을 향한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눈이 멀어버리기라도 하신 겁니까?”최근 위클리 뉴스는 몇 차례 정보를 유출 당한 바 있었는데, 이는 모두 라이벌 회사인 SN 미디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클리 뉴스의 직원을 스카우트한 탓이었다. 여은은 이 일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참이었기
“레이디 퍼스트.”송승헌이 자리에 앉은 채 손을 뻗어 의사를 표했다. 하연이 주사위 상자를 들고는 책상 위에서 무심히 한번 흔들었다. 가느다란 손을 주사위 상자 위에 올려 두고는 가볍게 주사위 하나를 손에 쥐었다.“됐습니다.”송승헌이 음침하게 웃으며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은 진지하지 않은 것이 어쩐지 질 작정인 듯했다.구경꾼들은 이런 하연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그게 다입니까?”“확실하게 결판을 내려야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는 법이지요!”“주사위가 몇 개인지도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날 이기시겠다?’‘어림없지!’송승헌은 상대가 여자임에도 봐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송승헌은 사이먼의 특종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얻고 싶었다. 몇 초 동안 뜸을 들이던 송승헌은 몸을 일으켜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주사위 상자를 몇 분간 흔들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지칠 때쯤, 송승헌이 매섭게 탁자 위에 주사위를 내려놓았다.4개의 5!‘됐다.’‘역시, 나 같은 프로가 저런 아마추어에게 질 리 없지.’ 송승헌은 아주 득의양양했다.‘송승헌, 아직 여전하네.’ 구경꾼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송 사장님, 대단하십니다. 최 사장님께서 판을 뒤집기는 힘들겠어요!”하연의 곁에 선 여은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송 사장님이 대단하신지 아닌지는, 우리 최 사장님의 주사위도 열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기뻐하시긴 이릅니다.” 하연이 여은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은아, 네가 열어봐.”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말 그대로 오락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여은이 주사위를 들고 있던 손바닥을 펴 보였다.많은 사람들의 눈에 비친 숫자는... 4개의 6!하연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웃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제가 이겼군요.”송승헌의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돼, 나를 이기다니.’하연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주사
구경꾼들이 분분히 놀랐다.민진현은 B시의 도박계에서 타짜라고 불리우던 사람이었다. 비록 최근 몇 년간 도박에 손을 대지는 않았으나, 반쪽짜리 타짜인 송승헌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었다.명망 높은 노인이 젊은이를 이토록 압박하다니, 민진현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만약 민 회장님께서 패하신다면...”하연이 민진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허!’‘나더러 한서준의 세컨드라는 걸 인정하라고? 웃기시네!“절대 안 져!”민진현이 목소리를 높였다.“나와 내기를 할 것인지 아닌지만 말하게!” 이는 분명, 민진현이 막강한 세력으로 하연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경꾼들 중에서 이에 대해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민 회장님께서 패하신다면, 민혜경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의 뺨을 때리며 제 결혼에 끼어든 것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할 겁니다!” 곧이어 하연의 눈동자가 민진현의 엄지손가락에 끼워진 백옥반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백옥 반지도 저에게 넘기시죠!” 하연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어머, 저 백옥 반지, 국보에 버금가는 거 아니야?” “일 년 내내 민 회장님의 곁을 따라다닌 사람도 저 반지의 가치를 알 수 없었다며?”“민 회장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물건이라던데... 최 사장님 정말 대담하다!” 모두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왜요? 못하시겠어요? 저에게 벌거벗은 것과 같은 창피를 주고 싶으신 모양인데, 민 회장님께서도 그 정도 큰 물건은 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연이 침착하게 말했다.민진현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돌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혔다. ‘감히 이 반지를 내기에 걸려고 하다니!’최근 언론으로 인해 요동치는 ST그룹의 주가를 생각하자, 민진현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좋아, 그렇게 하지!”“자신 있는 거야?”여은이 걱정스럽다는 듯 하연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민 회장님 말이에요, 정직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어머, 최 사장님을 속이려다 들키니까 했던 말을 번복하시려는 거예요? 만약 최 사장님께서 속임수인 줄 모르셨다면 그건 정말 억울한 일이잖아요!”“최 사장님더러 한 대표님의 세컨드라는 걸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건 너무도 부도덕한 일이에요.”“우리가 연예계 전문 기자이기는 하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내서 기사를 쓰는 건 아니잖아요? 민 회장님, 노망이라도 나신 거 아니에요?” “마음껏 떠들어보라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쓸 데 없는 말들일 뿐이니까!”화가 난 민진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민진현은 주위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들이 거북한 듯했다. “여기 있네!”민진현이 백옥 반지를 손가락에서 힘껏 책상 위에 내려놓으려다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하연의 손가락에 살짝 끼워 넣었다.민진현의 말투는 위협으로 가득 차 있었다.“잘 보관해두게, 곧 다시 찾으러 갈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죠.”하연이 돌아가자는 의미로 여은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최 사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그 백옥 반지를 보관할 수 있는 안전한 상자를 구해드리겠습니다.” 옆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웨이터가 하연의 타짜다운 면모에 탄복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혹시, 비닐봉지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거기 담아 가면 될 것 같은데.” 하연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렇게나 놓아 둘 물건입니다. 소중히 다뤄주실 필요 없어요.” 다시 한번 모두가 깜짝 놀랐다.백옥 반지는 감히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국보급 문물과도 같은 것으로, 민진현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반지를 비닐봉지 따위에 담아 가려 하다니! 하연의 말을 들은 민진현은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하연의 손에 들어간 백옥 반지를 돌려받을 방법은 없었다. 민진현이 온 힘을 다해 의자를 걷어찬 후, 자리를 떠났다. “민 회장님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
“이 정도의 약점을 부남준이 쉽게 너를 놓아줄 하연 없을 텐데?”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연지는 급히 상혁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 재무 보고서에는 부남준과 다른 이사들, 특히 정규인과의 결탁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어요.” 상혁은 정규인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눈을 들었다. “어디에 있지?” “제 금고 안에 있어요.” “원신민.” 원신민이 재빨리 다가와 연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서 가져오지.” “대표님...” 상혁은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들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일면서 머리카락이 재가 되어 날아갔고, 연지는 공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신민이 연지의 입을 재빨리 막아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한 움큼만 탔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황연지,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연지는 공포에 질린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하연은 다영과 헤어진 뒤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한 차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상혁이 항상 타고 다니고 있는 차였다. 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왔다. “부상혁 대표님께서 모시길 원하십니다.” 하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게 칠해진 방탄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향이 피워져 있었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듯한 상쾌한 향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그녀는 한순간에 상혁의 품에 안겨버렸다. 남자의 강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마자 차가 출발하면서 뒤로 밀리는 힘 때문에 하연은 더욱 상혁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떴다. “내 회사
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다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혁도 역시 그런 혼인의 필요가 없었다. 부남준은 달랐다. 그는 차남이었고, 어머니 집안의 지원이 없었기에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영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만약에 남준 씨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거리를 두세요.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말이에요.” ‘이미 오해는 깊어진 것 같아.’하연은 무력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문제는 부남준이 나랑 거리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정다영 씨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미래는 정다영 씨가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하연이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부남준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부남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다영 역시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둘은 주차장의 동남쪽 모퉁이에서 발생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끔찍할 정도로 붉게 번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남자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를 시켜서 덫을 놓았냐?”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연지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소문을 들었고, 오랫동안 지시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덫을 놓고 복수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를 듣고 상혁은 고개를 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연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고, 한쪽은 차갑고, 다른 쪽은 뜨거웠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남자야, 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리기가 두려운 거야?” 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림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기 두려우면, 내가 대신 그려줄까?” “날 놔!” 하연은 힘을 주어 저항하다가 잉크병을 쳐서 넘어뜨렸고, 남준은 즉각 그녀를 보호하려 하며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잉크는 그의 옷에 쏟아졌다. 하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그곳에 서 있는 정다영을 보았다. 정다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준 씨...” 남준은 다영을 보자마자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다영 씨는 여기 왜 왔어요?” 그는 마치 무언가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다영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몸에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남준 씨도 드셔보라고 하셨어요.”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선물을 내밀었다.사실 이 핑계는 다영이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다른 여자가 남준과 친밀한 화면을 목격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이 비서, 정다영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저... 남준 씨...” 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떠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준 씨, 이분은 누구세요?” 하연은 남준과 엮이기 싫어 얼른 그를 밀어내고는 빠르게 나와서 말했다. “정다영 씨, 우리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 하연이는 다영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다영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이따가 회의가 있어요. 먼저 옷을 갈아입고 갈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
연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 잘못이에요.” 남자 직원은 바로 반발했다. “뭐가 연지 씨의 잘못이에요? 연지 씨가 뭘 잘못했는데요? 연지 씨가 피해자잖아요.” 연지는 남자 직원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해요, 이분은 DS 그룹의 최하연 사장님이에요.” “최... 최...?” 남자 직원은 다시 하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고, 연지를 데리고 가려 했다. “자, 내가 널 처리해 줄게요.” 이 상황이 되니 하연은 마치 권력을 휘두르는 자, 강압적인 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하연의 머릿속이 아파지며, 그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잠깐 서봐요. 황연지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여기서 딱 정확히 말해 봅시다. CCTV를 확인하면 다 알 수 있잖아요.” 연지는 사과하며 말했다. “최 사장님, 제 잘못이에요. CCTV까지는 필요 없어요. 죄송해요, 제가 당신까지 다치게 했네요.” “너...” 하연은 더 화가 났다. ‘차라리 황연지가 맞서 싸우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사과하니 마치 내가 진짜 잘못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주변의 많은 시선들이 하연에게 집중되자, 하연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요. 기왕 내가 날 무서워한다면... 좋아요!!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게 맞다고 치자. 아무튼 CCTV는 반드시 봐야겠어요!” 멀리서 상혁이 이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선 무슨 일이야?” 원신민이 발돋움하며 말했다. “무슨 소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층은 부남준의 영역이었다. 상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연지는 불쌍한 얼굴로, 머리에 커피가 묻어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이때, 부남준 사람들 속에서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하연은 남준과 마주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정말로 나타났다. “CCTV를 확인하면 되잖아. 확인해.”
“이건 도 잘 몰라요.” 정민의 권한은 고위급 기밀에 알 수 없었다. 하연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증거를 정태훈에게 넘기자, 태훈이 바로 ‘까마귀’를 찾으러 갔다. 마침내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 땅은 DS그룹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까마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일로 인해 정민도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하연이 정민을 다시 찾으러 갔을 때, 정민은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예전에 만났던 정민을 아는 ‘여자 동료’가 하연에게 말했다.“정민 언니... 고향으로 돌아갔어. 마치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도망치듯이 갔다던데. 그쪽 정민 언니의 사촌이라고 했잖아, 정말 몰랐어?” 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말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어요.” “정민 언니의 옛 애인 ‘까마귀’가 지금 언니를 온통 찾아다니고 있으니 빨리 도망가야지.” 하연은 그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씁쓸하게 웃었다.“...”하연은 DL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안내데스크 직원이 하연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으며 말했다. “최 사장님, 누구를 찾으셨나요?” 하연은 입을 열었다가 망설이며 말을 바꿨다. “부남준 상무님을 뵈러 왔어요.” 직원은 곧바로 부남준의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고, 하연이는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상무님은 아직 바쁘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연은 대기실에서 부남준의 사무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하연이 그날 부씨 가문 저택의 서재에서 본 부건국이었다. 부남준은 부건국에게 친절한 듯 보였지만, 부건국은 다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부씨 가문 가족이 부남준을 이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점차 돌아오고 있음을 의미했고, 부남준이 DL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시선을 돌린 하연은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못된 장난을 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우리 졸업 날짜가... 며칠이더라?”그 말에 상혁의 평온했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얼굴에 잠시 분노가 스쳐 갔다. 하연은 그의 반응을 보며 장난기가 잦아들었다.“농담이에요. 나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하연은 그제야 상혁을 달래듯 메모장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순간을 잠시나마 밝게 비추는 듯했다.“내가 한명준의 선물을 받을 뻔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우리 넷째 오빠가 있잖아요. 오빠가 내가 고생하는 걸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연은 이미 이득을 본 주제에 오히려 얄밉게 굴며, 일부러 두 사람이 감정이 깊어지던 때 사용했던 애틋한 호칭으로 상혁을 불렀다.상혁의 몸도 순간에 마치 굳혔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그가 준 땅이 절대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조사 결과, 그 땅은 이 도시에서 악명 높은 깡패, 별명 ‘까마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연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땅이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을 줄은 몰랐다.정태훈이 말했다. “그 사람, 까마귀는 굉장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땅이 값어치 있다는 걸 알고 계속 내놓지 않으려 합니다.” 상혁이 준 주소는 ‘까마귀’의 애인의 집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도록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그곳은 마치 사창가 같은 장소였다. 남녀가 뒤섞여 있었고,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정민 언니 만나러 왔어요.” 길가에 서 있던 여자는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민 언니? 무슨 일로 찾는 거야?” “저는 정민 언니의 친척입니다. 좋은 거래를 소개해 드리려고 왔어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
상혁은 한 손으로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사실 꽤 좋은 거래였어. 아쉽네.” 이 순간, 그가 사업을 하는 사람의 태도로 하연의 말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말문이 막힌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하연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상혁의 눈에 잠깐 비쳤는지, 결국 그는 약간의 연민을 보였다. “부남준을 만났어?” 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네 몸에서 부남준이가 좋아하는 남자 향수가 나네. 오늘 부남준이 정다영 씨와의 만남은 순조로웠나?”하연은 상혁이 모든 걸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 당신이 주선한 거였어요?” 상혁이 모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다영 씨는 재능 있는 남자를 좋아해. 이 사회에서 부남준은 정다영 씨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하연은 드디어 기억났다.“정다영의 아버지가 지금도 DL그룹의 이사였고, 정다영과 부남준의 결혼은 부남준에게 득이 될 뿐이야.” “왜 굳이 스스로 적을 만들어요?”상혁은 하연의 다리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아직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은 듯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어.”하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생각에는 정다영이 부남준과 결혼하면 두 집안이 단단히 결속되고, 상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국 가족의 지지가 없이는 부남준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혁은 하연을 지나쳐 서류를 들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어. 이제 돌아가.” 그는 밤새도록 잠을 잤고, 이미 시간이 늦었지만 하연은 움직이지 않고 의자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상혁이 이미 계획을 세운 것 같다면, 하연도 자신이 정다영을 굳이 경고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일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조승원이 계약을 취소했고, 지금 하연에게 남은 시간에 새로운 땅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손이현은 하연이가 굴복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