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의 부하가 떠나자 주자철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이윽고 상혁이 손을 휘휘 젓자 다른 부하가 다가와 주자철을 끌어갔다.그 뒤로 한참 동안 꺼지지 않은 응급실 불을 보며 상혁, 하민과 하성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그러다 날이 밝자 응급실의 불은 끝내 꺼졌고, 세 사람은 동시에 응급실 문 쪽으로 달려갔다.마스크를 벗으며 나오는 의사를 보자 상혁이 맨 먼저 물었다.“상태가 어떻나요?”의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산소가 부족한 공간에 너무 오래 있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의식을 회복하기가 어려울 겁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상혁의 눈에 절망이 드리웠고, 목소리가 떨렸다.“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분이 식물 인간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그럴 리 없어!”하성이 시뻘게진 눈을 한 채 버럭 소리쳤다.“하연이 식물 인간이 되다니. 절대 그럴 리 없어.”이윽고 마치 이 사실이 믿기 힘든 것처럼 연신 부정했다. 이 순간 하성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세 사람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그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눈을 반짝이며 의사를 붙잡았다.“무슨 방법이죠? 하연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없어요.”“하... 하지만 그분이 나서줄지가 미지수라.”“그게 누구죠? 어디 있어요? 제가 당장 사람을 시켜 찾아올게요.”하민이 다급히 따져 묻자 의사는 입을 꾹 다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분은 의술이 뛰어나지만 신출귀몰하는 분이라 일반인들은 절대 찾을 수 없어요. 그리고 환자분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을 지체하면 아마...”의사는 안타깝다는 듯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하성이 다급히 물었다.“골든 타임이 아직 얼마나 남았죠? 하연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볼게요.”“6시간 남았습니다.”“6시간?”“네. 때문에 정말 어려워
상혁의 심각한 말투에 현승은 장난기 섞인 모습을 거두로 진지하게 물었다.“보스, 무슨 일인데 그래요?”“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간단한 한마디에 현승은 이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그를 보자 덩그러니 남겨진 미녀가 뒤에서 소리쳤다.“도련님, 어디 가는데요?”하지만 현승은 그 여자를 상대할 겨를이 없어 집에 가라는 말을 끝으로 곧장 전용기에 올라탔다.두 시간의 비행 끝에 현승은 겨우 D시 병원에 도착했다.“백... 백 교수님?”“헐,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정말 백 교수님이잖아!”“...”현승은 의료진들의 선망의 눈빛과 흥분 섞인 말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비행 중에 이미 하연의 검사 보고서를 토대로 수술 방안을 구상한 현승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복으로 환복하고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불이 다시 켜지자 하성이 걱정스레 물었다.“저 사람 정말 괜찮은 거 맞아?”“백현승이란 이름 세 글자가 의료계에서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어. 백 교수가 지금껏 실패한 수술이 없거든. 그런데 백 교수마저 실패하면 하연은...”하민은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하연의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하민도 생각지 못했으니까.그때 상혁이 하민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그래. 하연만 무사하면 이 일 제대로 갚아줄 거야. 하연이 다치게 한 사람은 한 놈도 용서할 수 없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뒤에 검은 무리를 달고 안으로 들어왔다.“한 대표님, 가시면 안 됩니다.”“꺼져!”서준은 포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저를 막는 경호원들을 뿌리쳤지만 경호원 역시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한 대표님,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최하연 어디 있어?”서준의 물음에 경호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때 하민이 다가와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한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하민을 마주하자 서준은 성질이
“걱정 마세요. 제 손을 거친 수술이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환자분은 이미 고비를 넘겨 곧 깨어날 겁니다.”그 말을 듣자 모든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상혁이 다가가 현승의 어깨를 두드렸다.“고생했어.”말이 떨어진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승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듯 고개를 상혁의 어깨에 기댔다.“보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제가 얼마나 열심히 수술했는데, 고작 고생했단 한마디가 끝이라고요?”그 말에 상혁은 현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테니까.”“이건 보스가 직접 말했어요? 후회하면 안 돼요.”현승은 헤실 웃으며 말하더니 피곤한지 하품을 했다.“에너지 너무 소모했더니 피곤해 죽겠네. 저 먼저 한숨 자고 와서 상은 이따 받을게요.”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경호원이 현승을 휴게실로 안내했다.한편, 수술실에 있던 의사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흘러나왔다.“와, 이게 가능해? 그렇게 오랫동안 뇌에 산소가 부족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바로 괜찮아졌다고?”“이건 의학계의 기적이야.”“역시 이래서 백 교수님 백 교수님 하는 거였네.”“이번 수술을 다음 논문의 참고 자료로 사용해야겠어. 백 교수님은 내 우상이야.”“...”사람들은 현승의 의술에 혀를 내두르며 열심히 학습했다.고비를 넘긴 하연은 이내 VIP실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 상혁이 계속 곁을 지켰다.한편 병실 입구에서 하민이 하성을 가로막았다.“두 사람한테 시간을 좀 줘.”결국 하성은 마지못 해 입을 삐죽거리며 문 앞에서 중얼거렸다.“저 자식이 앞으로 하연이 배신하면 내가 저 자식 가죽을 벗길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하성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상혁은 믿을 수 있어. 그동안 상혁이 하연한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는 어린애도 다 알 텐데, 우리가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일이잖아.”하성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 하
“제가 여기 남든 말든 최 대표님과 상관없지 않나요?”서준이 제 태도를 표명하자 더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눈치챈 하민은 마지막으로 충고했다.“한 대표님, 버스를 놓쳤으면 다음 걸 기다리세요. 선 자리에서 지나간 버스를 아무리 기다려봤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한 대표님도 잘 아실 텐데.”이윽고 하성을 데리고 병원을 나섰다.“형, 저 자식 저기 있게 그냥 두는 거야?”하성은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간다고 버티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무슨 수로 내쫓아?”“그래도 하연이 저 자식 얼굴 꼴도 보기 싫어할 거 아니야!”“너도나도 하연이 믿어야 돼. 본인이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 하연이도 남은 인생 누구한테 걸어야 할지 알 거야.”그 말에 하성의 마음은 이내 차분해졌다.“그러길 바라야지.”한편, 하연은 아주 긴 꿈을 꿨다.시간은 5년 전 서준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갔는데, 그때 하연은 컬럼비아 대학 디자인 학과를 다니며 대학원생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처음으로 하연을 낯선 도시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최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걱정했다.“하연아, 내가 너희 학교 맞은편에 집 하나 구입하고 경호원과 가정부도 고용했어. 밖에서 지내는 동안 절대 손해 보지 마.”하민이 전화로 신신당부하자 하연은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걱정 붙들어 매요. 그리고 이왕 공부하러 왔으니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 돼요. 저 이미 다 커서 나를 돌볼 능력은 되거든요.”“아무리 그래도, 네가 우리 곁을 떠난 적 한 번도 없어 걱정돼서 그러지.”하연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저 벌써 스무 살이에요. 어린애 아니라고요. 언젠가는 커요...”하연의 끊임없는 설득 끝에 하민은 그제야 받아들였다.전화를 끊은 하연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웬 사람 한 명이 하연에게 달려와 부딪쳤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중심이 무너져 버린 하연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고 곧이어 엉덩이에
그 남자와 다시 만난 건 약 한 달 정도 후였다.하연이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자 한 무리 사람들이 키득키득거리며 다가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아시아인들은 다 너처럼 등신 같고 개 같아?”“예전부터 병을 몰고 다니더니 더러운 종자!”“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시아인은 우리 발밑이야.”“...”사람들의 말에 하연은 속에서 열불이나 눈살을 찌푸렸다.‘이 왹국놈들 대체 뭐야? 이유도 없이 남을 욕하다니.’이윽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앞으로 다가가 반박하려 할 때, 옆에서 남자의 비명과 욕설이 들렸다.“젠장! 감히 나를 때려?”심지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대 더 얻어터졌다.“때렸다, 어쩔래? 감히 우리를 욕해? 오늘 제대로 얻어터져 봐!”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또다시 외국 학생의 얼굴을 후려쳤고 곧이어 꽥꽥거리는 비명이 들렸다.앞으로 다가가 보니 아시아인 남학생이 방금 하연을 비아냥거렸던 외국 학생들을 제대로 혼쭐 내주고 있었다.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몇 대 만에 외국 학생들을 모두 때려눕힌 남자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제 팔을 주물럭댔다.이윽고 눈을 내리깔며 귀찮은 듯 말했다.“같잖은 겉들이 어디서 잘난 척이야? 앞으로 나 만나면 돌아서 다녀. 안 그러면 볼 때마다 때릴 거니까.”말을 마친 남자가 뒤돌아서자 하연은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곧이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가리켰다.“어? 그쪽!”하연을 알아본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하연의 팔을 덥석 잡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아까 너무 멋지던데요? 나쁜 자식들! 감히 우리를 그렇게 욕해? 우리나라 경제가 지금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데 아직도 무시하다니. 아까 그 자식들 쥐어팬 거 너무 속 시원했어요. 저도 당장 가서 때려주고 싶었다니까요.”“...”하연이 끊임없이 쫑알대는 사이, 남자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그러다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그제야 하연을 놓아주었다.“아까 계속 있었어요?”남자의
하연이 웬 남자와 돌아온 걸 본 룸메이트들은 사냥감을 찾은 늑대처럼 득달같이 달려왔다.“방금 그 남자 누구야? 남자 친구? 너무 잘 생겼다!”“그러게. 근육질 몸매인 것 같던데, 너무 남성미 넘치더라.”“남친은 언제 사귀었어? 왜 나는 몰랐지?”“...”룸메이트들이 재잘재잘 질문하자 하연은 다급히 설명했다.“내 남자 친구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뭐?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그럼 이름이 뭔데? 나한테 소개해 줄 수 있어?”끊임없는 질문 세례에 하연은 그제야 상대와 두 번이나 만났는데 아직 이름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그건, 다음에 물어보면 알려줄게.”그 말에 룸메이트들은 너도나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다음에 만나면 이름, 학원 등등 개인 정보를 제대로 물어봐야지.’그리고 하연이 기대했던 만남은 다음날 바로 이뤄졌다.“하연아, 저 사람 어제 너 데려다줬던 그 남학생 아니야? 왜 교무처로 불려 갔지?”룸메이트의 말에 하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뒤따라 교무처로 향했다.이윽고 문에 바싹 기대 안을 확인했더니 안에는 어제 맞은 외국 남학생들이 불쌍한 표정으로 선생님께 일러바치고 있었다.“쌤, 저 아시안 놈이 어제 이유도 없이 우리를 때렸어요.”“학교에서 폭행을 저지르는 건 교칙에 어긋나는 거 아니에요? 저 자식 꼭 벌해주세요.”“아예 퇴학시켜 버리면 더 좋고요.”“...”외국 학생들의 비난에 남자는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유창한 언어로 툭 내뱉었다.“어제 그것도 많이 봐준 거야. 다음번에 또 만나면 그땐 이빨 다 털어줄게.”“그만!”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의 말을 잘랐다.“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학교도 더 이상 너를 받아줄 수 없어. 이렇게 뉘우치지 않으면 당장 교장 선생님께 말해 학교에서 제명하는 수가 있어.”“마음대로 하세요.”개의치 않는 듯한 남자의 태도에 선생님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보다
하연은 싱긋 웃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쪽 정의의 사도잖아요. 어제 그 자식들이 먼저 그렇게 심한 말을 했으니 저였어도 그놈들 곤죽을 만들었을 거예요.”“여자애가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되죠. 이런 일은 남자한테 시켜요.”이윽고 남자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투로 물었다.“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예요?”“최하연. 여름 하 제비 연이에요.”“음, 기억해 둘게요.”“그러는 그쪽은요? 이름이 뭔데요? 계속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남자는 싱긋 웃으며 의아함 가득한 눈으로 하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내 이름 알고 싶으면 모레 오후 세 시 반 서문에서 봐요. 그때 알려줄게요.”“뭐야!”하연은 불만 투로 중얼거렸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손을 흔들었다.“모레 세 시 반, 잊지 마요.”하연은 떨떠름해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날이 자꾸만 기다려졌다.그래서인지 시간은 무척 늦게 흘러갔다. 2년 같은 이틀이 지나 세 번째 날이 되자 하연은 아침 일찍 치장하고 예쁜 옷을 골라 입고는 오후 1시부터 서문에서 남자를 기다렸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남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하루, 이틀, 사흘...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기대가 점점 실망으로 변했고, 또 어느덧 2년간의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지만 기다리는 남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심지어 앞으로 평생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던 2년 뒤, 하연이 졸업하고 F국으로 돌아갈 때 비행기 안에서 또 그 남자를 만났다.양복을 쫙 빼 입고 광택 나는 구두를 신은 남자의 모습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조각 같은 얼굴에는 더 이상 가볍고 장난기 넘치는 분위기가 아닌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라 저도 모르게 잘못을 뉘우칠 뻔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잖아?’“이봐요, 잠깐만요.”하연은 남자에게 다가가 막아서더니 분노와 서러움이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2년 전에 왜 약속 안 지켰어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하연은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남자의 이름은 한서준이었다.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 세 글자는 마치 마법이라도 있는 듯 하연의 마음속에 새겨졌다.그 뒤의 일은 마치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것처럼 우연의 연속이었다.유연한 기회에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을 구했고, 그 덕에 강영숙은 하연을 제 손자의 부인으로 추천했다.3년 간의 결혼 생활이 마침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에 언뜻언뜻 지나면서 지금껏 벌어졌던 모든 일이 그때 하연의 잘못된 선택으로부터 야기됐다는 걸 깨우쳐 줬다.하지만 3년이란 시간 동안 하연은 여전히 서준이 왜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알지 못했다.병상에 누워 있던 하연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코끝을 자극하는 소독수 냄새가 하연을 다시 현실로 잡아끌었다.“하연아, 정신이 들어?”잔뜩 흥분한 상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하연은 싱긋 웃었다.“상혁 오빠, 저 무슨 상황이에요?”“너 사흘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어. 우리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래도 이렇게 깨어났으니 망정이지.”하연은 그날 자기가 쓰러지기 전 누군가 제 코와 입을 막았다는 걸 떠올렸다.“누군가 저한테 미약을 썼어요.”그걸 말하고 나니 하연은 덜컥 겁이 났다.때마침 안으로 들어온 하민이 끼어들었다.“걱정하지 마. 너 그렇게 만든 사람 이미 잡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대체 누구예요? 혹시 HY 그룹 쪽 사람이에요?”하민은 고개를 저었다.“HY 그룹은 이럴 배짱이 없어.”‘그럼 대체 누구지?’그 사이, 하민과 상혁이 눈빛을 교환했다.이 일로 하연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했다.“누구든 넌 상관하지 말고 우리한테 맡겨. 넌 지금 휴식이 필요해, 몸 잘 추스르고 회복하는 데만 전념해. 나머지는 걱정하지 마.”“하지만...”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이 하연의 손을 잡았다.“건강이 제일 중요해.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자.”“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