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은 애써 감정을 억제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렸다.“이 한복 좋은 거야.”하연은 서준이 한복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눈치채고 되물었다.“이 한복에 관심 있어?”하지만 서준은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채 가볍게 대답했다.“좋은 건 모두가 좋아하는 거 아니겠어?”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하연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포기해줘서 고마워.”이윽고 말을 마친 뒤 경매장을 떠나려 했다.서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멀어지는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런데, 다음 순간.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설아가 뻔뻔스럽게 다가와 말을 꺼냈다.“한 대표님, 혹시 6억만 빌려줄 수 있나요?”서준은 고개를 돌려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설아를 바라보더니 비아냥거리듯 말했다.“내가 누구한테 돈 빌려주는 습관이 없는지라.”명백한 거절에 설아는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결국 20이라는 거금을 내지 못한 설아는 경비원에게 쫓겨났다.한편, 경매장을 나선 서준은 기분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아 운전석에 앉아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댔다. 그렇게 담배꽁초가 쌓여감에 따라 차 안도 점점 담배 연기와 냄새로 가득 찼다.바닥에 널린 담배꽁초를 한참 바라보던 서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동후에게 전화했다.“최하연이 DS그룹에서 책임진 프로젝트 뭐가 있는지 모두 알아 와. 최근에 뭘 하고 있는지까지.”“네, 대표님.”동후는 서준의 명에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그때 서준이 말을 보탰다.“한 시간 내로 알아 와.”그 말을 마친 서준은 전화를 끊고 시동을 걸더니 곧장 경매장 주위를 벗어났다.역시나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동후는 1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하연이 최근 책임진 모든 프로젝트를 알아내서 서준의 핸드폰으로 전송했다.최근의 프로젝트와 일부 F국의 프로젝트를 확인하던 서준은 문뜩 나운석이라는 세 글자에 시선을 멈추었다. 서준은 솔직히 운석이 DS그룹에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중요한 프로젝트
그러다 패션쇼 전날 리허설하는 와중에 하연은 예나의 입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하연, 너 이번 행사장 HT에서 협찬해 준 거 알고 있어? 한서준도 내일 패션쇼에 참석할 거래, 심지어 오프닝 연설까지 한다더라.”하연은 그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HT에서 언제부터 공익 활동을 시작했대?”예나가 그 물음에 곧바로 정곡을 찔렀다.“딱 봐도 답 나오잖아. 한서영 때문에 바닥 친 기업 이미지 되돌리려고 용쓰는 거지 뭐.”“아.”하연은 대충 대답할 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도 그럴 게, 하연은 메인 디자이너로서 내일의 패션쇼를 순조롭게 끝내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있잖아. 혹시 한서준이 네가 이번 패션쇼 메인 디자이너인 걸 알고 일부러 행사장 협찬해 준 건 아니겠지?”그때 예나가 무의식중에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너무 간 것 같은데?”하지만 하연은 곧바로 부인했다. 한서준이 어떤 사람인지는 하연이 가장 잘 안다.이제껏 하연의 편 한 번 들어준 적 없는 사람이 이제 와서 하연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더군다나...“한서준의 일은 이젠 나와는 상관없어. 우린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접점이 없을 거야.”“문제는 상대가 그렇게 생각 안 한다는 거지.”“한서준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한서준 일이야.”‘난 내 일만 상관하면 그만이야.’...그 시각, DS그룹.하연과의 내기 때문에 호현욱은 최근 하연의 동향을 살피느라 바삐 보내고 있다.“이사님, 최근 회사의 큰 프로젝트는 모두 나운석이 도맡아 하고 있고 작은 프로젝트는 정태훈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 사장님은 패션쇼 때문에 좀처럼 회사 밖을 나서는 일이 없고요. 하지만 이번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몇억이라는 실적을 올렸더라고요.”“듣기로는 패션쇼에서 선보일 모든 의상을 회사의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답니다. 내일 패션쇼가 끝나면 아마 더 많은 주문을 받을 거고요. 그렇다면 적어도 패션 업계 쪽만 해도 5배가량의 실적을 내게 될 겁니다.”성진호의 보고에
B시의 패션쇼는 매우 성대하게 열렸다.현장에는 수많은 국제 패션업계 디자이너들이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업계의 유명 인사, 심지어는 국내외 유명 언론사 기자들까지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모든 사람이 이번 패션쇼에 큰 기대를 품고 있는 듯했다.하연은 아침 일찍 현장에 도착하여 무대 뒤에서 패션쇼 준비를 위해 바삐 움직였다.예나도 하연을 도와 메이크업 상태를 확인하는가 하면 모든 모델의 의상을 체크했다.매우 중요한 패션쇼인 만큼 모든 세부 사항에 주의해야 하고, 조그마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에 하연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옆에서 바빠 움직이는 하연을 본 예나가 다급히 물 한 컵을 건넸다.“물 좀 마시면서 해.”하연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얼른 컵을 받아 들었다.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야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초대 손님들도 어느 정도 다 모인 것 같아. 패션쇼까지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으니 조금이라도 쉬어.”“응.”예나의 말에 하연이 가볍게 대답했다.그때, 호주머니에 있던 하연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발신번호를 확인하니 한동안 연락하지 못한 셋째 오빠 최하성이었다.‘오늘 무슨 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 하지?’하연은 조금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하연, 왜 이렇게 늦게 받아?”하연은 스크린에 나타난 하성의 얼굴을 보며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그러는 오빠야말로 오늘 웬일로 저한테 전화할 생각을 다 했대요?”“에이, 나야 우리 동생 항상 생각하지. 네가 요즘 바쁜 것 같아 방해하지 않은 것뿐이야.”“아.”하연은 그 대답이 못마땅한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그때 하성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오늘 패션쇼 연다면서? 축하해.”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 내가 선물 준비했는데, 이제 곧 도착할 거야. 받으면 잊지 말고 말해줘.”하연은 그 말에 바로 호기심이 발동했다.“뭔데요?”하지만 하성은 뜸을 들
하지만 그런 말에도 하연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나를 볼 게 아니라 민헤경을 봐야지. 민혜경이 아직 감옥에 있는데, 시간 나면 자주 가서 봐.”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서준은 낯빛이 어두워졌다.“민혜경 얘기는 하지 마!”서준의 그런 반응에 하연은 피식 웃었다.“왜?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연인도 이젠 싫어졌나 봐?”서준은 애써 화를 내리눌렀다.“최하연, 나랑 민혜경 그런 사이 아니야. 왜 내 말을 믿지 않아?”“그만! 오늘 같은 날에 과거사 들먹이고 싶지 않아. 재수 없으면 어떡해.”하연은 서준과 혜경이 무슨 사이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손톱만큼도 관심 없었다.“난 이만 가봐야 하니 편할 대로 해.”그 말을 끝으로 하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하지만 하연이 무대 뒤편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하연, 왜 이제야 왔어? 큰일 났어.”예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저를 잡아당기자 하연이 놀란 듯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인데?”“옷이 망가졌어.”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연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순간 가위에 갈기갈기 찢긴 메인 의상 몇 벌을 발견했다.원래 모습을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의상들을 보면서 하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야?”“최 사장님, 저희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의상이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이제 어떡해? 패션쇼가 시작하려면 반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하필 모두 메인 의상들만 문제가 생겼으니, 오늘 패션쇼 망했네.”“...”모델들은 서로서로 귓속말로 소곤거리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예나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대체 어떤 개X식이 이랬어? 나한테 잡히기만 해 봐, 내가 그 자식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야!”그때 무대 담당자가 재촉했다.“최 사장님, 이제 준비해 주세요. 모델분들도 나와 주시고요.”하연은 눈앞에 닥친 상황에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아직 얼마나 남았어?”그 물음에 예나
“어떡해? 이제 5분밖에 안 남았어. 그사이에 끝낼 수 있어?”예나는 무대 뒤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면서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하연의 속도는 매우 빨랐지만 옷은 여전히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다.“아니면 주최 측에 시간 좀 연기해달라고 부탁할까?”“안돼. 이번 쇼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시간을 끌면 파장이 엄청 날 거야.”“그럼 어떡해? 이대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잖아.”예나의 말에 하연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심지어 바느질을 시작한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생각을 멈추지 않더니 문득 동작을 멈추며 말했다.“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모를까.”“그런데 이 시간에 합당한 이유를 어떻게 찾아?”이에 스태프들도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렇다 할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정 안 되면 첫 번째 모델들 한 바퀴 더 워킹하라면 어떨까요? 그러면 적어도 10분 정도는 벌 수 있을 거예요.”“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같은 모델이 한 번 더 워킹하면 문제가 생겼다는 걸 금방 알아챌걸요.”“이번 쇼에 참석한 사람이 많아 일이 커지면 수습하기 힘들 거예요.”“...”사람들은 각자 한마디씩 제 의견을 냈다.그 시각, 하연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옷 수선에 몰두했다.어느덧 시간이 되자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개막사를 시작했다.“시작했나 봐. 이제 곧 HT그룹 대표 연설이 있을 거야. 1조 모델들 준비시켜야 할 것 같아.”예나는 걱정스레 말하면서 얼른 준비하기 시작했다.당장 뾰족한 수가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모델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자 예나는 다급하게 물었다.“하연아, 얼마나 더 필요해?”“15분 정도.”예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델들에게 분부했다.“여러분, 이따 워킹할 때 속도 좀만 늦춰줘요. 결과가 어떻든 우리 함께 노력하여 시간 조금이라도 더 벌어 보자고요.”“알았어요, 예나 언니. 그렇게 할게요
하연도 그제야 안도했다.“아, 다행이다.”곧이어 하연은 눈을 들어 무대 우의 서준을 바라봤다. 이 시각 서준은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마이크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그리고 서준의 멘트를 듣는 순간 하연은 서준의 의도를 파악했다.무려 15분이나 지속된 서준의 연설은 계획한 시간을 훨씬 초과했지만 객석에 앉은 기자들은 지루하거나 따분해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이 얘기한 HT그룹의 비전은 B시에 거주한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니까.모든 사람은 귀를 쫑긋 세우고 서준의 연설에 집중했다.“이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한 대표님 연설이 왜 이렇게 길죠?”그때 진호가 호현욱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호현욱은 서준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고작 십몇 분 동안 결과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혹시 따로 준비한 거 또 있어?”호현욱의 물음에 진호가 이내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쇼를 망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뒀으니까.”아니나 다를까, 서준의 연설이 끝나고 1조 모델들이 무대에 오르기 바쁘게 현장 스태프가 헐레벌떡 하연에게 달려왔다.“최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청자 한복을 입기로 했던 모델분이 갑자기 발을 다쳤어요.”하연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섰다.“무슨 일이죠? 모델분은 지금 어디 있어요?”하연은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며 무대 뒤에 있는 라커룸에 도착했다. 그랬더니 청자 한복을 입기로 한 모델이 통증 때문에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게다가 모델의 발등 위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얼른 구급상자 가져와요.”하연의 부탁에 현장 스태프가 구급상자를 들고 나타났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쩌다 다쳤어요?”“저도 모르겠어요. 하이힐을 신었는데 안에 칼날이 있었어요. 이제 곧 제 차례인데 발이 이렇게 돼서 어떡해요?”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모든 상황을 비추어 보면 분명 누군가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 하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혹시 알아요? 세계 무대로 나갈지.”“...”주위 사람들이 수군대며 이번 패션쇼에 대한 호평을 늘어놓을수록 호현욱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옆에 앉아 있던 진호 역시 연신 식은땀을 닦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사님, 메인 의상이 망가졌으니 이번 쇼는 망치게 되어 있어요.”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인 의상을 입은 모델이 무대 위에 올랐다.메인 모델의 등장에 현장은 일순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히 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하연이 현장에서 수선한 메인 의상은 과감한 컬러와 세련된 스타일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독특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켰다.“이건 얼른 찍어야 해! 어쩜 이렇게 입체적인 다자인이 나올 수 있지? 오늘 본 디자인 중에 단연 최고야.”“디자이너가 정말 대단한데!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 거잖아.”“끝나면 무조건 인터뷰 따야겠네.”“이렇게 독특한 의상을 만들어 우리나라 문화를 세상에 알리다니, 분명 남다른 애국심을 품고 있는 디자이너가 틀림없어.”“이런 디자이너는 우리가 나서서 홍보해 줘야지.”“...”사람들이 말하면 말할수록 호현욱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심지어 앉든 서든 어딘가 불편하기만 했다.무대 위의 의상을 보는 호현욱의 눈에는 이미 거센 파도가 휘몰아쳤다.‘최하연, 내가 널 얕잡아 봤네.’솔직히 하연이 그토록 엉망이 되어버린 옷을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로 수선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호현욱은 화를 못 이겨 연신 기침했다. 그걸 본 진호가 얼른 그를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이사님, 괜찮으십니까?”하지만 호현욱은 콧방귀를 뀌며 진호를 밀어버렸다.“이게 네가 말한 좋은 일이야?”“이건... 저도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끝난 건 아니니.”그 말에 호현욱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하지만 다음 순간.고풍스러운 한복을 입은 하연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냘프고 여리여리한
[뭐? 한복 한 벌에 40억?][이건 완전히 내 인식을 뒤집네. 그런데 이렇게 보니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네티즌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하연은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마지막 의상을 선보였다. 스텝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이 담겨 있어 아래에서 보는 기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훔쳤다.특히 멀지 않은 곳에서 패션쇼를 보고 있던 서준은 이 순간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검은 눈동자에 오직 하연만 있을 뿐.워킹을 마친 하연은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마침 하성이 나타나 하연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갑자기 저를 품에 안은 상대를 확인한순간 하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요?하성은 하연을 풀어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선물 줄 거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계속 선물 확인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오는 수밖에.”하연은 그제야 하성이 말한 선물이 본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와! 고마워요. 저 잠깐만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이따 패션쇼가 끝나면 제가 제대로 대접할게요.”“그래.”하성은 하연이 예뻐 죽겠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그 대답에 하연은 얼른 라커룸으로 달려갔고, 하연이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던 하성은 뒤돌아서자마자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성은 콧방귀를 뀌며 이내 서준에게서 시선을 뗐다.이번 패션쇼는 매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심지어 끝나자마자 온갖 사이트의 인기 검색어를 차지하였고, 심지어 해외에서마저 이번 패션쇼에 대한 기사를 앞다투어 보도했다.한순간, 패션쇼의 열기는 극에 치솟으면서 하연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순간 수많은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하연 씨, 오늘 패션쇼에서 선보인 의상은 모두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것입니까?”“혹시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요?”“이렇게 큰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