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상혁이 너 같은데 아니야?'하성이 무심결에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쳤다.“아니다!”그는 몸을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상혁의 얼굴은 이미 어두운 먹구름이 낀 듯 굳어 있었다. 그리고 눈은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모니터 속에서, 하연은 세븐에게 붙잡혀 있었다. 여자의 허리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깊숙이 눌려 있었다.하연이 몸부림치려 하자, 세븐이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두 사람은 멀리서 보면 마치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세븐은 한 손으로 하연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이 남자의 손끝을 간지럽혔다.세븐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가만히 있어. 누군가가 눈치라도 챈다면, 난 당신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순간 하연의 몸은 떨렸다. 본능적으로 손을 배 위로 가져가 보호하듯 감쌌다. 결국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세븐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렇게 순순히 따라오면 돼. 그럼 난 널 해치지 않아.”하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문 쪽을 향해 걸어가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당신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돈이 필요해서? 아니면 무슨 다른 목적이라도 있어?”세븐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웃었다.“당신 생각엔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금액을 말해. 난 최씨 가문의 딸이야. 당신 요구를 최대한 맞춰줄 수 있어.”세븐은 비웃듯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만약 돈이 아니라면? 내가 다른 요구를 한다고 해도 네가 들어줄 수 있어?”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연의 허리를 거칠게 감쌌다. 단검을 거두며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하연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괜히 머리 쓰지 말고 가만히 따라오기나 해.”그렇게 두 사람은 호텔 문을 빠져나갔고, 곧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로 사라졌다.상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벽을 세게 내리쳤다. 상혁의 몸 전체에서 뿜어
“하연 씨, 곧 도착할 테니까 힘 빼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연지는 옆에 앉아 있던 세븐을 힐끗 보았다. 세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액셀을 힘껏 밟았다. 차량이 갑자기 급가속했고 강한 출력으로 몸이 쏠리며, 하연은 반사적으로 옆 좌석을 꽉 잡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주변 풍경은 점점 더 외진 곳으로 변해갔다.개인 헬기 이착륙장. 헬리콥터 한 대가 이륙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상무님, 세 사람이 도착했습니다!”멀리서 익숙한 검은색 차량이 점점 가까워지자, 부남준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이륙 준비하고, 계획대로 진행해.”“네, 상무님!”검은색 차량이 점점 다가와 마침내 멈춰 섰다.“하연 씨, 도착했어요.”연지가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차에서 내린 하연의 시선은 곧장 저 멀리 서 있는 남준에게로 향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남준은 먼저 하연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하연 앞에서 멈춰 서며,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런 방식으로 모셔와서 미안하군.”그러나 남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은 성큼 다가가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짝!거침없는 손길이 남자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순간 얼어붙었다.연지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가섰다.“상무님, 괜찮으세요?”남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하연이가 얼마나 세게 뺨을 때렸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걸로 화가 풀린다면, 한 대 더 때려도 괜찮아.”하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부남준,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남준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신호에 따라 연지를 비롯한 부하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하연은 경계심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바로 그때, 남준의 뒤편에서 헬리콥터 엔진이 가동되었다. 회전 날개가 점점
남준의 손등을 하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세게 악물었다. 남준의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결국, 참지 못한 남준이 손을 놓았다. 하연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물러섰고, 경멸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남준은 피가 흘러내리는 손등을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최하연, 너 개냐?”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 다가갔다. “오지 마!”하연은 경고하듯 외쳤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거야?”남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한테 난 그저 비열하고 파렴치한 그런 놈이라는 생각뿐인 거야?”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연의 앞에 멈춰 섰다. 하연이 또다시 물러나려 했지만, 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최하연, 오늘 나랑 같이 가기만 하면, 부씨 가문의 모든 걸 버리겠어.”하지만 하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목을 힘껏 뿌리쳤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왜 나한테 하는 건데? 넌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감춰둔 연인? 아니면, 형제 간 싸움에서 이용할 도구?”“아니야!”남준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목젖이 떨렸다. “만약 내가 널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게, 오직 너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면?”하연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의심과 경계가 자리 잡았다.“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남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네 눈엔 난 온갖 술수를 부리는 교활한 놈으로밖에 안 보이겠지.”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아니면, 네가 바라볼 수 있는 남자는 오직 부상혁 하나뿐인 거야?”남준의 시선이 하연을 꿰뚫듯이 바라봤다.“최하연, 네 눈에 내가 그렇게도 한심해? 정말 넌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는 거야?”그 순간, 뒤편에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
남준의 손등을 하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세게 악물었다. 남준의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결국, 참지 못한 남준이 손을 놓았다. 하연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물러섰고, 경멸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남준은 피가 흘러내리는 손등을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최하연, 너 개냐?”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 다가갔다. “오지 마!”하연은 경고하듯 외쳤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거야?”남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한테 난 그저 비열하고 파렴치한 그런 놈이라는 생각뿐인 거야?”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연의 앞에 멈춰 섰다. 하연이 또다시 물러나려 했지만, 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최하연, 오늘 나랑 같이 가기만 하면, 부씨 가문의 모든 걸 버리겠어.”하지만 하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목을 힘껏 뿌리쳤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왜 나한테 하는 건데? 넌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감춰둔 연인? 아니면, 형제 간 싸움에서 이용할 도구?”“아니야!”남준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목젖이 떨렸다. “만약 내가 널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게, 오직 너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면?”하연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의심과 경계가 자리 잡았다.“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남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네 눈엔 난 온갖 술수를 부리는 교활한 놈으로밖에 안 보이겠지.”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아니면, 네가 바라볼 수 있는 남자는 오직 부상혁 하나뿐인 거야?”남준의 시선이 하연을 꿰뚫듯이 바라봤다.“최하연, 네 눈에 내가 그렇게도 한심해? 정말 넌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는 거야?”그 순간, 뒤편에
“하연 씨, 곧 도착할 테니까 힘 빼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연지는 옆에 앉아 있던 세븐을 힐끗 보았다. 세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액셀을 힘껏 밟았다. 차량이 갑자기 급가속했고 강한 출력으로 몸이 쏠리며, 하연은 반사적으로 옆 좌석을 꽉 잡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주변 풍경은 점점 더 외진 곳으로 변해갔다.개인 헬기 이착륙장. 헬리콥터 한 대가 이륙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상무님, 세 사람이 도착했습니다!”멀리서 익숙한 검은색 차량이 점점 가까워지자, 부남준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이륙 준비하고, 계획대로 진행해.”“네, 상무님!”검은색 차량이 점점 다가와 마침내 멈춰 섰다.“하연 씨, 도착했어요.”연지가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차에서 내린 하연의 시선은 곧장 저 멀리 서 있는 남준에게로 향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남준은 먼저 하연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하연 앞에서 멈춰 서며,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런 방식으로 모셔와서 미안하군.”그러나 남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은 성큼 다가가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짝!거침없는 손길이 남자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순간 얼어붙었다.연지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가섰다.“상무님, 괜찮으세요?”남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하연이가 얼마나 세게 뺨을 때렸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걸로 화가 풀린다면, 한 대 더 때려도 괜찮아.”하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부남준,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남준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신호에 따라 연지를 비롯한 부하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하연은 경계심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바로 그때, 남준의 뒤편에서 헬리콥터 엔진이 가동되었다. 회전 날개가 점점
‘이 사람... 상혁이 너 같은데 아니야?'하성이 무심결에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쳤다.“아니다!”그는 몸을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상혁의 얼굴은 이미 어두운 먹구름이 낀 듯 굳어 있었다. 그리고 눈은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모니터 속에서, 하연은 세븐에게 붙잡혀 있었다. 여자의 허리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깊숙이 눌려 있었다.하연이 몸부림치려 하자, 세븐이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두 사람은 멀리서 보면 마치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세븐은 한 손으로 하연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이 남자의 손끝을 간지럽혔다.세븐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가만히 있어. 누군가가 눈치라도 챈다면, 난 당신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순간 하연의 몸은 떨렸다. 본능적으로 손을 배 위로 가져가 보호하듯 감쌌다. 결국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세븐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렇게 순순히 따라오면 돼. 그럼 난 널 해치지 않아.”하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문 쪽을 향해 걸어가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당신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돈이 필요해서? 아니면 무슨 다른 목적이라도 있어?”세븐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웃었다.“당신 생각엔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금액을 말해. 난 최씨 가문의 딸이야. 당신 요구를 최대한 맞춰줄 수 있어.”세븐은 비웃듯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만약 돈이 아니라면? 내가 다른 요구를 한다고 해도 네가 들어줄 수 있어?”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연의 허리를 거칠게 감쌌다. 단검을 거두며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하연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괜히 머리 쓰지 말고 가만히 따라오기나 해.”그렇게 두 사람은 호텔 문을 빠져나갔고, 곧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로 사라졌다.상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벽을 세게 내리쳤다. 상혁의 몸 전체에서 뿜어
상혁이 다시 로비로 돌아왔을 때, 무의식적으로 하연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익숙한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상혁은 미간을 좁히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차가운 자동 응답 음성이 들려왔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왠지 모르게 상혁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그는 발걸음을 서둘러 인파 속에서 하성을 찾아냈다. 곧장 하성의 팔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하연이 못 봤어?”하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너희 같이 있던 거 아니였어?”상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재빨리 하성을 놓고 출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하성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따라붙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상혁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야. 아마 쉬러 갔을 거야. 가서 확인해 볼게.”하성은 더 묻지 않고 상혁와 함께 휴게실 방향으로 향했다.“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그렇게 말하면서도 상혁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두 사람은 호텔 내 모든 휴게실을 확인했지만 하연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상혁은 점점 초조해졌다.그때, 정예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그녀는 상혁을 보자 놀란 듯 말했다.“부 대표님, 아까 하연이랑 부 대표님 같이 나가지 않았어요?”순간, 상혁의 몸이 굳어졌다.“뭐라고?”하성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상혁이는 계속 나랑 같이 있었어.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예나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아까 분명이 로비에서 ‘부상혁'이 하연을 감싸 안고 호텔 문을 나서는 걸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심지어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지기도 했다.“신혼부부는 아니랄까 봐 떨어질 생각이 없나 보네. 어디 가서 둘이 꽁냥꽁냥 거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이 한 잔을 사과의 의미로 받아 주세요.” 다영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잔을 비웠다. “아주버님, 형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여자의 말은 매끄러웠고, 태도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하연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난 후. 다영은 더 이상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끝까지 침착해야 해.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아.’ 손의 떨림을 억지로 참아내며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은 후, 급하게 잔을 채우고 나서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녀는 자신의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 한 걸음을 내디딘 이상,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한편, 상혁은 한쪽 팔로 하연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하연은 의아한 눈길로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그러자, 상혁은 하연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순간, 하연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정말이에요?”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여자의 시선을 가리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연의 잔과 자신의 잔을 교체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 한마디에, 하연은 비로소 안도한 듯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둘은 자연스럽게 눈빛을 교환하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다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했다. 즉, 하연이 아무런 의심 없이 잔을 들어, 그 안의 음료를 마시는 순간을. 그 순간, 다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됐다...!’ 이제, 하연의 뱃속 아이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니까. ‘길어야 3일... 그 안에 반드시 아이를 잃게 될 거야.’ ‘하지만
“그러고 보니, 연지 씨가 부상혁 대표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사실상 부 대표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던데... 그런데 지금은 부남준 상무를 위해 일하고 있네.”“내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부씨 가문의 두 형제 사이를 능숙하게 오갈 수 있는 거지?” 세븐이 입을 열자, 연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 말투와 어조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부상혁 대표는 원래 이런 말투로 말하지 않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시지.” 그리고 이어서 단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이나 제대로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약점 보였다가 후회하지 말고.”그러나 세븐은 개의치 않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지 씨, 정말 부상혁 대표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단 말이야?” “그건 당신이 궁금해할 필요 없고.” 연지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오늘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세븐은커녕 이 공간에 발 들이는 것조차 끔찍했을 것이다.“그리고 부남준 상무님이 하신 말씀 잊지 마. 본인이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세븐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올렸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지는 손목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예식이 시작돼. 모든 건 계획대로 진행하면 돼.” “걱정 마. 발목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대답은 나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얌전히 있어. 내 연락 기다려.” 마지막으로 단단히 일러둔 후, 연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 비록 약혼식이지만,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이들 모두 이를 굉장히 중시했다. 사소한 부분까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로비의 장식만 봐도,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이 작년부터 준비해 온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홀 중앙에는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 비친 금빛 패턴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하객들은 이미 자리를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