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 랭킹 4위는 취설검, 소유자는 홍흥조.” “신병 랭킹 5위는 패왕도, 소유자는 소명.” “신병 랭킹 6위는 추성검, 소유자는 한서.” “신병 랭킹 7위는 천뢰도, 소유자는 진무열.” “신병 랭킹 8위는 황천검, 소유자는 홍군림.” “신병 랭킹 9위는 창궁검, 소유자는 유장혁.” “신병 랭킹 10위는 폭우이화침, 소유자는 당흠.” 이청성은 신병 랭킹의 순위를 차례로 읊으며 그에 관련된 정보를 전달했다. 신병 랭킹에는 신병의 이름뿐 아니라 그 소유자의 정보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신병 랭킹 상위 10위에 두 자루나 이름을 올리다니, 이게 기쁠 일인지 걱정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군.” 유진우는 리스트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병 랭킹에 오른다는 건 겉으로는 영광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동시에 커다란 위험을 동반한다. 이른바 ‘옥이 무거우면 지키는 자가 고생한다’는 말처럼 신병을 손에 넣은 이상 이를 지킬 만한 강한 실력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각지의 고수들이 신병을 노리고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두 자루나 가졌으니 속으로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청성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무도 고수들이 제대로 된 병기를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혼자서 두 자루를 차지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부러워할지 상상이 가네요.” “저는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신병 랭킹이 발표된 이상 앞으로 제 무기를 노리는 고수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겠군요. 일일이 방어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예요.” 유진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청성은 웃으며 대꾸했다. “사람들이 당신의 검을 빼앗으려면 먼저 자신의 실력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만 잃게 될 테니 그런 멍청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오호? 무슨 뜻이죠?” 유진우는 흥미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알게 될 겁니다. 이제 나머지 두 개의 리스트를 들려줄게요.” 이청성
“어쨌든 이 진무열이 천교 랭킹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라면 분명 비범한 능력을 가졌을 겁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보세요. 그래도 친척이잖아요.” 이청성은 반쯤 농담 식으로 말했다. “적일지 아군일지 아직 모릅니다. 난 진씨 가문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어요.” 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온화하고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진씨 가문에 의해 가문을 떠나야만 했고 이후 한 번도 그곳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진씨 가문이 결코 좋은 집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진무열이 어떻든 유진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물론 진씨 가문이 인재를 길러내는 데 있어 독보적인 능력을 가진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공주님은 그 정도 실력을 가졌으니 천교 랭킹에도 올라야 정상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름이 없죠?” 유진우가 문득 물었다. “이건 무림인들의 세계의 순위표예요. 황실 인물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청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천기각이 아무리 강력한 정보기관이라 해도 모든 걸 완벽히 알 수는 없어요. 이 순위표는 단지 참고용일뿐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용국은 땅이 넓고 숨은 고수들이 많으니 우리가 모르는 곳에 더 강한 인물들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맞는 말이네요.” 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고 사람 위에 또 다른 사람이 있는 법. 천교 랭킹에 들지 않은 강자가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마지막 순위표를 발표할게요. 이번에는 경천 랭킹입니다.” 이청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경천 랭킹은 용국 최정상 강자들의 순위표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각 지역의 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먼저 경천 랭킹 1위는 여전히 변함없는 존재, 용호산의 장선기입니다.” “그리고 2위와 3위는 큰 변화가 있었어요. 이전에는 호룡각 각주 이원무와 서경검선 백준이 차지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2위가 검종의 종주, 홍흥조예요.” “3위는 천하회의 종주, 소
“일리가 있네요.” 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경천 랭킹은 큰 변동이 있었어요. 이원무와 백준이 연이어 죽고 반유림은 행방불명이며 부규환은 한 칼에 쓰러졌죠. 작년 톱10 중 4명이 사라졌으니 정말 큰 손실이에요. 다행히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해 공백을 메웠어요. 정말 ‘강산은 인재가 계속 이어지고 신세대가 구세대를 대체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네요.” 이청성은 감탄하며 말했다. “새로 순위에 오른 이들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유진우는 갑자기 물었다. “5위, 채원진, 호룡각의 신임 각주죠. 이 사람은 아바마마께서도 전에 당신에게 언급하셨던 인물이에요. 송원호란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활동 중이에요. 이원무가 죽으면서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된 거죠.” 이청성이 대답했다. “채원진이란 사람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예전에는 경천 랭킹에 없었는데 이원무가 죽자마자 순위에 올랐고 그것도 그렇게 높은 위치인가요?” 유진우는 약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말이죠. 채원진이라는 사람은 아주 깊이 숨어 있던 인물이에요. 이원무가 억누르고 있던 시절에는 채원진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었죠. 하지만 이원무가 죽고 나서 채원진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고 엄청난 수단으로 호룡각 잔당들을 정리했어요. 그러면서 천기각이 그제야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5위라는 평가는 보수적인 것이고 그의 실제 실력은 삼대파의 종주들과 견줄 만하다는 평이 많아요.” 이청성의 말투는 점점 진지해졌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군요?” 유진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경천 랭킹의 강자는 순위마다 큰 격차가 있었다. 예전에 백준은 혼자서도 경천 랭킹 강자 3명과 싸워 완벽히 우위를 점했으니 말이다. 또한 자신이 부규환과 싸웠을 때 서로 막상막하였고 술법을 써야 겨우 승리했었다. 그렇다면 부규환보다 더 상위에 있는 채원진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와 맞닥뜨린다면 이길 수 있을지는커녕 목숨을 건지는 것조차 어려울 수도 있었다. “호룡각 부각
서경 왕성.유진우와 이청성은 비행기에서 내려 조용히 승합차에 올랐다. 그들은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으며 아무의 주목도 받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두 사람만이 함께 떠난 것으로 그들의 밀사와 근위병은 이미 전날 밤에 서경에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하니 더욱 은밀하고 안전했다. 차 안에서 이청성은 창문 너머로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며 새로운 것들에 흥미를 느꼈다. 연경의 번잡함과 비교하면 서경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역 풍경이든, 문화든, 연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평소 연경을 떠날 일이 거의 없었던 이청성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서경이 이렇게 많이 변했을 줄은 몰랐어요. 어렸을 때 이곳에 왔을 땐 대부분 낮은 건물들뿐이었는데 십여 년 만에 연경 못지않게 번화해졌네요.” 이청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서경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이제는 저조차도 길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유진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모든 것이 이미 변해버린 모습이었다. 왕부에 돌아가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당신 아버지는 정말 위대한 분이에요.” 이청성은 감동한 듯 말했다. “아바마마께 들었는데 20여 년 전 서경은 아직도 황폐하고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지는 곳이었다고 해요. 백성들은 고통 속에 살아갔고 정말 메마른 땅에 굶주린 시체가 들판을 덮은 그런 상태였죠.” 그런데 서경왕 유만수가 나타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유만수는 연경의 명문가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놀라운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군에 입대한 후에는 연전연승하며 많은 공을 세웠고 당시 그는 ‘세상에 비할 자 없는 명장’으로 불렸다. 어린 나이에 후작이 되고 장군의 자리에 올랐으니 정말 대단한 영광이었다. 모두가 유만수가 연경에 돌아가 발전하면 ‘천하의 권력을 쥔 이인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결정을 내렸다. 바로 서경에 정착해 국경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다.
유씨 가문 묘원, 일명 왕씨 가문 묘원은 약 800묘의 광활한 면적을 자랑한다. 묘원 내부는 경치가 아름답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으며 널찍한 도로와 다양한 시설이 완벽히 갖춰져 있다. 묘원 곳곳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사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여 꽃바다가 펼쳐지고 여름에는 푸른 잔디가 깔려 시원한 느낌을 준다. 가을이 되면 단풍잎이 흩날리며 감탄을 자아내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쌓여 은빛으로 뒤덮인다. 유씨 가문 묘원은 개방형으로 유씨 가문의 자손들뿐만 아니라 서경을 위해 공헌한 많은 장병들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매년 추모 기간 때마다 묘원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떤 사람들은 고인의 묘를 참배하러, 또 어떤 이들은 순국열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서경 사람들은 이 점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현재 누리고 있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모두 순국열사들이 목숨을 바쳐 쟁취한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시간 후, 유진우와 이청성은 차를 타고 유씨 가문 묘원의 정문에 도착했다.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 두 사람은 간단히 변장을 했다. 이청성은 섬유 재질의 인조 얼굴 가면을 쓰고 평범한 얼굴로 변장했다. 이는 사전에 준비한 것이었다. 서경에 도착해 종일 망사 모자나 베일을 쓰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오히려 주목을 끌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청성은 평범한 얼굴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매와 기품은 여전히 돋보였다. 묘원 안을 걷는 동안 그녀를 힐끗거리는 남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연지 랭킹 1위의 무게감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진우는 기억을 더듬으며 묘원의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억이 맞는다면 어머니의 묘는 묘원의 가장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고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다. 약 10분 정도 걸었을 때, 유진우는 드디어 진왕비의 묘를 찾아냈다. 다른 묘소에 비해 진왕비의 묘는 훨
유진우는 어머니의 비석 앞에서 무릎 꿇고 절을 올렸다.어머니를 살해한 주범 이원무는 살해되였고 호룡각도 무너졌으니 이젠 채원진과 사철수 일행만 남았다.이 사람들만 없애면 어머니의 피맺힌 원수는 완전히 갚을 수 있다.“어머니, 너무 보고 싶어요!”유진우는 눈앞의 비석을 바라보면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유진우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일 년 내내 나랏일에만 힘쓰시며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으셨고 어머니 혼자 고생스럽게 자신을 키우셨다.어렸을 때 어머니가 너무 엄하게 다스린 탓에 반항심이 생겨 걸핏하면 엉덩이를 몇 대씩 더 맞곤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고된 마음을 이해 할수 있었다.유진우는 서경 세자로서 어려서부터 부유했고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다.이런 환경에서 어머니가 잘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는 남을 쉽게 깔보는 부잣집 도련님이 되었을 것이다.유진우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어머니가 정성껏 길러주신 덕분이다.무술이든 군사든 의약이든 아니면 기이한 비술이든 모두 어머니의 교육을 벗어나지 못했다.어머니는 그에게 생명을 줬을 뿐만 아니라 장래의 모든 길을 열어 주셨다.“휴...”슬픔에 젖어 있는 유진우를 보며 이청성은 한숨을 내쉬며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그녀는 두 모자가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을거로 생각했다.한 시간 뒤, 유진우는 하소연을 마치고 어머니의 비석 앞에서 정중하게 세 번 절을 한 후 일어섰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커다란 묘지에는 몇몇 사람들이 간혹 슬피 통곡하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없었다.“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유진우는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청성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괜찮아요. 전 진 왕비의 인품을 항상 매우 탄복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그녀의 수상을 보게 된 것도 저의 영광이에요.”이청성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날도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일단 쉴 곳이라도 찾아봐요.”유진우는 어머니의 말이 나오면 더 슬퍼질까 봐 다시 말을 돌렸다.“제가
“어?”의외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비석을 다시 똑똑히 쳐다본 유진우는 이 비석의 주인이 뜻밖에도 자신이랑 친분 있는 당시 흑용군의 선봉에 섰던 유림 부 장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선봉군은 모두 신중하게 고른 실력 있는 사람들로 부 장군까지 될 수 있었다는 건 그 누구보다 더 우수했을 것이다.유진우의 기억 속에 부 장군 유림은 천성적으로 신력을 가진 사람으로 전쟁터에서 매우 사납고 흉악했으며 무수한 적을 죽여 일생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유림 장군은 또한 자신의 아버지 유만수를 위해 서경을 평정시키고 적들을 방어하는데 큰공을 세웠었고 희생된 후에도 관직이 바로 한 계급 올라 선봉군 주 장군으로 바뀌었다.그리하여 장례식도 매우 성대하게 치렀고 후손들은 덕분에 각종 우대를 받으며 생활했다.‘이대로라면 유림 장군의 후손들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처참해진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유진우는 혼자 생각하다 천천히 젊은 남자한테로 다가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려 했다.“누구냐!”젊은 남자는 인기척을 눈치챈 듯 살짝 경계하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긴장하지 말아요. 우리도 당신처럼 가족한테 제사를 지내러 왔어요.”경계심이 가득한 남자를 본 유진우는 급하게 대답했다.“가족한테 제사 지내러 오셨다고요?”젊은 남자는 아래위로 훑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경계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네, 저희도 방금 제사가 끝나고 돌아가려던 찰나 너무 슬피 우시길래 걱정되어 찾아왔어요.”“죄송해요. 방금 제가 감정이 조금 격했어요. 두 분이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라요.”유진우의 걱정 어린 말투에 젊은 남자는 그제야 사과의 말을 전했다.“괜찮아요. 저희도 다 이해해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르고 있었다는 듯 눈앞의 비석을 쳐다보며 놀란 어조로 물었다.“어머! 여기는 위대한 유림 장군님의 묘지가 아니에요? 설마 귀하께서는 유 장군님의 후손이신가요?”“네, 제 이름은 유성이고 유림 장군은 바로 저희 아버지예요
“제가 이길 수 없어도 서경에는 왕이 계시잖아요. 그들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왕보다 더 강할까요?”“이보게 친구,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들이 아니에요. 그 악당들의 아버지들은 전부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 유명하며 대부분 서경 황족과 친분이 두텁고 개인적인 금융거래도 엉켜있어 아무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어요.”유성은 울먹이면서 말했다.“이런 벌레 같은 놈들을 설마 어르신도 상관하지 않는다고요?”유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르신 인품으로 보면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절대 가만히 있었을 수 없었을 것이다.“어르신께서 처리해야 될 일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찌 이런 작은 일까지 일일이 신경 써주시겠어요. 게다가 그 나쁜 관리자 놈들이 이런 추악한 일들이 생겨도 말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입막음했으니, 어르신께서는 절대 알 리도 없고 우리를 위해 정의를 밝혀줄 기회도 없었어요.”유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서경이 이 정도로 난잡해졌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유진우는 서경에서 손가락에 꼽힐 수 있는 집안의 세자로서 시민들이 이런 압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하소연할 길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노가 차올라 낯색이 어두워졌다.게다가 장군의 아들인 유성마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반 시민들은 또 어떤 압박을 받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지금의 서경은 겉보기엔 번화한 것 같지만, 인성은 예전 같지가 않아요. 어르신도 이젠 연세가 많으셔서 몸이 예전보다 못해지다 보니 많은 일들을 직접 처리할 수 없기에 관리자들에게 기회를 주어 처리하게 하는데 그들 또한 이런 추악한 일들은 어르신께 보고 없이 내부에서 숨기고 있어서 우리한텐 이런 불공평한 일들은 자주 볼 수 있는 일들이에요.”유성은 실망이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일들은 금시초문이에요. 이젠 제가 알았으니 절대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저한테 말만 해주시면 제가 반드시 되돌려 놓을 거예요.”유진우는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채 각주, 첩자에 관련된 일은 저도 전혀 몰랐습니다.”유태범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이틀 동안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렸는데 만약 제가 일말의 거짓이라도 했다면 기꺼이 천벌을 받을게요.”“허허허, 단지 농담한 거니까 유 장군은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채원진은 유태범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미소를 지었다.“유 장군의 말은 저야 당연히 믿죠. 저 두 첩자는 아마 유만수 쪽에서 보낸 사람들일 것이고 혹시나 유 장군이 도망갈까 봐 몰래 미행한 것 같습니다.”“워낙 음흉하고 교활한 사람이라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죠. 다행히 채 각주께서 제때 발견하신 덕분에 기지가 노출되는 걸 막을 수 있었습니다.”유태범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첩자가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알아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기지의 위치는 이미 서경왕부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큽니다.”“그러면 어떡하죠? 미리 철수하는 게 나을까요?”유태범이 깜짝 놀라 물었다.“철수요?”채원진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기지 위치가 알려졌다 해도 구체적으로 기지 안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고 화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아직 모를 겁니다.”“유 장군, 솔직히 말해서 우리 기지의 방어 능력으로는 서경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흑용군이라고 해도 10만 이상의 병사를 데리고 와야 맞서 싸울 맛이 있을 텐데 문제는 이만큼의 병사를 동원하게 되면 분명 저한테 들킨다는 점입니다. 사실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유만수가 매우 난감할 겁니다. 우리 기지 내부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쉽사리 병사들을 풀지 못하거든요. 적은 인원의 병사로 우리 기지로 공격해 온다 해도 그건 자살골이나 마찬가지고 병사만 축을 낸 셈이 되는 거죠. 그러나 만약 대규모로 군대를 이동한다면 이것 또한 저한테 발각되기 쉬워서 바로 철수해야 할 겁니다.”“다시 말해서 맞서 싸우든, 철수시키든 모두 제 선택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만수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거든요. 이길 수
이때 한 명의 호룡각 밀정이 갑작스레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채원진이 담담히 물었다. “각주님, 외부에서 서경 왕부 쪽으로 보이는 첩자 둘을 붙잡았습니다. 처분은 어떻게 할까요?” 호룡각 밀정이 고개 숙여 물었다. “첩자라...” 채원진이 미묘한 미소를 띠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유태범을 흘끗 본 뒤 가볍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을 안으로 끌고 와라. 내가 직접 심문하지.” “네.” 호룡각 밀정은 고개를 숙여 명령을 받아들인 뒤 문밖으로 손짓했다. 곧이어 두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온몸이 결박된 채 끌려 들어왔다. 그들의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가 벗겨지자마자 그중 한 명이 격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유태범, 이 배신자 새끼야! 네놈이 감히 우리를 배신하다니 천벌을 받을 거다.” “입을 쳐라.” 채원진이 차갑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 “네.” 밀정이 앞으로 나아가 첩자의 뺨을 좌우로 무자비하게 내려쳤다. 연거푸 내려친 손길에 그 첩자는 입과 코에서 피를 쏟으며 비틀거렸다. 몇 차례 더 맞은 뒤에는 치아가 반쯤 부러진 채 흐느적댔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거짓말을 한다면 네 목숨은 여기까지다.” 채원진이 높직한 목소리로 첩자들에게 냉랭하게 물었다. “너희들은 정말 서경 왕부에서 온 것이냐?” “퉤.” 얼굴이 부어오른 채로 고통에 몸부림치던 검은 옷의 사내가 갑자기 채원진을 향해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죽이려면 죽여라. 내 입에서 뭔가 알아내겠다고? 그건 꿈도 꾸지 마.” “좋다. 그 소원 내가 들어주지.” 채원진은 더 이상 말을 낭비할 생각 없이 한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바닥이 검은 옷 사내의 머리를 내리치자 머리는 그대로 진흙 덩이처럼 으스러지고 말았다. 그 잔혹한 살수 방식에 유태범조차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채원진은 슬쩍 손을 털며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네 차례다. 말할 건가 말하지 않
“죽은 척하며 속이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채원진은 눈썹을 올리며 의아해했다. “저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겁니다.” 유태범은 고개를 흔들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결국 우리는 한 수 비운 거죠. 유만수가 오히려 우리에게 함정을 놓고 우리가 그의 손에 놀아났습니다. 지금 제 부하들은 모두 제어 당했고 이제 반전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채 각주께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머릿속으로 정리 좀 해볼게요.” 채원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계획은 실패했고 유만수는 살아있으며 당신이 모은 모든 병력은 모두 포로가 되었고 지금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맞나요?” “네. 거의 그런 셈입니다.” 유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 장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만약 계획이 실패하고 당신의 부하들이 전멸했다면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죠?” 채원진은 반문했다. “실은 저는 항복을 가장해서 그들을 속였고 그 틈을 타서 빠져나왔습니다.” 유태범은 고백했다. “항복? 어떻게 그랬나요?” 채원진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씀드리기 전에 혹시 채 각주께서 불쾌해하시면 안 됩니다.”유태범은 잠시 말을 정리한 뒤에 이어서 말했다. “사실 저는 채 각주를 미끼로 삼아서 유만수에게 항복한 척하고 그들에게 제가 채 각주를 잡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들은 복수를 갈망했기 때문에 저를 풀어주었고 저를 이용해 채 각주를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채원진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저와 만난 것은 함정이었나요? 유만수가 꾸민 계략이었다는 거군요?”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경 왕부의 세력이 이미 사라졌다고 판단했고 호룡각에 합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들을 완전히 속여서 자신들의 계략에 휘말리지 않도록 했고 중요한 정보를 하나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유태범은 확신
이 방어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성벽을 넘어선 후 유태범 앞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었다. 규모에서 볼 때 성벽 뒤의 이 기지는 마치 작은 도시 같았다. 곳곳에 다양한 건물들이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군사 기지, 훈련장, 실험장, 군수 창고, 벙커, 군용 공항 등 각각의 시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민간 용도로 사용되는 시설도 섞여 있었다. 유태범은 대강 한 눈으로 보면서 이 기지의 규모와 면적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았다. 이 군사 기지는 최소 5만에서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방대했다. 후방 지원 인력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다면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아무리 수많은 풍파를 겪었던 유태범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화룡각은 너무나도 깊이 숨어 있었고 표면에는 티가 나지 않았으나 이미 엄청난 군사력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서경의 밀정들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그는 갑자기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 후회를 느꼈다. 만약 기지 안에서 채원진을 독살했다면 과연 그는 살아날 수 있었을까? 그건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었다.“유 장군, 이쪽입니다.” 사철수는 유태범의 생각을 끊으며 그를 군사 기지의 중심에 위치한 지휘실로 이끌었다. 거의 아무도 모른다. 이 지휘실 아래 깊은 지하에는 핵 방어 대피소가 건설되어 있다는 사실을. 현재 지휘실 안에서는 가면을 쓴 채원진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화면 앞에서는 예전 버전의 드라마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채원진은 이를 흥미진진하게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채원진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철컥.” 지휘실의 문이 열리자 사철수와 유태범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유 장군, 또 만났군요.”
지금 한 대의 이동하는 비즈니스 차 안에서. 사철수는 검은 천 한 조각을 꺼내어 유태범에게 건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 장군, 길이 멀고 잠시 눈을 감고 쉬어 가시죠.” “무슨 뜻이죠?” 유태범은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리며 물었다. “이건 우리의 규칙입니다. 비밀 기지에 외부인이 갈 때는 반드시 눈을 가려야 합니다. 안전을 위해서죠.” 사철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왜요? 저를 못 믿겠다는 건가요?” 유태범은 일부러 불쾌한 듯 말하며 물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유 장군, 모두 같은 규칙입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사철수의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그럼 눈 가려요. 마침 피곤했는데 한숨 자도 되겠네요.” 유태범은 귀찮아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바로 눈을 감았고 몸을 편안하게 놓은 채 잠시 휴식을 취하려 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유 장군.” 사철수는 미소를 지으며 직접 눈을 덮어 줬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차는 처음엔 순조롭게 달리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도로가 갑자기 울퉁불퉁해졌다. 차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사람을 졸리게 만들 정도로 기울었다.“사 장군,우리는 지금 도시를 벗어난 건가요?”유태범이 갑자기 물었다. “네. 맞습니다.”사철수는 숨김없이 대답했다. “안전상 기지는 도시 밖에 자리 잡고 있고 거리가 좀 멀지만 충분히 은밀한 장소입니다.” “호룡각이 생각보다 정말 조심스럽네요.”유태범이 말했다. “조심하는 게 항상 좋은 일이죠. 유 장군, 조금만 더 참으시면 곧 도착합니다.”사철수는 웃으며 말했다. 차는 계속해서 나아갔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난 뒤 차가 마침내 멈췄다. 그제야 사철수는 유태범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풀어주었다. 유태범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이 깊고 외진 산골짜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우뚝 솟은 산들이 마치 숨어있는 거대한 짐승처럼 느껴졌다. 산골
“기다리세요!”유태범이 떠나려 하자 사철수는 마침내 참을 수 없었다. “유 장군, 얘기는 천천히 나누면 됩니다. 왜 이렇게 성급하게 행동하시나요?”“무엇을 더 얘기할 게 있겠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신뢰조차 없는데 이것은 분명히 저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유태범은 일부러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유 장군, 잠시 진정해 주세요. 각주께서는 당신을 뵙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간이 없으셔서 그렇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잠시 기다려 주시고 제가 각주께 여쭤보겠습니다. 어떻게 하실지 여쭤볼게요.” 사철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빨리 물어보세요. 저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유태범은 두 손을 뒤로 포개며 위엄 있게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장군, 잠시만 앉아 계세요. 바로 각주께 여쭤보겠습니다.”사철수는 몇 마디를 진정시키며 옆으로 가서 핸드폰을 꺼내 누구와 통화를 시작했다. 약 2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사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레스토랑 안에 있던 그의 부하들이 즉시 흩어져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모든 부하가 돌아와 상황에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했다. 사철수는 몇 마디를 더 한 후 채원진과의 통화를 마쳤다.사철수는 미소를 지으며 유태범 앞에 다가가 말했다. “유 장군, 방금 각주께 보고했는데요. 그쪽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급하시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얘기해도 괜찮습니다.” “다른 곳?” 유태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자연히 저희 호룡각의 서경 비밀기지입니다.” 사철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비밀기지는 고위 인사들만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각주께서 장군을 초대한 것도 충분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을 들은 유태범은 턱을 만지며 잠시 망설였다. 그는 지금 채원진이 어떤 속셈을 가졌는지 몰랐지만 상대가 절대 순진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호룡
그 순간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선두에 있는 사람은 검은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깊게 쓴 중년 남자였다. 중년 남자는 모자를 매우 낮게 눌러썼고 머리를 숙여 얼굴을 확실히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외관으로 보았을 때 그의 몸은 매우 마르고 깡마른 상태였다. 문을 지나 들어온 후 모자를 쓴 중년 남자는 바로 유태범 앞에 앉았다. 그의 뒤에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경계의 태도를 취하고 주변의 이상을 감시했다. “당신은?” 유태범은 눈앞의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채원진을 이미 본 적이 있었고 그의 몸은 크고 건장한 모습이라 이 사람과는 확연히 달랐다. “유 장군, 오랜만입니다.” 중년 남자는 머리 위의 모자를 벗어 던지며 얼굴을 드러냈다.유태범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사철수?” “유 장군, 좋은 눈썰미를 가졌군요. 10년 만에 이렇게 알아보시다니 놀랍네요.”사철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10년 전의 그 강건했던 모습에 비해 지금의 사철수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잠깐! 당신은 이미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살아있을 수가 있죠?” 유태범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당시 자금성 대변혁에서 왕부에 있던 사람 중 유장혁과 술광 외에는 거의 전원 희생되었고 사철수도 그중 하나였다. 그랬는데 10년 만에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운이 좋았습니다. 누군가 구해줘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요.”사철수가 설명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송원호처럼 호룡각 사람인 거예요?” 유태범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맞아요. 우리는 모두 호룡각의 스파이였고 서경에 숨어 있었어요. 이제는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온 거죠.” 사철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진짜 예상 못 했네요. 당신들이 이렇게 깊숙이 숨어서 우리 모두를 속였다고요?” 유태범은 눈을 좁혔다. 10년 동안 이름을 숨기고 세상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인 것이라니. 그 깊
“오? 벌써 준비를 해놨네.”유만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작은 여우 같았다. 일부러 이런 함정을 만든 것은 유태범에게 압박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 보약을 먹은 이상 유태범이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더는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삼촌을 믿을 수 없으니 당연히 보험을 들어야죠. 만약 삼촌이 그 순간 열 받아서 어떤 반역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땐 우리가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격이잖아요.” 유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예방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네 삼촌을 미끼로 쓰는 게 과연 믿을 만한 방법일까?” 유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채원진의 실력은 뛰어나고 성격이 치밀해서 속이기 쉽지는 않을 거예요.”“삼촌만으로는 안 될 거예요. 채원진이 막 결맹한 사람을 믿지 않을 거니까. 우리는 두 번째 계획을 준비해야 합니다.” 유진우가 말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유만수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어요. 그때 가면 알게 되실 겁니다.” 유진우가 살짝 비밀스럽게 답했다. “이 자식, 이제는 네 아버지인 나도 속일 셈이냐?” 유만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속인 게 아니라 아버지 곁의 사람들을 속인 거예요. 아무도 모르죠. 아버지 옆에 배신자라도 있을지. 조심해야죠.” 유진우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알겠다. 이제 네가 충분히 혼자 맞설 나이가 되었구나. 이 일은 전적으로 네게 맡길게.” 유만수가 하품한 후 말했다. “너희 두 형제가 서로 잘 상의해 봐. 서경의 미래는 너희에게 달렸으니 잘해라.” 그는 말을 마치고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천우야, 옷 갈아입고 나랑 함께 나가자. 예상대로라면 오늘 밤에 치열한 전투가 있을 테니 미리 준비를 해두자.” 유진우는 미리 말해준 뒤 유천우와 함께 위장을 하고 외출했다. 지금 왕부 내에서는 몇몇 가까운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뢰할 수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겐 항상 경계심
유태범은 눈썹을 추켜세우고 검은 알약을 보며 약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혁아, 네 성의는 알겠지만 이런 보물이야 네가 가지고 있어. 삼촌은 쓸 데가 없어.”“저는 천하대보환은 많아요. 귀한 보물도 아니고 편히 드세요. 한 알로 부족하면 많으니까 더 드릴게요.”유진우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그게...” 유태범은 조금 망설였다.“왜요? 삼촌은 저를 못 믿으세요? 제가 독을 넣었다고 생각해요?”유진우가 냉담하게 한마디 덧붙였다.“그럴 리 없지.”유태범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장혁이 너는 정직한 사람이라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그럼 먹어봐요.”유진우는 검은 알약을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유태범은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결국 그 검은 알약을 받아들여 한 번에 삼켰다. 이 약이 무엇이든 그는 반드시 먹어야 했다. 그래야 상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삼촌, 어때요?”유진우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군. 역시 신비한 약이야. 방금 먹자마자 몸 안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면서 전에 막혀 있던 경락들이 모두 뚫리는 느낌이야.” 유태범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삼촌이 큰 문제가 없으니 이번 습격은 오늘 밤에 진행하죠.” 유진우가 말을 이었다. “오늘 밤?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냐?” 유태범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그의 상처는 하루이틀에 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령 습격에 실패해 채원진이 반격하면 그는 도망가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삼촌, 기회를 놓치면 안 돼요. 왕부 쪽에서의 소식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거예요. 채원진이 곧 이상함을 눈치챌 겁니다. 우리가 미룰수록 채원진이 도망칠 가능성이 커지니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유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그 말은 맞지만...” 유태범은 말을 아끼며 입을 다물었다.“삼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삼촌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할 겁니다. 만약 위험에 처하시면 크게 소리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