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만수무강하실 거예요.”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이 한마디를 덧붙였다.엄마, 아빠가 없는 생활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당황하고 쓸쓸했지만 그렇다 해서 이우범에게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내 것이 아니다.아빠가 멈칫하더니 난감한 듯 웃었다.“나도 만수무강하면 좋지. 로아와 승현이 커서 결혼하는 것도 보고, 너의 새로운 의지와 버팀목이 되는 것까지만 봐도 나와 네 엄마는 시름 놓고 떠날 수 있을 텐데.”“그런 말 하지 마요. 아직 멀었어요.”나는 아빠가 더는 말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렇게 슬픈 화제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또 이우범 얘기가 나오는 건 더 싫었다.아빠는 그래도 눈치가 빨랐다. 내 기분이 다운된 걸 발견하고는 바로 얌전하게 이 화제를 논하지 않았다.아빠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빈이가 떠올랐다. 사실 아빠와 그냥 층만 달랐기에 보러 가기 편했지만 저번에 내가 상처 준 일이 떠올랐다.그러다 그냥 가보지 않기로 했다. 가서 희망을 주는 게 오히려 더 잔인했다.점심이 가까워지자, 아빠가 내게 귀띔했다.“지영아, 우범이한테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바쁜 거 아는데 하루가 멀다고 이렇게 찾아오니, 잘 대접해 줘야지.”“네, 알겠어요. 이따가 바로 전화할게요.”내가 얼른 대꾸했다.아빠는 내가 얼렁뚱땅 넘어갈까 봐 그러는지 기어코 자기가 보는 앞에서 이우범에게 전화해 점심 약속을 잡으라고 했다.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우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우범은 전화를 받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여보세요?”“우범 씨, 지금 병원 근처에요? 근처에 맛있는 식당 하나 아는 데 가볼래요?”나는 아빠를 힐끔 쳐다봤다. 아빠는 뿌듯하다는 눈빛으로 내게 답하고 있었다.“네, 주소 보내줘요. 15분 정도 걸리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이우범의 목소리는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게 듣기 좋았다.“네.”나는 전화를 끊고 아빠에게 물었다.“이제 좀 마음에 들어요? 이따 바로 아빠가 좋아하는 우범 씨 진수성찬으로 대접
‘인호 씨와 빈이가 왜 여기 있지?’빈이의 옷차림을 보니 외투 안에 입은 환자복 옷깃이 보였다.“빈아, 이렇게 추운데 왜 나왔어?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몸을 숙여 빈이의 손을 잡았다. 빈이는 기뻐하다가 손을 뺐다.“안 추워요. 병원에 있는 게 너무 심심해서 나와 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아빠한테 데리고 나와달라고 했어요.”빈이가 얌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손을 빼는 그 동작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일부러 내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이우범도 나를 따라 걸어왔다. 내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마침 이우범과 배인호 사이에 껴 있었다.“다른 사람이랑 나와서 밥 먹을 시간도 있고, 한가하네.”배인호가 갑자기 이렇게 툭 던졌다. 시선은 이우범에게로 꽂혔다. 배인호가 말한 다른 사람은 역시나 이우범이었다.“일이 좀 있어서 같이 밥 먹으러 나온 거예요. 밖에 추우니까 얼른 빈이 데리고 병원으로 들어가요. 그러다 감기 걸리면 시끄러워지니까.”나는 빈이의 몸을 걱정해 이렇게 귀띔했다.배인호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말투가 매우 언짢았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일단 너부터 잘 관리해.”“나랑 왜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난 그저 빈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나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전에는 내게 빈이를 돌봐달라고 하더니 지금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지금 이 아이에게 감정이 생긴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건 이미 늦었다.“뭐 어떻게 걱정할 건데? 애 엄마를 대체하기라도 할 거야?”배인호는 화통이라도 삶아 먹은 듯 말투에 나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나는 당연히 민설아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었다. 이 부분도 내가 제일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빈이가 민설아 곁으로 돌아가는 게 싫었다. 책임감 없는 엄마 옆에서 아이가 삐뚤어질까 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민설아의 아이라 내가 빈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이우범은 배인호가 나를 이렇게 대하자 차가운 목소리로 편을 들었다.“
‘왜 다들 나한테서 사람을 찾는 거야?’이모건은 전 여자 친구를, 노성민은 전처를 찾았다.“나도 정아가 어딨는지 몰라요.”내가 솔직하게 말했다.“허허, 그럴 리가요. 지영 씨한테까지 비밀로 할 사람이 아니에요. 하늘을 날든 땅을 파든 꼭 찾아낼 거라고요.”내가 말하려 하지 않자, 노성민은 내 앞에서 맹세했다.“날든지 파든지 알아서 해요.”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노성민은 할말을 잃었는지 멍해서 나를 쳐다봤다.나는 노성민을 지나쳐 차로 향했다.이우범은 우산을 들고 창가로 다가와 내게 귀띔했다.“비 오니까 운전 천천히 해요. 나는 먼저 서울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빚진 점심은 다음에 다시 먹는 거로 하죠.”“네.”나는 이우범에게 서울에는 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가 전보다 바빠진 건 정상이었다.이우범이 가고 나서야 나는 차를 운전해 병원으로 향했다.아빠는 내가 이우범과 밥도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걸 알고 내가 일부러 후진 식당을 골라 빨리 끝내려고 그랬다고 우겼다. 내가 어떻게 설명하든 아빠는 믿지 않았다.나는 아빠의 잔소리를 들으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사람이 아프면 더 쉽게 정서에 휘둘리는 것 같았다. 전에도 아빠는 내게 잔소리했지만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빠에게 대들 수도 없어 그저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아빠의 잔소리가 끝나자 나는 아빠와 진지한 얘기를 시작했다.“며칠 뒤에 외국 좀 다녀올게요. 인호 씨가 추천한 그 병원에 아빠 진단 자료를 보내야 해서요.”“배인호가 추천한 거라고?”아빠가 멈칫하더니 물었다.“언제?”“저번에 아빠 보러 왔을 때 병원 얘기를 하러 온 게 더 컸어요. 아빠한테 얘기하지 않은 건 저도 나름의 조사를 했거든요. 지금 조사가 거의 끝났는데 그 병원으로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아빠의 태도는 내 예상을 빗나갔다.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거절한 것이다.“나 안 가. 인호가 추천한 거라며, 안 가.”나는 하는 수
“맞아요. 우범 씨 저희 부모님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죠.”나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고 배인호의 말에 맞춰 맞장구를 쳤다. 결국 배인호의 안색은 흐림에서 폭우로 변했다. 마치 내가 극악무도한 말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빈이는 상황이 점점 이상해지자 입을 열었다.“아줌마, 오늘 보러 와줘서 고마워요. 근데 지금 너무 졸려서 자고 싶어요.”이는 내가 먼저 자리를 뜰 수 있게 핑계를 만들어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여기 더 있다간 배인호와 다투게 될 것이다.“그래, 그럼 푹 자. 내일 다시 보러 올게.”나는 빈이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는 배인호에게 눈길을 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체했다.하지만 배인호는 지금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라 예의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었다.병실 밖, 노성민과 박준은 아직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둘은 바로 입을 다물었고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나는 그런 둘을 신경 쓰지 않고 아빠에게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박준이 다가오더니 궁색한 표정으로 말했다.“허지영 씨, 혹시 뭐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뭐요?”나는 담담하게 되물었다.“아니다, 질문 두 개.”박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브이 포즈를 취했다.노성민은 멀지 않은 곳에서 마치 특수 공작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 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시선이 느껴지자 그는 바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벽을 만지작거리다가 화분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직감이 말해주었다. 박준이 말한 질문 2개에서 1개는 무조건 노성민을 대신해 묻는다는 걸 말이다.나는 옅은 미소로 웃으며 말했다.“물어봐요.”박준은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첫 번째 질문을 꺼냈다.“그게… 지금 정아 씨 어디 사는지 알아요? 성민이 저 모자란 놈이 와이프랑 아이들 보고 싶다고 해서…”“잠깐만, 와이프요? 전처가 맞죠.”나는 박준이 잘못 사용한 단어를 짚어냈다.“네, 네, 성민이가 전처가 보고 싶다고 실패한 결혼을 만회하고 싶다고 그러네요.”박준이 갑자기 나를 향해 맹세하기 시작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전까지 어두웠던 빈이의 눈빛에서는 삽시간에 빛이 나더니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 아빠!”말을 마친 뒤 그는 배인호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기분도 조금 전 보다 확실히 좋아진 듯 했고,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무균 치료실에 들어가는 듯 했다.무균 치료실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니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한 달 동안 빈이가 겪어야 하는 일에 대해 알 수 없었고, 빈이와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의사 선생님뿐이었다.나는 모든 게 순조롭길 기도했다.“자식, 진짜 용감하고 멋지네. 나 전에는 빈이가 저렇게 착하고 멋진 애인 줄 왜 몰랐지?”박준이 입을 열었다. 그는 빈이가 이식수술은 한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달려온 듯 했으며, 그와 동시에 노성민의 일 때문에 겸사겸사 온 듯 하다.누가 뭐라든 그와 노성민은 수년간의 친구로서 어떤 일이 생겨도 서로 돕곤 했었다.“응.”배인호는 짧게 답한 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노성민이 이 틈을 타 내 앞에서 불쌍한척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나도 우리 아이들 보고 싶네. 지금 어디 있는지, 잘은 지내는지, 괴롭힘은 당하지 않는지….”그가 이혼 후 와이프가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다.모르는 사람이 그 말만 들었으면 그의 아이들이 누구한테 유괴라도 당한 줄 알겠다.이때 배인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너 다리도 이제는 거의 나았으니 얼른 제주도로 가. 그쪽에는 내가 안심할 수 없으니까, 네가 가서 봐줘. ”“뭐?”원한과 증오에 빠져있던 노성민은 그 말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뭐가 뭐야? 네 전 와이프가 아직도 널 기다리는 줄 알아? 이미 다른 남자가 생겨서 널 피할 수도 있잖아.”배인호가 무표정인 얼굴로 노성민에게 상기시키자, 노성민은 대경실색하며 답했다.“인호 형, 형 전 와이프가 그랬다고 내 전 와이프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 마!! 우리 아이들이 다른 남자를 아빠라 부른다고? 절대 안 돼!”배인호는 노성민의 그 말에 얼굴색이 굳어
세희는 내 비명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그녀도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이모건을 발견했고, 그를 본 순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그러자 이모건은 큰 손으로 세희 팔목을 꽉 잡은 채 가지 못하게 했다.나는 바로 달려가 있는 힘껏 이모건의 손을 떼려 했다.“이모건 씨, 당장 그 손 놔요!”분노 섞인 나와 세희를 마주하던 이모건의 눈빛은 살짝 차가웠지만 그래도 결국은 세희의 팔을 놓아줬다.세희는 비록 나보다 조금은 살집이 있지만 이모건의 체형과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다. 만약 이모건이 마음먹고 세희를 데려가려 한다면, 우리 두 명이라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그 시각, 대기실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고 우리 셋만 대치 상태에 있었다.내가 한 가지 더 빠뜨린 점이 있다면 이모건은 세희의 핸드폰 위치추적까지 했다. 그렇게 된 이상 세희의 신상과 티켓 구매 상황 등 전부 찾을 수 있을 것이다.“둘이서만 얘기 좀 해요.”이모건은 나긋나긋한 말투로 세희한테 말했다. 비록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매우 달랐다.나도 과거에는 말릴 수 없는 사랑꾼이었기에, 사랑할 때와 사랑하지 않을 때의 눈빛은 한 번에 알아챌 수 있다. 하여 이모건이 세희에게 감정이 있는 건 확실하다.단, 이건 기괴한 사랑이다!“이야기 하지 마!. 남자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 대화 좀 하자는 거야. 그러다 네 태도가 많이 좋아지면 그때 다시 본성을 내비치는 거지!”나는 세희가 답하기도 전에 미리 그녀 대신 거절해 버렸다.그 순간 나를 보는 이모건의 눈빛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이건 저랑 세희씨 일이니, 지영 씨는 간섭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이모건 씨, 지영이도 간섭한 권리가 있어요. 본인이 뭐가 된 것처럼 얘기하지 마요. 기껏 해봐야 저랑 한동안 만났던 제 전 남자 친구잖아요? 하지만 지영이는 제 오랜 친구예요. 얘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거면, 이모건 씨는 저를 괴롭힐 권리가 있어서 이러는 건가요?”세희는 이모건의 한마디에 나를 자기 뒤
한국에 돌아온 지 5일째.나는 너무 피곤해 일단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몇몇 도우미 아줌마, 로아와 승현이가 있었고, 세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이틀 전 이미 서울로 돌아갔다. 그 맞선 상대의 일은 누가 뭐라든 그녀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그리고 그날 이모건이 다친 이유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심하게 맞았기 때문이었다.그도 독한 게 그렇게 심하게 상처를 입고도 세희를 찾으러 간 것이었다.“엄…엄…마…”한창 로아를 안고 놀아주고 있을 때쯤, 갑자기 로아가 작은 입을 움직이더니 희미하게 뭐라고 옹알거렸다.“빠…빠…”그러고는 또다시 그걸 반복하기 시작했다.옆에서 승현이를 안고 있던 도우미 아줌마도 깜짝 놀란 듯 말했다.“어머, 작은 아가씨가 이제는 엄마라고 부를 줄도 아네요?!”엄마?나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그러고는 신기한 듯 계속 로아의 입 쪽을 바라보았다.“로아야, 엄마라고 한 번만 더 불러볼래?”로아는 나를 보며 손가락을 물고 있었고, 투명한 침이 턱에 흘러내렸다. 나는 휴지로 로아의 침을 닦아주며 이어서 말했다.“자, 엄~마 해봐.”나는 한 글자씩 로아에게 말해줬지만, 로아는 아직 알아들을 수 없었다. 로아는 까맣고 예쁜 큰 눈으로 나를 보고만 있었고, 기나긴 속눈썹은 마치 하늘을 찌를 듯이 길었다.“아가씨, 너무 급해하지 마세요. 작은 아가씨가 아직은 말을 트기 시작한 단계인 같아요. 즉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음절 같은 거죠. 사실 아직은 자기가 뭐라고 했는지도 모를 거예요. 시간 좀 더 지나면 조금씩 알 거니까 너무 다급해하지 마요.”도우미 아줌마가 나를 안심시켰다.=나는 아이를 늦게 가진 케이스이다. 내 나이 또래면 대부분은 아이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아이가 무의식에 부른 엄마 소리에 기뻐하고 있다.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구나. 처음으로 엄마가 되어보니 잘 몰랐어요. 우리 승현이는 말을 늦게 트려나?”나는 이번에는 아줌마
고개를 돌려보니 배인호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왜 병원에 있는 거지? 이론대로라면 빈이가 무균 치료실에 들어갔으니, 그도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박준은 그의 냉담함에 다소 뻘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배인호를 대신해서 감정상의 어려움을 분담하고 싶어 했지만, 그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오늘 왜 온 거야? 병원에 처리할 거 있으면 내가 해!”박준이 의리 가득한 모습으로 말했다.“배인호, 너 일 많잖아. 지금쯤 엄청 바빠야 하는 거 아니야?”그렇다, 배인호에게는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그리고 민설아, 친자식이 아닌 빈이까지. 말 그대로 아주 많은 일이 있다.요 며칠 이우범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서울로 돌아갔다. 하지만 배인호는 여전히 가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다는 건가?“준이야!”박준이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갑자기 어디선가 배인호 어머니 김미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니 배인호 부모님이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다. 여긴 왜 온 거지?이윽고 박준도 그녀에게 얼른 인사를 건넸다.“아저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그들은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김미애는 나한테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지영아, 아버지가 아픈 거 왜 우리한테는 안 알려줬어? 어제 오랜 친구가 갑자기 전화 와서, 나한테 알려주지만 않았다면 우린 여전히 다 몰랐을 거야!”그 말에 나는 배인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내 시선을 피한 채 옆모습만 보이게 고개를 돌렸다.가끔 배인호도 내 심정에 대해 잘 헤아려주는 듯하다. 내가 먼저 그의 부모님에게 우리 아빠의 병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니 그도 자연스레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과거에 사돈 사이였으니, 서로 만나면 어색할 게 분명하다.나 대신 말하지 않은 거네.하지만 몇 다리만 걸치면 서로 다 아는 사이라, 결국에는 배인호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아주머니, 저희 아빠 괜찮아요. 아직은 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