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직장은 나한테 있어서 아주 신선한 느낌이었고, 특히 매일 배인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배인호가 대체 어떤 생각으로 나한테 이 자리를 줬는지 궁금했다.어머님이 나한테 문자를 보내기전까진 말이다.「지영아, 인호가 너한테 일자리는 배정해 줬니? 어떤 업무야? 인호랑은 매일 볼 수 있는 거니?」그 연속으로 이어진 세 가지 질문을 본 후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시부모님이 중간에서 압력을 가하셨을 거란걸 말이다.나는 배인호가 당연히 본인한테 잘해주고 있다고 답하며 문자를 보냈다.「어머니, 저 지금 인호 씨 사무실에서 인호 씨 개인비서 하고 있어요.」어머님은 엄지척 이모티콘을 나한테 보냈다.퇴근 시간이 되자 나는 퇴근 준비를 하며, 서란한테 지금 거기로 갈 수 있으니, 주소를 보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배인호는 아직 퇴근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나 야근해야 하니까 먼저 가봐.”“네.”나는 혹시나 나를 불러세워 야근하라고 할까 봐, 재빨리 짐을 싸서 퇴근했다.서란은 곧 답장이 왔고, 우리는 “랑데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나는 차로 곧장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고, 이외로 서란은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흰색 스웨터 카디건을 걸쳤고 그 안에는 갈색 니트 민소매를 입었다. 그녀는 하얗고 가녀린 목과 쇄골을 드러냈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까맣고 부드러운 머릿결은 청순하고 매력적이었다.그녀는 콜라겐으로 가득 찬 얼굴에 까만 진주 같은 눈동자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고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진짜 예쁘네!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적어도 그 외모는 나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배인호와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지영언니!”나를 발견한 서란은 웃으며 나한테 손을 흔들었다.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검은색 트렌치 코드를 여미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고 그녀한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서란아, 어쩐 일로 부른 거야?”서란은 핸드폰을 꺼내 들면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언니, 카톡 좀 추
이우범은 내가 아직 배인호한테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듣고는, 마치 선생님이 열등생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나는 단지 내면의 생각을 얘기하고,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이우범을 부른 거지, 교육받으려고 부른 게 아니기 때문에, 괜히 목이 움츠러들었다.“자, 자, 자, 먹자고요!”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올라왔고, 나는 이우범을 재촉하며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이우범은 나와 같이 있을 때면 입맛이 없는 건지, 매번 얼마 먹지를 않고 떠났다. 나 혼자서 식탁에 가득 찬 맛있는 음식을 마주하는 건, 낭비 그 자체이다.다 먹지 못한 음식을 포장 후, 운전해서 집으로 간 나는 윤 집사한테 남은 음식들을 정원에서 기르는 닭과 오리에게 먹이라고 했다.윤 집사는 닭과 오리를 기르는데는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시댁에서 가져온 몇 마리 토종닭과 토종 오리는 그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아주 통통하게 자랐다.나는 갑자기 40살 불혹까지 살 수 있는 건 하나님이 도운 거라는 이우범의 말이 생각났고, 또 전생에 내가 죽은 이유도 떠올라서 바로 윤 집사를 불렀다.“윤 집사님, 내일 한방 오리백숙 좀 부탁드릴게요!”“네, 사모님.”윤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윤 집사는 걱정스러운 일이 있는 건지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본인 딸이 남자친구랑 헤어진 일 때문인가? 아니면 최근 화학 공장 철거 문제 때문에?나는 거기에 관해 묻지 않았고, 얼른 샤워하고 휴식을 취했다.잠들기 전, 나는 민정이한테 연락했다. 민정이 말로는 허겸이 지금 확실히 흔들리는 중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배 씨 그룹의 대우도 좋고 플랫폼도 넓어서, 일단 배 씨 그룹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앞날은 창창하기 때문이다!“우리끼리 전에 논의한 대로 많이 격려해 주고, 퇴사하게끔 만들어.”나는 팩을 한 상태에서 이민정한테 말했다.“알겠어, 근데 배 씨 그룹에서는 어떻게 허겸한테 러브콜을 보내게 된 거야? 인호 씨가 도와준 거야?”민정이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응, 그 인간 이번
나와 배인호가 세화산업 공장 쪽에 도착했을 때, 그곳 입구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싸여 있었고, 모두 40~50대쯤의 아저씨들이었다. 그들은 격분한 상태로 무언가를 토론하고 있었다.배인호의 차가 들어오는 걸 보고, 그들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우리 여기엔 뭐 하러 온 거예요?”나는 좋지 않은 예감에 차를 멈추고 배인호한테 물었다.“협상하러.”배인호는 태연하고 침착했다. 마치 밖에 저 화난 얼굴의 남자들이 곧 겨냥할 사람이 본인이 아닌 거처럼 말이다.배인호가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자, 나는 얼른 내 태도를 밝혔다.“전 안 가요. 가고 싶으면 혼자 가세요!”애들 장난도 아니고, 저 사람들끼리 다투다가, 혹시라도 이 가냘픈 몸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배인호는 매정하게 말했다.“가기 싫어도 가야 해. 넌 지금 내 비서라는 걸 잊지 마! 아니면 우리 엄마한테 너 근무태도 안 좋다고 얘기할까?”나는 어이가 없었다. 감히 시어머니로 날 협박하다니?나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했다. 시어머니의 압박으로 배 씨 그룹 개인 비서로 들어온 거도 맞고, 만약 어머님이 내 근무태도가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나에 대한 인상도 나빠질 테니 말이다.나는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가면 가는 거죠. 뭐 !”차에서 내린 후, 나는 배인호의 뒤를 따라 그 분노한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당신이 바로 그 배 씨 그룹에 배 대표?”선두에 선 남자는 50대 정도였고, 약간은 뚱뚱한 몸매에 배가 나와 있었다. 거친 태도 때문에 이미지가 좋아 보이진 않았고, 이 사람이 바로 서란의 아버지 즉 서중석이었다.“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철거비 관련해서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혹시 여기 대표자로서 저랑 얘기 좀 나누실 수 있을까요?”배인호는 온화하게 존댓말로 말했다.세상 오만한 왕자님도 미래 장인어른 앞에서는 공손하게 되는 게 사랑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서중석도 배인호가 이렇게까지 예의 바르게 나올 줄 몰랐는지, 얼떨떨한 눈치였고, 뒤에 사람들을 한
“엄마, 너무 급해 마세요. 혹시라도 제가 비즈니스 천재가 될 수도 있잖아요.”나는 엄마를 다독이는 건지 나를 다독이는 건지 모르겠다.어찌 됐든 엄마는 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말했다.“어떤 결정을 하든 나랑 네 아빠는 너를 응원할 거야. 딸이라고는 너 하나뿐인데 너만 행복하면 돼.”저번 생에 난 아무래도 정신이 어떻게 된 듯했다. 이렇게 좋은 부모님과 재력을 두고 배인호만 따라다닌 끝에 결국 그렇게 참담한 결말을 맞이한 거다.머리를 마음껏 움직일 수만 있다면 지금 엄마를 꼭 안아줬을 텐데 말이다.엄마는 나랑 한참을 놀아주다가 집에 돌아가 삼계탕을 끓이겠다고 했다. 먹고 싶었던 차라 나는 잽싸게 대답했다. 엄마가 간 후 정아와 세희, 민정이가 병실로 찾아왔다.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내 모습을 보자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지영아, 어때? 머리 아직도 아파?”“어떤 쳐 죽을 놈이 감히 너를 때린 거야? 내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맛보게 해줄 거야.”“언제 퇴원 가능하대?”나는 셋이 쉬지도 않고 재잘 재잘대는 소리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다치긴 했지만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관심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한결 아름다워 보였다.“괜찮아. 그냥 뇌진탕이래. 나 아직 배 씨 그룹에서 출근하잖아. 인호 씨랑 같이 세화 근처 아파트 단지 철거 관련 프로젝트 진행하고 있는데 그쪽 대표랑 인호 씨가 네고가 잘 안 됐었나 봐. 그래서 그쪽 사람들이 나한테 화풀이한 거지.”나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한번 쭉 설명했다.정아가 영양제들을 사물함에 올려놓으며 투덜대기 시작했다.“배인호는 네 인생에 도움이 안 돼. 전에 네가 그렇게 쫓아다니다가 지금 그만두니까 그 사람 회사에서 출근하고, 출근해서 배인호랑 나갔다가 맞아서 뇌진탕까지 걸리고. 그냥 빨리 이혼하는 게 어때?”세희도 두 손 들고 찬성했다.“그래 맞아! 두 사람의 궁합이 안 맞으면 한쪽이 한쪽을 해한다나? 팔자가 더 센 사람이 좀 더 오래 버티는 거지.”“그럼,
제54화 다 알고 있어배인호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허허, 그래? 건강이 이렇게 안 좋은지 몰랐네?”“전에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기나 했어요? 참나.”나는 어디서 온 자신감인지 몰라도 배인호를 경멸의 눈길로 배인호를 바라봤다.그래도 이 화제는 잘 넘긴 건 같았다.나는 내 머리를 몽둥이로 후려친 그 나쁜 자식이 생각나서 물었다.“나 습격당한 거 경찰에 신고했어요?”“했어. 그 사람 지금 경찰서에 있어.”배인호가 도시락을 열자 향긋한 전복죽이 보였다.“윤 집사가 만든 거야.”익숙한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윤 집사였다. 나는 도시락을 건네받고는 먹기 시작했다.맛있게 먹고 있는데 배인호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윤 집사 내가 해고했어. 내일 집에서 나갈 거야.”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숟가락을 떨어트릴 뻔했지만, 상처를 생각해 머리를 돌리지는 않았다.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왜요?”“너 습격한 사람 서원석이라는 사람인데 윤 집사의 작은 도련님이라네. 이제 더 이상 집에 남겨두는 건 아닌 거 같아.”이 말을 들은 내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윤 집사가 서란의 어머니라는 걸 배인호가 안 건가?’배인호가 서원석을 조사했다면 서란 일가의 상황도 조사했을 거고 그러면 윤선이 누군지도 쉽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나는 집에 윤 집사를 한동안 더 남겨둘 생각이었다. 배인호가 먼저 손을 쓸 줄은 몰랐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네, 알겠어요.”나는 정서를 가다듬고 계속하여 죽을 먹었다.죽을 먹으면서 곁눈질로 배인호를 훔쳐봤다. 배인호는 윤선이 누군지 알고 있다. 내가 서란을 알고 있을 거라고 배인호는 의심해 본 적이 없는 걸까?배인호는 옆에 앉아 받은 문자들을 쉬지 않고 답장했다. 이 시간이면 엄마의 삼계탕도 곧 완성될 것 같아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도시락 가져다 줘서 고마워요. 바쁜데 얼른 가봐요.”“그래.”배인호가 시크하게 일어나 병실에서 나갔다.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새를 못 참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감히 인호 씨를 갖고 놀아요?”나는 설명했다.“윤선이 도우미로 왔을 때 인호 씨는 서란이 누군지도 몰랐을 거예요. 내가 무당도 아니고 앞일을 어떻게 알겠어요.”배인호의 안색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침묵했고 병실 안의 산소도 그의 침묵에 따라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그의 아우라는 항상 강렬했다. 기분이 별로면 압박감은 더 배로 늘었다.나도 따라서 침묵을 지켰다. 거의 모든 진실을 밝힌 지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드디어 배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앞으로 다시는 서란과 엮이지 마. 조사하지도 말고 접근하지도 말고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해.”“어떻게 그래요?”내 말투도 차갑게 식어 갔다. 담담하고도 냉정한 눈빛으로 배인호를 쳐다봤다.“지금까지 날 뭐로 생각한 거예요? 바보 아니면 또라이? 나한테 상처 준 것까지도 없었던 일로 하라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그래서 뭐 어쩔 건데?”배인호가 침대맡에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마치 하늘의 신 같았고 나는 10년째 그 신을 믿는 경건한 신도 같았다.나는 비아냥거리며 물었다.“인호 씨, 서란을 위해서 세화 공정도 양보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직접 담판에 나선 거고 나도 다치게 된 건가요?”“응”배인호는 항상 너무 솔직했다. 상처 주는 것도 늘 거리낌이 없었다.“인호 씨도 내가 서란과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았고 서란도 내가 당신 와이프라는 거 알았으니 이제 이혼해요, 우리. 좋게 만나 좋게 헤어지는 거죠. 이 자리 서란한테 양보하는 거 전혀 불만 없어요.”전생의 배인호는 일 년쯤 서란을 쫓아다닌 뒤 나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줬고 이혼하자고 했다. 지금 많은 일들에 변화가 생겼고 이혼이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세희의 말이 맞았다. 이 남자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나는 재난을 멀리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달리고 싶다.배인호가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가 엄동설한 속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
배인호든 이우범이든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다. 이번 생은 내가 환생하면서 가져온 나비 효과로 의외의 접점이 생긴 거고 지금은 다 제자리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그러니 나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초겨울이라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얀색 코트를 입고 창밖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었다.손에든 전화기가 울려 댔다. 정아가 채팅방에서 우리 전부를 호출했다.「예쁜이들, 눈 온다! 눈도 오는데 만나야지?」세희가 울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나도 만나고 싶은데 며칠 뒤에 회사에서 축하 행사를 나한테 맡겼지, 뭐야!」정아:「네 아빠는 너를 딸로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근로자로 생각하는 건지, 가서 항의해!」민정이도 대화에 참여했다.「그럼, 일단 정아랑 지영이만 나와. 먼저 바 가서 한 바퀴 돌고 물 안 좋으면 방 탈출 가자. 끝나면 샤브샤브 배불리 먹고 집에 가서 꿀잠 자면 완벽하지!」민정이의 계획은 완벽했다. 나는 마음이 동했다. 혼자 집을 지키는 것도 심심해서 답장을 보냈다.「갈게. 주소 보내 줘. 바로 출발하게.」정아도 답장했다.「나도 나도!」이때 눈꽃 하나가 유리창에 떨어졌고 금방 녹아 버렸다. 진짜 눈이 오고 있었다. 나는 베이지색 목도리를 걸치고는 바로 출발했다.바에 들어가니 온도가 확확 올라왔다. 민정이와 나는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미 훈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아를 발견했다.“왜 그렇게 껴입었어? 빨리 외투부터 벗어. 조금 있다 댄스 활동이 있는데 무대에서 댄스를 추는 미녀한테는 와인 한 병 무료, 인기가 제일 많은 사람한테는 6개월 80% 할인권 준대!”무슨 이런 활동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투성이긴 했지만 그래도 외투를 벗어서 옆에 놓아뒀다.멀지 않은 곳에 네온등으로 반짝이는 무대가 있었다. 무대 위에는 몸매 좋은 여자들이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고 있었다. 무대 아래서는 흥분에 찬 남녀들이 호응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나는 주위를 한번 훑어봤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발견했다. 기선우였
오래 춤을 추지 않아서 그런지 음악에 따라 움직이는 내 몸이 조금은 굳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알코올의 힘으로 용기가 생겼고 몸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절주에 맞출 수 있었다.누군가가 나를 향해 장미를 던져 왔다. 나는 그 장미를 주워 들었고 사람들의 호응 하에 스웨터의 끝부분을 말아 속옷 아래로 밀어 넣어 하얀 허리를 드러내고는 장미를 청바지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빨간 장미가 하얀 피부와 선명하게 비교되었고 그것은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 이에 남자들의 흥분된 함성이 들려왔다.나는 모두가 나에게 주목하는 느낌을 되찾았고 그 느낌은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알코올이 점점 신경을 마비시켰고 나는 옷을 더 위로 올리려 했다. 놀란 정아와 애들이 다급하게 나를 향해 뛰어왔다.순간 모든 조명이 꺼졌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추던 춤을 멈췄고 까만 그림자가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그림자는 이를 갈며 욕을 퍼붓고 있었다.“이런 젠장. 허지영 너 죽고 싶어 안달 났구나.”배인호였다. 바의 전기를 끊은 것도 그가 시킨 짓일 것이다.‘서란이 옆에 없었나? 배인호가 이렇게 와서 나를 멈춰 세우는데 서란은 막을 생각 안 한 건가?’“인호 씨!”서란의 목소리가 인파속에서 들려왔다. 누군가 전화기의 플래시를 켰다. 하지만 그 불빛이 무대를 향하진 않았고 밖으로 향하고 있어 내 쪽은 아직 어둠속이었다.배인호가 한 손으로 내 팔을 잡고 간신히 화를 참아 내고 있었다. 서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가 본능적으로 말했다.“나.”나는 까치발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 배인호의 목을 휘감았고 정확히 그의 입을 맞추었다. 그가 하려던 말은 나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묻혔다.그는 나를 밀어내려 했지만, 알코올의 작용하에 나는 더 대담하게 그의 손을 잡아 내 가슴에 올려놓았다.한 사람이라도 플래시를 이쪽으로 비춘다면 이 뜨거운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스릴 넘치는 환경 속에서도 이상하게 배인호는 나를 밀쳐 내지 않았다. 오히려 벌을 주듯 나를 거세게 잡았고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