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든 천도준은 익숙한 환경에 놀라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정처없이 걷다 보니 전에 오남미와 같이 월세를 살았던 아파트 단지 입구에 와 있었다.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그러고 보니 회식 장소가 여기와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과거에 저녁을 먹고 오남미와 함께 강변을 걸었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술 취한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다신 돌아갈 수 없겠네.”천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서던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천도준 씨!”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정말 여기 살아요?”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천도준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오남미 남동생의 여자친구, 임설아였다.지난번에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임설아는 굉장히 반가운 얼굴을 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얀색 짧은 원피스에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밤바람을 맞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 모습이 어쩜 이리도 꼴사나울까!“무슨 일이지?”천도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임설아는 오들오들 떨며 그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가슴골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거기까지!”천도준이 싸늘하게 말했다.“왜 그래요?”임설아가 화들짝 놀라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개수작 그만둬.”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천도준이 차갑게 말했다.임설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하고 그에게 되물었다.“제가 뭘 어쨌다고요?”천도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담담히 말했다.“다 보이니까 가릴 데 좀 가리라고.”임설아의 뺨이 탐스럽게 붉어지더니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나빴어요.”허리를 배배 꼬고 가는 눈을 뜬 그 모습은 무언의 초대였다.천도준은 짜증이 치밀어 뒤돌아섰다.앞으로 성큼 다가선 임설아가 그의 손목을 잡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준 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요.”“난 관심없어.”
이날, 임설아는 짜증이 나서 밤잠을 설쳤다.그렇게 노골적으로 다가갔는데도 천도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남자의 심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파악한다고 자부하던 그녀의 자존심이 철저히 무너졌다.알게 모르게 그에게 호감을 표시했고 자존심 굽혀서 사과까지 했다.그래서 한 번만 더 찾아가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남자가 당연히 넘어올 줄 알았다.물론 그와 연인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이런 사람은 알아두면 나중에 콩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그런데 천도준의 싸늘한 반응은 그녀의 상상 밖이었다.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다음 날 아침, 오남준이 모닝콜을 걸어왔지만 전처럼 살갑게 대해줄 수 없었다.그녀는 천도준에게서 당한 짜증과 분노를 전부 오남준에게 쏟아냈다.“오남준, 아침부터 짜증나게 왜 전화질이야?”“설아야, 전부터 내가 모닝콜을 해주기로 했었잖아.”오남준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모닝콜은 무슨! 밤새 못 자서 짜증 나 죽겠는데!”임설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었다.“뭐? 밤새 못 잤어? 내가 지금 바로 갈게. 그렇게 힘들면 오늘은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오남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출근 얘기가 나오자 임설아의 분노가 다시 폭발했다. 오남준의 이런 무의미한 관심은 그녀에게 부담일 뿐이었다.“출근 안 하면? 오남준 네가 나 먹여 살릴 거야? 그럴 시간 있으면 결혼자금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이나 좀 해봐. 대체 약혼은 언제하고 결혼은 언제 하니? 하기 싫으면 당장 그만둬!”오남준이 다급히 말했다.“설아야, 걱정하지 마. 집에서 이미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 약혼식 날에 네가 요구한 결혼자금 마련해 볼게.”“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매형이 그렇게 부자인데 그냥 달라고 하면 되잖아!”탁!그 말을 끝으로 임설아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천도준을 꼬시는 건 이미 실패로 돌아갔고 오남준에게서 돈까지 받아내지 못하면 그와 공들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임설아가 사는 집 아래에서 통화 중이던 오
놀란 오남미가 비명을 질렀다. 발버둥치던 그녀는 오남준에 관한 일이라니까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엄마에게 물었다.“남준이가 또 왜?”“결혼자금! 남준이 약혼식 날짜도 다가오는데 결혼자금 준비 못하면 설아가 남준이랑 헤어진다잖아! 남준이 지금 죽겠다고 난리라고!”장수지는 조급한 마음에 딸의 귀뺨까지 때리며 소리쳤다.“내가 대체 널 왜 낳았을까? 누나가 돼서 동생 결혼하는데도 손 놓고 도움도 안 주고! 너 엄마랑 남준이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오남미는 얼얼한 볼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엄마를 바라봤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분을 쏟아냈다.“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잖아. 내가 여기서 뭘 더 하기를 바라는데?”짝!장수지가 또 손을 들어 그녀의 귀뺨을 쳤다.“네가 뭘 한 게 있다고 큰소리야! 천도준 그 인간 돈이 많다며? 그 인간한테 가서 돈 좀 빌려오면 될 것을 이혼은 왜 했어? 너 남준이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혼한 거 아니야?”오남미는 충격 받은 얼굴로 엄마를 바라봤다.그녀가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그 사람 정말 돈이 없어. 결혼한 뒤로 카드도 다 나한테 맡겼는데 돈이 있으면 내가 먼저 알았겠지. 마지막 남은 돈까지 끌어다가 줬잖아. 정말 돈이 있었으면 내가 모른 척했겠어?”“남준이가 그 인간 돈이 많다고 했어. 그럼 남준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이성을 잃은 장수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고함을 질렀다.“아이고 내 팔자야! 곱게 기른 딸은 이혼녀가 돼버리고 아들 혼삿길도 막혀 버렸으니 난 이제 뭘 보고 살아?”“그래! 나도 죽을 거야! 남준이 죽으면 나도 살 이유가 없어!”그 말을 끝으로 장수지는 방을 뛰쳐나갔다.겁에 질린 오남미는 다급히 달려가서 장수지의 팔목을 잡았다.“엄마, 이러지 마. 제발!”소리를 들은 오덕화가 밖으로 나와 아내를 부둥켜안았다.“남준이도 이제 성인이야. 당신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귀한 아들이 결
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아직도 응급실에서 수술을 진행 중이었다.지금 가장 시급한 건 어머니의 안위였다.어머니가 무사히 깨어나시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만약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천도준 자신조차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는 음침한 얼굴로 응급실 밖을 지켰다.이가 갈리고 손발이 떨렸다.그는 곧장 오남미에게 문자를 보냈다.[지난번에도 우리 엄마한테 한 짓, 벌써 잊었어? 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못살게 굴 거야? 제발 우리 엄마 더 이상 건드리지 마!]5분 뒤, 오남미에게서 답장이 왔다.문자를 확인한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천도준, 이 사기꾼! 나쁜 자식아! 내가 가져간 4천만 원이 어머니 마지막 치료비라며? 그런데 어머니 멀쩡히 살아 계시잖아? 벌써 회복기에 들어갔다던데? 돈이 없었으면 치료를 어떻게 했니? 남준이 좀 도와달라니까 모른 척한 건 당신이었어. 그래서 어머니 찾아가서 좀 도와달라고 부탁한 게 그렇게 잘못이야?]쾅!천도준은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벽에 꽂았다.“오남미, 그리고 당신 가족들… 이건 당신들이 자초한 거야!”응급실 문이 열렸다.천도준은 다급히 의사부터 찾았다.“선생님, 저희 엄마는 어떻게 됐나요?”장 박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피곤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걱정 마세요. 다행히 응급조치가 빨리 이루어져서 지금은 고비를 넘겼어요.”“정말 감사합니다!”천도준은 그제야 가슴을 꽉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놀란 장 박사가 얼른 다가와서 천도준을 부축했다.이수용이 직접 부탁한 귀한 사람인데 절대 문제가 생기게 할 수 없었다.장 박사가 정색한 얼굴로 당부하듯 말했다.“하지만 주치의로서 이 말씀은 드려야겠습니다. 전처와 이미 이혼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님이 충격 받으실까 봐 사실을 얘기하지 않은 건 이해해요. 이번에는 전처분의 행동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해요.”“다행히 응급조치가 빨리 이루어져서 고비를 넘겼지만 그분이 또 오
어쩌면 이혼마저도 그의 설계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자 배신감에 서럽고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이난희 앞에서 울고 불고 난리를 피웠다.이혼했으면 위자료라도 챙겨줘야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조금 치사한 감이 있지만 그 돈으로 가족들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못할 것도 없었다.일시적은 충동으로 천도준을 놓치고 동생의 결혼까지 도울 수 없게 된다면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 같았다.그런데 멀쩡하던 이난희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진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잠시 후, 의료진이 달려와서 이난희를 응급실로 끌고 갔다.당황한 오남미는 돈이고 나발이고 재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잘못한 건 없어. 천도준, 이건 당신이 날 속여서 생긴 일이야!”오남미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천도준, 이 나쁜 자식아!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나 부모님 반대에도 끝까지 당신 포기하지 않고 결혼까지 했어. 그리고 당신 따라서 내가 고생한 게 얼마인데 가족들 좀 도와줄 수도 있잖아? 내가 내 동생 결혼자금에 좀 보태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고작 그것 때문에 나를 세상 나쁜 년으로 만들고 이혼하니까 좋아?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난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는데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울분을 토해낼수록 그녀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그녀는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생각했다.그렇게 그녀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자존심이 강한 그녀였지만 주변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이때, 장수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돈은? 받아냈어?”“아니… 못 받았어.”오남미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도준과의 결혼은 그녀의 선택이었고 이혼 역시 그녀가 동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 천도준의 간계에 속아 이혼했다는 걸 알면 엄마가 또 어떻게 나올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안 그래도 동생 결혼 때문에 힘든데 자신
오전 내내 고객의 민원 전화가 끊이지 않았지만 팀장이 두둔해 줘서 다행히 그럭저럭 넘어갔다.이때, 핸드폰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임설아는 심드렁하게 문자를 확인하다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비명을 질렀다.계좌에 10억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였다.한꺼번에 불어난 계좌 잔액에 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곧바로 은행으로 달려갔다.확인 결과, 실제로 벌어진 일임을 재확인한 그녀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그리고 이때, 핸드폰에 문자 알림음이 다시 떴다.확인해 보니 천도준이 보낸 문자였다.[10억 입금했어. 오남준이랑 결혼하는 대신, 내 부탁 좀 들어줘.]임설아의 볼이 빨갛게 상기되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이미 불어난 계좌 잔액에 이성은 안드로메다로 날아 간지 오래였다.천도준이 준 금액은 오남준이 약속한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그녀는 재빨리 문자에 답장했다.[평생 도준 씨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게요.]다시 회사로 돌아온 그녀는 고객 의뢰를 신속히 처리하고는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천도준이 갑자기 거액을 입금하고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이건 일종의 암시가 아닐까?그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임설아는 다시 천도준에게 문자를 보냈다.[도준 씨, 오늘 우리 집으로 올래요? 내일 저 약혼식 해요.]곧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그러지!]답장을 확인한 임설아의 볼이 토마토처럼 탐스럽게 물들었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오남준과 10억, 비교할 가치도 없는데 하물며 상대는 천도준이었다.그녀는 오늘 밤에는 무조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날 저녁 여덟 시.천도준이 임설아가 보낸 주소로 찾아갔을 때, 식탁에는 잘 구워진 스테이크와 촛불, 그리고 와인잔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기 중에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천도준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임설아의 초대에 응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내일 약혼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지금 펼쳐진 상황은 그의 마음을 불
정성 들여 준비한 촛불 만찬과 예쁘게 꾸민 여자.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고 분위기도 좋았다.반쯤 취한 임설아는 그대로 천도준의 품을 파고들었다. 술기운 때문에 그녀의 입가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천도준의 몸에도 반응이 찾아왔다.촛불에 비친 임설아의 몸매는 유난히 탐스럽고 매혹적이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그녀가 지척으로 다가왔을 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우린 사이는 단순한 거래일 뿐이야.”임설아의 어깨가 움찔 떨리더니 속눈썹이 파르르 진동했다. 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거래 맞아요.”천도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그러니까 난 돈을 제공하고 넌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아주 간단하지?”말을 마친 그는 손을 뻗어 임설아를 밀어내고 자신의 계획을 말해준 뒤, 싸늘하게 자리를 떴다.너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임설아는 아무런 응대도 할 수 없었다.저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간 거지?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간다고?사실 천도준이 임설아를 끌어들인 건 단지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임설아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천도준은 절대 임설아 같은 여자를 눈에 담을 이유가 없었다.쾅!그녀는 홧김에 식탁을 엎어버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오늘 밤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그 상실감에 그녀는 잠에 들 수 없었다.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임설아가 짜증스럽게 현관에 대고 소리쳤다.“누구야?”“설아 씨, 나 남준이 누나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문밖에서 오남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설아는 짜증이 극도로 치달았다.하지만 이내 옷을 갈아입고 지저분한 식탁을 정리한 뒤에 전등을 켜고 문을 열었다.오남미의 부탁을 들은 임설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천도준이 시킨 일을 어디서부터 진행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는데 오남준 가족이 먼저 찾아와서 기회
장수지는 정색해서 오남준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며느리가 잘 들어왔으니 나중에 친구들한테 나가서 자랑해도 되겠어.”말을 마친 그녀는 오남미를 흘겨보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그러니까 너도 그때 엄마 말 듣고 천도준이랑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았잖아. 어련히 엄마가 좋은 혼처 자리를 소개해 주지 않을까. 결국 이혼녀 딱지나 달고, 이게 다 뭐야?”오남미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내일이 곧 오남준의 약혼식이었기에 이 시점에서 알고 있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당신도 참! 곧 애들 약혼식인데 재수 없게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은 좋은 얘기만 하자고!”가장인 오덕화가 눈을 부릅뜨며 아내를 나무랐다.“친척이랑 지인들에게 청첩장은 다 돌렸지? 이따가 전화해 봐야겠어.”“참, 호텔에 확인해 본다는 걸 깜빡했네요. 무조건 성대하게 치러줘야죠. 설아가 이렇게나 양보를 해줬는데.”장수지도 잔뜩 흥분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갔다.그날 밤, 그들 가족은 더 이상 다투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밤을 보냈다.그 시각, 천도준은 병원에서 어머니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잠든 어머니의 얼굴은 어느 정도 생기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창백했다.그는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다.천도준은 착잡한 얼굴로 창가를 내다보며 중얼거렸다.“지금쯤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축하하고 있겠지? 우리 엄마한테 한 짓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그 사람들이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면 절대 오남미를 종용해서 어머니의 치료비까지 싹 긁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러고도 뻔뻔하게 찾아와서 병든 어머니를 자극한 여자였다.“오늘을 잘 즐겨둬. 내일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테니까!”냉소를 짓는 천도준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이건 당신들이 받아야 할 대가야.”다음 날.아침 일찍 천도준은 장 박사를 찾았다. 어머니의 병세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약혼식이 있을 예정인 리빙턴 호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