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일이 정말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죠. 솔직히 말해서 누군가가 그를 모함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이번에도 누군가 일부러 그를 노리고 고발해 구속 수사를 받게 된 겁니다. 서 의원님, 의원님은 청렴결백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니 분명 알고 계실 것입니다...”“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으시군요. 부승민을 너무 약하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요.”서정훈은 단번에 온하랑의 아첨을 끊고 말을 이어갔다.“게임에는 항상 승패가 존재하는 법이죠. 그리고 기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시적인 난국이 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죠. 지금 의기양양하더라도 그 사람이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됐어요, 다른 일 없으면 나가세요.”서정훈은 다시 눈을 감고 손을 들어 양미간을 비비며 매우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온하랑은 더 이상 그를 방해할 수 없었기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답변 감사드립니다, 의원님. 푹 쉬세요,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룸에서 나온 온하랑은 연도진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걸은 뒤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찾아 연도진의 앞에서 삭제했다.“삭제했어요.”연도진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설마 백업한 건 아니죠?”그러자 온하랑은 직접 휴대폰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못 믿겠으면 직접 보세요.”그러나 연도진은 다시 폰을 그녀의 손에 밀어 넣었다.“좋아요, 믿어볼게요. 그러니까 시연이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알아요.”전혀 의심하지 않는 연도진의 모습에 온하랑은 조금 양심이 찔렸다.만약 연도진이 그녀의 휴대폰을 들고 김시연과 나눈 톡 기록을 뒤적여보면 비슷한 사진을 보내준 적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호텔로 돌아가는 길, 온하랑은 계속하여 서정훈이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기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일시적인 난국이 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의기양양하더라도 그 사람이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는 건 아니다.그 말은 즉 부승민이 겉으로는 곤경에 처했지
그래도 온하랑은 성실하게 일을 마무리해야 하기에 어떻게든 배우들의 협조를 끌어내야 한다.작은 마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배우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그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거나 걸음을 멈추어 그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몇 장을 찍고 나서 온하랑이 한창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술렁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바닥에 한 부인이 쓰러져 있었다.옆에 있던 아저씨가 바로 그녀를 부축해서 그녀의 인중을 꼬집으며 응급처치를 진행했고 그들 주위에는 몇 명이 둘러싸고 있었다.여인은 창백한 얼굴로 일어나더니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괜찮으세요? 병원에 가보실래요?”“아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단지 저혈당이 있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을 뿐이에요.”“여사님, 여기 초콜릿 두 개가 있는데 괜찮으시면 먼저 드세요.”온하랑이 걸어가더니 주머니에서 초콜릿 두 조각을 꺼내어 여인에게 쥐여주었다.초콜릿 두 조각은 원래 체력 보충용으로 계속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이었다.여인이 머뭇거리자 누군가가 나서서 덩달아 말을 얹었다.“먼저 가져가세요. 슈퍼마켓은 저쪽에 있어서 좀 멀어요.”그러자 여인은 온하랑을 향해 감격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천만에요, 저쪽에 자리가 있으니 가서 좀 쉬세요.”온하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우의 외침이 들려왔다.“뭐 하는 겁니까? 빨리 와서 촬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온하랑은 여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그럼 전 이만 일 보러 갈게요. 어서 가서 쉬세요.”“네, 다녀오세요.”길 가던 다른 사람이 여인을 부축하여 길가의 벤치로 데려다주었고 여인은 초콜릿을 먹으며 온하랑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회복이 거의 끝나가자 여인은 또 근처 마트에 가서 과일을 사 온하랑의 카메라 가방 옆에 놔두었다.온하랑은 바쁜 일을 다 끝내고 나서야 이를 보게 되
[온하랑, 너 정말 나 열 받게 하려고 작정했어?][캔디야, 제발 내 말 좀 들어봐...][네 말 좀 들어달라고?]김서연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네가 뭘 말할 수 있는지나 보자. 만약 네 이유가 나를 설득할 수 없다면 넌 앞으로 나에게 말 걸지 마.][처음에는 나도 정말 믿지 않았어.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더라고.]이어 온하랑은 당시 자신의 사고 과정과 육광태의 존재를 전부 김시연에게 이야기해 주었다.[아... 정말 거짓말 아니지?]아마 부승민이 당시 김시연에게 남긴 인상이 너무 안 좋았던 탓인지 김시연은 진심으로 온하랑의 말을 조금도 믿고 싶지 않았다.[확실해. 내가 어떻게 널 속일 수 있겠어?][몰라 몰라. 어찌 됐든 이번 일은 부승민이 잘못한 게 맞아. 정말 널 위해서였다면 지금 위기가 해결되고 분명히 널 찾아가겠지. 그러니까 넌 절대 쉽게 용서해서는 안 돼. 알겠지?][물론이지.][말로만 그러지 말고.][절대 그럴 리 없다니까. 아 맞다...]온하랑은 그녀가 연도진과 거래한 일을 김시연에게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절대 김시연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한 약속?그럴 리가?같은 시각, 김시연은 화가 치밀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그러니까 며칠 전에 나 몰래 귀국했다는 말이지?][아니... 그... 나, 난 그때 부승민 약 올려주러 잠깐 간 거라 안 말했지.]하여 온하랑은 또 김시연에게 구치소에 가서 부승민을 면회하고 일부러 그를 자극한 일을 간단하게 말해주었다.[약 올려주러 갔다고? 부승민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네 진정한 목적이었겠지.]김시연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하,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친구가 있으니 속이 다 썩어간다.그러자 온하랑은 얼른 해명을 늘어놓았다.[아니, 난 정말 부승민을 화나게 하고 싶었을 뿐이고 서 의원님의 말대로라면 내가 그를 찾지 않아도 부승민은 괜찮을 거라는 뜻이었어.][정말 그를 화나게 하려고 한 거야?][응. 하늘에 맹세할게.][그럼 내가 아이디
“자기소개를 시켜볼 테니까 네가 한 번 골라봐.”“잠깐만. 이분들 이곳에서 일하는 웨이터 아니야? 내가 돈 주고 고용할 수 있어?”벨라가 말하기도 전에 웨이터 중 한 명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죠, 아름다운 아시안 아가씨. 돈만 있으면 뭐든지 시킬 수 있습니다.”똑똑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온하랑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혹시 이름이 뭐죠? 몇 살이에요?”“제 이름은 리차드입니다. 스물여섯 살이고 전갈자리죠. 아가씨, 우리를 고용하려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남자친구인 척하고 전남편 좀 상대하려고요.”“네?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전남편이 있다니. 당신이 말하지 않았다면 저는 당신이 겨우 열여덟 살일 줄 알았을 거예요.”온하랑은 그가 마음에 드는지 싱긋 미소를 지었다.“당신 재미있는 것 같네요. 당신으로 할게요.”“자, 아가씨. 이제 전 무엇을 하면 될까요?”다른 사람들을 전부 내보내고 온하랑이 자신의 요구를 말해주었다.온하랑에게 선택받은 남자친구라면 먼저 그녀의 취향을 살뜰히 살펴야 한다.둘째, 정직하고 품위 있는 일을 해야 온하랑이 그에게 반한 것이 엉뚱해 보이지 않는다.전자는 온하랑이 리차드에게 자신의 취향을 알리고 기억하게 하면 되니까 문제없지만 후자는 상대적으로 어렵다.일단 부승민이 리처드가 술집에서 웨이터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는 곧 진실을 알아낼 것이다.그때, 리차드가 주동적으로 아이디어를 냈다.“아가씨께서 사진작가라고 들었는데 예술을 하는 남자친구를 찾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요? 마침 유화를 조금 배웠는데 그냥 바 벽화작가라고 할까요?”온하랑은 친구와 술집에 와서 휴식을 취하다가 마침 바에서 벽화를 그리고 있던 리처드를 만나게 된 것이다.그리고 회화와 사진에는 공통점이 있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친해지고 사귀게 된 것이다.온하랑은 결국 이 스토리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리차드와 정보를 간단히 대조하여 들키지 않도록 만반의 준
온하랑이 부승민을 만난 건 7월 말의 어느 한 저녁이었다.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졌고 하루 촬영을 마친 온하랑은 카메라 가방을 메고 건물에서 나왔다.건물 앞 계단에는 훤칠한 몸매를 자랑하는 한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손에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하지만 온하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보며 가던 길을 갔고 도로에 있는 차량 번호를 살피며 자신이 부른 콜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바로 이때 부승민이 꽃을 들고 앞으로 나와 온하랑의 앞을 막았다.“하랑아.”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온하랑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앞에 있는 부승민을 바라봤다.그렇게 2초간 멍하니 있다가 곧장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왜 찾아왔어?”온하랑의 태도를 본 부승민은 이번에 용서를 받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아무런 상의도 없이 늘 제멋대로 결정했으니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부승민은 멋쩍게 웃으며 손에 든 꽃다발을 건넸다.“데리러 왔어.”어이가 없었던 온하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부승민, 너 미쳤어? 설마 또 추서윤이랑 내기했니? 너희들 게임에 놀아날 생각 없으니까 작작 좀 해.”“그런 거 아니야.”부승민은 즉각 부인했다.“하랑아, 정말 추서윤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난...”“날 바보로 생각하는 거야?”온하랑은 차분한 표정으로 부승민을 바라보며 단번에 그의 말을 잘랐다.온하랑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부승민은 하려던 말이 목구멍에 걸린 듯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당황함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제발 믿어줘. 곤경에 빠질 일이 있었는데 괜히 너까지 끌어들일까 봐 일부러 추서윤이랑 연기한 거야.”“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온하랑은 조롱하듯 되물었고 부승민은 조바심이 났다.“증명해 줄 사람도 있어.”“뇌물 주면서 다 짜고 쳤겠지.”온하랑은 체념한 듯 웃었다.“부승민, 난 이제 너랑 할 얘기 없어.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이만 가볼게.”콜택시가 도로 한 켠에 주차된 걸
부승민은 순간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심호흡하며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하랑아...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거짓말? 내가 그런 걸 왜 하겠어.”온하랑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선 그의 차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미안한데 남자 친구가 데리러 와서 이만 가볼게. 안녕.”부승민은 온하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애스턴마틴 한 대가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운전석에 탄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온하랑이 조수석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부승민은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어느새 칠흑처럼 변했다.그는 음흉하고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그 차를 노려봤다. 마치 오랫동안 잠복해 있던 독사가 사냥감을 발견한 듯 언제든 잡아먹을 기세였다.처음 구치소에서 온하랑이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보니 진짜였다.이곳에 온 지 한 달 남짓 만에 온하랑은 정말로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안전을 위해 그동안 곁에 사람을 붙인 덕분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남자 친구를 사귀었냐는 말이다.핸들을 잡고 있던 그는 뼈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손에 힘을 불끈 쥐었다.하지만 고작 남자 친구 따위에 흔들릴 부승민이 아니었다.골키퍼가 있어도 골은 들어가는 법이니 결코 이대로 포기하지 않았다.점심쯤.시간을 확인한 온하랑은 점심시간이 된 것을 보고 업무를 마무리했다.“일단 여기까지 찍고 오후에 이어서 하죠.”“네.”옆에 있던 스태프들은 하나둘씩 온하랑의 말에 답했고 일반인 모델도 그제야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사전 테스트 촬영을 마친 온하랑은 이번에 주얼리 브랜드의 신제품인 커플링 광고 촬영을 맡게 되었다.이때 한 스태프가 스튜디오를 들어서며 말했다.“페이, 밖에서 누가 찾아요.”“네, 지금 바로 나갈게요.”카메라를 정리하고 부랴부랴 스튜디오를 나선 온하랑은 도시락을 들고 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그는 아무 일도
온화랑은 매우 화가 났다.부부란 자고로 일심동체 아니겠는가? 온하랑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하고 곤란과 역경을 함께 맞서 나가는 게 진정한 부부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든 솔직하게 얘기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걸 원했으나 부승민은 뭐든지 숨기고선 자신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듯 늘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니 온하랑은 말 잘 듣는 기계처럼 순중할 수밖에 없었고 제멋대로인 부승민에게 더 이상 그 어떤 희망도 갖지 않았다.그녀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부승민의 가슴에 꽂혔다.온화랑은 이참에 사건의 심각성을 알리며 독단적인 그의 성향을 고치고 싶었다. 물론 그동안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살았는지 느끼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마침내 해냈다.부승민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는 멍하니 그곳에 서서 온하랑을 봤는데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하려던 말을 삼키는듯 쭈뼛거렸다.심장은 여러 차례 찔려 이미 미어지게 아팠다.“하랑아... 정말 날 버릴 거야?”부승민은 잔뜩 잠긴 목으로 처절하게 애원하듯 말했고 온하랑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내가 널 버린 게 아니라 네가 날 밀어낸 거야.”“잘못했어. 너한테 숨기는 게 아니었는데.. 혼자서 결정하지 말았어야했어... 아랑아,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안 될까?”“부승민. 난 이미 너한테 수없이 많은 기회를 줬어. 그걸 매번 모른 체 하던 사람이 너고. 도대체 나보고 뭘 더 어쩌라는 거야?”부승민은 몸이 잔뜩 얼어붙은 채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간절하게 애원했다.“진짜 마지막이야. 기회를 한 번만 더 줘. 응? 앞으로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만에 하나 또 그런 상황이 된다면 절대 매달리지 않을게.”“싫어. 그리고 더 이상 네 말을 믿지 않을 거야. 내가 평생 너만 바라볼 거라고 착각하지 마. 이제 남자 친구도 생겼으니까 새로운 삶을 살 거야. 나라는 사람을 잊고 잘살아 봐.”말을 마친 온하랑은 곧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아니, 이렇게 잔인하게 날 내
부승민은 리차드의 시선을 마주하고선 조롱하듯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답했다.“나랑 하랑이 사이에 그쪽이 끼어들 필요는 없어요.”장소가 장소인지라 스튜디오 입구에서 괜히 시비가 붙으면 온하랑의 업무에 지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시락을 온하랑의 손에 쥐여줬다.“일단 들어가서 점심 먹어. 저녁에 데리러 올게.”옆에 있는 리차드의 존재를 잊은 듯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했다.그러자 리차드는 도시락을 빼앗아 곧바로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고선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마음은 고마운데 저랑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어서 이딴 도시락은 필요 없어요.”말이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더니 주위에 서리가 내린 듯 얼어붙었다.온하랑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부승민의 눈치를 살폈고 그는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으나 줄곧 담담한 표정으로 리차드를 노려봤다.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주었다.리차드의 팔을 끌어당긴 순간 온하랑은 확연히 굳어진 그의 근육이 느껴졌고 어쩌면 긴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한없이 고요했다.온하랑은 부승민이 리차드를 향해 주먹을 날릴까 봐 걱정됐지만 예상과 달리 부승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되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하랑아, 얼른 가서 밥 먹어.”곧이어 그는 리차드를 바라봤다.“리차드 씨 맞죠? 따로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리차드는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얘기요?”“그냥 뭐 이것저것.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부승민의 말투는 도발적이었다.“안될 건 없죠. 하고 싶은 말이 뭐죠?”“여긴 사람이 많아서 곤란하니까 비상계단 쪽으로 갈까요?”“그러죠.”리차드는 흔쾌히 동의했다.온하랑은 의견조차 묻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안돼. 가지 마요.”그녀는 리차드가 부승민과 대화를 나눌수록 비밀을 들킬 위험성도 커진다고 생각했다.부승민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비웃듯이 리차드를 바라봤다.그러자 리차드는 온하랑의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