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부승민은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더니 미친 듯이 복부를 가격했다.주먹 몇 대를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리차드는 그제야 반격하기 시작했다.리차드도 키가 큰 데다가 평소 여자를 꼬시기 위해 틈틈이 운동한 덕분에 생각보다 실력이 꽤 있었고 자연스레 부승민도 주먹 몇 대를 맞게 되었다.결국 마지막에는 두 사람 모두 부상을 입었다.지나가던 직원이 인기척을 듣고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서야 두 사람은 멈췄다.20분 후, 레스토랑에 있던 온하랑은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로 나타난 리차드를 보게 되었다.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다물지 못했고 재빨리 리차드를 자리에 앉혔다.“얼굴이 왜 이래요? 설마 맞았어요?”“네...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때렸거든요. 처음에는 페이 씨가 이혼한 게 이해가 안 됐었는데 오늘부로 그 이유를 알았어요. 그 사람은 너무 폭력적이에요.”리차드는 가볍게 눈가의 멍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것도 엄연히 산재 처리에 속하죠?”“그렇죠. 일단 같이 병원부터 가봐요.”“갑자기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리차드는 빙빙 돌려서 티를 냈다.“정신적 피해보상금은 제가 드릴게요.”리차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죠.”병원에서 나온 후 온하랑은 또 리차드에게 돈을 이체해 줬다.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허탈함이 밀려왔다.‘부승민, 아주 잘하는 짓이다.’처음엔 그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며칠 뒤에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반성은커녕 되레 리차드를 때릴 줄은 어떻게 알았겠는가?‘이번에 아주 잘 걸렸다. 끝까지 괴롭혀줄 테니까 기대해.’아침부터 우중충하더니 오후가 되자 날이 어두워지면서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깔렸다.다행히 스튜디오 안에서 하는 촬영이라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밖에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오후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비가 그치지
애초에 리차드를 고용하는 비용도 결코 적지 않은데 추가 비용이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온하랑은 이를 꽉 악문 채로 또박또박 말했다.“네가 한 짓이야?”“응.”부승민은 순순히 인정했다.“너...”온하랑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수리비는 네가 감당해.”“왜? 애스턴마틴을 운전하는 사람이 설마 이 정도 수리비도 감당 못 하는 거야?”“감당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잖아. 네가 차를 망가뜨렸으니 당연히 배상해야지.”“알았어. 내가 낼게.”부승민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일단 집까지 데려다줄게.”온하랑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밖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점점 세지는 걸 보고선 마지못해 답했다.“그래.”부승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적극적으로 온하랑의 카메라 가방을 챙겼다.“내가 들게. 얼른 가자.”그 순간 온하랑은 부승민의 뒤로 큰 꼬리가 흔들리고 있는 걸 봤다. 마치 애타게 기다리던 간식을 한입 먹은 강아지마냥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렇게 온하랑과 부승민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차에 오른 온하랑은 행여나 부승민이 안전벨트를 매준다는 핑계로 가까이 다가올까 봐 부랴부랴 잽싸게 안전벨트를 맸다.그 후 부승민을 힐끗 쳐다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고 동시에 온하랑은 자신의 순발력에 감탄했다.폭풍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다른 차들도 안전을 위해 천천히 운전한다.그런데 부승민의 운전하는 차는 유난히 더 느렸고 20분 거리를 기어코 40분 동안 운전했다. 긴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차는 온하랑의 집 앞에 멈춰 섰다.“고마워. 도착했으니까 이만 가볼게.”온하랑은 차에서 내리려 문을 밀었으나 열리지 않았다.하여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보며 눈치줬다.그러나 부승민은 문을 열기는커녕 되레 온하랑을 향해 다가갔고 그녀는 잔뜩 경계하며 차장 쪽에 몸을 바짝 붙였다.“부승민. 뭐 하는 거야?”“어떻게 하면 나한테 기회를 줄래?”부승민은 뚫어져라 온하랑을 바라봤다.“그럴 생각 없으니
“필요 없어.”온하랑은 단호하게 목소리로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부승민이 아니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만두랑 참치죽 만들었어.”“귀찮게 하지 말고 너 혼자 먹어.”“아랑아, 문 좀 열어줘. 내가 이렇게 계속 문 두드리면 너도 짜증 나잖아.”이마에 핏줄이 곤두설 정도로 화가 났던 온하랑은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벌컥 열고선 눈을 두릅 뜬 채로 부승민을 노려봤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못 알아들었어?”부승민은 한손에 반찬통을 들고 다른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 처량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아랑아, 미안해. 이 방법 외에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일단 광태가 하는 말 좀 들어봐. 이것만 들으면 앞으로 절대 귀찮게 안 할게.”계획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서 일부러 육광태를 보냈던 온하랑은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조바심이 났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육광태에게 연락할 줄은 아예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온하랑이 필라시에 있는 동안 육광태가 줄곧 곁을 지켰기에 지금 그녀의 상황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게다가 온하랑은 일찌감치 육광태가 자신을 비밀리에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니 당연히 부승민이 내린 결정을 이해했고 그의 주장을 믿었다.육광태라면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부승민의 반응을 보니 모든 걸 터놓지는 않은 듯싶었다.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그제야 평정심을 되찾은 온하랑은 부승민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방금 한 말 진심이지?”“응.”온하랑은 그이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 귓가에 갖다 대며 물었다.“여보세요?”“저예요.”핸드폰 너머로 육광태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바로 스피커폰으로 돌렸다.“하랑 씨, 지금 승민이를 오해하고 있어요. 승민이가 얘기해준 거 있죠? 그게 전부 사실이에요. 필라시에 있는 동안 하랑 씨를 지키려고 제가 줄곧 따라다녔어요. 믿기지 않으면 테스트해 봐도 돼요. 하랑 씨가 갔던
부승민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과 함께 그대로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상태는 위태로워 보였고 눈빛도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하랑아...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육광태 씨의 설명을 들으면 다시는 귀찮게 매달리지 않겠다고 했지? 그러니까 이제 가.”온하랑은 단호하게 문을 닫았고 부승민은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재빨리 막으려고 했지만, 손은 뻣뻣하게 굳어 허공에 얼어붙었다. 마지못해 무기력하게 팔을 거둔 부승민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마치 천 킬로그램이나 되는 큰 돌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숨이 막혔다.그 시각 냉정하게 문을 닫았던 온하랑은 도어 뷰어로 밖에 있는 부승민을 관찰했다.그는 매우 허탈해 보였고, 문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쓸쓸한 뒷모습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온하랑은 마음이 괴로운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드러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내가 너무 심했나?’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심한 것도 아니다. 만약 부승민을 짝사랑하던 몇 년의 온하랑이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아마 모든 의욕을 잃고 고통에 허덕이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심지어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아무리 속상해도 부승민이 온하랑은 속인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온하랑은 오랫동안 슬픔에 잠겼던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더니 절대 이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같은 시각 전화를 끊은 육광태의 얼굴에는 간사한 웃음이 번졌다.이틀 전 온하랑은 그에게 연락해 부승민이 출소했다는 사실과 어쩌면 며칠 뒤에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줬다. 하여 안전은 확보할 수 있으니, 그더러 김정숙과 부시아 쪽으로 가서 두 사람이 잘 도착할 수 있게, 부시아가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곁을 지키라고 했다.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던 육광태는 부승민에게 연락하려고 핸드폰을 들었으나 뜻밖에도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핸드폰 너머의 부승민은 온하랑이 귀국해
클럽의 룸안은 럭셔리하고 화려하게 꾸며졌다.“그동안 제가 찰스 씨를 쭉 지켜본 거 알아요? 별일 없어 보여서 다행이네요.”조지 부인은 훅 파인 드레스 차림으로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여성용 담배가 끼워져 있었고 입으로는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조지 부인의 뒤에는 뛰어난 외모의 젊은 웨이터가 찰싹 달라붙어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었다.“별일도 아닌데 괜히 신경 쓰이게 했네요.”부승민은 룸 한켠의 일인용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꼬더니 무심하게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았다.“그동안 잘 지내셨어요?”조지 부인은 원망하는 듯 했으나 애틋하면서도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1년 전이에요.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잘 지냈을 리가 없죠.”부승민은 조지 부인의 농담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 아무런 반응 없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데시아 그룹의 제이슨 씨와 함께 하신다면서요? 얼마 전에 뉴스에서 봤어요. 같이 몰디브로 여행도 갔던데 못 지냈다는 말은 너무 신빙성이 없네요.”“제이슨이 아무리 좋아도 찰스 씨에 대한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조지 부인은 아쉬워하더니 손가락을 치켜들고선 빨간 입술로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한 번만 만족시켜 주면 이렇게 계속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로 애타지 않을 텐데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볼 생각 없어요? 하룻밤이면 돼요.”조지 부인은 과부다.가문의 큰 아가씨였던 그녀는 조지 가문과 혼인을 맺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외부인이 있을 때만 서로를 존중하는 쇼윈도 부부였고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제멋대로 방탕하게 놀았다.쿨한 성격인 조지 부인은 조지가 죽은 후에도 두 가문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재혼하지 않았다. 물론 사적으로는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났다.부승민은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 조지 부인을 알게 되었다.당시 BX 그룹의 코스피 상장사들이 뉴욕 증권거래소에 발을 들였고 그룹 대표인 부승민은 단상에 올라 간단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도움이 필요해서 연락드렸어요.”담배를 피우던 조지 부인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도움을 청하는 거면 당연히 사례도 준비했겠죠?”“당연하죠. 만족하실만한 거로 준비했습니다.”“난 찰스 씨를 원하는데?”“사모님.”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조지 부인을 째려봤다.“알겠어요.”조지 부인은 한발 물러섰다.“뭘 도와드리면 되죠?”연인이 되지 못한다면 친구라도 되고 싶었다.부승민의 부탁을 들은 조지 부인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작 이런 일을 부탁한다고요?”말을 이어가던 조지 부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아내분이 참 부럽네요. 이렇게 사랑해 주는 찰스 씨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요.”부승민이 떠난 후 조지 부인은 그가 남긴 사진을 부하들에게 건네며 최대한 빨리 눈앞으로 데려오라고 말했다.얼마 후 리차드는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낯선 곳으로 끌려갔다.겁에 잔뜩 질린 그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온하랑과의 계약이 성사되면서 그는 이 기간에 온하랑에게만 집중했고 바에는 출근하지 않았다.하여 집에서 쉬고 있던 그는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곧장 문 쪽으로 다가갔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그의 입을 막으며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씌웠고 팔까지 묶고선 강제로 차에 태웠다.그를 납치한 사람은 누구일까? 과연 무슨 이유로 납치했을까?리차드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더불어 정신이 혼미해져 어디로 끌려가는지조차 몰랐다. 다만 코끝에 느껴지는 좋은 향기는 아주 현실감이 있었다.“사모님, 잡아 왔습니다.”이때 옆에서 한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여자는 느릿느릿 여유롭게 말했다.“이제 그만 풀어줘.”“알겠습니다.”손목에 묶인 밧줄이 풀리자, 리차드는 재빨리 얼굴을 가리고 있던 비닐과 입에 물고 있던 천을 뱉었다.그러자 화려한 룸과 소파에 앉아 있는 낯선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자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세련된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고 눈길을
조지 부인은 바를 자주 드나드는 단골이었지만 최근에 제이슨에게 푹 빠져 바에 간 적이 없었다.하여 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리차드에 대해 아예 몰랐다.“사모님만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뭐지? 여자 친구 있다는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얘기한다고?’“그럼 솔직하게 말할게. 난 네가 꽤 마음에 들거든. 그래서 스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리차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영광입니다.”“동의하는 거야?”“당연하죠.”‘내가 사람 잘못 잡아 온 거 아니지?’조지 부인은 불안함에 사진을 꺼내 다시 한번 비교해 봤는데 누가 봐도 사진 속의 그 사람이었다.“계약서야. 읽어봐.”조지 부인은 바로 사인할 수 있게끔 미리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리차드는 앞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고 그것은 스폰관련 계약서였다.계약에 사인한 순간 리차드는 바로 7천만 원을 얻게 된다. 앞으로 매달 1억 남짓의 용돈과 다양한 선물을 받게 되고 심지어 계약이 끝나는 날에도 수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그 조항들을 본 리차드는 두 눈이 반짝 빛났다.조지 부인의 스폰을 받는다면 불과 몇 달 만에 부자가 될 수 있다.조지 부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리차드를 바라봤다.“미리 충고하자면 난 소유욕이 엄청 강한 사람이야. 계약 기간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게 들키면 그간 받았던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할 거야. 아참, 그리고 10억 정도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해.”리차드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잘 알겠습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그래? 그럼 계약서에 사인해. 앞으로 한 달 동안 넌 내꺼야.”“알겠습니다.”리차드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으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도무지 억제할 수가 없었다.자리에 앉은 그는 펜을 들어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과 개인 정보 그리고 계좌번호까지 적었다.조지 부인은 서명된 계약서를 바라보며 웃었다.“좋아. 7천만 원은 바로 입금될 거야. 그리고 이참에 얘네랑 같이 백화점에 가서
온하랑은 짜증이 밀려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더 이상 속일 방법도 없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부승민한테 털어놓을까?’온하랑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시 일에 전념했다.그러다가 점심때쯤 낯선 사람이 보낸 메일 한 통을 받게 되었고 의아해하며 메일을 열어본 온하랑은 그 안에 담긴 사진 몇 장을 보게 되었다.구도를 보니 몰래 찍은 것처럼 보였고 초점이 완벽하게 잡히지 않았으나 사진 속의 주인공이 리차드인 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쭉쭉빵빵한 몸매를 가진 여자와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여자는 차 앞쪽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차 로고로 짐작했을 때 상당한 부자인 게 틀림없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리차드가 왜 계약을 해지했는지 깨달았다.알고 보니 그는 돈 많은 스폰을 구해 더 이상 온하랑이 필요 없었다.계약 해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하랑은 곧바로 이 사진을 받게 되었다. 모든 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부승민의 얼굴이 떠올랐다.‘설마 부승민이 한 짓이야?’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핸드폰도 울렸다.확인해 보니 부승민의 보낸 카톡이었다.“하랑아, 점심 가져왔는데 문 좀 열어봐.”생각에 잠긴 온하랑은 방금 그 사진을 확대하며 자세히 관찰하다가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고선 미심쩍은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봤다.어제의 쓸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마치 다른 사람인양 활기 넘쳤다.“하랑아, 점심 먹자.”“귀찮게 매달리지 않겠다고 네가 어제 직접 얘기했잖아.”“맞아. 어제는 매달리지 않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하루잖아.”부승민은 웃으며 말했다.“들어와.”현관 앞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온하랑은 순순히 그를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사진이 먹혔다는 생각에 부승민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부승민은 싸 온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