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도움이 필요해서 연락드렸어요.”담배를 피우던 조지 부인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도움을 청하는 거면 당연히 사례도 준비했겠죠?”“당연하죠. 만족하실만한 거로 준비했습니다.”“난 찰스 씨를 원하는데?”“사모님.”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조지 부인을 째려봤다.“알겠어요.”조지 부인은 한발 물러섰다.“뭘 도와드리면 되죠?”연인이 되지 못한다면 친구라도 되고 싶었다.부승민의 부탁을 들은 조지 부인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작 이런 일을 부탁한다고요?”말을 이어가던 조지 부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아내분이 참 부럽네요. 이렇게 사랑해 주는 찰스 씨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요.”부승민이 떠난 후 조지 부인은 그가 남긴 사진을 부하들에게 건네며 최대한 빨리 눈앞으로 데려오라고 말했다.얼마 후 리차드는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낯선 곳으로 끌려갔다.겁에 잔뜩 질린 그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온하랑과의 계약이 성사되면서 그는 이 기간에 온하랑에게만 집중했고 바에는 출근하지 않았다.하여 집에서 쉬고 있던 그는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곧장 문 쪽으로 다가갔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그의 입을 막으며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씌웠고 팔까지 묶고선 강제로 차에 태웠다.그를 납치한 사람은 누구일까? 과연 무슨 이유로 납치했을까?리차드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더불어 정신이 혼미해져 어디로 끌려가는지조차 몰랐다. 다만 코끝에 느껴지는 좋은 향기는 아주 현실감이 있었다.“사모님, 잡아 왔습니다.”이때 옆에서 한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여자는 느릿느릿 여유롭게 말했다.“이제 그만 풀어줘.”“알겠습니다.”손목에 묶인 밧줄이 풀리자, 리차드는 재빨리 얼굴을 가리고 있던 비닐과 입에 물고 있던 천을 뱉었다.그러자 화려한 룸과 소파에 앉아 있는 낯선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자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세련된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고 눈길을
조지 부인은 바를 자주 드나드는 단골이었지만 최근에 제이슨에게 푹 빠져 바에 간 적이 없었다.하여 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리차드에 대해 아예 몰랐다.“사모님만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뭐지? 여자 친구 있다는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얘기한다고?’“그럼 솔직하게 말할게. 난 네가 꽤 마음에 들거든. 그래서 스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리차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영광입니다.”“동의하는 거야?”“당연하죠.”‘내가 사람 잘못 잡아 온 거 아니지?’조지 부인은 불안함에 사진을 꺼내 다시 한번 비교해 봤는데 누가 봐도 사진 속의 그 사람이었다.“계약서야. 읽어봐.”조지 부인은 바로 사인할 수 있게끔 미리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리차드는 앞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고 그것은 스폰관련 계약서였다.계약에 사인한 순간 리차드는 바로 7천만 원을 얻게 된다. 앞으로 매달 1억 남짓의 용돈과 다양한 선물을 받게 되고 심지어 계약이 끝나는 날에도 수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그 조항들을 본 리차드는 두 눈이 반짝 빛났다.조지 부인의 스폰을 받는다면 불과 몇 달 만에 부자가 될 수 있다.조지 부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리차드를 바라봤다.“미리 충고하자면 난 소유욕이 엄청 강한 사람이야. 계약 기간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게 들키면 그간 받았던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할 거야. 아참, 그리고 10억 정도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해.”리차드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잘 알겠습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그래? 그럼 계약서에 사인해. 앞으로 한 달 동안 넌 내꺼야.”“알겠습니다.”리차드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으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도무지 억제할 수가 없었다.자리에 앉은 그는 펜을 들어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과 개인 정보 그리고 계좌번호까지 적었다.조지 부인은 서명된 계약서를 바라보며 웃었다.“좋아. 7천만 원은 바로 입금될 거야. 그리고 이참에 얘네랑 같이 백화점에 가서
온하랑은 짜증이 밀려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더 이상 속일 방법도 없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부승민한테 털어놓을까?’온하랑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시 일에 전념했다.그러다가 점심때쯤 낯선 사람이 보낸 메일 한 통을 받게 되었고 의아해하며 메일을 열어본 온하랑은 그 안에 담긴 사진 몇 장을 보게 되었다.구도를 보니 몰래 찍은 것처럼 보였고 초점이 완벽하게 잡히지 않았으나 사진 속의 주인공이 리차드인 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쭉쭉빵빵한 몸매를 가진 여자와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여자는 차 앞쪽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차 로고로 짐작했을 때 상당한 부자인 게 틀림없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리차드가 왜 계약을 해지했는지 깨달았다.알고 보니 그는 돈 많은 스폰을 구해 더 이상 온하랑이 필요 없었다.계약 해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하랑은 곧바로 이 사진을 받게 되었다. 모든 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부승민의 얼굴이 떠올랐다.‘설마 부승민이 한 짓이야?’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핸드폰도 울렸다.확인해 보니 부승민의 보낸 카톡이었다.“하랑아, 점심 가져왔는데 문 좀 열어봐.”생각에 잠긴 온하랑은 방금 그 사진을 확대하며 자세히 관찰하다가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고선 미심쩍은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봤다.어제의 쓸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마치 다른 사람인양 활기 넘쳤다.“하랑아, 점심 먹자.”“귀찮게 매달리지 않겠다고 네가 어제 직접 얘기했잖아.”“맞아. 어제는 매달리지 않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하루잖아.”부승민은 웃으며 말했다.“들어와.”현관 앞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온하랑은 순순히 그를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사진이 먹혔다는 생각에 부승민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부승민은 싸 온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부승민은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실은 사람 시켜서 미행했어. 처음에는 약점 잡으려고 시작했던 건에 이런 사진이 찍힐 줄은 몰랐어. 하랑아, 믿어줘. 이 사진은 진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믿는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모르는 계정으로 메일을 보낸 거야.” 듣자마자 거짓말인 걸 알아챈 온하랑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롭다는 듯이 부승민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정말 사람을 시켜 미행했다면 리차드가 술집 종업원이라는 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반응을 보아하니 부승민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그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간절하게 애원했다.“하랑아, 정말 믿어줘.”온하랑은 웃으며 사진 속의 여자를 가리켰다.“이 여자. 아는 사람이야?”“모르는... 모르는 사람이야.”온하랑의 시선을 마주친 부승민은 흠칫하더니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내가 이 여자한테 리차드를 꼬시라고 한 건 맞는데 이렇게 덥석 미끼를 물 줄은 아예 몰랐어. 솔직히 리차드 같은 사람이 바람피우는 건 시간 문제야.”“그래서? 내가 너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니?”“응.”“정말 미쳤구나. 당장 나가.”온하랑은 잠깐이나마 마음이 약해졌던 자신을 원망했다.부승민이 쉽게 포기할 스타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를 과소평가했다.“하랑아, 정말 진심으로...”온하랑은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나가.”“리차드는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야. 나한테 다시 한번 기회를 줘....”부승민은 뒤로 밀려나면서도 결코 입을 다물지 않았다.그렇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부승민은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소파로 돌아온 온하랑은 자리 잡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요리 실력은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 맛있네.’오후에도 줄곧 일에 전념하던 온하랑은 편집장의 연락을 받았다.“페이, 회사 산하의 금융사에서 잡지 촬영을 해줄 사진작가가 필요하대. 시간 괜찮아? 다른 작가들은 스케줄이 다 찼나 봐.”“언제 찍는데요? 마감 시간은요?”“
그의 왼쪽에는 낯선 남자였고 오른쪽에는 온하랑이 아는 편집장이었다.그리고 그의 뒤에는 메이크업 선생님들과 비서들이 뒤따랐다.온하랑은 입꼬리를 한번 놀리고는 부승민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당신이 여기엔 웬일이야?”편집장 등 사람들은 온하랑의 앞에 멈춰 섰다. 안 그래도 편집장은 온하랑과 찰스가 다 같은 한인이고 같이 필라시에서 지서 서로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온하랑에서 서로 아는 사이인지 물어보고 싶었다.근데 그전에 왼쪽에 있던 남자는 아주 언짢다는 듯 온하랑을 힐끔 보고는 한보 빠르게 입을 열고 물었다.“당신이 오늘 촬영을 담당할 촬영 기사에요? 우리 찰스 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예요?”부승민은 덤덤하게 웃으며 온하랑을 향해 눈을 깜빡이고는 말했다.“괜찮아요.”편집장도 수습하면서 말했다.“페이 씨도 절대 고의로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자, 페이 씨, 제가 소개를 해 드릴게요. 이분은 브라운 태크닉 회사의 담당자 찰스 님이고 여기 이분은 경제 잡지의 편집장 화이트 님이에요. 찰스 님, 그리고 여긴 오늘 촬영을 맡은 사진작가 페이 씨에요.”온하랑은 감을 잡은 듯 스리슬쩍 부승민을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찰. 스. 님. 안. 녕. 하. 세. 요!”‘부승민이 오늘 내가 맡은 촬영 상대라고!?’‘어쩐지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했어!!’“안녕하세요. 합작하게 되어서 기쁘네요.”부승민은 얼굴색 일도 안 변하고 태연하게 말했다.“찰스 님이 마음이 넓으셔서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앞으로 말조심하세요.”화이트는 온하랑을 째려보았다.온하랑은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대답했다.“네네. 찰스 님, 죄송해요. 제가 방금 찰스 님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실례를 범했네요.”“오? 누구로 착각하셨는데요?”“제 지질한 전남편으로요.”“...”부승민 왼쪽에 선 분이 성질을 부릴 것 같아서 온하랑은 재빨리 해명했다.“아이고, 제 주둥이, 찰스 님은 비주얼이 엄청나신 데 어떻게 감히 제 전남편과 비교하겠어요? 그 사람은 찰스 님 눈곱보다도 못해
편집장은 하는 수 없이 온하랑에게 걸어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페이 씨?”온하랑은 카메라 속 사진들을 편집장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각도가 잘 안 잡혀서 사진이 별로 예쁘게 나오지 않네요.”편집장은 사진을 보고는 또 이전의 사진 몇 개를 마저 보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며 물었다.“잘 나왔는데요?”“잘 나왔다고요?”“잘 나왔지 않아요?”“어디가 잘 나왔다는 거예요?”“페이 씨 자신한테 요구가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아니면 찰스 님더러 직접 보라고 할까요?”온하랑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보면서 말했다.“당신 여기 와서 봐봐요.”부승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오고는 온하랑의 말대로 카메라 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괜찮네요. 페이 씨, 실력이 아주 대단한데요.”화이트도 다가와 사진을 힐끔 보더니 어리둥절했다.“?”‘모델이 그만큼 한 비주얼이 있으니, 누가 찍어도 못생기진 않을 건데 도대체 어딜 봐서 실력이 대단하다는 거야?’‘어휴, 찰스 님도 정말 착해라.’“솔직하게 말해요.”“솔직하게 말한 건데요.”온하랑은 침묵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정말 자기 자신한테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온하랑은 사진 속 부승민이 안 이쁘다고 생각했다.안 이쁜 게 아니라, 사진 속 부승민도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있었지만, 온하랑은 사진에는 실제 부승민의 잘생김을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내가 승민 오빠에 대해 너무 익숙해서 그런가?’온하랑이 부승민에 대해 어느 정도로 익숙한가?오바해서 말하면 부승민이 재가 되더라도 온하랑은 그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온하랑의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그 시절에 부승민의 얼굴은 시종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녀의 꿈속에 나타났다.그리고 부승민이 나타난 곳이라면 그녀의 시선은 무조건 그의 몸에 떨어지곤 하였다.그리고 그 후에 두 사람은 또 같이 3년 동안 같은 침대에서 잤다.온하랑은 부승민 몸의 모든 디테일들에 대해
“외투를 벗고 우리 저쪽으로 가서 찍어요.”화이트는 놀라웠다.“벌써 자리를 옮겨요? 몇 장 안 찍은 거 아닌가요.”“총 네 장 필요하시니까 많이 찍을 필요 없어요.”“만약 찰스 님이 네 장을 고르지 못하면 어떡해요?”“무조건 고를 수 있을 거예요.”세 번째 사진, 부승민은 소파에 앉았다.온하랑은 전신을 찍을 생각이어서 부승민에게 말했다.“좀 자연스럽게 너무 경직되어 있지 말고 평소에 앉던 대로 앉으세요.”사진 속 화면을 넘쳐날 것 같은 부승민의 긴 다리를 보며 온하랑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자리를 바꾸죠.”화이트가 말했다.“벌써요?”“네.”온하랑은 나머지 배경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생각하더니 부승민에게 말했다.“우리 밖에서 찍어요. 차 안에 있는 사진을 한 장 찍어요.”“좋아요.”“찰스 님은 차를 어디에 두었어요?”“지하 주차장에 있어요.”온하랑은 몸을 돌려 편집장과 화이트에게 물었다.“혹시 두 분 중 누구의 차가 건물 앞 주차장에 있나요?”“저요. 제 차로 찍어요. 마침, 며칠 전에 세차했어요.”몇몇 스태프는 반사판을 들고 같이 내려갔다.부승민은 운전석에 앉고는 차창을 절반 내렸다.“이쪽을 보시고 눈빛 처리해 주세요. 저분이 찰스 님 전 와이프의 남자 친구라고 생각해 보세요.”온하랑은 옆에 서 있는 화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화이트는 어안이 벙벙했다.“?”이 사진을 찍고 나서 온하랑은 선택했던 4장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며 확실히 빠진 부분이 없는지를 확인했다.“됐어요. 촬영이 끝났어요.”“벌써 다 찍은 거예요?”화이트는 걸어 나와 부승민에게 차 문을 열어주면서 의심하는 말투로 물었다.“네.”화이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부승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찰스 님, 우리 올라가서 사진을 골라 봐요.”부승민은 온하랑의 뒷모습을 한번 쳐다보았다.접대 실에 돌아와서 온하랑은 사진을 컴퓨터에 올린 후 자신이 정성껏 촬영한 사진 4장을 한곳에 모여놓고 부승민을 보며 말했다.“저는 이 4장이
중도에 온하랑은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로비에서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룸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온하랑은 계단 입구에 서서 싸움을 구경했다.온하랑은 곧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를 이해했다.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남자는 원래 두 여자 중 한 명과 사귀는 사이였는데,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원래 여자 친구와 헤어지려고 했다.그러나 여자 친구는 하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남자 친구를 엄청나게 사랑하며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우는 거에 대해 신경 안 쓴다고 말했다. 남자 친구가 나중에 제삼자와 계속 연락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온하랑은 어안이 벙벙했다.“??”‘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가십거리를 다 알고 나서 온하랑은 천천히 룸으로 돌아가며 머릿속에는 부싯돌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온하랑이 한 가지 일을 소홀히 한 듯했다.그것은 바로 민지훈이든 리차드든, 온하랑은 그들이 다른 여자와의 친밀한 사진을 보면서 부승민한테 시달려 그들과 헤어졌을 때, 마치 자기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모두 속상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그 이유는 온하랑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아마 부승민도 이런 점을 눈치채고 나서 겁 없이 민지훈을 건드리고 리차드를 건드렸다.온하랑은 그제야 깨달았다. 부승민을 화나게 만드는 데 있어서의 관건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남자 친구는 쉽게 부승민한테 당할 수 있지만, 온하랑의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만약 내가 리차드 때문에 속상해하고 초췌해져서 죽고 못 살겠다고 한다면 승민이는 어떻게 나올까?'문득 누군가가 온하랑의 어깨를 툭 쳤다.“아…”온하랑은 생각에 잠겨 넋 놓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몸을 돌려 부승민인 걸 보고 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토닥였다.“깜짝이야, 오빠 뭐 하는 거야?”“나야말로 너한테 뭐 하는지 묻고 싶어. 그렇게 오래 나가서 안 돌아오고는 넋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