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도움이 필요해서 연락드렸어요.”담배를 피우던 조지 부인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도움을 청하는 거면 당연히 사례도 준비했겠죠?”“당연하죠. 만족하실만한 거로 준비했습니다.”“난 찰스 씨를 원하는데?”“사모님.”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조지 부인을 째려봤다.“알겠어요.”조지 부인은 한발 물러섰다.“뭘 도와드리면 되죠?”연인이 되지 못한다면 친구라도 되고 싶었다.부승민의 부탁을 들은 조지 부인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작 이런 일을 부탁한다고요?”말을 이어가던 조지 부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아내분이 참 부럽네요. 이렇게 사랑해 주는 찰스 씨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요.”부승민이 떠난 후 조지 부인은 그가 남긴 사진을 부하들에게 건네며 최대한 빨리 눈앞으로 데려오라고 말했다.얼마 후 리차드는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낯선 곳으로 끌려갔다.겁에 잔뜩 질린 그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온하랑과의 계약이 성사되면서 그는 이 기간에 온하랑에게만 집중했고 바에는 출근하지 않았다.하여 집에서 쉬고 있던 그는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곧장 문 쪽으로 다가갔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그의 입을 막으며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씌웠고 팔까지 묶고선 강제로 차에 태웠다.그를 납치한 사람은 누구일까? 과연 무슨 이유로 납치했을까?리차드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더불어 정신이 혼미해져 어디로 끌려가는지조차 몰랐다. 다만 코끝에 느껴지는 좋은 향기는 아주 현실감이 있었다.“사모님, 잡아 왔습니다.”이때 옆에서 한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여자는 느릿느릿 여유롭게 말했다.“이제 그만 풀어줘.”“알겠습니다.”손목에 묶인 밧줄이 풀리자, 리차드는 재빨리 얼굴을 가리고 있던 비닐과 입에 물고 있던 천을 뱉었다.그러자 화려한 룸과 소파에 앉아 있는 낯선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자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세련된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고 눈길을
조지 부인은 바를 자주 드나드는 단골이었지만 최근에 제이슨에게 푹 빠져 바에 간 적이 없었다.하여 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리차드에 대해 아예 몰랐다.“사모님만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뭐지? 여자 친구 있다는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얘기한다고?’“그럼 솔직하게 말할게. 난 네가 꽤 마음에 들거든. 그래서 스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리차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영광입니다.”“동의하는 거야?”“당연하죠.”‘내가 사람 잘못 잡아 온 거 아니지?’조지 부인은 불안함에 사진을 꺼내 다시 한번 비교해 봤는데 누가 봐도 사진 속의 그 사람이었다.“계약서야. 읽어봐.”조지 부인은 바로 사인할 수 있게끔 미리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리차드는 앞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고 그것은 스폰관련 계약서였다.계약에 사인한 순간 리차드는 바로 7천만 원을 얻게 된다. 앞으로 매달 1억 남짓의 용돈과 다양한 선물을 받게 되고 심지어 계약이 끝나는 날에도 수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그 조항들을 본 리차드는 두 눈이 반짝 빛났다.조지 부인의 스폰을 받는다면 불과 몇 달 만에 부자가 될 수 있다.조지 부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리차드를 바라봤다.“미리 충고하자면 난 소유욕이 엄청 강한 사람이야. 계약 기간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게 들키면 그간 받았던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할 거야. 아참, 그리고 10억 정도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해.”리차드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잘 알겠습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그래? 그럼 계약서에 사인해. 앞으로 한 달 동안 넌 내꺼야.”“알겠습니다.”리차드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으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도무지 억제할 수가 없었다.자리에 앉은 그는 펜을 들어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과 개인 정보 그리고 계좌번호까지 적었다.조지 부인은 서명된 계약서를 바라보며 웃었다.“좋아. 7천만 원은 바로 입금될 거야. 그리고 이참에 얘네랑 같이 백화점에 가서
온하랑은 짜증이 밀려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더 이상 속일 방법도 없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부승민한테 털어놓을까?’온하랑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시 일에 전념했다.그러다가 점심때쯤 낯선 사람이 보낸 메일 한 통을 받게 되었고 의아해하며 메일을 열어본 온하랑은 그 안에 담긴 사진 몇 장을 보게 되었다.구도를 보니 몰래 찍은 것처럼 보였고 초점이 완벽하게 잡히지 않았으나 사진 속의 주인공이 리차드인 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쭉쭉빵빵한 몸매를 가진 여자와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여자는 차 앞쪽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차 로고로 짐작했을 때 상당한 부자인 게 틀림없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리차드가 왜 계약을 해지했는지 깨달았다.알고 보니 그는 돈 많은 스폰을 구해 더 이상 온하랑이 필요 없었다.계약 해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하랑은 곧바로 이 사진을 받게 되었다. 모든 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부승민의 얼굴이 떠올랐다.‘설마 부승민이 한 짓이야?’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핸드폰도 울렸다.확인해 보니 부승민의 보낸 카톡이었다.“하랑아, 점심 가져왔는데 문 좀 열어봐.”생각에 잠긴 온하랑은 방금 그 사진을 확대하며 자세히 관찰하다가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고선 미심쩍은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봤다.어제의 쓸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마치 다른 사람인양 활기 넘쳤다.“하랑아, 점심 먹자.”“귀찮게 매달리지 않겠다고 네가 어제 직접 얘기했잖아.”“맞아. 어제는 매달리지 않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하루잖아.”부승민은 웃으며 말했다.“들어와.”현관 앞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온하랑은 순순히 그를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사진이 먹혔다는 생각에 부승민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부승민은 싸 온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부승민은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실은 사람 시켜서 미행했어. 처음에는 약점 잡으려고 시작했던 건에 이런 사진이 찍힐 줄은 몰랐어. 하랑아, 믿어줘. 이 사진은 진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믿는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모르는 계정으로 메일을 보낸 거야.” 듣자마자 거짓말인 걸 알아챈 온하랑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롭다는 듯이 부승민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정말 사람을 시켜 미행했다면 리차드가 술집 종업원이라는 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반응을 보아하니 부승민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그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간절하게 애원했다.“하랑아, 정말 믿어줘.”온하랑은 웃으며 사진 속의 여자를 가리켰다.“이 여자. 아는 사람이야?”“모르는... 모르는 사람이야.”온하랑의 시선을 마주친 부승민은 흠칫하더니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내가 이 여자한테 리차드를 꼬시라고 한 건 맞는데 이렇게 덥석 미끼를 물 줄은 아예 몰랐어. 솔직히 리차드 같은 사람이 바람피우는 건 시간 문제야.”“그래서? 내가 너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니?”“응.”“정말 미쳤구나. 당장 나가.”온하랑은 잠깐이나마 마음이 약해졌던 자신을 원망했다.부승민이 쉽게 포기할 스타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를 과소평가했다.“하랑아, 정말 진심으로...”온하랑은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나가.”“리차드는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야. 나한테 다시 한번 기회를 줘....”부승민은 뒤로 밀려나면서도 결코 입을 다물지 않았다.그렇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부승민은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소파로 돌아온 온하랑은 자리 잡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요리 실력은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 맛있네.’오후에도 줄곧 일에 전념하던 온하랑은 편집장의 연락을 받았다.“페이, 회사 산하의 금융사에서 잡지 촬영을 해줄 사진작가가 필요하대. 시간 괜찮아? 다른 작가들은 스케줄이 다 찼나 봐.”“언제 찍는데요? 마감 시간은요?”“
그의 왼쪽에는 낯선 남자였고 오른쪽에는 온하랑이 아는 편집장이었다.그리고 그의 뒤에는 메이크업 선생님들과 비서들이 뒤따랐다.온하랑은 입꼬리를 한번 놀리고는 부승민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당신이 여기엔 웬일이야?”편집장 등 사람들은 온하랑의 앞에 멈춰 섰다. 안 그래도 편집장은 온하랑과 찰스가 다 같은 한인이고 같이 필라시에서 지서 서로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온하랑에서 서로 아는 사이인지 물어보고 싶었다.근데 그전에 왼쪽에 있던 남자는 아주 언짢다는 듯 온하랑을 힐끔 보고는 한보 빠르게 입을 열고 물었다.“당신이 오늘 촬영을 담당할 촬영 기사에요? 우리 찰스 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예요?”부승민은 덤덤하게 웃으며 온하랑을 향해 눈을 깜빡이고는 말했다.“괜찮아요.”편집장도 수습하면서 말했다.“페이 씨도 절대 고의로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자, 페이 씨, 제가 소개를 해 드릴게요. 이분은 브라운 태크닉 회사의 담당자 찰스 님이고 여기 이분은 경제 잡지의 편집장 화이트 님이에요. 찰스 님, 그리고 여긴 오늘 촬영을 맡은 사진작가 페이 씨에요.”온하랑은 감을 잡은 듯 스리슬쩍 부승민을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찰. 스. 님. 안. 녕. 하. 세. 요!”‘부승민이 오늘 내가 맡은 촬영 상대라고!?’‘어쩐지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했어!!’“안녕하세요. 합작하게 되어서 기쁘네요.”부승민은 얼굴색 일도 안 변하고 태연하게 말했다.“찰스 님이 마음이 넓으셔서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앞으로 말조심하세요.”화이트는 온하랑을 째려보았다.온하랑은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대답했다.“네네. 찰스 님, 죄송해요. 제가 방금 찰스 님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실례를 범했네요.”“오? 누구로 착각하셨는데요?”“제 지질한 전남편으로요.”“...”부승민 왼쪽에 선 분이 성질을 부릴 것 같아서 온하랑은 재빨리 해명했다.“아이고, 제 주둥이, 찰스 님은 비주얼이 엄청나신 데 어떻게 감히 제 전남편과 비교하겠어요? 그 사람은 찰스 님 눈곱보다도 못해
편집장은 하는 수 없이 온하랑에게 걸어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페이 씨?”온하랑은 카메라 속 사진들을 편집장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각도가 잘 안 잡혀서 사진이 별로 예쁘게 나오지 않네요.”편집장은 사진을 보고는 또 이전의 사진 몇 개를 마저 보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며 물었다.“잘 나왔는데요?”“잘 나왔다고요?”“잘 나왔지 않아요?”“어디가 잘 나왔다는 거예요?”“페이 씨 자신한테 요구가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아니면 찰스 님더러 직접 보라고 할까요?”온하랑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보면서 말했다.“당신 여기 와서 봐봐요.”부승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오고는 온하랑의 말대로 카메라 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괜찮네요. 페이 씨, 실력이 아주 대단한데요.”화이트도 다가와 사진을 힐끔 보더니 어리둥절했다.“?”‘모델이 그만큼 한 비주얼이 있으니, 누가 찍어도 못생기진 않을 건데 도대체 어딜 봐서 실력이 대단하다는 거야?’‘어휴, 찰스 님도 정말 착해라.’“솔직하게 말해요.”“솔직하게 말한 건데요.”온하랑은 침묵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정말 자기 자신한테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온하랑은 사진 속 부승민이 안 이쁘다고 생각했다.안 이쁜 게 아니라, 사진 속 부승민도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있었지만, 온하랑은 사진에는 실제 부승민의 잘생김을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내가 승민 오빠에 대해 너무 익숙해서 그런가?’온하랑이 부승민에 대해 어느 정도로 익숙한가?오바해서 말하면 부승민이 재가 되더라도 온하랑은 그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온하랑의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그 시절에 부승민의 얼굴은 시종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녀의 꿈속에 나타났다.그리고 부승민이 나타난 곳이라면 그녀의 시선은 무조건 그의 몸에 떨어지곤 하였다.그리고 그 후에 두 사람은 또 같이 3년 동안 같은 침대에서 잤다.온하랑은 부승민 몸의 모든 디테일들에 대해
“외투를 벗고 우리 저쪽으로 가서 찍어요.”화이트는 놀라웠다.“벌써 자리를 옮겨요? 몇 장 안 찍은 거 아닌가요.”“총 네 장 필요하시니까 많이 찍을 필요 없어요.”“만약 찰스 님이 네 장을 고르지 못하면 어떡해요?”“무조건 고를 수 있을 거예요.”세 번째 사진, 부승민은 소파에 앉았다.온하랑은 전신을 찍을 생각이어서 부승민에게 말했다.“좀 자연스럽게 너무 경직되어 있지 말고 평소에 앉던 대로 앉으세요.”사진 속 화면을 넘쳐날 것 같은 부승민의 긴 다리를 보며 온하랑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자리를 바꾸죠.”화이트가 말했다.“벌써요?”“네.”온하랑은 나머지 배경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생각하더니 부승민에게 말했다.“우리 밖에서 찍어요. 차 안에 있는 사진을 한 장 찍어요.”“좋아요.”“찰스 님은 차를 어디에 두었어요?”“지하 주차장에 있어요.”온하랑은 몸을 돌려 편집장과 화이트에게 물었다.“혹시 두 분 중 누구의 차가 건물 앞 주차장에 있나요?”“저요. 제 차로 찍어요. 마침, 며칠 전에 세차했어요.”몇몇 스태프는 반사판을 들고 같이 내려갔다.부승민은 운전석에 앉고는 차창을 절반 내렸다.“이쪽을 보시고 눈빛 처리해 주세요. 저분이 찰스 님 전 와이프의 남자 친구라고 생각해 보세요.”온하랑은 옆에 서 있는 화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화이트는 어안이 벙벙했다.“?”이 사진을 찍고 나서 온하랑은 선택했던 4장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며 확실히 빠진 부분이 없는지를 확인했다.“됐어요. 촬영이 끝났어요.”“벌써 다 찍은 거예요?”화이트는 걸어 나와 부승민에게 차 문을 열어주면서 의심하는 말투로 물었다.“네.”화이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부승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찰스 님, 우리 올라가서 사진을 골라 봐요.”부승민은 온하랑의 뒷모습을 한번 쳐다보았다.접대 실에 돌아와서 온하랑은 사진을 컴퓨터에 올린 후 자신이 정성껏 촬영한 사진 4장을 한곳에 모여놓고 부승민을 보며 말했다.“저는 이 4장이
중도에 온하랑은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로비에서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룸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온하랑은 계단 입구에 서서 싸움을 구경했다.온하랑은 곧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를 이해했다.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남자는 원래 두 여자 중 한 명과 사귀는 사이였는데,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원래 여자 친구와 헤어지려고 했다.그러나 여자 친구는 하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남자 친구를 엄청나게 사랑하며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우는 거에 대해 신경 안 쓴다고 말했다. 남자 친구가 나중에 제삼자와 계속 연락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온하랑은 어안이 벙벙했다.“??”‘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가십거리를 다 알고 나서 온하랑은 천천히 룸으로 돌아가며 머릿속에는 부싯돌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온하랑이 한 가지 일을 소홀히 한 듯했다.그것은 바로 민지훈이든 리차드든, 온하랑은 그들이 다른 여자와의 친밀한 사진을 보면서 부승민한테 시달려 그들과 헤어졌을 때, 마치 자기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모두 속상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그 이유는 온하랑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아마 부승민도 이런 점을 눈치채고 나서 겁 없이 민지훈을 건드리고 리차드를 건드렸다.온하랑은 그제야 깨달았다. 부승민을 화나게 만드는 데 있어서의 관건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남자 친구는 쉽게 부승민한테 당할 수 있지만, 온하랑의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만약 내가 리차드 때문에 속상해하고 초췌해져서 죽고 못 살겠다고 한다면 승민이는 어떻게 나올까?'문득 누군가가 온하랑의 어깨를 툭 쳤다.“아…”온하랑은 생각에 잠겨 넋 놓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몸을 돌려 부승민인 걸 보고 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토닥였다.“깜짝이야, 오빠 뭐 하는 거야?”“나야말로 너한테 뭐 하는지 묻고 싶어. 그렇게 오래 나가서 안 돌아오고는 넋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