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아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게스트 룸에 왜 여자가 있지?’그 순간 부시아의 작은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 차마 전부 담을 수 없었다.어젯밤 안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 삼촌은 거부하면서 피곤하다고 놀아주기 싫다고 했었다.딱 봐도 안쪽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그 여자가 숙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면 삼촌이 그런 반응을 보일 리도 없고, 숙모가 먼저 나와서 놀아줬을 것이었다.할머니가 얘기하기로 삼촌은 어제 게스트 룸에서 잤다고 했는데, 그 여자도 게스트 룸에 있었다.‘혹시 둘이 같이 잔 건가?’부시아는 비록 어렸지만, 남녀관계는 부부만 함께 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설마, 삼촌 마음이 변한 건가?’부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닫고 얼른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삼촌은 안방에서 잤는데 할머니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었다.안방 문을 열자 내부는 남자와 여자의 옷이 널브러진 채 아수라장이었다.부시아는 철저히 실망하며 소파에 숨죽여 앉았다.비서가 보낸 옷은 틀림없이 저 방에 있는 여자에게 줄 옷일 것이다.‘흑, 방 안에 있는 여자는 싫어! 숙모가 좋아!’“왜 그러세요?”안문희가 월남쌈 한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부시아는 입술이 툭 튀어나온 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안문희가 얼른 나서서 달랬다.“왜 울고 있어요? 할머니한테 얘기해 봐요. 어디 아파요?”부시아에게서 답은 없었다. 그녀는 괴로운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문희는 더 조급해 났다.문을 여는 소리가 나며 부승민이 캐리어를 들고 들어왔다.“시아야...”“대표님, 얼른 와서 보세요. 시아 아가씨가 계속 울면서 말도 안 해요.”부승민이 얼른 캐리어를 내려놓고 큰 보폭으로 다가와 시아를 안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시아야, 왜 그러니? 어디 아파? 삼촌한테 알려줘.”부시아가 발버둥을 치며 부승민의 품을 거부했다.“안지 마요! 삼촌 싫어요!”
부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은 입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어... 왜 숙모가 여기에...?’온하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이자 이불이 흘러내렸다. 하얗고 갸름한 목에는 키스 마크가 가득했다.부승민은 한순간 아이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줄까 봐 찔려서 얼른 부시아를 안고 나가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숙모 만났으니 됐지?”“네...”부시아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댔다.“이제 얘기해 볼까? 아까는 왜 그랬어?”“음... 삼촌! 제 선물 챙겨오셨다면서요? 뭐예요?”부시아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부시아!”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네? 삼촌, 저 불렀어요?”부시아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시침을 떼는 부시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선물은 몰수야.”“아, 안 돼요. 삼촌!”부시아의 작은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녀는 얼른 부승민의 목을 껴안고 그의 얼굴에 뽀뽀했다.“삼촌이 최고예요!”“삼촌은 하나도 안 좋아요. 아까도 삼촌은 못 안게 하고 숙모만 찾았잖아요.”부시아가 찔리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그 순간 부승민은 어제의 온하랑이 갑자기 생각났다.찔리는 표정은 마치 복사라도 한 듯 똑같았다.부승민은 갑자기 부시아에게 계속 다그치기 어려워졌다.‘될 대로 되라지, 작은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부승민은 부시아에게 정교한 오르골을 선물했다. 맘에 들었는지 그녀는 오르골을 안고 거실에서 한참을 놀다가 고개를 들어 한숨을 쉬었다.“숙모는 왜 아직도 안 깨요?”온하랑은 점심이 되어서야 깨어났다.눈을 뜨니 자신이 낯선 방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문득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임가희를 만나러 가던 길에 부승민이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흐트러진 화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온하랑의 얼굴에 홍조가 띠었다. 눈을 감자 곱슬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이불 아래 그녀는 본인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음
부승민은 임가희가 온하랑에게 약을 먹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온하랑이 핸드폰으로 타자해서 부승민에게 보여주었다.“레스토랑의 물과 음식은 먹지 않았어.”영화 촬영장에서는 물을 많이 마셨지만, 그곳에서 누가 그녀를 해친다는 말인가.온하랑과 배우들이 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부씨 일가의 지지도 있으니, 그녀를 해치려고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부승민이 답했다.“그런 약은 모두 먹는 게 아니야. 일부는 연기처럼 피워서 흡입할 수도 있어.”온하랑의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룸에 들어갈 때, 확실히 향기를 맡았었다.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임가희가 직접 10개월을 품은 친딸인데 말이다!임가희가 아무리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임연지를 위해서 자신을 해칠 이유가 있을까?“레스토랑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온하랑이 타이핑한 글을 보며 부승민이 몸을 일으켜 차키를 챙겼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두 사람은 어제저녁의 레스토랑으로 와 같은 룸으로 향했다. 온하랑이 룸에 들어서자,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향기가 느껴졌다. 지금의 냄새는 레스토랑 스태프가 뿌린 방향제의 냄새였다.온하랑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으며 사지가 저렸다.그녀는 단지 임가희가 본인에게 차갑고 무관심하며 임연지에게 더 마음을 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약까지 쓸 줄은 몰랐다.부승민이 오지 않았더라면, 약효가 발작한 후 누구의 침대로 보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온하랑의 떨리는 어깨를 보며 부승민이 다가가 감싸안았다.“괜찮아, 하랑아. 그 여자가 너를 딸로 여기지 않는다면 너도 그 여자를 위해 슬퍼하지 마. 그럴 가치 없어.”온하랑이 코를 훌쩍이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답했다.“나도 알아.”차도 돌아온 부승민이 차분함을 되찾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무심코 물었다.“왜 너한테 약을 먹였는지는 생각해 봤어?”온하랑이 답했다.“아마... 윗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겠지.”오재원 사건은 사안이 명백하여 수사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검찰로 송치되어 검찰이
계획이 실패하고 임가희가 경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최국환에게 제지당했다.최국환이 말했다.“내일 나도 마침 강남시에 가야 하니 같이 돌아오면 되겠어.”임가희가 막 승낙하려고 할 때, 최국환이 말을 덧붙였다.“맞다. 내일 연지도 함께 와. 시간 내서 온하랑에게 사과하게 해. 이건 누가 봐도 연지가 잘못한 일이야. 그때 당신이 연지랑 같이 가서 모녀지간의 사이도 좀 누그러뜨려 봐.”임가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벌리며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국환 씨, 당신도 연지 성격 알잖아요.”게다가 어젯밤 일도 있으니 온하랑이 그녀를 증오하면 했지, 모녀의 정은 나누지 않을 것이었다.최국환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성격을 아니까 하는 소리야. 뭘 해도 되고, 뭘 하면 안 되는지 잘 가르쳐야지. 오냐오냐 키우면 엇나갈 뿐이야.”“알겠어요. 하지만 온하랑쪽은 저한테 오해가 깊어요. 쉽게 풀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당신이 걔한테 잘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하랑이도 당신 마음 알게 될 거야. 짧은 순간에 너무 급해하지 마.”최국환이 영양가 없는 말을 뱉었다.지금과 같을 때, 자신이 부승민 앞에 나서 부승민의 친부임을 밝히고 최씨 가문으로 복귀를 종용한다면 부승민은 아마 그를 내쫓을 것이었다.그는 부승민의 얼굴에서 한이 맺힌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저 임가희와 온가랑이 중간에서 연결고리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전화를 끊은 임가희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질뻔했다.‘감히 나랑 연지한테 온하랑에게 사과하라고? 온하랑한테 잘 보이라고? 그런 잡종한테 가당키나 한 일인가!’임연지가 그날 돈을 받고 최씨 가문을 떠나려고 했을 때, 경주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최동철의 사람에게 붙잡혀 2층 아파트에 갇혔다.최동철은 임연지의 자유만 속박했을 뿐 다른 방면에서는 홀대한 적이 없었다.임연지가 뭘 먹고 싶다고 하면 경호원을 보내 사 오게 했다.처음에는 그런 방식으로 경호원을 괴롭혀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지만, 이틀이 지나고 나서는 그런 방
소나무처럼 꼿꼿하고 책임감 있는 부승민을 생각하니 임연지는 그에게 더 큰 호감을 느꼈다.하지만 부승민의 책임감은 오롯이 온하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임연지는 질투로 인해 얼굴이 흉악해졌다.‘왜? 왜 온하랑은 부승민과 오빠의 사랑을 동시에 받을 수 있지? 왜 이혼하고 나서도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그렇게 목을 매는 거지? 부승민이 나한테 온하랑을 대하는 것처럼 대한다면, 내가 억울함을 당했을 때 바로 나서서 해결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고모, 정말 온하랑이랑 모녀간의 정을 회복하게? 온하랑을 최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임연지가 입술을 부풀린 채 임가희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당연히 그럴 일은 없지. 내가 그러고 싶어도 온하랑이 절대 승낙하지 않을 거야. 걔가 멍청이도 아니고. 너는 걱정하지 마, 네 몫을 빼앗아 갈 사람은 없어.”임연지가 한숨을 돌렸다.“고모, 역시 고모가 최고야.”임가희가 웃었다. 무엇인가 생각이라도 난 듯, 표정을 굳히더니 임연지의 손등을 치며 물었다.“연지야, 네 고모부와 오빠가 너를 유학 보낼 생각이던데 어느 나라 가고 싶어? 다 들어주실 거야.”임연지가 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가희를 바라보았다.임가희의 진지한 표정을 확인한 임연지가 농담이 아님을 깨닫고는 당황햇다.“고모, 저는 유학 가고 싶지 않아요. 네? 고모부랑 오빠한테 잘 얘기해주세요.”임가희가 한숨을 내쉬었다.“안돼, 연지야. 아직도 내가 이 집에서 어떤 위치인지 모르겠어? 두 부자가 같이 결정한 일을 내가 어떻게 바꾸겠니. 이번 일은 네가 너무 크게 벌였어.”임연지가 울기 시작했다.“고모, 제가 이렇게 빌게요. 정말 유학 가고 싶지 않아요. 해외 가면 모두 낯선 곳이고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제가 밖에서 그렇게 고생하는 거 지켜보실 거예요?”임가희가 임연지의 등을 두드리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고모가 너를 도와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나도 방법이 없어. 하지
부승민이 두판으로 보낸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장국호는 이미 두판에서 결혼하고 슬하에 자식까지 있었다.부승민이 보낸 사람이 전한 소식에 의하면 장국호가 양강에서 머무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주위의 사람에게 수소문해 보니 장국호는 하재범 일행에게 잡혀가고 장국호의 아내와 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갔다고 했다.부승민의 추측에 의하면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간 사람은 아마 최동철의 사람일 것이다. 국경에서 장국호를 잡은 후, 순리대로 아내와 아이로 장국호를 협박하여 그를 경찰에 넘기는 계획일 것이다.더 깊이 생각한다면 장국호가 국경에서 하재범의 손에서 벗어나는 상황도 아마 최동철의 사람이 손을 써 장국호에게 접근하고 그를 위협하기 위함을 것이다.일은 절반쯤 성공했을 터였다.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납치한 패거리들은 마음을 놓고 있어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그 틈을 타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구출해 데리고 있었다. 지금은 은밀한 곳에서 부승민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부승민은 직접 장국호의 아내와 아이를 만나고 경찰서에서 장국회의 면회를 신청했다.장국호의 죄명은 이미 10년 전에 정해졌다. 추서윤이 무고하든 아니든 그는 도망갈 수 없었다.아내와 아이가 누구 손에 있으면 장국호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했다.부승민이 그의 아내와 아이의 동영상을 보여주자, 장국호는 사건 번복에 동의했다.현재 사건은 이미 종결되어 감찰원 심사를 받고 있었는데, 부승민이 연줄을 동원하여 감찰원에 그대로 묶어 두었다.수사 결과를 뒤집으려면 검찰에서 재심사를 진행해야 했다.이를 위해 부승민이 관련 인원들을 초대하여 접대했는데, 그중 한 명이 검찰이었다.그 검찰의 외삼촌이 부승민의 협력 파트너였는데, 그레이트 테크의 오진무 대표였다.정치와 재벌가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들이 서려 있었다. 오진무의 매제는 정계 출신으로, 그의 부모와 형제도 정부 기관에서 요직을 맡고 있거나 공검법에 근무하고 있었고, 누나는 대학교수였다.지난번, 오진무 대표와 연을 튼 이후로 오
온하랑이 얼른 몸을 피했다.승합차가 그녀의 곁을 지나갔다.온하랑이 슬쩍 쳐다보니, 승합차의 옆문이 열려있었다.머릿속에서 비상벨이 번뜩 크게 울렸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차 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번개와 같은 속도로 그녀를 차로 끌고 가더니 손등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세게 내리쳤다.온하랑은 시야가 깜깜해지며 정신을 잃었다.10시인데 내려오지 않는 온하랑은 기다리던 기사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온하랑에게 채용됐을 당시, 그녀가 가장 바쁠 때였는데 자주 야근하거나 접대를 해도 11시 정도였다.지금은 10시여서 기사는 아직 온하랑이 바빠서 전화를 못 받는 줄로만 알고 신경 쓰지 않았다.몇 분 후,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기사가 재단으로 향해 확인했다. 하지만 재단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기사가 문어구에서 다시 한번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운전기사는 당황하여 급히 사무실 모니터룸으로 향해 감시카메라를 찾았다. 다행하게도 말이 잘 통해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걸렸다.한참 뒤척인 끝에 기사는 CCTV에서 온하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영상에 의하면 온하랑은 9시 12분에 엘리베이터에 진입하여 9시 13분에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여닫힐 때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지하 1층에서 내렸다.건물 옆에 쇼핑몰이 있었는데, 지하 주차장은 서로 통해있었다. 쇼핑몰의 지하 1층에는 종합 마트가 있었는데 쇼핑하러 갔을까 싶었다.하지만 쇼핑한다고 해도 한 시간 동안이나 하지는 않을 것이고, 전화도 받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기사가 급히 물었다.‘지하 주차장의 카메라는요?”모니터링 실 스태프가 안타깝다는 듯이 답했다.“상황이 공교롭네요. 지하 주차장 카메라 시스템에 어제 문제가 생겨서 아직 수리 전이에요. 전체 지하 주차장에 현재 영상이 없어요.”그는 심장이 뛰다 못해 뛰쳐나올 것 같았다.‘어떻게 이렇게 공교
은은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문 앞에는 머리를 짧게 자른 키 작은 남자가 상품을 훑어보는 것처럼 온하랑을 보더니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보기에 괜찮은 것 같네. 좋은 값은 받을 수 있겠어.”온하랑의 마음이 차게 식었다.‘설마 인신매매?’이전에 외딴 지역으로 유괴되어 처참한 꼴을 당한 여성들을 생각한 온하랑은 지금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죽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뒤에 있던 남자는 초췌하고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머리와 수염도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귀찮다는 말투로 답했다.“얼른 돈이나 줘.”자세히 보니 낯익은 모습이었다.머릿속에서 얼핏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밖에 있는 지저분한 남자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그 남자는 바로 민성주였다.경찰의 수배와 수사로 인해 각 기차역과 고속도로에도 그를 수색하는 인력이 포진되어 있었다. 민성주는 강남시를 떠나지 못하고 숨어다니고 있었다.이틀 전, 누군가 그의 행방을 찾아 한탕 더 뛰라고 했다. 온하랑을 인신매매범에게 넘겨 산골짜기에 팔아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하면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해외로 도피시켜 수배를 피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온하랑이 단서를 발견하고 다시 사건을 조사하는 바람에 그가 지금 이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은 잊지 못하는 민성주였다.그는 온하랑이 미웠다. 오랫동안 그 일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온하랑이 미웠다.하여 그는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온하랑을 인신매매범에게 팔아 산골짜기에서 노총각들의 출산 기계가 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민성주도 인신매매범과 함께 온하랑을 데리고 강남시를 벗어나 직접 산골짜기에 팔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그도 멍청이만은 아니었다.경찰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온하랑이 사라지면 경찰은 더욱 통제를 강화할 것이었고, 그는 더욱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얼른 돈을 챙겨 이 상황을 피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출국하려고 했다.키 작은 남자가 주머니에서 지폐 두 다발을 꺼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