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처럼 꼿꼿하고 책임감 있는 부승민을 생각하니 임연지는 그에게 더 큰 호감을 느꼈다.하지만 부승민의 책임감은 오롯이 온하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임연지는 질투로 인해 얼굴이 흉악해졌다.‘왜? 왜 온하랑은 부승민과 오빠의 사랑을 동시에 받을 수 있지? 왜 이혼하고 나서도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그렇게 목을 매는 거지? 부승민이 나한테 온하랑을 대하는 것처럼 대한다면, 내가 억울함을 당했을 때 바로 나서서 해결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고모, 정말 온하랑이랑 모녀간의 정을 회복하게? 온하랑을 최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임연지가 입술을 부풀린 채 임가희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당연히 그럴 일은 없지. 내가 그러고 싶어도 온하랑이 절대 승낙하지 않을 거야. 걔가 멍청이도 아니고. 너는 걱정하지 마, 네 몫을 빼앗아 갈 사람은 없어.”임연지가 한숨을 돌렸다.“고모, 역시 고모가 최고야.”임가희가 웃었다. 무엇인가 생각이라도 난 듯, 표정을 굳히더니 임연지의 손등을 치며 물었다.“연지야, 네 고모부와 오빠가 너를 유학 보낼 생각이던데 어느 나라 가고 싶어? 다 들어주실 거야.”임연지가 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가희를 바라보았다.임가희의 진지한 표정을 확인한 임연지가 농담이 아님을 깨닫고는 당황햇다.“고모, 저는 유학 가고 싶지 않아요. 네? 고모부랑 오빠한테 잘 얘기해주세요.”임가희가 한숨을 내쉬었다.“안돼, 연지야. 아직도 내가 이 집에서 어떤 위치인지 모르겠어? 두 부자가 같이 결정한 일을 내가 어떻게 바꾸겠니. 이번 일은 네가 너무 크게 벌였어.”임연지가 울기 시작했다.“고모, 제가 이렇게 빌게요. 정말 유학 가고 싶지 않아요. 해외 가면 모두 낯선 곳이고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제가 밖에서 그렇게 고생하는 거 지켜보실 거예요?”임가희가 임연지의 등을 두드리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고모가 너를 도와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나도 방법이 없어. 하지
부승민이 두판으로 보낸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장국호는 이미 두판에서 결혼하고 슬하에 자식까지 있었다.부승민이 보낸 사람이 전한 소식에 의하면 장국호가 양강에서 머무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주위의 사람에게 수소문해 보니 장국호는 하재범 일행에게 잡혀가고 장국호의 아내와 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갔다고 했다.부승민의 추측에 의하면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간 사람은 아마 최동철의 사람일 것이다. 국경에서 장국호를 잡은 후, 순리대로 아내와 아이로 장국호를 협박하여 그를 경찰에 넘기는 계획일 것이다.더 깊이 생각한다면 장국호가 국경에서 하재범의 손에서 벗어나는 상황도 아마 최동철의 사람이 손을 써 장국호에게 접근하고 그를 위협하기 위함을 것이다.일은 절반쯤 성공했을 터였다.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납치한 패거리들은 마음을 놓고 있어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그 틈을 타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구출해 데리고 있었다. 지금은 은밀한 곳에서 부승민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부승민은 직접 장국호의 아내와 아이를 만나고 경찰서에서 장국회의 면회를 신청했다.장국호의 죄명은 이미 10년 전에 정해졌다. 추서윤이 무고하든 아니든 그는 도망갈 수 없었다.아내와 아이가 누구 손에 있으면 장국호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했다.부승민이 그의 아내와 아이의 동영상을 보여주자, 장국호는 사건 번복에 동의했다.현재 사건은 이미 종결되어 감찰원 심사를 받고 있었는데, 부승민이 연줄을 동원하여 감찰원에 그대로 묶어 두었다.수사 결과를 뒤집으려면 검찰에서 재심사를 진행해야 했다.이를 위해 부승민이 관련 인원들을 초대하여 접대했는데, 그중 한 명이 검찰이었다.그 검찰의 외삼촌이 부승민의 협력 파트너였는데, 그레이트 테크의 오진무 대표였다.정치와 재벌가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들이 서려 있었다. 오진무의 매제는 정계 출신으로, 그의 부모와 형제도 정부 기관에서 요직을 맡고 있거나 공검법에 근무하고 있었고, 누나는 대학교수였다.지난번, 오진무 대표와 연을 튼 이후로 오
온하랑이 얼른 몸을 피했다.승합차가 그녀의 곁을 지나갔다.온하랑이 슬쩍 쳐다보니, 승합차의 옆문이 열려있었다.머릿속에서 비상벨이 번뜩 크게 울렸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차 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번개와 같은 속도로 그녀를 차로 끌고 가더니 손등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세게 내리쳤다.온하랑은 시야가 깜깜해지며 정신을 잃었다.10시인데 내려오지 않는 온하랑은 기다리던 기사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온하랑에게 채용됐을 당시, 그녀가 가장 바쁠 때였는데 자주 야근하거나 접대를 해도 11시 정도였다.지금은 10시여서 기사는 아직 온하랑이 바빠서 전화를 못 받는 줄로만 알고 신경 쓰지 않았다.몇 분 후,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기사가 재단으로 향해 확인했다. 하지만 재단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기사가 문어구에서 다시 한번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운전기사는 당황하여 급히 사무실 모니터룸으로 향해 감시카메라를 찾았다. 다행하게도 말이 잘 통해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걸렸다.한참 뒤척인 끝에 기사는 CCTV에서 온하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영상에 의하면 온하랑은 9시 12분에 엘리베이터에 진입하여 9시 13분에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여닫힐 때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지하 1층에서 내렸다.건물 옆에 쇼핑몰이 있었는데, 지하 주차장은 서로 통해있었다. 쇼핑몰의 지하 1층에는 종합 마트가 있었는데 쇼핑하러 갔을까 싶었다.하지만 쇼핑한다고 해도 한 시간 동안이나 하지는 않을 것이고, 전화도 받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기사가 급히 물었다.‘지하 주차장의 카메라는요?”모니터링 실 스태프가 안타깝다는 듯이 답했다.“상황이 공교롭네요. 지하 주차장 카메라 시스템에 어제 문제가 생겨서 아직 수리 전이에요. 전체 지하 주차장에 현재 영상이 없어요.”그는 심장이 뛰다 못해 뛰쳐나올 것 같았다.‘어떻게 이렇게 공교
은은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문 앞에는 머리를 짧게 자른 키 작은 남자가 상품을 훑어보는 것처럼 온하랑을 보더니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보기에 괜찮은 것 같네. 좋은 값은 받을 수 있겠어.”온하랑의 마음이 차게 식었다.‘설마 인신매매?’이전에 외딴 지역으로 유괴되어 처참한 꼴을 당한 여성들을 생각한 온하랑은 지금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죽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뒤에 있던 남자는 초췌하고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머리와 수염도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귀찮다는 말투로 답했다.“얼른 돈이나 줘.”자세히 보니 낯익은 모습이었다.머릿속에서 얼핏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밖에 있는 지저분한 남자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그 남자는 바로 민성주였다.경찰의 수배와 수사로 인해 각 기차역과 고속도로에도 그를 수색하는 인력이 포진되어 있었다. 민성주는 강남시를 떠나지 못하고 숨어다니고 있었다.이틀 전, 누군가 그의 행방을 찾아 한탕 더 뛰라고 했다. 온하랑을 인신매매범에게 넘겨 산골짜기에 팔아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하면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해외로 도피시켜 수배를 피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온하랑이 단서를 발견하고 다시 사건을 조사하는 바람에 그가 지금 이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은 잊지 못하는 민성주였다.그는 온하랑이 미웠다. 오랫동안 그 일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온하랑이 미웠다.하여 그는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온하랑을 인신매매범에게 팔아 산골짜기에서 노총각들의 출산 기계가 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민성주도 인신매매범과 함께 온하랑을 데리고 강남시를 벗어나 직접 산골짜기에 팔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그도 멍청이만은 아니었다.경찰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온하랑이 사라지면 경찰은 더욱 통제를 강화할 것이었고, 그는 더욱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얼른 돈을 챙겨 이 상황을 피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출국하려고 했다.키 작은 남자가 주머니에서 지폐 두 다발을 꺼냈다.
“날 바보로 아는 거야? 괜한 힘 빼지 마.”키 작은 남자가 온하랑을 바라보며 싸늘히 웃었다.‘이쁘고 기품 있는 게 정말 부잣집 여자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파는 게 더 안전해. 자유로워진 후에 경찰에 신고해서 나를 잡으면 어떡해?’남자가 다가와 온하랑을 밀어붙이자, 손발이 묶인 온하랑은 일어설 수가 없었다.그녀가 빠르게 말했다.“나를 외딴 산골짜기에 팔아봤자 모두 장가도 못 간 홀아비일 터인데 얼마에 팔 수 있겠어? 하지만 나를 놓아준다면 1억, 아니 2억도 줄게!”그녀의 말을 듣자 남자의 걸음이 멈칫했다.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 사람들이 여자를 사려는 목적은 명확했다.집안이 가난하고 본인이 별 보잘것없어서 시집오려는 여자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아무리 이쁜 여자라고 해도 기껏해야 천만 원 정도를 받을 뿐이었다. 더 많이 부르면 그 홀아비들도 지급할 능력이 없었다. 천만 원조차도 그들이 지금껏 고생해서 모아둔 전부일 것이다.게다가 최근 단속이 심해져 더 이상 이런 일을 지속하기 어려웠다.온하랑 입에서 1억, 2억이 나오자, 남자의 욕심이 들끓어 올랐다.정말 2억을 받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 모아둔 재산까지 합쳐서 후반생은 별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었다.온하랑은 남자의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며 물 들어온 김에 노를 저었다.“못 믿겠으면 내 가방을 봐. 진품이야. 중고 시장에 가져가도 400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 핸드폰도 애플 15 플러스, 2TB짜리야. 못해도 200만 원은 받을 수 있겠지.”가방은 그녀가 부풀린 가격이었다.그녀는 그렇게 높은 가격을 주고 가방을 하지 않았다. 몇십만 원짜리 가방으로 저렴하지도 비싸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명품 가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이라 일단 거짓말을 했다.핸드폰은 진실이었다. 언제 영감이 떠오를지 몰라서 그녀는 언제든지 촬영하는 습관이 있었다. 카메라에 대한 요구도 높아서 수시로 촬영하고 저장하고 있었다.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네
민성주가 사람을 그에게 팔 때, 받기 두려워할까 봐 온하랑의 신분에 관해서 얘기하지 않고 그녀와의 은원관계에 관해서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저 오랫동안 굶다가 길에서 홀로 있는 모습을 보고 나쁜 마음을 먹고 납치해 왔다고 했다.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모든 걸 할 수 있었다.남자는 민성주의 모습을 보고 그가 경찰을 피해 숨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고 그의 말에 대한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다.온하랑도 솔직하게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물은 이유는 집안 배경을 알아보려고 한다는 사실은 자명했다.솔직하게 얘기하여 부승민과의 관계를 알고, 부승민의 성격을 안다면 남자는 아마 온하랑은 바로 죽일 것이다.부승민에게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당시의 여자 친구 추서윤으로 협박을 가했지만, 그는 협박을 무시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었다.온하랑이 멈칫하며 말을 이었다.“내가 입고 있는 코트 중고 시장에서 50만 원이야. 믿지 못하겠으면 먼저 이 코트를 가지고 중고 시장에 가서 물어봐. 그리고 내 이름은 김시연이야. 아버지 성함은 김웅이시고, 당진의류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어. 검색해 보면 알 거야.”그녀는 김시연의 이름을 빌렸다. 김시연의 집안도 부유하고 걱정 없이 살고 있었지만, 부승민처럼 눈에 띄지는 않았다.그때, 온하랑은 민성주가 그녀의 가방을 챙겨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방에는 그녀의 신분증이 있었는데 들통나기 쉬웠다.“김시연...”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반복하여 중얼거렸다.“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그는 문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고 멀지 않은 곳에서 망을 보는 동생을 불러 방금 온하랑과의 대화를 전해주었다.동생은 2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두 눈을 반짝였다.“형, 2억이 끝이 아닐 거예요. 잘하면 3억, 6억도 뜯어낼 수 있어요.”남자도 흔들린 마음으로 생각하다 답했다.“김시연이라고 해. 아빠는 김웅, 의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데 그런 사람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봐.”동생은 학식도 없고 어떻게 조사해야 하
온하랑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남자는 핸드폰을 동생에게 던져주었다.“틀림없나 보네.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겠어. 돈을 가지고 일단 피해 있자.”“휴, 형. 무슨 생각이야? 오늘 저녁에 저 여자 아빠한테 전화하게”동생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남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동생에게 말했다.“새 카드로 전화해서 일단 돈을 마련하라고 해야지. 우리도 도망칠 구석을 알아보고 이틀 후에 접선 지역을 찾아야지.”“알았어.”동생이 차에서 새로운 전화카드 하나를 꺼내 핸드폰에 끼웠다.이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위치가 특정될까 봐 전화카드를 수시로 바꿔 끼웠다.남자가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와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은 경계의 태세로 남자를 바라보며 숨을 참았다.“알겠어. 건드리지 않을게. 아빠 번호 알려줘. 돈만 손에 넣으면 풀어줄게.”남자가 말했다.온하랑이 남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빠를 만나면 사건을 철회하도록 설득할 수 있어. 하지만 당신도 나를 다치게 해서는 안 돼. 나의 안전을 보장해 줘.”남자가 온하랑을 훑어보며 아쉬운 마음을 지웠다. 돈만 받으면 앞으로 이런 여자는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남자가 답했다.“약속할게.”“핸드폰 줘. 내가 아빠한테 얘기할게.”남자는 온하랑이 허튼수작이라도 할까 봐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번호 불러. 전화는 내가 해.”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부승민의 번호를 불러줬다.그녀의 심장은 정처 없이 빠르게 뛰었다.‘실종된 걸 알면, 이 정도는 알아서 맞장구를 쳐주지 않을까? 도움 필요 없다고 했는데, 또 도움을 청하게 되네.’남자가 전화를 걸자, 상대편은 바로 받았다.“여보세요?”핸드폰 너머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엇인가 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젊어 보이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남자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온하랑을 쳐다보았다.‘거짓말한 건 아니겠지?’남자가 음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당진의류의 대표 김웅 맞아?”“당신은 누군데?”부승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그렇게 빨라?”“나도 몰라!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얘기한 바에 의하면 곧 도착한대.”동생은 긴장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남자와 같은 베테랑 장사꾼들은 접선 지점에 모두 망을 봐주는 사람들을 준비한다.망을 봐주는 사람들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제때 알려주어 남자에게 더 많은 탈출 시간을 제공했다.동생도 망봐주는 사람의 소식을 듣고 경찰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남자가 낮게 욕설을 뱉었다.“젠장! 감히 나를 속여!”말을 마치고 그는 얼른 전화를 끊고 동생에게 뿌렸다.동생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처럼 얼른 전화카드를 뽑아 버렸다.남자는 어두운 안색으로 온하랑을 쳐다보고는 뺨을 후려쳤다.“감히 시간을 끌어!”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맞은 온하랑은 바닥에 엎어졌다. 뺨에서 통증이 치밀어 오르고 귀가 윙윙거리며 머리마저 어지러웠다.“나... 나 아니야!”그녀는 정말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저 팔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었다.경찰이 이렇게 빨리 이곳으로 향해 인신매매범을 발견할 줄은 몰랐다.이제 그는 더 이상 온하랑의 임시방편을 믿지 않을 것이었다.남자가 냉소를 지으며 찢어진 천을 온하랑의 입에 쑤셔 넣고는 둘러메고 차로 향했다.“얼른 가자.”차가 쏜살같이 그곳을 떠났다.온하랑의 가방 안에는 위치추적기가 있었다.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가방이었는데, 육광태가 이전에 공항에서 넣어둔 것이었다.그로 인해 부승민은 가끔 손쉽게 온하랑의 위치를 파악하여 그녀를 찾아왔다.온하랑의 기사가 부승민에게 그녀의 실종 사실을 알린 후, 그는 바로 온하랑의 위치를 추적했다. 낯선 길가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경찰에게 연락하여 CCTV를 확보하고 나서야 온하랑의 가방이 한 승합차에서 버려졌음을 알게 되었다.경찰은 CCTV를 통해 승합차의 행방을 찾았고, 대략적인 위치를 특정한 이후 인질 구출 작전을 실행했다.부승민의 사람들도 함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