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부승민이 일어났을 때 온하랑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안문희가 부시아의 장난감을 치우고 있을 때, 부승민이 게스트 룸에서 나왔다. 한밤중까지 온하랑을 돌봐주고 열이 내려갈 때쯤에야 게스트 룸으로 가 눈을 붙인 부승민이었다.부승민이 안문희에게 지시했다.“오늘 제 방에 있는 침대 시트, 이불, 매트리스까지 사람 불러서 치워주세요.”안문희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하기도 전에 부승민이 얼른 덧붙였다.“음료수를 쏟았어요.”“알겠습니다, 대표님.”안문희가 답했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침대 시트, 이불, 매트리스를 정리하게 하고 집에 가져다 쓰기로 마음먹었다.모두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인데 저렴하지 않아 버리면 아깝게 느껴졌다.부승민은 재력이 넘쳐 일부 물건들은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버렸다. 그것들은 전부 안문희가 주워서 집으로 가져가고 있었다.“그리고 아침은 하랑이 부르지 마세요. 더 자게 내버려두세요.”“알겠습니다.”안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에 걸려 열이 날 때는 푹 쉬는 게 최고였다. 부승민이 분부하지 않더라도 온하랑을 깨우지 않았을 것이었다.주말이라 부시아도 수업이 없었다. 그녀가 깨났을 때 안문희는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부시아는 혼자 세수하고 로션까지 바르고 나와 부승민의 곁에 서서 물었다.“삼촌, 캐리어는 가지고 왔어요?”부승민의 입가가 떨렸다.사실 그의 캐리어는 줄곧 자동차 트렁크에 있었다. 부승민이 온하랑을 안아 차에서 내린 후, 기사도 캐리어를 갖고 올라오는 것을 깜빡했다.“갖고 왔어. 아래층에 있을 테니 삼촌이 얼른 가서 챙겨올게.”“좋아요.”부승민은 키를 가지고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지하 차고로 향했다.부시아가 로션을 바르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났다.시아는 소파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작은 보폭으로 문 쪽으로 달려가 손가락으로 인터폰을 조작했다. 화면으로 누군가 밖에 있는 게 보였는데, 방문한 사람은 부승민의 비서였다.부시아도 회사에 간 적이 있었고, 대표실의 비서들이 잘 돌봐줘서
부시아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게스트 룸에 왜 여자가 있지?’그 순간 부시아의 작은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 차마 전부 담을 수 없었다.어젯밤 안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 삼촌은 거부하면서 피곤하다고 놀아주기 싫다고 했었다.딱 봐도 안쪽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그 여자가 숙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면 삼촌이 그런 반응을 보일 리도 없고, 숙모가 먼저 나와서 놀아줬을 것이었다.할머니가 얘기하기로 삼촌은 어제 게스트 룸에서 잤다고 했는데, 그 여자도 게스트 룸에 있었다.‘혹시 둘이 같이 잔 건가?’부시아는 비록 어렸지만, 남녀관계는 부부만 함께 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설마, 삼촌 마음이 변한 건가?’부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닫고 얼른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삼촌은 안방에서 잤는데 할머니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었다.안방 문을 열자 내부는 남자와 여자의 옷이 널브러진 채 아수라장이었다.부시아는 철저히 실망하며 소파에 숨죽여 앉았다.비서가 보낸 옷은 틀림없이 저 방에 있는 여자에게 줄 옷일 것이다.‘흑, 방 안에 있는 여자는 싫어! 숙모가 좋아!’“왜 그러세요?”안문희가 월남쌈 한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부시아는 입술이 툭 튀어나온 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안문희가 얼른 나서서 달랬다.“왜 울고 있어요? 할머니한테 얘기해 봐요. 어디 아파요?”부시아에게서 답은 없었다. 그녀는 괴로운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문희는 더 조급해 났다.문을 여는 소리가 나며 부승민이 캐리어를 들고 들어왔다.“시아야...”“대표님, 얼른 와서 보세요. 시아 아가씨가 계속 울면서 말도 안 해요.”부승민이 얼른 캐리어를 내려놓고 큰 보폭으로 다가와 시아를 안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시아야, 왜 그러니? 어디 아파? 삼촌한테 알려줘.”부시아가 발버둥을 치며 부승민의 품을 거부했다.“안지 마요! 삼촌 싫어요!”
부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은 입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어... 왜 숙모가 여기에...?’온하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이자 이불이 흘러내렸다. 하얗고 갸름한 목에는 키스 마크가 가득했다.부승민은 한순간 아이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줄까 봐 찔려서 얼른 부시아를 안고 나가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숙모 만났으니 됐지?”“네...”부시아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댔다.“이제 얘기해 볼까? 아까는 왜 그랬어?”“음... 삼촌! 제 선물 챙겨오셨다면서요? 뭐예요?”부시아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부시아!”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네? 삼촌, 저 불렀어요?”부시아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시침을 떼는 부시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선물은 몰수야.”“아, 안 돼요. 삼촌!”부시아의 작은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녀는 얼른 부승민의 목을 껴안고 그의 얼굴에 뽀뽀했다.“삼촌이 최고예요!”“삼촌은 하나도 안 좋아요. 아까도 삼촌은 못 안게 하고 숙모만 찾았잖아요.”부시아가 찔리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그 순간 부승민은 어제의 온하랑이 갑자기 생각났다.찔리는 표정은 마치 복사라도 한 듯 똑같았다.부승민은 갑자기 부시아에게 계속 다그치기 어려워졌다.‘될 대로 되라지, 작은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부승민은 부시아에게 정교한 오르골을 선물했다. 맘에 들었는지 그녀는 오르골을 안고 거실에서 한참을 놀다가 고개를 들어 한숨을 쉬었다.“숙모는 왜 아직도 안 깨요?”온하랑은 점심이 되어서야 깨어났다.눈을 뜨니 자신이 낯선 방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문득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임가희를 만나러 가던 길에 부승민이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흐트러진 화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온하랑의 얼굴에 홍조가 띠었다. 눈을 감자 곱슬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이불 아래 그녀는 본인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음
부승민은 임가희가 온하랑에게 약을 먹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온하랑이 핸드폰으로 타자해서 부승민에게 보여주었다.“레스토랑의 물과 음식은 먹지 않았어.”영화 촬영장에서는 물을 많이 마셨지만, 그곳에서 누가 그녀를 해친다는 말인가.온하랑과 배우들이 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부씨 일가의 지지도 있으니, 그녀를 해치려고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부승민이 답했다.“그런 약은 모두 먹는 게 아니야. 일부는 연기처럼 피워서 흡입할 수도 있어.”온하랑의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룸에 들어갈 때, 확실히 향기를 맡았었다.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임가희가 직접 10개월을 품은 친딸인데 말이다!임가희가 아무리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임연지를 위해서 자신을 해칠 이유가 있을까?“레스토랑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온하랑이 타이핑한 글을 보며 부승민이 몸을 일으켜 차키를 챙겼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두 사람은 어제저녁의 레스토랑으로 와 같은 룸으로 향했다. 온하랑이 룸에 들어서자,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향기가 느껴졌다. 지금의 냄새는 레스토랑 스태프가 뿌린 방향제의 냄새였다.온하랑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으며 사지가 저렸다.그녀는 단지 임가희가 본인에게 차갑고 무관심하며 임연지에게 더 마음을 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약까지 쓸 줄은 몰랐다.부승민이 오지 않았더라면, 약효가 발작한 후 누구의 침대로 보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온하랑의 떨리는 어깨를 보며 부승민이 다가가 감싸안았다.“괜찮아, 하랑아. 그 여자가 너를 딸로 여기지 않는다면 너도 그 여자를 위해 슬퍼하지 마. 그럴 가치 없어.”온하랑이 코를 훌쩍이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답했다.“나도 알아.”차도 돌아온 부승민이 차분함을 되찾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무심코 물었다.“왜 너한테 약을 먹였는지는 생각해 봤어?”온하랑이 답했다.“아마... 윗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겠지.”오재원 사건은 사안이 명백하여 수사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검찰로 송치되어 검찰이
계획이 실패하고 임가희가 경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최국환에게 제지당했다.최국환이 말했다.“내일 나도 마침 강남시에 가야 하니 같이 돌아오면 되겠어.”임가희가 막 승낙하려고 할 때, 최국환이 말을 덧붙였다.“맞다. 내일 연지도 함께 와. 시간 내서 온하랑에게 사과하게 해. 이건 누가 봐도 연지가 잘못한 일이야. 그때 당신이 연지랑 같이 가서 모녀지간의 사이도 좀 누그러뜨려 봐.”임가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벌리며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국환 씨, 당신도 연지 성격 알잖아요.”게다가 어젯밤 일도 있으니 온하랑이 그녀를 증오하면 했지, 모녀의 정은 나누지 않을 것이었다.최국환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성격을 아니까 하는 소리야. 뭘 해도 되고, 뭘 하면 안 되는지 잘 가르쳐야지. 오냐오냐 키우면 엇나갈 뿐이야.”“알겠어요. 하지만 온하랑쪽은 저한테 오해가 깊어요. 쉽게 풀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당신이 걔한테 잘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하랑이도 당신 마음 알게 될 거야. 짧은 순간에 너무 급해하지 마.”최국환이 영양가 없는 말을 뱉었다.지금과 같을 때, 자신이 부승민 앞에 나서 부승민의 친부임을 밝히고 최씨 가문으로 복귀를 종용한다면 부승민은 아마 그를 내쫓을 것이었다.그는 부승민의 얼굴에서 한이 맺힌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저 임가희와 온가랑이 중간에서 연결고리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전화를 끊은 임가희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질뻔했다.‘감히 나랑 연지한테 온하랑에게 사과하라고? 온하랑한테 잘 보이라고? 그런 잡종한테 가당키나 한 일인가!’임연지가 그날 돈을 받고 최씨 가문을 떠나려고 했을 때, 경주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최동철의 사람에게 붙잡혀 2층 아파트에 갇혔다.최동철은 임연지의 자유만 속박했을 뿐 다른 방면에서는 홀대한 적이 없었다.임연지가 뭘 먹고 싶다고 하면 경호원을 보내 사 오게 했다.처음에는 그런 방식으로 경호원을 괴롭혀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지만, 이틀이 지나고 나서는 그런 방
소나무처럼 꼿꼿하고 책임감 있는 부승민을 생각하니 임연지는 그에게 더 큰 호감을 느꼈다.하지만 부승민의 책임감은 오롯이 온하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임연지는 질투로 인해 얼굴이 흉악해졌다.‘왜? 왜 온하랑은 부승민과 오빠의 사랑을 동시에 받을 수 있지? 왜 이혼하고 나서도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그렇게 목을 매는 거지? 부승민이 나한테 온하랑을 대하는 것처럼 대한다면, 내가 억울함을 당했을 때 바로 나서서 해결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고모, 정말 온하랑이랑 모녀간의 정을 회복하게? 온하랑을 최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임연지가 입술을 부풀린 채 임가희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당연히 그럴 일은 없지. 내가 그러고 싶어도 온하랑이 절대 승낙하지 않을 거야. 걔가 멍청이도 아니고. 너는 걱정하지 마, 네 몫을 빼앗아 갈 사람은 없어.”임연지가 한숨을 돌렸다.“고모, 역시 고모가 최고야.”임가희가 웃었다. 무엇인가 생각이라도 난 듯, 표정을 굳히더니 임연지의 손등을 치며 물었다.“연지야, 네 고모부와 오빠가 너를 유학 보낼 생각이던데 어느 나라 가고 싶어? 다 들어주실 거야.”임연지가 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가희를 바라보았다.임가희의 진지한 표정을 확인한 임연지가 농담이 아님을 깨닫고는 당황햇다.“고모, 저는 유학 가고 싶지 않아요. 네? 고모부랑 오빠한테 잘 얘기해주세요.”임가희가 한숨을 내쉬었다.“안돼, 연지야. 아직도 내가 이 집에서 어떤 위치인지 모르겠어? 두 부자가 같이 결정한 일을 내가 어떻게 바꾸겠니. 이번 일은 네가 너무 크게 벌였어.”임연지가 울기 시작했다.“고모, 제가 이렇게 빌게요. 정말 유학 가고 싶지 않아요. 해외 가면 모두 낯선 곳이고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제가 밖에서 그렇게 고생하는 거 지켜보실 거예요?”임가희가 임연지의 등을 두드리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고모가 너를 도와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나도 방법이 없어. 하지
부승민이 두판으로 보낸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장국호는 이미 두판에서 결혼하고 슬하에 자식까지 있었다.부승민이 보낸 사람이 전한 소식에 의하면 장국호가 양강에서 머무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주위의 사람에게 수소문해 보니 장국호는 하재범 일행에게 잡혀가고 장국호의 아내와 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갔다고 했다.부승민의 추측에 의하면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간 사람은 아마 최동철의 사람일 것이다. 국경에서 장국호를 잡은 후, 순리대로 아내와 아이로 장국호를 협박하여 그를 경찰에 넘기는 계획일 것이다.더 깊이 생각한다면 장국호가 국경에서 하재범의 손에서 벗어나는 상황도 아마 최동철의 사람이 손을 써 장국호에게 접근하고 그를 위협하기 위함을 것이다.일은 절반쯤 성공했을 터였다.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납치한 패거리들은 마음을 놓고 있어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그 틈을 타 장국호 아내와 아이를 구출해 데리고 있었다. 지금은 은밀한 곳에서 부승민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부승민은 직접 장국호의 아내와 아이를 만나고 경찰서에서 장국회의 면회를 신청했다.장국호의 죄명은 이미 10년 전에 정해졌다. 추서윤이 무고하든 아니든 그는 도망갈 수 없었다.아내와 아이가 누구 손에 있으면 장국호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했다.부승민이 그의 아내와 아이의 동영상을 보여주자, 장국호는 사건 번복에 동의했다.현재 사건은 이미 종결되어 감찰원 심사를 받고 있었는데, 부승민이 연줄을 동원하여 감찰원에 그대로 묶어 두었다.수사 결과를 뒤집으려면 검찰에서 재심사를 진행해야 했다.이를 위해 부승민이 관련 인원들을 초대하여 접대했는데, 그중 한 명이 검찰이었다.그 검찰의 외삼촌이 부승민의 협력 파트너였는데, 그레이트 테크의 오진무 대표였다.정치와 재벌가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들이 서려 있었다. 오진무의 매제는 정계 출신으로, 그의 부모와 형제도 정부 기관에서 요직을 맡고 있거나 공검법에 근무하고 있었고, 누나는 대학교수였다.지난번, 오진무 대표와 연을 튼 이후로 오
온하랑이 얼른 몸을 피했다.승합차가 그녀의 곁을 지나갔다.온하랑이 슬쩍 쳐다보니, 승합차의 옆문이 열려있었다.머릿속에서 비상벨이 번뜩 크게 울렸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차 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번개와 같은 속도로 그녀를 차로 끌고 가더니 손등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세게 내리쳤다.온하랑은 시야가 깜깜해지며 정신을 잃었다.10시인데 내려오지 않는 온하랑은 기다리던 기사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온하랑에게 채용됐을 당시, 그녀가 가장 바쁠 때였는데 자주 야근하거나 접대를 해도 11시 정도였다.지금은 10시여서 기사는 아직 온하랑이 바빠서 전화를 못 받는 줄로만 알고 신경 쓰지 않았다.몇 분 후,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기사가 재단으로 향해 확인했다. 하지만 재단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기사가 문어구에서 다시 한번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운전기사는 당황하여 급히 사무실 모니터룸으로 향해 감시카메라를 찾았다. 다행하게도 말이 잘 통해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걸렸다.한참 뒤척인 끝에 기사는 CCTV에서 온하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영상에 의하면 온하랑은 9시 12분에 엘리베이터에 진입하여 9시 13분에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여닫힐 때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지하 1층에서 내렸다.건물 옆에 쇼핑몰이 있었는데, 지하 주차장은 서로 통해있었다. 쇼핑몰의 지하 1층에는 종합 마트가 있었는데 쇼핑하러 갔을까 싶었다.하지만 쇼핑한다고 해도 한 시간 동안이나 하지는 않을 것이고, 전화도 받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기사가 급히 물었다.‘지하 주차장의 카메라는요?”모니터링 실 스태프가 안타깝다는 듯이 답했다.“상황이 공교롭네요. 지하 주차장 카메라 시스템에 어제 문제가 생겨서 아직 수리 전이에요. 전체 지하 주차장에 현재 영상이 없어요.”그는 심장이 뛰다 못해 뛰쳐나올 것 같았다.‘어떻게 이렇게 공교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