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가희는 최국환으로부터 그만하고 경주로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아직 합의서도 받아내지 못했는데 왜 돌아오라는 거예요?”최국환이 물었다.“온하랑은 당신 딸 아니야?”임가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최국환이 이어서 말했다.“당신 그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별다른 말은 안 했어요. 그저 그 애의 출생을 알려줬어요.”그러자 최국환은 부승민의 말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다.“부승민이 방금 직접 우리 집에 찾아왔어. 온하랑 그 아이가 너무 슬퍼서 실신했다고 따지러 왔더군. 그러니까 더 이상 찾아가지 마.”“하지만, 그럼 연지는...”“나도 알아, 당신이 연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걸. 다만 이 일은 연지의 잘못이 먼저야. 온하랑은 당신 딸이잖아. 왜 그렇게 그 아이를 괴롭히는 거야? 당신 전남편은 이미 죽었어. 아이한테 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래. 당신이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되지.”임가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해명했다.“나...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렇다고 연지가 오씨 가문 사람들한테 끌려가는 걸 두 눈 펀히 뜨고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온하랑의 아버지가 추상훈이라는 사실은 임가희가 결혼 생활 중에 바람을 피웠다는 말이고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최국환이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그녀도 당연히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이 일은 동철이에게 맡기고 최선을 다하라 할 테니 잘 안돼도 방법이 없어. 누가 걔한테 그런 짓을 하래?”이윽고 최국환은 넌지시 말했다.“사실 난 온하랑 그 아이가 무척 마음에 들어. 전에 그 아이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모두 칭찬이 자자하더군. 얼마 전 촬영대회에서도 1등을 했다고 들었는데 임연지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해. 만약 당신이 그 아이를 데려오고 싶다면 관계를 잘 다져봐. 그 아이가 최씨 가문에 온다면 난 대환영이야.”“...”임가희는 최국환이 임연지를 포기할 계획이라는 것을 알았다. 온하랑과 달리 임연지는 쓸모없어 보이고 큰
“대충 알고 있어요.”“온하랑은 나와 전남편 사이의 아이야. 전남편의 가정 폭력으로 난 엄청난 노력 끝에 겨우 이혼하고 그 사람의 집착을 피하고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오게 되며 어쩔 수 없이 하랑이를 그곳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어. 그 때문에 그 애한테 수년 동안 마음에 빚을 지고 살았어. 방금 너희 아버지께서 나더러 하랑이를 최씨 가문에 데려와 그동안 못다 한 모녀 간의 정을 잘 다지라고 하더라.”최동철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임가희의 중점은 제일 마지막 한마디에 있었다. 온하랑을 최씨 가문에 데려오라는 건 최국환의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싸구려 아버지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온하랑을 여동생으로 만들면 최동철이 쉽게 포기할 줄 알았나 본데 어림도 없었다. 다 교활한 사람들인데 임가희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최동철은 피식 웃었다.“아줌마 의견은요?”“사실 너희 아버지가 간과한 게 있어. 나와 하랑이가 20년 넘게 떨어져 살았는데 무슨 모녀의 정이 남아 있겠니? 나를 증오하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거지. 하지만 연지는 내 곁에서 키우며 내 딸이나 다름없거든. 난 정말 연지가 감옥에 가서 인생을 망친다는 생각만 하면 견딜 수가 없어.”“그래서요?”“너 온하랑을 좋아한다면서? 내가 온하랑의 어머니로서 너한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연지를 오씨 가문에 넘기지만 않는다면 내가 나서서 널 도와줄게.”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임가희는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며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깔았다. 그녀의 계략을 들은 수화기 반대편의 최동철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임가희는 마음을 졸이며 인내심 있게 최동철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지금 도박을 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최동철의 목소리가 수화기 반대편에서 흘러나왔다.“그래요. 그렇게 하죠.”임가희의 입꼬리는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도박에서 이겼다.“다만 최근 일어난 일 때문에 그 애가
레스토랑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룸 안에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임가희를 본 온하랑은 자기 출생의 비밀을 생각하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가방을 내려놓고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임가희는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지난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잖아. 이번에는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으니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하자.”“그럴 필요 없어요. 바로 말해요.”온하랑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더 이상 임가희와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나와 김시연은 오재원과 합의할 수 있어요. 다만, 당신의 성의를 보여줘요.”합의하려면 상대방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만족시켜 주는 게 인지상정이니까.예상치 못한 수확에 임가희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하랑아. 잘 생각했어. 형세에 맞게 판단하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지. 널 서운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왠지 모르게 온하랑은 룸 안이 덥게 느껴졌다. 고개를 기울여 살펴보니 난방이 켜져 있었다. 온하랑은 옷깃을 헐렁하게 풀었다.“그럼 말씀해 보세요. 어떻게 저를 서운하게 하지 않을 건지. 다시 말해, 당신 마음속에 임연지의 가치는 얼마인지 말입니다.”임가희는 웃으며 옆에 놓인 핸드백을 들어 안에서 은행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온하랑의 앞으로 쭉 밀었다. 온하랑은 카드를 들어 흘긋 보고는 눈을 들어 임가희를 쳐다보았다.“안에 10억이 들어있어.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 레스토랑 바로 옆에 ATM기기가 있으니 가서 확인해 보렴.”임가희가 말했다. 최씨 일가와 같은 큰 사업을 하는 집안이 약속까지 하고 굳이 텅 빈 카드를 만들어 그녀를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온하라은 카드를 가방에 넣고 안에서 노트를 꺼냈다. 그녀는 노트에 합의서를 써놓은 상태였다. 그 페이지를 찢어서 임가희에게 넘기려고 하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뛰쳐들어와 온하랑이 멍해 있는 틈을 타서 그녀의 손에 들린 합의서를 빼앗아 갈기
“늦었다는 건 무슨 말이야?”온하랑이 물었다.“그들이 벌써 오빠를 적대시하기 시작했어?” “아니, 이번에 일부러 최씨 가문을 방문하려고 경주로 갔어. 최 회장은 이미 너와 시연 씨를 다시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온하랑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부승민의 행동력은 정말이지 빨랐다.“그러니까...”“그래. 임가희는 이미 최 회장에게서 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자기 의견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야. 만약 네가 동의했다면 내 노력이 헛수고가 됐겠지.”부승민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온하랑은 마음에 찔려 시선을 피했지만 여전히 떳떳한 태도로 말했다.“그럼 나한테 미리 알려주지. 말해줬더라면 내가 왜...”“내가 미리 알려주면 네가 내 도움을 받아들였을까?”“...”온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쩌면 부승민과 그렇게 명확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가 부승민에게 진 빚은 이미 갚기 힘든 정도였고, 한 번 더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마치 일부 사람들처럼 몇십만 원을 빚졌을 때는 돈을 갚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만약 그 빚이 몇천만 원 혹은 억 원대에 달하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배 째라 할 테니까.부승민은 온하랑의 붉어진 얼굴과 이마의 땀을 보더니 운전기사에게 말했다.“히터 풍속 좀 줄여줘요.”“이미 제일 낮은 풍속인데, 끌까요?”운전기사가 말했다.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어 이제는 히터를 틀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꺼요.”온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최 회장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그냥 바로 동의한 거야?”“그래, 넌 너무 멀리 갔어. 최씨 일가와 같은 사업가들은 다른 사람들과 쉽게 척지려고 하지 않아.”부승민은 눈을 내리깔고 최국환과 차윤식의 태도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분명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가 가족 상봉을 하려고 찾아왔을 거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부승민은 최국환을 찾아갈 때에도 상봉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다른 집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온하랑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녀는 더는 자기가 왜 이러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눈앞의 슈퍼 모델 같은 남자의 몸을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고 있었다. 부승민은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몸부림치는 온하랑을 꼭 끌어안았다.차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자 그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온하랑을 안고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부승민은 온하랑을 안고 곧바로 19층으로 갔다. 안문희는 거실에서 청소 중이었고, 부시아는 화장실에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안문희는 부승민이 한 여자를 품에 안고 곧장 안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안문희는 흘끗 보고는 그 여자가 온하랑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머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열이 난 것처럼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문희는 서둘러 빗자루를 내려놓았다.“회장님, 사모님께서 열이 나는 거예요? 제가 가서 해열제를 가져올게요.”부승민은 말리려다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안방으로 갖다줘요. 따뜻한 물도 같이요.”“네.”안문희는 얼른 가지러 갔다. 부승민이 온하랑을 침대에 눕히고 일어나려는데 온하랑이 덩굴처럼 그의 목을 꽉 감싸안았다. 거친 숨결에 부드러운 신음이 섞여 그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피가 끓어오를 정도로 유혹적인 소리였다.“하랑아, 진정해.”온하랑의 팔을 치워버린 부승민은 무릎을 꿇고 앉아 겉옷을 벗겨주었다.“...부승민, 나 너무 더워...”이성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온하랑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안문희가 주전자와 약상자를 들고 들어오자 부승민은 몸을 슬쩍 기울여 온하랑을 가렸다.“저기 테이블 위에 올려놔요. 내가 먹일 테니 문 닫아줘요.”“네,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세요.”전에 온하랑이 열이 날 때도 부승민이 돌보았다. 안문희는 별생각 없이 물건을 내려놓고 방을 나가서 문을 닫았다.부승민은 해열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온하랑을 도와 옷을 벗겨주었다. 온하랑은 끙끙거리며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마구 불을 지폈다. 부승민은 더는 견
아침, 부승민이 일어났을 때 온하랑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안문희가 부시아의 장난감을 치우고 있을 때, 부승민이 게스트 룸에서 나왔다. 한밤중까지 온하랑을 돌봐주고 열이 내려갈 때쯤에야 게스트 룸으로 가 눈을 붙인 부승민이었다.부승민이 안문희에게 지시했다.“오늘 제 방에 있는 침대 시트, 이불, 매트리스까지 사람 불러서 치워주세요.”안문희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하기도 전에 부승민이 얼른 덧붙였다.“음료수를 쏟았어요.”“알겠습니다, 대표님.”안문희가 답했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침대 시트, 이불, 매트리스를 정리하게 하고 집에 가져다 쓰기로 마음먹었다.모두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인데 저렴하지 않아 버리면 아깝게 느껴졌다.부승민은 재력이 넘쳐 일부 물건들은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버렸다. 그것들은 전부 안문희가 주워서 집으로 가져가고 있었다.“그리고 아침은 하랑이 부르지 마세요. 더 자게 내버려두세요.”“알겠습니다.”안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에 걸려 열이 날 때는 푹 쉬는 게 최고였다. 부승민이 분부하지 않더라도 온하랑을 깨우지 않았을 것이었다.주말이라 부시아도 수업이 없었다. 그녀가 깨났을 때 안문희는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부시아는 혼자 세수하고 로션까지 바르고 나와 부승민의 곁에 서서 물었다.“삼촌, 캐리어는 가지고 왔어요?”부승민의 입가가 떨렸다.사실 그의 캐리어는 줄곧 자동차 트렁크에 있었다. 부승민이 온하랑을 안아 차에서 내린 후, 기사도 캐리어를 갖고 올라오는 것을 깜빡했다.“갖고 왔어. 아래층에 있을 테니 삼촌이 얼른 가서 챙겨올게.”“좋아요.”부승민은 키를 가지고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지하 차고로 향했다.부시아가 로션을 바르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났다.시아는 소파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작은 보폭으로 문 쪽으로 달려가 손가락으로 인터폰을 조작했다. 화면으로 누군가 밖에 있는 게 보였는데, 방문한 사람은 부승민의 비서였다.부시아도 회사에 간 적이 있었고, 대표실의 비서들이 잘 돌봐줘서
부시아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게스트 룸에 왜 여자가 있지?’그 순간 부시아의 작은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 차마 전부 담을 수 없었다.어젯밤 안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 삼촌은 거부하면서 피곤하다고 놀아주기 싫다고 했었다.딱 봐도 안쪽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그 여자가 숙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면 삼촌이 그런 반응을 보일 리도 없고, 숙모가 먼저 나와서 놀아줬을 것이었다.할머니가 얘기하기로 삼촌은 어제 게스트 룸에서 잤다고 했는데, 그 여자도 게스트 룸에 있었다.‘혹시 둘이 같이 잔 건가?’부시아는 비록 어렸지만, 남녀관계는 부부만 함께 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설마, 삼촌 마음이 변한 건가?’부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닫고 얼른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삼촌은 안방에서 잤는데 할머니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었다.안방 문을 열자 내부는 남자와 여자의 옷이 널브러진 채 아수라장이었다.부시아는 철저히 실망하며 소파에 숨죽여 앉았다.비서가 보낸 옷은 틀림없이 저 방에 있는 여자에게 줄 옷일 것이다.‘흑, 방 안에 있는 여자는 싫어! 숙모가 좋아!’“왜 그러세요?”안문희가 월남쌈 한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부시아는 입술이 툭 튀어나온 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안문희가 얼른 나서서 달랬다.“왜 울고 있어요? 할머니한테 얘기해 봐요. 어디 아파요?”부시아에게서 답은 없었다. 그녀는 괴로운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문희는 더 조급해 났다.문을 여는 소리가 나며 부승민이 캐리어를 들고 들어왔다.“시아야...”“대표님, 얼른 와서 보세요. 시아 아가씨가 계속 울면서 말도 안 해요.”부승민이 얼른 캐리어를 내려놓고 큰 보폭으로 다가와 시아를 안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시아야, 왜 그러니? 어디 아파? 삼촌한테 알려줘.”부시아가 발버둥을 치며 부승민의 품을 거부했다.“안지 마요! 삼촌 싫어요!”
부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은 입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어... 왜 숙모가 여기에...?’온하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이자 이불이 흘러내렸다. 하얗고 갸름한 목에는 키스 마크가 가득했다.부승민은 한순간 아이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줄까 봐 찔려서 얼른 부시아를 안고 나가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숙모 만났으니 됐지?”“네...”부시아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댔다.“이제 얘기해 볼까? 아까는 왜 그랬어?”“음... 삼촌! 제 선물 챙겨오셨다면서요? 뭐예요?”부시아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부시아!”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네? 삼촌, 저 불렀어요?”부시아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시침을 떼는 부시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선물은 몰수야.”“아, 안 돼요. 삼촌!”부시아의 작은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녀는 얼른 부승민의 목을 껴안고 그의 얼굴에 뽀뽀했다.“삼촌이 최고예요!”“삼촌은 하나도 안 좋아요. 아까도 삼촌은 못 안게 하고 숙모만 찾았잖아요.”부시아가 찔리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그 순간 부승민은 어제의 온하랑이 갑자기 생각났다.찔리는 표정은 마치 복사라도 한 듯 똑같았다.부승민은 갑자기 부시아에게 계속 다그치기 어려워졌다.‘될 대로 되라지, 작은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부승민은 부시아에게 정교한 오르골을 선물했다. 맘에 들었는지 그녀는 오르골을 안고 거실에서 한참을 놀다가 고개를 들어 한숨을 쉬었다.“숙모는 왜 아직도 안 깨요?”온하랑은 점심이 되어서야 깨어났다.눈을 뜨니 자신이 낯선 방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문득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임가희를 만나러 가던 길에 부승민이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흐트러진 화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온하랑의 얼굴에 홍조가 띠었다. 눈을 감자 곱슬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이불 아래 그녀는 본인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음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