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지는 말이 없어진 임가희의 모습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고모, 꼭 저 구해주셔야 해요.”뒤늦게 정신을 차린 임가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 오재원이 저지른 짓이라고 하지 않았어? 경찰이 아직 널 체포하러 온 것도 아니잖아. 그럼 이 일은 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마.”임연지의 심장이 계속해서 쿵쿵 뛰었다.“근데 저 무서워요. 만약 오재원이 감형받으려고 경찰한테 제 이름 불어버리면 어떡해요? 그리고 오씨 집안 사람들이 제가 연루되어 있다고 확신하면요? 두 집안 관계 유지하려고 고모부께서 저를 방패로 쓰시면 어떡해요?”오재원이 경찰한테 잡혀있는 건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오재원은 정말 임연지의 개새끼였다. 임연지가 손가락만 까딱이며 오른쪽으로 가라 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은 감히 쳐다도 못 보는 그런 사람이었다.임연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는 바로 오재원의 가문인 오씨 집안이었다.명문 세가 사람들로서 모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사람 보는 눈에는 도가 터 있었다. 임연지가 오재원을 꼬드겼다는 것쯤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곧 있으면 얘기를 나누러 최씨 일가로 찾아올 것이다.임가희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려던 그 순간, 밑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임연지가 다급히 창가로 달려가 창밖을 확인했다. 검은색 승용차가 최씨 일가의 저택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차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내렸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오재원의 삼촌이었다.오재원의 삼촌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저택 2층을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임연지가 재빨리 고개를 숨기고 임가희의 팔을 끌어안은 채 울면서 말했다.“고모, 오씨 집안 사람이 온 것 같아요! 저 좀 살려주세요! 부모님이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저한테 남은 친척이라고는 고모밖에 없다고요.”임연지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그 시절, 임연지의 부모님은 경주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던 탓에 임가희의 차를 타고 외출했다.어쩌면 임가희도 그 차에 함
“형님, 어차피 진짜 가족도 아니잖습니까. 임연지 그것이 심보가 못돼서는 관리도 똑바로 안 되니까 계속 최씨 가문에 남겨두면 언젠가 큰일을 칠 겁니다.”“형님, 우리 두 가문의 관계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두 노인네가 아직 살아있을 때는 기억 하십니까? 저희 아버지가 저 데리고 최씨 일가 저택까지 찾아왔다가 속옷 한 장 못 입고 돌아갔던 그 일 말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그때 일을 장난처럼 얘기하시더라고요. 재원이도 동철이랑 같이 자란 아이인데 아직도 저렇게 잘 지내는 걸 보니까 저도 기분이 참 좋습니다... 형님, 형님도 제 친형 부부한테 아이들이 많다는 걸 아시겠죠. 바깥사람 때문에 형제 우애를 망치고 싶지가 않네요.”오정우는 두 집안의 관계가 최씨 가문에 달려있다는 뜻이 담긴 말을 전했다. 최국환이 임연지만 자신들에게 넘긴다면 두 집안의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지만 오재원이 감옥에 들어가는 이상 두 집안의 관계는 바로 끊긴다는 것이다.최국환이 답했다.“난 여태껏 재원이를 내 친조카라고 생각해왔어. 재원이를 감옥에 보내고 싶을 리가 있나. 이렇게 하자. 지금 당장 연지 불러서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물어보도록 하지. 정말 연지와 관련되어 있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어휴, 역시 형님은 공평하게 대해줄 줄 알았어요.”오정우가 말했다.최국환이 도우미를 시켜 위층으로 올라가 임연지를 불러오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위층에서 내려와 전전긍긍하며 말했다.“선생님, 아가씨께서 집에 안 계신데요.”최국환이 놀란 기색으로 물어봤다.“금방 돌아오지 않았나?”도우미가 답했다.“사모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아가씨께서 잠시 다른 곳으로 여행 가셨다고 하던데요. 물건 정리만 대충하고 바로 다시 나가셨대요.”오정우가 최국환을 슬쩍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여행이라니, 물건만 챙기고 바로 나갔다니. 이걸 누가 믿나.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니까 도망간 게 아니고? 임연지의 도망으로 최국환은 이
“정말 관련도 없다면 도망은 왜 친 건데?”최국환이 냉소를 지으며 임가희를 바라보았다.“요즘 날씨가 확확 변하니까 동림이 감기 안 걸리게 케어 잘 해줘. 다른 일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하지만, 연지는 우리 오빠 부부의 유일한 아이예요.”임가희가 말을 꺼내며 눈시울을 붉혔다.“전에 본가에 있을 때도 저희 오빠가 저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지 아세요? 무슨 물건이든 다 저한테 남겨주고 전남편한테 가정 폭력을 당할 때도 저희 오빠 아니었으면 이혼도 못 했을 거예요. 연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나중에 오빠 얼굴을 무슨 면목으로 봐요?”“나도 당신이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 당신 오빠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것도 잘 알고 있고. 하지만 당신이 정말 연지를 위한다면 이런 식으로 감싸고 도는 것도 절대 좋은 게 아니야! 만약 정우가 아니었다면 난 연지가 남의 작품을 도용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거야!”최국환은 관리를 잘 받아 아직도 청초하고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의 비참했던 몰골을 떠올렸다. 최국환의 말투는 여전히 단호했지만 태도에서 마음이 약해졌다는 게 티가 났다.임가희가 눈물을 머금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그 일은 연지가 잘못한 게 맞아요. 그 일에 대해선 제가 이미 잘 알아듣게 혼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잘 넘기기만 한다면 제가 충분히 타이르도록 할게요. 여보,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요?”얼음장 같던 최국환의 마음이 순식간에 눈 녹듯 풀려버렸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연지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쯤은 나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하지만 그 조건으로 연지는 무조건 내 계획에 따라야 해.”임가희가 잠시 멈칫하더니 찔러보듯 물었다.“어떤 계획인데요?”최국환이 임가희를 바라보았다.“그건 나도 아직 몰라. 하지만 연지를 해치는 일은 없을 거야. 그저 연지가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날 따위는 없을 거란 소리지.”임가희가 입을 열기 전에 최국환이
“아버지, 서로에게 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최동철은 웃는 듯 마는 듯하면서 최국환의 사심을 알아보지 못 본 척했다.“피해자가 친구라면서? 네가 직접 가서 얘기해봐. 만약 오재원을 양해해 준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상관없어.”“이게 바로 아버지가 말한 서로에게 다 좋은 방법이에요?”최동철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최국환은 눈꼬리가 펄쩍 뛰었다.“온하랑은 너의 학생이지? 네가 나서면 너의 체면을 봐서라도 동의할 거야.”앞서 촬영 공모전에서 최동철은 사고가 발생하였고 임연지는 이 틈을 탔다. 겨우 이일을 해결하였는데 그날 룸에서 오재원은 또 온하랑에게 함부로 말을 지껄였다. 이번 일까지 겹치게 되면 최동철은 온하랑에게 오재원을 양해하라고 말할 면목이 없었다.최동철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최국환은 그를 흘겨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오재원이 말한 것처럼 온하랑에게 미혹되어 너의 사촌 동생인 오재원이 감옥에 가는 꼴을 보더라도 돕지 않을 거야?”최동철은 말하려다 무언가가 문득 생각이 나서 눈을 내리깔며 찬웃음을 지었다.“난 그녀를 좋아하지만, 양해하는 것은 그녀의 권리에요. 그녀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억지를 부리겠어요! 나 때문에 이미 이런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사정할 면목이 없어요. 그리고 오씨네 가문에서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협박과 회유도 안 되는 걸 내가 말하면 양해해 줄 것 같나요?”“이번 일은 오재연과 연지의 잘못이에요.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저한테 책임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어요. 그러니 그들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되죠, 아버지가 보기에는요?”“오재원은 너와 함께 컸어. 그가 감옥살이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거야?”“당연히 아니죠. 하여 나는 임연지를 오씨 가문에 넘기려고 해요.”최동철이 답했다.최국환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나는 그녀가 다른 곳으로 피신갈 거라고 짐작했어요.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사람을 시켜 쫓도록 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거예요.”최동철이 말했다.“너...”최국환은
촬영 현장이다. 방금 촬영을 마친 온하랑은 분장실에서 대본을 보고 있었다.이때 직원 한 명이 문 앞에서 머리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다가 온하랑을 보고는 안으로 들어왔다.“하랑 씨, 밖에 누군가가 찾아왔어요.”“누구죠?”대본을 읽고 있던 온하량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현재 상황으로 보면 배우 본인과 관계되는 사람만이 올 수 있었다. 팬들이 스타를 만나기 위해 줄줄이 서 있는 상황에서 배우 본인과 관계되는 사람이 아니면 스태프는 일부러 통지하지 않을 것이다.“엄마라고 했어요.”온하랑은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말했다.“나의 엄마는 이미 20여 년 전에 떠났어요. 밖에 있는 분은 사기꾼일 테니 쫓아내면 돼요.”직원은 의아해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떠났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일까?’“네. 그럼 돌려보낼게요.”스태프는 촬영장 밖에 서 있는 차 옆에 다가와 뒷좌석의 임가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버젓하게 생겼는데 사기꾼이군!’스태프는 무례한 태도로 임가희에게 말했다.“가세요. 온하랑 씨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임가희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나의 신분을 말하지 않았어요?”“말했죠.”“그럼 뭐라고 했어요?”“이 사람이 체면을 세워주니 싫어? 온하랑 씨가 그러는데 그의 엄마는 20년 전에 이미 죽었대! 사기꾼, 어서 떠나지 못해!”스태프는 말을 마치고는 돌아갔다.임가희는 어이가 없었다.어쩐지 온하랑이 여태껏 그녀를 찾지 않더라니, 알고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구나?“사모님, 어디로 모실까요?”기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임가희가 말했다.“일단 기다려요.”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사람을 시켜 온하랑의 전화번호를 알아보게 했다.앞서 두 사람은 통화했지만, 경찰의 전화를 사용했기에 그녀는 번호를 기록하지 않았다.몇 분 후 온하랑의 전화번호를 받은 임가희는 바로 연락했다.“온 선생님, 전화가 왔어요.”비서는 벨이 울리는 휴대폰을 건네줬다.최근에 너무 바빠진 온하랑은 출퇴근을 책임질 기사를 모집했고
“내가 온하랑의 엄마야. 전화 바꿔.”비서는 잠시 멍해졌다.‘온하랑 선생님의 엄마라고?’‘하지만 정말 온하랑의 엄마라면 어떻게 낯선 번호로 전화를 했을까?’온하랑 선생님은 분명히 이 번호를 모른다.비서가 뒤를 돌아보니 현장 감독은 오디션 때문에 이미 온하랑을 불러갔다. “죄송해요, 온하랑 선생님은 지금은 촬영 중이니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제가 대신 전달해 드릴게요. 아니면 선생님께서 퇴근한 후에 다시 전화해 주세요.”“나는 걔 엄마야. 낯선 사람이 아니라고! 빨리 전화를 바꿔봐!”임가희는 매서운 태도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죄송해요. 온하랑 선생님께서 일하고 계시니 다른 일 없으시면 먼저 끊을게요. 이제 선생님께서 퇴근하신 후 다시 연락해주세요.”전화를 끊고 비서는 물컵을 들고 촬영 현장으로 갔다.온하랑은 대역 배우와 대본을 맞추었으며 그 배우의 비서도 역시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화제는 갑자기 온라인 사기 사건으로 돌려졌고 두 사람은 이를 주제로 토론하기 시작했다. 비서는 아까 받은 전화가 생각나서 참다못해 불평을 터뜨렸다.“...요즘 별의별 온라인 사기가 다 있어요. 저도 조금 전에 남의 엄마 행세를 하는 전화를 받았어요...”“사기꾼이 가족들의 목소리와 억양을 모아 AI로 시뮬레이션하면 친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너무 끔찍해요.”비서가 감탄했다.오후 3시가 넘어서야 온하랑은 촬영을 마치고 현장에서 나와 길가의 차로 걸어갔다.비서가 있으니 확실히 많이 편리했다. 예를 들어 온하랑이 분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비서는 이미 기사에게 연락하여 차를 제작진 근처로 대기시켜 그녀를 편하게 했다.온하랑이 뒷좌석의 문을 열고 차에 오르려고 했을 무렵 갑자기 옆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온하랑은 주춤하며 멈춰 섰다.이 목소리는 한 번밖에 들어본 적이 없지만 아주 익숙했다.임가희가 이렇게 끈기 있게 여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아마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다.온하랑은 차분히 고개를 돌렸
임가희는 어리둥절하여 즉시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몰고 오라고 했지만 아쉽게도 온하랑의 차는 이미 멀리 가버렸다.그녀는 뒷좌석에 앉아 창문으로 창밖의 거리 풍경을 바라보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온씨네가 온하랑에게 자신이 죽었다고 속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러면, 그녀가 목적을 이루려면 먼저 온하랑에게 그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믿게 해야 했다.하지만 다시 자세히 생각해보면, 임가희는 또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만약 온하랑이 정말로 어머니가 죽은 줄 알았다면 불화가 있었던 사람이 나타나 갑자기 자신이 어머니라고 말하면 화를 내며 머리가 이상하다고 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냉정하게 엄마가 없다며 죽었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온하랑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혹시 온하랑이 그녀의 신분을 일찍 알고 있었기에 덤덤했을까?온하랑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며 그녀는 알아차렸다.그렇다면 온하랑은 언제 알았을까?임가희는 지난번에 병원에서 만났을 때를 회억하며 온하랑의 반응이 가식적이지 않아 몰랐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병원에 들어온 후 온하랑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게 되었고, 병원의 일을 떠올리면 억울한 마음에 화가 나서 그녀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임가희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온하랑은 지난번 병원에서 발생한 일로 인해 그녀를 탓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이 모녀 관계를 신경 쓰고 있다는 신호이기에 그녀가 주동적으로 친해지기만 하다면 온하랑의 태도는 틀림없이 누그러질 것이다.차 안에서 온하랑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꼼짝도 하지 않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사실 지난번 병원에서 다시 만나기 전에 온하랑은 이미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접었다.사실 그녀도 임가희를 이해하려 했었다. 비록 자신을 낳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으니 더 좋은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그러나 두 사람이 재회한 후의 상황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일이 없으면 찾아오지 않는 법, 온하랑은 임가희가 양심의
그러나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메시지 옆에 빨간 느낌표가 나타났다.이 번호도 차단되었다.임가희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말을 듣지 않으니 수단을 써야겠군.’이튿날, 온하랑이 현장에서 촬영하고 있을 때 부시아 유치원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비서는 벨 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온하랑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화면을 보더니 바로 전화를 받았다.전화 건네 편에서 선생님이 말했다.“시아 엄마, 안녕하세요. 시아 외할머니 되는 분이 유치원에 오셔서 시아를 데려가겠다고 해요.”온하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안돼요, 시아를 데려가게 할 수 없어요.”“네, 우리도 알고 있어요. 당신을 꼭 봐야 한다며 유치원을 떠나지 않고 있어요.”온하랑은 얼굴을 찡그리고 몇 초 동안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전화 바꿔주세요.”“네.”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휴대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랑아, 드디어 엄마 전화를 받는구나.”온하랑은 쌀쌀하게 물었다.“임 여사님, 도대체 뭘 하려는 건가요?”“넌 나의 딸이니 잘 보상해 주고 싶어 찾아왔어. 너 언제 시간이 있으면 모녀가 만나가 만나서 얘기해.”온하랑은 그녀가 자신을 만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온하랑은 책상 위에 놓인 스케쥴표를 보며 말했다.“저녁 8시에 촬영이 끝나니 그때 오세요. 미리 말해두는데 이번 한 번만 나를 만날 수 있으니 무슨 말을 할지 잘 생각해 봐요.”“좋아.”임가희는 흔쾌히 대답했다.“내가 도착한 후 연락할 수 있게 날 블랙리스트에서 꺼내줘.”그러나 일정표에 기재된 시간은 정상적인 촬영 진도에 의한 예상일 뿐 정확하지 않다.배우가 연기에 몰입하지 못해 지체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예를 들어 오늘 밤 온하랑과 상대역을 맡은 배우가 웬일인지 여러 번 NG를 내서 9시가 다 되어서야 온하랑은 오늘의 촬영을 마쳤다.촬영장과 멀지 않은 곳에 룸서비스가 제공되는 식당이 있었다.배우와 스태프들은 일과를 마치고 이곳에 와서 종종 식사하곤 한다.임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