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걸음을 멈추었다.“아니면 그냥 여기까지 배웅해 줄게. 바로 저기 체크인 데스크니까 굳이 따라가지 않을게.”이주혁은 시계를 흘깃 쳐다보고는 아쉬운 듯 말했다.“그래, 이만 돌아가 봐. 괜히 여행하는 데 방해되겠다. 귀국하면 또 보자.”온하랑이 뭐라 말하려는데 멀리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이주혁이다!”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에서 무수히 많은 발소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온하랑이 고개를 돌리는데 순식간에 개미 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미처 반응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사람들 틈에 끼어버렸다.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지나치며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흥분한 누군가 강한 힘으로 온하랑과 부딪혔고 온하랑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놀란 비명 소리도 소음에 잠식된 채 곧바로 누군가 그녀의 다리를 밟았다.무수히 많은 발과 다리가 그녀를 지나쳤고, 누군가는 실수로 밟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했다.온하랑의 비명소리는 묻혀버렸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녀의 등이 밟혔다.귀 가까이 다가온 하이힐은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까지 밟을 뻔했다.온하랑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보호하며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바닥의 공기는 희박했고 온하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러다 누군가 머리를 발로 찼고, 넘어진 그 사람은 온하랑을 발로 차며 욕설을 퍼부었다.“미친 거 아니야, 왜 바닥에 누워서 이래!”온하랑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기절하려는 순간 갑자기 따뜻하고 넓은 품에 안겼다.온하랑은 공중에 들려 누군가에게 안긴 채 사람들을 지나쳤다.이 순간 온하랑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했다.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느껴져도 온하랑은 환각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의 귀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 사람이 다쳤어요! 비켜요!”이 목소리, 왜 이렇게 익숙하지?온하랑이 고개를 들자 부승민의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반쯤 얼굴에 햇빛을 받은 그는 마치
부승민은 온하랑을 데리고 병원에 검사받으러 갔다.가는 길에 온하랑은 김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연 씨, 괜찮아요? 난 사람들한테 밟혀서 지금 병원에 가요. 먼저 호텔로 돌아가서 기다려요.]김시연이 겨우 살았다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난 괜찮아요.][세상에, 사생들이 무슨 사이비 종교 같아요!][많이 다쳤어요?][심하게 다치진 않았어요. 걱정 마요.][혼자 병원에 간 거예요? 어디에요, 내가 갈게요.]온하랑은 옆에 운전석에 앉은 부승민을 흘끗 쳐다보았다.[나 지금 공항 나왔으니까 호텔로 돌아가서 기다려요.]몇 초 후, 김시연이 갑자기 답장을 보냈다.[하랑 씨, 저 아까 부승민 씨 본 것 같아요!]온하랑은 순간 심장이 살짝 철렁했다. 괜히 옆에 있는 부승민을 힐끗 보면서 현애인에게 전 애인 만나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잘못 본 거겠죠. 그 사람이 왜 여기 있겠어요.]메시지가 전송된 후 온하랑은 멍한 표정으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내가 잘못 본 것 같아요. 이 얘기는 그만 해요. 버스 왔어요. 호텔에서 기다릴게요.][그래요.]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검사 결과는 온하랑은 가벼운 뇌진탕으로 이틀 정도 쉬면 괜찮다고 했다.그 외에도 온하랑의 몸에는 푸른 멍이 들어 의사는 울혈을 없애주는 연고를 처방했다.부승민은 손에 연고를 든 채 온하랑에게 말했다.“가자,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온하랑이 몇 번이고 손에 든 연고를 쳐다봤지만, 부승민은 모른 척 연고를 주머니에 넣었다.그리하여 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연고 줘, 나 혼자 갈 거야.”부승민은 아니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왜 사서 고생을 하지?”온하랑은 찔리는 게 있는 듯 눈을 피하며 일부러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검사했는데 아무 이상 없잖아. 나 혼자서 호텔로 돌아갈 수 있어. 네가 날 데려다주면 시연 씨가 볼 거야.”“보면 안 돼? 뭐가 부끄러워?”“네가 부끄러워.”부승민은 웃었다.“그럼 말을
부승민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온하랑의 손에서 연고를 빼앗아 소파로 걸어가 앉더니 연고를 열었다.“약만 발라주고 갈게.”온하랑은 이마를 짚었다.“...”“나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 계속 꾸물거려도 돼.” 부승민이 이렇게 말하자 온하랑은 두 눈을 부릅뜨며 칼날처럼 예리하게 그를 노려보았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면봉 한 통을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승민 옆에 앉아 치맛자락을 무릎까지 끌어올렸다.하얗고 매끈했던 종아리는 보라색 멍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이힐 굽에 밟힌 듯 자국이 남고 가장자리 피부가 찢어진 상처까지 있었다.부승민의 깊은 눈동자는 왠지 모를 감정에 젖어 있었고, 그의 큰 손은 온하랑의 멍든 종아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아파?”솔직히 꾹 누르지만 않으면 아프지 않았다.그러나 부승민의 손길이 너무 가벼워서 깃털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고, 간지러운 느낌에 온하랑은 닭살이 돋았다.“약 바를 거면 빨리 해!”부승민은 굳어진 표정으로 면봉에 연고를 짜서 멍든 곳을 눌렀다.“꺄악.”온하랑이 찬 공기를 훅 들이마시며 불현듯 통증이 밀려왔다.“부승민, 좀 살살 해줄 수는 없어?”“미안. 빨리 하라길래 힘 조절을 못 했네.”부승민은 느긋하게 다시 약을 짰다.온하랑은 화가 나서 그를 또 노려보았다.이 망할 부승민,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하다!피부에 닿은 연고의 시원한 촉감에 한결 편안해졌다.온하랑이 시선을 돌리자 부승민의 진지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집중하고 있었는데, 마치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았다.온하랑의 시야엔 부승민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과, 높은 콧대, 뚜렷한 얼굴 윤곽이 한눈에 보였다.부승민이 갑자기 고개를 들자 온하랑은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온하랑은 황급히 눈을 피하며 아무 생각 없이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다리는 다 됐어. 등 외에 다친 곳 없어?” 부승민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없어.”“그럼 소파에 엎드려봐.”온하랑은 소파에 엎드리다가 무언가를
“내가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말만 하고 쫓아내다니. 하랑아,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온하랑은 어이가 없어 몇 초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내가 이런 식이면 뭐, 너도 약속 안 지켰잖아. 앞으로 더 이상 안 따라다니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출장 왔다가 우연히 공항에 왔다는 말은 하지 마.”“내가 너 안 따라다녔으면 얼마나 더 다쳤을지 몰라.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나, 다치지를 않나. 이런데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우리 이미 이혼했잖아, 내 일은 너랑 상관없어. 그냥 무시해.”“너...”부승민의 표정이 굳어지며 눈가가 어두워졌다.온하랑은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며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부승민은 한 걸음 더 다가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한 말, 다시 말해 봐!”온하랑은 두 눈을 깜박이며 한 발짝 물러섰다.“우린 이미 이혼했고, 내 일은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 그냥 무시하라고.”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아 충분한 용기는 없는 것 같았다.부승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며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온하랑은 뒤로 가고 싶었지만 벽에 다다라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마치 작은 메추라기처럼 조금씩 옆으로 움직였다.부승민의 큰 손이 온하랑의 턱을 그러쥐며 고개를 숙여 키스를 했다.눈앞의 잘생긴 얼굴이 훅 다가오자 놀란 온하랑은 잠시 굳어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읍...”부승민의 어깨는 단단한 벽처럼 온하랑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끄덕하지 않았다.그는 온하랑의 부드러운 입술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고, 혀끝으로 그녀의 잇새를 거칠게 유린했다.뜨거운 입김이 뒤엉키자 숨이 가빠진 온하랑은 점점 더 숨쉬기 힘들었다.부승민은 그 틈을 타 온하랑의 이를 벌리고 혀끝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읍...”온하랑은 눈을 감고 세게 깨물었다.부승민은 밀려오는 고통에 낮게 신음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깊은 키스를 이어갔고, 비릿한 피 맛이 두 사람의 입에 퍼졌다.문득 겹친 입술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고, 혀끝
온하랑과 김시연이 버스에 올라타자 수다를 이어가던 버스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온하랑과 김시연은 자리를 골라 나란히 앉았다.앞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두 분, 어디서 오셨어요? 일하러 오신 거예요, 여행하러 오신 거예요?”젊은 남자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잠시 온하랑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두 남자 앞에 앉은 아저씨도 거들었다.“나이를 보아 학생 같지는 않은데.”김시연은 웃으며 말했다.“저희는 여기 여행 중이고, 고향은 강남이예요. 그쪽은요?”고향 얘기가 나오자 차 안의 관광객들은 너도나도 자기 고향을 알리기 바빴고, 같은 지역 출신이 아니면 늘 비슷한 말로 공감대를 형성하려 들었다.“내 친구가 거기 사람인데…”이윽고 7, 8명 정도 더 차에 올라탔고, 가이드가 명단을 확인한 후 문을 닫고 출발했다.차에 시동을 걸자 차 안은 정적이 흘렀고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을 했다.어떤 사람은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어떤 사람은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어떤 사람은 카메라로 풍경을 찍고 있었다.젊은 남자의 일행은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남자를 팔꿈치로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뒤에 앉은 여자 둘, 한 명은 온하랑 같은데?”“온하랑이 누군데?” 남자는 처음에 알아채지 못했다.“몰라? 부승민 아내!”남자는 기억을 떠올리며 놀란 눈빛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온하랑이야?”“내가 봤을 땐 맞아. 옆에 있는 친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시연이야.”처음 부승민과 온하랑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기숙사에서 한창 떠들어댔던 게 생각났다. 다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남들과는 출발선부터 다른 부승민을 부러워했었다.남자는 호기심이 생겼다.“내 기억이 맞다면 얼마 전에 부승민과 이혼하지 않았나?” “맞아.”남자의 일행은 한숨을 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분명 부승민한테서 재산도 나눠 가졌으니 부자일 거야! 재혼이긴 하지만 젊고 돈도 많잖아. 그래도 재벌가 쪽에서는 다시 저 여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그냥 같이 해요.”온하랑이 말했다.그녀는 곧바로 샌들을 벗고 해변에 앉아 손을 씻은 후 고기와 해산물을 꼬치에 꽂기 시작했다.가이드는 얇게 썬 빵과 양상추, 소시지 등을 준비했고, 해산물은 옆 동네에서 사 온 것으로, 구워 먹을 수 있는 것은 생선, 새우, 조개 등이 대부분이었다.작게 잘라진 삼겹살은 알아서 꼬치에 꽂으면 되고 해물도 마찬가지였다.직접 준비한 음식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에서 낯선 여행자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바비큐를 먹는 건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년은 자신의 이름은 허명진, 동행자의 이름은 장천수라고 말했다.고기와 해산물을 모두 꼬치에 끼우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 허명진이 제안했다.“누나, 이러면 좀 느린 것 같은데, 구우면서 꼬치에 끼울까요?”“그래.”“그럼 누나들이 꼬치에 끼우면 내가 구울게요. 먹고 싶은 건 많이 끼워요. 내가 다 구워줄게요.”허명진은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새우를 좋아했던 김시연은 그의 말대로 한 접시나 되는 새우를 꼬치에 끼워서 그대로 허명진에게 건넸다.“동생, 난 새우 좋아하니까 많이 구워줘.”“알겠어요. 누나는 뭐 좋아해요?”허명진은 미소를 지으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난 가리는 것 없이 다 먹어.”온하랑이 말했다.“그럼 내가 하나씩 구워줄게요.”음식이 그릴에 올려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숨 막히는 연기 냄새와 함께 요란한 소리가 났다.음식이 하나씩 익자 허명진은 깨끗한 접시를 가져와 온하랑과 김시연 앞에 놓으며 말했다.“누나, 다 구워진 꼬치는 이 접시에 담을 테니까 먹고 싶은 건 가져가세요.”“고마워. 고생이 많네.”허명진은 웃으며 말했다.“고생은요. 예쁜 두 누나를 모시게 되어 영광이죠.”김시연과 온하랑은 서로 마주보다 손에 쥔 꼬챙이를 내려놓고 삼겹살 꼬치를 먼저 먹었다.새우는 익는 속도가 느린 탓에 김시연은 이미 몇 번이나 흘끗 쳐다보았다.온하랑은 먼저 구운 소시지 꼬치를 먹은 뒤 계속해서
“아니, 내가 볼 땐 허명진이 하랑 씨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요. 이혼하고 나니 연애운이 마구 쏟아지네요!”온하랑은 이마를 짚었다.“누구든 지금은 그럴 생각 없어요.”“그래요.”김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아까운 인물인데.”“아까우면 시연 씨가 만나보지 그래요?”“나도 그러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상대가 바라보는 사람은 제가 아니네요.”“만약 잘못 짚은 거면요?”“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를 똑같게 대하는 것 같지만, 말할 때마다 하랑 씨만 봐요.”“...”“참, 민지훈이랑 연락하고 있어요?”“자주는 안 하죠.”민지훈이 자주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드물게 답장을 보냈다. 민지훈도 강남 출신이라 혹시라도 나중에 다시 만날 가능성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민지훈의 연락처를 바로 지워버렸을 것이다.“저기, 하늘에 헬리콥터 있어요!” 한 관광객이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감탄했다.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창밖을 내다봤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상공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보였다.가이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부러워하지 마세요. 프린스턴 비터버러 구간에 도착하면 우리도 헬기를 타고 십이사도 바위를 구경할 수도 있어요.”십이이사도 바위는 대양로와 빅토리아주 전체를 대표하는 풍경으로, 헬기 투어를 할 수 있는 명소이자 대양로의 주요 명소이기도 했다.해가 지기 전에 그들은 아포르만에 도착했다.오늘 밤 이곳에서 야영할 예정이었다.가이드는 텐트를 나눠주며 텐트 설치 방법을 알려주었다.김시연과 온하랑의 텐트를 허명진이 와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온하랑은 거절했다.“괜찮아. 너희 것만 해. 우리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허명진은 제자리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온하랑이 선 긋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텐트 설치가 끝나자 가이드는 자유 활동 시간을 주었다.온하랑과 김시연은 옆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오트웰 등대를 보러 갔다.푸른 바다 옆 산꼭대기에는 하얀 등대가 우뚝 서 있었고, 등대로 가는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양쪽으로 하얀 난간이
등대에서 돌아와 숲속 캠핑장에 도착하니 가이드는 이미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한쪽에 자리를 내고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온하랑과 김시연은 따로 챙겨온 도시락을 꺼냈다. 반찬은 간단하게 스팸구이와 불고기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열악한 야외조건에서 이 정도면 정말 만족스러운 한 끼 식사였다.허명진은 가이드를 도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있었다.“아가씨들, 커피 드세요.”그는 두 잔의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오더니 김시연과 온하랑에게 건네며 말했다.“더 필요하면 저쪽 가서 받아요.”“네, 감사합니다.”온하랑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가볍게 한모금 마시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그 모습을 보던 허명진의 눈빛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평소 신경이 쇠약한 탓에 장천수는 집을 나서기 전 꼭 수면제를 챙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을 온 지금은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이 잘 왔다. 장천수는 수면제를 괜히 챙겨 짐만 더 만든 듯한 기분이라며 불평했다.어쨌든 도움은 된 거 아닌가?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조금 전 받았던 커피잔을 손에 들고 다시 한 모급 들이켰다.가이드는 차에서 몇 병의 맥주병을 꺼내더니 모닥불 근처에 앉아읶던 관광객들에게 물었다.“여기 맥주도 있는데, 마실래요?”맥주를 마시겠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알다. 기껏해야 대여섯명 정도만 가이드의 말에 대답을 했다.가이드는 그들에게 맥주 한 병씩 건넨 뒤, 또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다들 한 잔씩 안 하실 거에요? 이 달빛에 이 야경인데도요?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 맥주 한 병이 무슨 술입니까, 그냥 음료수죠. 마셔도 안 취해요.”가이드의 말이 끝나자 또 몇 명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병씩 달라며 입을 열었다. 그 중에는 김시연도 포함이었다. 그녀는 맥주 두 병을 받아와 한 병은 온하랑에게 던져주며 말했다.“이런 기회 흔한 거 아니에요, 한 잔 하죠?”맥주병을 받아든 온하랑은 병마개를 돌려땄다.이국 땅의 야외에서, 익숙한 얼굴의 이방인들이 함께 모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