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무슨 웃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차갑게 부승민을 바라보며 말했다.“나 자유롭게 해준다며 오빠가 그랬잖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린 이미 이혼했어. 내 앞에서 연기할 필요 없다는 소리야.”부승민은 눈앞이 아찔해 났다. 온하랑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부승민에게 일말의 믿음도 남아있지 않았다.“나 후회해, 하랑아. 널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네가 말했다시피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내가 연기할 필요가 뭐 있어. 하랑아, 네가 믿건 안 믿건 난 정말 너 많이 좋아해. 너랑 이혼하기 싫어.”부승민은 이전에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었으나 언제부터였냐 묻는 온하랑의 물음에 항상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진짜 좋아하는 거라 쳐도 온하랑이 꼭 돌아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좋아한다 해서 그녀가 지금껏 받아왔던 상처가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온하랑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후회해도 소용없어. 오빠가 어떤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하는진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 난 오빠랑 재혼할 일 없어.”온하랑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한테서 무슨 이득을 볼 게 있다고 추서윤을 국내에 버려두고 여기까지 와서 연기를 하는 건지. 설마 할아버지 유언장에 BX 그룹 회장 자리에 앉는 조건이 이혼하지 않는 건가? 아마 이게 가장 납득할 만한 이유인 것 같았다.말을 듣고 난 부승민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늘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다. 온하랑의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것이었다. 그녀는 부승민과 재혼할 생각이 없다. 그 한마디는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하랑 씨, 얼른 타요.”김시연이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는 온하랑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부승민을 째려보고는 잽싸게 조수석에 앉았다. 부승민을 볼 때부터 김시연은 그를 온하랑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현이 그녀를 막아 나서서 온하랑 스스로 해결하게 놔두고 온하랑이 해결할 수 없을 때 다시 두 사람이 돕자고 결정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금방 여름섬에서 돌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이리 많이 앞당긴 이상 세 사람은 포드타운에 가기로 결정했다.포드타운은 트로토와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협곡과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때마침 마을은 극야상태였다.그들은 마을을 한바퀴 쭉 돌았다. 쭉 뻗은 해안선과 설산의 절경을 느끼며 틈틈이 멈춰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기간 김시연과 주현은 계속 몰래몰래 온하랑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온하랑은 그들의 도둑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걱정 마요. 나 괜찮다니까. 아까 그 사람 본 뒤로 기분이 안 좋아져서 그래요, 정상 아닌가요? 어느 사람이 전남편을 보고 기분 좋을 수가 있겠어요.”김시연이 온하랑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하랑 씨, 내려놨으면 됐어요.”그리고 세 사람은 트로토와의 호텔에서 하룻밤 쉬고 이튿날 링와스섬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마 설경을 보는데 조금 질리기는 했을 것이다. 세 사람은 링와스섬에서 밤을 보내지 않고 당일로 트로토와에 돌아왔다. 도착했을 때 마침 밥을 먹을 시간이어서 세 사람은 바로 김시연이 새로 발견했다는 레스토랑으로 운전해 이동했다.밥을 다 먹고 나서 결제하려는 때에야 온하랑은 늘 가지고 다니던 가죽 가방 안의 지갑이 감쪽같이 없어진 걸 발견했다.“아? 내 지갑은? 호텔에 놔두고 왔나?”처음에 온하랑은 도난당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김시연이 온하랑의 텅 빈 가방을 보고는 자기 지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자, 내가 결제할게요.”온하랑은 김시연의 지갑을 건네받고 의문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아닌데... 아까 나올 때 다 가방에 넣었는데, 길에서 떨어트린 건 아니겠죠?”“떨어트릴 수는 없다고 보고요, 소매치기를 만났을 수밖에 없겠네요.”김시연이 말했다.온하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도 떨어트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방에 잠금장치가 있었는데 아까 가방을 열 때 잠금장치는 닫힌 상태였다. 지갑은 호텔
“소매치기범 보통내기가 아니던데요. 링와스섬에서 사진 찍을 때 지갑을 슬쩍해가는 걸 내가 봤거든요.”온하랑은 그를 쳐다봤다.“링와스섬에 갔었어요?”아주 잠깐 온하랑은 지갑을 육광태가 훔쳐 간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타이밍이 좋았다.“네, 어제 갔거든요.”“그래요? 고마워요.”온하랑과 나머지 두 사람은 오늘 간 거였는데, 정말 그냥 우연인 건가.“별말씀을. 해외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났는데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거죠.”육광태가 지갑을 건넸다. 온하랑은 지갑을 건네받고 고개를 들어 육광태에게 말했다.“좀만 늦었어도 오베니아에 가는 티켓을 끊었을 거예요. 이렇게 하죠, 내일 제가 밥 살게요, 어때요? 당신 친구만 괜찮다면 같이 와도 되고요.”육광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때 가서 보죠. 돌아가서 친구랑 물어볼게요.”“친구가 너무 엄하게 관리하는 거 아니에요? 친구라기보단 와이프에 가까운 것 같네요. 밖에서 딴짓 못하게 말이에요, 하하.”온하랑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육광태의 뇌리에는 먹구름이 어둡게 깔린 부승민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눈썹을 치켜뜨고 웃으면서 말했다.“아 걘 진짜 여자 친구보다 더 까탈스러워요. 이제 보면 알 걸요.”온하랑의 눈이 반짝이며 입가엔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졌다.“농담이에요. 어차피 절 도와준 건 사실이니까 제가 당연히 밥 한 끼 사야죠. 만약 친구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찾아가서 말해볼게요.”육광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기 많은 얼굴로 웃었다.“그래요, 먼저 가볼게요. 이따가 소식 있으면 문자 보낼게요.”“네.”온하랑은 문을 닫은 뒤 등을 붙이고 섰다. 그녀는 손안의 지갑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정말 그저 우연의 일치인 걸까?...육광태는 바로 부승민의 방으로 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지갑 돌려줬어.”“응.”부승민은 소파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손에 라이터와 담뱃갑을 쥔 채 팔꿈치를 무릎에 지탱하고 있었다.“어제 만났다
그래서 온하랑은 육광태와의 식사 시간을 저녁으로 정했다. 육광태가 자기가 레스토랑을 예약한다고 했을 때, 온하랑은 또다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육광태더러 결정한 뒤에 그녀에게 알리라 했다....이튿날 아침 일곱 시 반, 온하랑 삼인방은 지정된 부두에 왔다. 그 시각 이미 적잖은 사람들이 부두 주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딱 보면 패키지여행으로 고래 구경을 하러 나온 게 틀림없었다. 개중에 아시안들도 심심찮게 보였다.온하랑 삼인방이 예약한 건 쌍동선이었는데 가이드는 백인이었고 함께 패키지에 참여한 사람들끼리도 전부 영어로 교류했다.7시 40분쯤 돼서야 배에 오를 수 있었는데 8시가 다 돼서 출발할 때 배에는 삼십 명 남짓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배가 물살을 가로지르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조금씩 부두와 멀어졌다.온하랑은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녀가 머리를 돌렸을 때 부두는 점점 멀어져 흐릿해지다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사방을 둘러봤을 때 주변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고 푸른 바다의 끝에 설산이 보이는 듯 마는 듯해 땅과 하늘이 그대로 맞닿아 어우러진 느낌이었다.고래 출몰 지역과는 아직 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온하랑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휴게실로 돌아왔다. 배에는 조그마한 휴게실이 있었는데 이미 열몇 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나머지 열몇 명의 사람들은 추위에 굴하지 않고 밖에서 버티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래 출몰 지역에 도착해 가이드가 알리고 나서야 온하랑은 다시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 시각, 부두는 진작 안 보인 지 오래였고 조그만 배 한 척만이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었다. 온하랑은 세상은 너무나도 크고 인간은 티끌만 한 존재라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고래 구경은 사실 오로라처럼 상당한 운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유람객들은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집중해서 자세히 해수면을 살폈다. 그
온하랑은 오늘 오베니아에 가지 않은 것과 육광태가 지갑을 돌려준 사실을 주현과 김시연에게 얘기했다. 김시연은 어깨를 온하랑과 부딪히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정말 우리가 안 가도 돼요?”“나 혼자 가보면 돼요.”온하랑이 입술을 앙다물고 웃었다. 만약 그저 육광태에게 감사한 뜻으로 밥을 사는 자리라면 당연히 김시연과 주현을 불러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가고 싶었다. 김시연은 온하랑이 육광태한테 뜻이 있다고만 생각하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향해 눈썹을 찡그렸다.“알았어요. 파이팅! 오늘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요!”주현도 온하랑이 육광태를 좋아하는 줄 알고 이주혁을 대신해 아쉬워하며 말했다.“하랑 씨, 신중하게 생각해요. 우리는 육광태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잖아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알고 있어요, 안심해요.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그녀는 그저 육광태가 이상하다고 여겨져 그녀의 짐작을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김시연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해명은 숨기려는 의도죠.”“...”육광태가 예약한 음식점은 온하랑 삼인방이 가보지 못한 일식집이었다. 음식점의 제일 우측에는 작은 방들이 일렬로 벽에 붙어있었는데 앞뒤로 파티션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좌측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주렴이 걸려있어 어느 정도 사적인 공간이었다. 육광태에 의하면 그들이 오늘 식사할 방은 끝으로 두 번째 방이었다. 온하랑이 도착했을 때 육광태는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하랑이 들어오며 주렴이 촤라락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육광태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왔어요? 얼른 앉아요. 고래 봤어요?”온하랑은 가방을 식탁 모서리에 벗어두고 육광태 맞은 쪽에 앉았다.“봤어요. 오늘 운이 좋았죠. 고래 떼도 보고 점프하는 것도 봤다니까요? 정말 예뻤어요! 볼래요? 사진이랑 영상 보내줄까요?”“급해 말아요.”육광태는 메뉴를 온하랑 앞에 내밀었다.“먼저 주문부터 하죠. 제가 먼저 몇 개 주문하긴 했는데 더 먹고 싶은 거 있나 봐봐요
온하랑은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지탱하고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감탄하는 얼굴로 육광태를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난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해요!”“컥-”옆방에서 또 무슨 소리가 들려왔으나 온하랑은 신경 쓰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제가 가정적 원인으로 조금 신중하고 절제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늘 뭔가를 하고 싶으면 하는, 세속적인 안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한다면 하는 그 박력, 자유를 위해서는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나한테 없는 거거든요.”온하랑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계속 말했다.“그리고 광태 씨는 정의롭잖아요. 저 대신 지갑을 찾아 돌려줬고 여자분들한테 해가 될까 조심하는 것도 말이에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얼굴로 수많은 여자 울렸을걸요.”“...과찬이시네요.”온하랑의 사뭇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육광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설마 진짜 날 좋아하나? 육광태는 등 뒤가 시간이 갈수록 서늘해짐을 느꼈다.“내가 한 말 모두 진심이에요.”“...”육광태는 말이 없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주문했던 음식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육광태는 직원의 손에서 그릇들을 건네받으며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온하랑에게 말했다.“우리 얘기만 하지 말고 밥 먹어요.”“그래요.”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런데 왜 여기로 예약한 거예요? 별실까지 따로 잡고?”육광태가 변명을 찾아 위기를 모면하려는 때, 온하랑의 아름다운 눈썹이 꿈틀거리며 눈동자를 굴렸다.“다른 사람이 우리를 방해할까 봐서요?”“...”이 말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마치 데이트하는 것 같달까.옆방에서 또 귀를 찌르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칼로 스테이크를 써는 듯한 소리였는데 칼과 접시가 마찰하며 내는 소리는 특별히 듣기 싫었다. 육광태는 심지어 부승민의 화난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도 몰랐다, 일이 이렇게 예상 밖으로 흘러갈 줄은.온하랑이 감탄을 금치 못하고 말했다.
짤라당.옆방에서는 뭔가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직원이 부랴부랴 달려가 어렴풋이 수습하는 게 보였다. 육광태는 이젠 부승민의 감정을 고려할 새도 없었다. 그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온하랑이 날 좋아한다고? 온하랑이 왜 날? 그는 커다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고는 복잡한 심경으로 온하랑에게 물었다.“하랑 씨, 그 말 진심입니까?”“당연하죠. 아니면 오늘 왜 혼자 왔겠어요.”온하랑은 입꼬리를 올리며 길고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육광태는 한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하... 하랑 씨, 신중하게 생각해 봐요. 제 어디가 끌렸는지는 몰라도 아무튼...”“혹시 제가 결혼한 적 있는 게 걸려서 그래요?”온하랑이 그의 말을 잘랐다.“그게 아니라...”“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부승민 그 사람 그 쪽으로 아예 안 되거든요.”육광태는 경악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믿기지 않죠? 나도 제일 처음에는 안 믿었거든요. 겉으로 봤을 때는 건장해 보였는데 진짜 허수아비가 따로 없었다니까요. 수술도 해봤고 약도 먹여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와 결혼생활 한 이 3년 동안 저 진짜 매일 밤 혼자 독수공방했다니까요.”육광태의 입은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벌어졌다. 옆방의 부승민은 이미 온하랑 때문에 화가 나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부승민은 자신이 괜히 친구를 불러들여 돌로 제 발등을 깠다고 생각했다. 온하랑이 이리도 빨리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육광태를 좋아할 줄은 전혀 몰랐다. 그건 그렇다 쳐도 육광태의 인정을 받아내고자 육광태앞에서 거짓을 꾸며내 그를 욕보이다니! 간땡이가 부어도 제대로 부은 온하랑이였다.육광태가 사실인지 아닌지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호주머니에서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부승민이었다. 아마도 화가 나 거의 이성을 잃기 직전이겠지? 하지만 타이밍이 꽤 좋긴 했다. 아니면 이 상황에서 육광태는 무슨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을
온하랑은 팔짱을 끼고 있다가 한 손을 들어 주렴을 걷어내고 여유롭게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부승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는 말했다.“설마 여기에 출장 왔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줄래? 이렇게 우연히 여기서 손님이랑 식사할 리 없잖아?”부승민은 입술을 오므렸다.“...너 알고 있었어?”그러니까 아까 온하랑이 했던 말들은 일부러 한 말이었던 건가?“육광태는 오빠 친구고 오빠는 요 며칠 계속 나 따라다닌 거지?”원래 육광태가 이상하다 여겨지긴 했었어도 김시연의 말에 의심을 거뒀었다. 하지만 이후에 공항에 나타난 부승민을 보고 온하랑은 다시 의심의 불씨를 지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부승민의 상태를 보아하면 갓 노르빈에 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적극적으로 행동했을 때 육광태의 반응으로 봐서는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김시연의 추측은 자연스레 빗나갔다.“응.”부승민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대답했다. 그는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절절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쳐다보며 말했다.“하랑아, 난 너 없으면 안돼. 하지만 내가 네 앞에 나타나면 네가 싫어할까 봐 그저 멀리서만 널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그러니까 그녀가 몇 번이나 느꼈던 그녀를 주시하던 눈빛은 모두 부승민이였다. 온하랑은 시선을 떨궜다. 부승민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와서 나타나지 않고 숨어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조심스레 행동했던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감동받아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온하랑은 그 목적에 의구심을 품을 줄밖에 몰랐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가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서 저지른 일이라 한들 이미 늦었다.“부승민 씨, 우린 이미 이혼했어. 우린 이젠 남남이고 각자의 길을 걷는 거야. 서로 관심 끄고 앞으로 이런 의의 없는 일도 자제하고.”“네가 의의 없다 해서 의의가 없는 게 아니야. 넌 나랑 재혼하기 싫다고 말했지. 네 용서 바라지도 않아. 그저 매일 널 볼 수 있고 네가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만족해.”다른 건
온하랑은 머리가 복잡했다.‘메이슨이 나의 아이가 아니라면 그럼 그 아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메이슨에게 감정이 없었던 그녀는 엄마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그를 보러 왔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메이슨에게 정들기 시작했을 무렵 누군가가 메이슨이 그녀의 친자가 아니라며 진짜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온하랑의 마음은 지쳐있었다.한순간 그녀는 지금처럼 메이슨을 자기 친자식처럼 키우며 모두 잊어버리자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가 낳은 아이가 지금 어딘가에서 힘겹게 고군분투하며 구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만약 그 아이를 찾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전화를 걸어온 부승민은 부드럽게 말했다.“다 봤어?”온하랑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응, 봤어...동철 씨한테 잘 물어볼게.”“동철이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어.”“그러나 혈연관계는 옳으면 옳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야. 유전자 검사를 다시 의뢰할 거야.”“그래, 내가 내일 갈게. 나와 함께 동철이를 만나러 가자.”부승민이 말했다.만약 계략이 탄로 나 화가 치밀어 오르면 최동철은 온하랑을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부승민은 철저하게 최동철을 방어하며 그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그럴 일 없을 거야.”“불안해서 안 돼.”“...”부승민은 화제를 바꾸었다.“병원에 다녀왔는데 간호사가 원녕이의 검사 수치가 서서히 정상 수치로 돌아오고 있다고 했어. 보름 정도 지나면 퇴원할 가능성이 있대.”부승민에게서 원녕의 소식을 전해 들은 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됐어. 수고했어, 승민아.”통화를 마치고 온하랑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메이슨은 이미 여러 개의 곰 모형 쿠키를 만들어 놓았다.그 남자는 최동철이 유전자 검사서를 위조했다고 했다.하지만 온하랑은 메이슨의 신분을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최동철은 친자확인서를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온하랑은 메이슨이 그녀에게 경계심이 없기에 모낭이
반죽을 열심히 다루는 메이슨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온하랑의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부승민의 말에 그녀는 마치 큰 바위에 가슴을 짓눌린 듯 숨이 막혔다.‘메이슨이 친자가 아니라면 최동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최동철은 어떻게 먼저 메이슨을 찾아서 그의 존재를 알렸을까? 그러면 진짜 아이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그녀는 메이슨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도록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엄마, 이것 보세요. 곰돌이 같아요?”메이슨은 갓 눌러놓은 곰돌이 쿠키 틀을 들어 올리며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온하랑은 웃으면서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곰돌이와 똑같아. 참 잘했어, 메이슨.”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메이슨은 머리를 숙여 계속 쿠키를 만들었다.그러나 온하랑은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부승민이 그녀 몰래 핸드폰 설정을 변경했을 당시 그 남자는 서우현의 핸드폰을 훔쳐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렸다.비록 그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었으나 그의 등장은 여전히 수상했다.‘예를 들어 그는 누구일까? 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왜 이제야 모든 진실을 알려주는 것일까?’심호흡을 한 그녀는 잠시 마음속의 의심을 가라앉혔다.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온하랑은 그 남자가 메이슨이 겪었던 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불쌍하고 죄가 없는 어린 메이슨은 복잡한 어른들의 세계에 휘말리지 말아야 했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괜찮아, 아빠가 돌아오시면 네가 만든 쿠키를 보고 기뻐하실 거야.”그녀는 멈칫했다.“메이슨, 먼저 천천히 쿠키를 만들고 있어. 엄마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위층에 다녀올게.”“네.”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태연하게 위층으로 올라와 방문을 닫자 온하랑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메일을 열고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부승민이 보낸 동영상을 클릭했다.영상 속 심문실에는 마른 얼굴에 몇 군데가 찢어지고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의자
온하랑은 쪼그리고 앉아 메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메이슨은 경주에 집이 있기에 낯선 강남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도 이곳은 낯선 곳이야, 엄마의 집은 강남시에 있어.”슬퍼하는 메이슨을 온하랑은 계속 달래주었다.“앞으로 엄마가 메이슨 보러 자주 올게. 메이슨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남시에 찾아와도 돼.”그녀가 조산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은 탓에 먼저 메이슨을 데려간 최동철이 각종 절차를 밟아 양육권을 가졌고 그 사이 메이슨도 이미 이곳에 적응해 버렸다.최동철은 온갖 정성을 쏟아서 메이슨을 돌봤으며 마음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생활환경을 자주 바꿀 수 없으므로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메이슨은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이모가 만들었던 쿠키를 기억해? 엄마가 메이슨이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만들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오시면 메이슨의 솜씨가 어떤지 맛보라고 하자.”기분이 언짢았던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쿠키를 만들기 시작하자 곰돌이 모양의 틀로 반죽을 찍던 그는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쿠키를 만들던 중 온하랑은 부승민의 전화를 받았다.그가 물었다.“출발했어?”“아니, 깜빡했어. 아까 최 회장님 다녀가셨는데 동철 오빠의 소식이 있다고 하셨어.이틀 더 머물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갈게.”부승민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그가 기분이 언짢다고만 생각한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며칠인데 못 기다리겠어?”“아니.”부승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우현 씨 핸드폰을 훔쳤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응, 기억해.”바로 서우현이 그 남자를 찾았고 그의 입에서 메이슨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온하랑은 식탁에서 쿠키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메이슨을 바라보았다.“그가 왜?”“줄곧 그가 나타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으라고 했는데 며칠 전 그를 찾아서 잡고 심문하니 진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