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컷 놀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2시에 접어들고 있었다.세 사람은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로 돌아갔다.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세 사람이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가던 중, 온하랑은 익숙한 누군가의 실루엣을 발견했다.자세히 그 사람을 바라보던 그녀는 별안간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육광태 씨?”온하랑의 소리에 뒤를 돌아본 육광태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육광태의 표정에서 놀라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정말 신기하긴 하네요. 여기까지 오셨을 줄은 몰랐어요.”“여기 엄청 유명한 곳이잖아요. 친구가 와보고 싶다고 하길래 같이 한 번 와봤어요.”온하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육광태의 등 귀를 바라보았지만 말로만 전해 듣던 그 잘생긴 훈남 친구를 찾지는 못했다.육광태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친구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싶다고 산책하러 나갔어요.”“아, 언제쯤 떠나실 생각이세요?”“글쎄요. 친구가 가고 싶다고 할 때 가야죠.”“그럼 노르웨이 여행 끝마치면 곧바로 귀국하실 예정이세요? 아니면 또 다른 나라로 가실 건가요?”“그것도 제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해야죠.”“저희는 곧 링와스섬으로 떠날 예정인데, 같이 가실래요?”온하랑이 자신들까지 초대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육광태의 눈빛에는 순간 놀라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큰 손을 꾹 말아쥔 채 입가로 가져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했다.“가서 친구한테 한 번 물어보고 올게요. 저희 카톡이라도 추가할까요? 돌아가서 같이 갈지 말지 알려드릴게요.”“좋죠.”온하랑은 육광태가 내민 카카오톡 QR코드를 스캔한 후, 그에게 메시지를 남기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질문을 던졌다.“광태 씨, 저 아시죠?”육광태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고개를 들어보니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온하랑이 눈에 들어왔다, 육광태는 당황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설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온하랑은 육광태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역시나 친구가 거절한 탓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문자였다.온하랑이 답장을 보냈다.[아쉽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같이 놀러 가요.]육광태는 이모티콘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기회가 된다면’이라는 말에 부승민의 표정이 또다시 어두워졌다.온하랑 일행은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의 한쪽은 통유리로 되어있어 창밖의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시간개념이 사라진 탓에 관광객들의 식사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지금 레스토랑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식사를 절반 정도 마쳤을 때쯤, 누군가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저기 좀 봐! 저거 오로라 아니에요?”짙은 남색의 하늘 위로 한 갈래의 초록빛이 나타났다. 하도 희미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해내기 여간 쉽지 않았다.하지만 그런 풍경 역시 많은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은 오로라로 꽉 차 마치 오로라 대폭발을 연상케 했다. 큼지막한 녹색 빛들이 하얀 은하수 별빛과 보랏빛 밤하늘과 어울려 창공을 아름답게 수 놓았다.호텔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도 밖으로 달려 나와 오로라를 구경했다.온하랑 일행도 식사하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사진 촬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온하랑이 각도를 잡던 그때, 그녀는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제 패키지여행 버스 안에서처럼 식사 자리가 급격히 불편해졌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의 출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그 오로라에 꽂혀있을 뿐, 그 아무도 온하랑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호텔 2층 테라스로 옮겨 그곳을 쓱 훑어보았다.그 순간, 자신에게 내리꽂히던 그 날카로운 시선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고개를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듯싶더니 곧바로 다시 사진 촬영에 돌입했다.그 순
젊은 사내는 잠시 의아해했으나 이내 사건의 경과를 유추해 냈다. 온하랑이 이렇게 경각심이 높을 줄이야. 그는 웃으며 쟁반을 받아 들고는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방문을 닫았다.온하랑은 고개를 쏙 집어넣고는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온하랑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육광태였는데 그녀는 이 사람이 문제 있다고 진작 의심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확실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아마 그날 밤 그녀를 감시한 것도 이 사내였으리라. 그리고 뉴스를 통해 그녀를 알았을 것도 같지 않았다.이때 온하랑의 핸드폰에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 육광태가 주동적으로 그녀에게 보낸 문자였다.[내가 혹시 배가 아픈가요?]그가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걸 보고 온하랑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반박자 멈추는 듯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온하랑은 답장을 보냈다.[방에서 너무 오래 뜸 들이면서 안 나오길래 어디 몸이 안 좋은가 해서요. 저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아까 보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이 방에 묵는 건 어떻게 안 건데요?]온하랑은 육광태가 순순히 인정할 줄 몰랐다.[오전에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그 메시지를 보고 육광태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힐긋 쳐다보고는 따로 부정하지 않았다.[저한테 관심 가져줘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오늘 확실히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일찍 잠들었거든요. 밖이 소란스럽길래 그저 커튼을 열어 힐긋 쳐다봤을 뿐이죠.]사실 그가 묵고 있는 방은 0208이었으나 오전에 확실히 온 적 있기는 했다. 육광태는 한쪽으로 타자하면서 한쪽으로 부승민에게 말했다.“꽤 경각성이 높은 것 같은데.”부승민은 핸드폰을 그의 손에서 뺏어내고는 온하랑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그럼 쉬어요, 정말 우리랑 같이 안 놀래요?]온하랑은 육광태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알아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문자를 본 부승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네, 내 친구가 낯선 사람이랑 여행하는 걸 싫어해서요. 이번에 친구랑 온 거여서 아쉽게 됐네요, 친구를 버릴
부승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손이 떨려오고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감각을 뒤로 하고 부승민은 가까스로 세 글자를 써 보냈다.[아니요.]부승민은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참 기다려도 온하랑한테서 답장이 오지 않자 그는 팽팽히 당겨진 줄처럼 긴장해졌고 슬슬 초조해나기 시작했다. 온하랑이 정체를 알아챌까 두렵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정체를 아예 모를까 두렵기도 했다.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온하랑의 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특히나 그 아니요 세 글자가 결정적으로 의심이 가게 만들었다. 정말 육광태 친구인 걸까? 만약 친구라면 왜 육광태를 대신해서 답장하는 걸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친구... 온하랑의 뇌리에 불현듯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온하랑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하필 그가 생각날 건 또 뭐람?“하랑 씨, 지치신 거 아니셨어요? 왜 가서 쉬시지 않고 계세요.”주현과 김시연이 올라오면서 계단 입구에서 핸드폰을 들고 서있는 온하랑을 보고는 말을 걸어왔다.“아, 방에 있는 게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요.”방이 답답하면 창문을 열면 되지 않나, 오로라도 보고. 김시연이 의아하다는 눈길로 온하랑을 바라봤다. 그녀는 쏜살같이 온하랑 곁으로 다가와 빠르게 핸드폰을 스캔했다. 온하랑이 재빠른 속도로 화면을 껐지만 김시연이 조금 더 빨랐다. 김시연은 연락하는 상대방 이름이 육광태라는 것을 피뜩 보고 장난기 가득하게 웃었다.“아~ 여기 숨어서 육광태 씨랑 얘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이참!”온하랑은 김시연이 오해하는 걸 보고는 황급히 해석했다.“시연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난 그냥...”온하랑의 해석은 김시연 눈에 그저 눈가림 수단으로만 보였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다 안다고요~ 육광태 씨 키 크죠, 잘생겼죠, 부승민 대표보다는 돈이 없겠지만 그래도 돈 많은 친구가 있는 걸 봐서는 모자랄 것 같지도 않고요.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쁠 건 없죠, 주요하게는 그 남자 딱 봐도 거기가 되게 커 보인다니까요..
“전 좋아요!”김시연은 머리를 끄덕이며 놀리듯 온하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아이고, 우리 하랑 씨 이혼하더니만 이리도 빨리 사랑이 찾아오네요. 그것도 3명이나!”“스읍,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알겠네요~ 말 안 할게요. 아무튼 잘 고르면 되겠네요. 제가 보기엔 육광태나 이주혁이나 다 괜찮거든요.”“...”이주혁은 주현에게 자신의 비행기 일정을 보냈다. 시간이 아직 좀 남은 걸 확인하고 세 사람은 호텔에 몇 시간 머물며 휴식을 취하다 여름섬을 떴다.호텔에 짐을 놔두고 그들은 차를 운전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십 분쯤 기다렸을까, 이주혁이 입국 게이트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는 캡모자랑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어떤 짐도 없이 검은 롱패딩 하나만 입고 있었다. 패딩을 입어도 말라 보이는 그를 향해 주현이 손을 흔들었다.이주혁이 차 앞으로 다가와 먼저 뒷좌석 유리를 통해 온하랑을 힐긋 쳐다보고는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제가 여행에 방해된 건 아니죠?”듣기 좋은 목소리와 함께 입가엔 입김이 날렸다.“아니죠, 당연히.”주현이 대답했다.“여름섬을 다 돌아봤거든요, 저희가. 어차피 돌아올 생각이었어요, 얼른 타요.”이주혁은 뒷문을 열어 온하랑 옆에 앉았다. 그는 김시연과는 아는 사이가 아니어서 그저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한 뒤 온하랑에게 물었다.“하랑아, 몸은 좀 어때?”“많이 좋아졌어. 안 그러면 여기 여행 올 수도 없었겠지. 넌 좀 어때? 촬영 끝났다던데. 그렇게나 빨리?”“얼마 전에 여주인공이 바뀌었거든. 여주인공 씬을 찍을 수 없고 캐스팅도 시간이 걸리니까 내가 등장하는 씬을 앞당겨서 몰아 찍었어. 그래서 빨리 끝난 거고.”김시연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불륜녀는 당연히 바뀌어야죠.”이주혁은 김시연을 흘깃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그런데 요즘 연예계에 그런 말이 돌던데요. 부승민 대표가 추서윤 씨랑 결혼할 거라고, 그래서 추서윤 씨가 더 이상 얼굴을 드러내는 걸 막는다고요. 추서윤 씨 스케줄도 끊겼을걸요.
식사가 끝나고 주현이 차를 운전해 공항으로 갔다. 공항 주차장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이주혁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잘 가, 오주에서 보자.”이주혁은 멈칫하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하랑아, 나 안 바래다줘?”온하랑은 잠시 주춤하다 별생각 없이 반대편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마침 주현을 부르려는데 이주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주현 씨, 차에서 잠깐 기다려 줄래요?”“네!”주현은 재빠르게 대답하고 웃으며 온하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밖이 추워서 난 안 갈래요, 하랑 씨가 나 대신 이주혁 씨 잘 바래다주고 와요.”온하랑은 별수 없이 이주혁한테 물었다.“터미널까지 데려다줘?”“응.”이주혁이 배시시 웃었다. 차 안의 김시연과 주현이 서로 의미심장한 얼굴로 눈을 마주쳤다.온하랑과 이주혁은 나란히 터미널 입구까지 걸었다. 가는 길 내내 온하랑은 의식적으로 화제를 찾아 대화를 이어나갔다,“폰세에서의 촬영 스케줄이 이번 년 마지막이야?”이주혁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내가 남은 스케줄을 모두 앞당긴 거야. 너희랑 여행 갈 보름 정도 남기려고. 이것도 쉬는 방식이니까.”“뭘 그렇게까지 서둘러. 그때 가서 몸 다 버려서 병원 갈 생각 말고 워라밸 좀 지켜. 네 직업 특성상 휴일 정하는 거 꽤 자유롭잖아, 굳이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그냥 내가 혼자 여행 가는 거 재미없기도 하고 해서 그래. 너랑 같이 가려고.”이주혁의 깊은 눈이 온하랑을 보고 있었다. 온하랑의 얼굴이 아주 잠시 조금 경직됐으나 이주혁의 암시를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그녀는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 친구가 함께하면 아주 편하긴 할 거야. 됐다, 터미널 도착. 너 얼른 들어가, 나도 차에 들어가게. 밖이 너무 추워.”“잠깐만, 하랑아.”이주혁이 롱패딩의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케이스 위에는 영어가 몇 글자 새겨져 있었는데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였다. 이주혁은 조심조심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눈부실 정도로 정교한
멀지 않은 곳의 검은색 세단 옆, 부승민이 모자에 털 달린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열어젖힌 패딩 안으로 옷이랑 벨트가 보였다. 그는 조수석 문 앞에 서서 온하랑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온하랑이 이리 빨리 여름섬을 떠나는 게 이주혁때문이었단 사실을 안 뒤 부승민의 마음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씁쓸하기도 괴롭기도, 또 이주혁에 대한 질투도 조금 섞인 채.그리고 방금, 이주혁과 온하랑이 껴안고 키스하는 걸 보고 부승민은 더 이상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주혁은 일하는 시간도 짜내 온하랑을 보러 왔고, 온하랑은 그에 감동받은 건가? 두 사람이 만나기라도 하나? 온하랑이 이주혁의 아내가 되어 보통 부부들처럼 친밀한 사이가 될 것을 생각하면 부승민의 마음은 칼에 갈기갈기 찢기고 뼈저린 고통이 엄습하는 기분이었다.온하랑은 그의 것일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는 그저 온하랑이 혼란스러울까 그녀를 보살피느라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었다.온하랑은 여기에 왜 부승민이 있는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부승민은 그녀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가 타고 온 차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온하랑은 괜스레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바람 피우다 딱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깨달았다, 그녀는 전혀 제 발 저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온하랑과 부승민은 이미 이혼한 사이고 이주혁과도 정상적인 친구 관계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만에 하나 무슨 관계가 있다 해도 부승민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온하랑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부승민이 보는 아래 얼굴에 일말의 동요도 없이 차 옆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 마침 뒷좌석에 앉으려는데 뒤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랑아.”온하랑의 몸이 경직됐다. 그녀는 차 문을 닫고 몸을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앵두 같은 그 입술이 떨어졌다.“둘째 오빠, 진짜 이런 우연도 있네? 오빠도 여기 출장 온 거야?”며칠 안 봤다고 부승
온하랑은 무슨 웃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차갑게 부승민을 바라보며 말했다.“나 자유롭게 해준다며 오빠가 그랬잖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린 이미 이혼했어. 내 앞에서 연기할 필요 없다는 소리야.”부승민은 눈앞이 아찔해 났다. 온하랑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부승민에게 일말의 믿음도 남아있지 않았다.“나 후회해, 하랑아. 널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네가 말했다시피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내가 연기할 필요가 뭐 있어. 하랑아, 네가 믿건 안 믿건 난 정말 너 많이 좋아해. 너랑 이혼하기 싫어.”부승민은 이전에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었으나 언제부터였냐 묻는 온하랑의 물음에 항상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진짜 좋아하는 거라 쳐도 온하랑이 꼭 돌아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좋아한다 해서 그녀가 지금껏 받아왔던 상처가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온하랑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후회해도 소용없어. 오빠가 어떤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하는진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 난 오빠랑 재혼할 일 없어.”온하랑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한테서 무슨 이득을 볼 게 있다고 추서윤을 국내에 버려두고 여기까지 와서 연기를 하는 건지. 설마 할아버지 유언장에 BX 그룹 회장 자리에 앉는 조건이 이혼하지 않는 건가? 아마 이게 가장 납득할 만한 이유인 것 같았다.말을 듣고 난 부승민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늘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다. 온하랑의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것이었다. 그녀는 부승민과 재혼할 생각이 없다. 그 한마디는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하랑 씨, 얼른 타요.”김시연이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는 온하랑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부승민을 째려보고는 잽싸게 조수석에 앉았다. 부승민을 볼 때부터 김시연은 그를 온하랑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현이 그녀를 막아 나서서 온하랑 스스로 해결하게 놔두고 온하랑이 해결할 수 없을 때 다시 두 사람이 돕자고 결정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