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컷 놀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2시에 접어들고 있었다.세 사람은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로 돌아갔다.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세 사람이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가던 중, 온하랑은 익숙한 누군가의 실루엣을 발견했다.자세히 그 사람을 바라보던 그녀는 별안간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육광태 씨?”온하랑의 소리에 뒤를 돌아본 육광태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육광태의 표정에서 놀라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정말 신기하긴 하네요. 여기까지 오셨을 줄은 몰랐어요.”“여기 엄청 유명한 곳이잖아요. 친구가 와보고 싶다고 하길래 같이 한 번 와봤어요.”온하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육광태의 등 귀를 바라보았지만 말로만 전해 듣던 그 잘생긴 훈남 친구를 찾지는 못했다.육광태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친구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싶다고 산책하러 나갔어요.”“아, 언제쯤 떠나실 생각이세요?”“글쎄요. 친구가 가고 싶다고 할 때 가야죠.”“그럼 노르웨이 여행 끝마치면 곧바로 귀국하실 예정이세요? 아니면 또 다른 나라로 가실 건가요?”“그것도 제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해야죠.”“저희는 곧 링와스섬으로 떠날 예정인데, 같이 가실래요?”온하랑이 자신들까지 초대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육광태의 눈빛에는 순간 놀라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큰 손을 꾹 말아쥔 채 입가로 가져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했다.“가서 친구한테 한 번 물어보고 올게요. 저희 카톡이라도 추가할까요? 돌아가서 같이 갈지 말지 알려드릴게요.”“좋죠.”온하랑은 육광태가 내민 카카오톡 QR코드를 스캔한 후, 그에게 메시지를 남기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질문을 던졌다.“광태 씨, 저 아시죠?”육광태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고개를 들어보니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온하랑이 눈에 들어왔다, 육광태는 당황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설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온하랑은 육광태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역시나 친구가 거절한 탓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문자였다.온하랑이 답장을 보냈다.[아쉽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같이 놀러 가요.]육광태는 이모티콘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기회가 된다면’이라는 말에 부승민의 표정이 또다시 어두워졌다.온하랑 일행은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의 한쪽은 통유리로 되어있어 창밖의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시간개념이 사라진 탓에 관광객들의 식사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지금 레스토랑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식사를 절반 정도 마쳤을 때쯤, 누군가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저기 좀 봐! 저거 오로라 아니에요?”짙은 남색의 하늘 위로 한 갈래의 초록빛이 나타났다. 하도 희미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해내기 여간 쉽지 않았다.하지만 그런 풍경 역시 많은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은 오로라로 꽉 차 마치 오로라 대폭발을 연상케 했다. 큼지막한 녹색 빛들이 하얀 은하수 별빛과 보랏빛 밤하늘과 어울려 창공을 아름답게 수 놓았다.호텔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도 밖으로 달려 나와 오로라를 구경했다.온하랑 일행도 식사하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사진 촬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온하랑이 각도를 잡던 그때, 그녀는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제 패키지여행 버스 안에서처럼 식사 자리가 급격히 불편해졌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의 출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그 오로라에 꽂혀있을 뿐, 그 아무도 온하랑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호텔 2층 테라스로 옮겨 그곳을 쓱 훑어보았다.그 순간, 자신에게 내리꽂히던 그 날카로운 시선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고개를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듯싶더니 곧바로 다시 사진 촬영에 돌입했다.그 순
젊은 사내는 잠시 의아해했으나 이내 사건의 경과를 유추해 냈다. 온하랑이 이렇게 경각심이 높을 줄이야. 그는 웃으며 쟁반을 받아 들고는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방문을 닫았다.온하랑은 고개를 쏙 집어넣고는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온하랑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육광태였는데 그녀는 이 사람이 문제 있다고 진작 의심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확실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아마 그날 밤 그녀를 감시한 것도 이 사내였으리라. 그리고 뉴스를 통해 그녀를 알았을 것도 같지 않았다.이때 온하랑의 핸드폰에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 육광태가 주동적으로 그녀에게 보낸 문자였다.[내가 혹시 배가 아픈가요?]그가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걸 보고 온하랑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반박자 멈추는 듯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온하랑은 답장을 보냈다.[방에서 너무 오래 뜸 들이면서 안 나오길래 어디 몸이 안 좋은가 해서요. 저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아까 보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이 방에 묵는 건 어떻게 안 건데요?]온하랑은 육광태가 순순히 인정할 줄 몰랐다.[오전에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그 메시지를 보고 육광태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힐긋 쳐다보고는 따로 부정하지 않았다.[저한테 관심 가져줘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오늘 확실히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일찍 잠들었거든요. 밖이 소란스럽길래 그저 커튼을 열어 힐긋 쳐다봤을 뿐이죠.]사실 그가 묵고 있는 방은 0208이었으나 오전에 확실히 온 적 있기는 했다. 육광태는 한쪽으로 타자하면서 한쪽으로 부승민에게 말했다.“꽤 경각성이 높은 것 같은데.”부승민은 핸드폰을 그의 손에서 뺏어내고는 온하랑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그럼 쉬어요, 정말 우리랑 같이 안 놀래요?]온하랑은 육광태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알아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문자를 본 부승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네, 내 친구가 낯선 사람이랑 여행하는 걸 싫어해서요. 이번에 친구랑 온 거여서 아쉽게 됐네요, 친구를 버릴
부승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손이 떨려오고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감각을 뒤로 하고 부승민은 가까스로 세 글자를 써 보냈다.[아니요.]부승민은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참 기다려도 온하랑한테서 답장이 오지 않자 그는 팽팽히 당겨진 줄처럼 긴장해졌고 슬슬 초조해나기 시작했다. 온하랑이 정체를 알아챌까 두렵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정체를 아예 모를까 두렵기도 했다.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온하랑의 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특히나 그 아니요 세 글자가 결정적으로 의심이 가게 만들었다. 정말 육광태 친구인 걸까? 만약 친구라면 왜 육광태를 대신해서 답장하는 걸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친구... 온하랑의 뇌리에 불현듯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온하랑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하필 그가 생각날 건 또 뭐람?“하랑 씨, 지치신 거 아니셨어요? 왜 가서 쉬시지 않고 계세요.”주현과 김시연이 올라오면서 계단 입구에서 핸드폰을 들고 서있는 온하랑을 보고는 말을 걸어왔다.“아, 방에 있는 게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요.”방이 답답하면 창문을 열면 되지 않나, 오로라도 보고. 김시연이 의아하다는 눈길로 온하랑을 바라봤다. 그녀는 쏜살같이 온하랑 곁으로 다가와 빠르게 핸드폰을 스캔했다. 온하랑이 재빠른 속도로 화면을 껐지만 김시연이 조금 더 빨랐다. 김시연은 연락하는 상대방 이름이 육광태라는 것을 피뜩 보고 장난기 가득하게 웃었다.“아~ 여기 숨어서 육광태 씨랑 얘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이참!”온하랑은 김시연이 오해하는 걸 보고는 황급히 해석했다.“시연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난 그냥...”온하랑의 해석은 김시연 눈에 그저 눈가림 수단으로만 보였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다 안다고요~ 육광태 씨 키 크죠, 잘생겼죠, 부승민 대표보다는 돈이 없겠지만 그래도 돈 많은 친구가 있는 걸 봐서는 모자랄 것 같지도 않고요.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쁠 건 없죠, 주요하게는 그 남자 딱 봐도 거기가 되게 커 보인다니까요..
“전 좋아요!”김시연은 머리를 끄덕이며 놀리듯 온하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아이고, 우리 하랑 씨 이혼하더니만 이리도 빨리 사랑이 찾아오네요. 그것도 3명이나!”“스읍,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알겠네요~ 말 안 할게요. 아무튼 잘 고르면 되겠네요. 제가 보기엔 육광태나 이주혁이나 다 괜찮거든요.”“...”이주혁은 주현에게 자신의 비행기 일정을 보냈다. 시간이 아직 좀 남은 걸 확인하고 세 사람은 호텔에 몇 시간 머물며 휴식을 취하다 여름섬을 떴다.호텔에 짐을 놔두고 그들은 차를 운전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십 분쯤 기다렸을까, 이주혁이 입국 게이트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는 캡모자랑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어떤 짐도 없이 검은 롱패딩 하나만 입고 있었다. 패딩을 입어도 말라 보이는 그를 향해 주현이 손을 흔들었다.이주혁이 차 앞으로 다가와 먼저 뒷좌석 유리를 통해 온하랑을 힐긋 쳐다보고는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제가 여행에 방해된 건 아니죠?”듣기 좋은 목소리와 함께 입가엔 입김이 날렸다.“아니죠, 당연히.”주현이 대답했다.“여름섬을 다 돌아봤거든요, 저희가. 어차피 돌아올 생각이었어요, 얼른 타요.”이주혁은 뒷문을 열어 온하랑 옆에 앉았다. 그는 김시연과는 아는 사이가 아니어서 그저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한 뒤 온하랑에게 물었다.“하랑아, 몸은 좀 어때?”“많이 좋아졌어. 안 그러면 여기 여행 올 수도 없었겠지. 넌 좀 어때? 촬영 끝났다던데. 그렇게나 빨리?”“얼마 전에 여주인공이 바뀌었거든. 여주인공 씬을 찍을 수 없고 캐스팅도 시간이 걸리니까 내가 등장하는 씬을 앞당겨서 몰아 찍었어. 그래서 빨리 끝난 거고.”김시연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불륜녀는 당연히 바뀌어야죠.”이주혁은 김시연을 흘깃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그런데 요즘 연예계에 그런 말이 돌던데요. 부승민 대표가 추서윤 씨랑 결혼할 거라고, 그래서 추서윤 씨가 더 이상 얼굴을 드러내는 걸 막는다고요. 추서윤 씨 스케줄도 끊겼을걸요.
식사가 끝나고 주현이 차를 운전해 공항으로 갔다. 공항 주차장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이주혁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잘 가, 오주에서 보자.”이주혁은 멈칫하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하랑아, 나 안 바래다줘?”온하랑은 잠시 주춤하다 별생각 없이 반대편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마침 주현을 부르려는데 이주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주현 씨, 차에서 잠깐 기다려 줄래요?”“네!”주현은 재빠르게 대답하고 웃으며 온하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밖이 추워서 난 안 갈래요, 하랑 씨가 나 대신 이주혁 씨 잘 바래다주고 와요.”온하랑은 별수 없이 이주혁한테 물었다.“터미널까지 데려다줘?”“응.”이주혁이 배시시 웃었다. 차 안의 김시연과 주현이 서로 의미심장한 얼굴로 눈을 마주쳤다.온하랑과 이주혁은 나란히 터미널 입구까지 걸었다. 가는 길 내내 온하랑은 의식적으로 화제를 찾아 대화를 이어나갔다,“폰세에서의 촬영 스케줄이 이번 년 마지막이야?”이주혁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내가 남은 스케줄을 모두 앞당긴 거야. 너희랑 여행 갈 보름 정도 남기려고. 이것도 쉬는 방식이니까.”“뭘 그렇게까지 서둘러. 그때 가서 몸 다 버려서 병원 갈 생각 말고 워라밸 좀 지켜. 네 직업 특성상 휴일 정하는 거 꽤 자유롭잖아, 굳이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그냥 내가 혼자 여행 가는 거 재미없기도 하고 해서 그래. 너랑 같이 가려고.”이주혁의 깊은 눈이 온하랑을 보고 있었다. 온하랑의 얼굴이 아주 잠시 조금 경직됐으나 이주혁의 암시를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그녀는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 친구가 함께하면 아주 편하긴 할 거야. 됐다, 터미널 도착. 너 얼른 들어가, 나도 차에 들어가게. 밖이 너무 추워.”“잠깐만, 하랑아.”이주혁이 롱패딩의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케이스 위에는 영어가 몇 글자 새겨져 있었는데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였다. 이주혁은 조심조심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눈부실 정도로 정교한
멀지 않은 곳의 검은색 세단 옆, 부승민이 모자에 털 달린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열어젖힌 패딩 안으로 옷이랑 벨트가 보였다. 그는 조수석 문 앞에 서서 온하랑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온하랑이 이리 빨리 여름섬을 떠나는 게 이주혁때문이었단 사실을 안 뒤 부승민의 마음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씁쓸하기도 괴롭기도, 또 이주혁에 대한 질투도 조금 섞인 채.그리고 방금, 이주혁과 온하랑이 껴안고 키스하는 걸 보고 부승민은 더 이상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주혁은 일하는 시간도 짜내 온하랑을 보러 왔고, 온하랑은 그에 감동받은 건가? 두 사람이 만나기라도 하나? 온하랑이 이주혁의 아내가 되어 보통 부부들처럼 친밀한 사이가 될 것을 생각하면 부승민의 마음은 칼에 갈기갈기 찢기고 뼈저린 고통이 엄습하는 기분이었다.온하랑은 그의 것일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는 그저 온하랑이 혼란스러울까 그녀를 보살피느라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었다.온하랑은 여기에 왜 부승민이 있는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부승민은 그녀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가 타고 온 차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온하랑은 괜스레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바람 피우다 딱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깨달았다, 그녀는 전혀 제 발 저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온하랑과 부승민은 이미 이혼한 사이고 이주혁과도 정상적인 친구 관계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만에 하나 무슨 관계가 있다 해도 부승민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온하랑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부승민이 보는 아래 얼굴에 일말의 동요도 없이 차 옆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 마침 뒷좌석에 앉으려는데 뒤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랑아.”온하랑의 몸이 경직됐다. 그녀는 차 문을 닫고 몸을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앵두 같은 그 입술이 떨어졌다.“둘째 오빠, 진짜 이런 우연도 있네? 오빠도 여기 출장 온 거야?”며칠 안 봤다고 부승
온하랑은 무슨 웃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차갑게 부승민을 바라보며 말했다.“나 자유롭게 해준다며 오빠가 그랬잖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린 이미 이혼했어. 내 앞에서 연기할 필요 없다는 소리야.”부승민은 눈앞이 아찔해 났다. 온하랑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부승민에게 일말의 믿음도 남아있지 않았다.“나 후회해, 하랑아. 널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네가 말했다시피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내가 연기할 필요가 뭐 있어. 하랑아, 네가 믿건 안 믿건 난 정말 너 많이 좋아해. 너랑 이혼하기 싫어.”부승민은 이전에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었으나 언제부터였냐 묻는 온하랑의 물음에 항상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진짜 좋아하는 거라 쳐도 온하랑이 꼭 돌아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좋아한다 해서 그녀가 지금껏 받아왔던 상처가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온하랑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후회해도 소용없어. 오빠가 어떤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하는진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 난 오빠랑 재혼할 일 없어.”온하랑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한테서 무슨 이득을 볼 게 있다고 추서윤을 국내에 버려두고 여기까지 와서 연기를 하는 건지. 설마 할아버지 유언장에 BX 그룹 회장 자리에 앉는 조건이 이혼하지 않는 건가? 아마 이게 가장 납득할 만한 이유인 것 같았다.말을 듣고 난 부승민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늘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다. 온하랑의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것이었다. 그녀는 부승민과 재혼할 생각이 없다. 그 한마디는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하랑 씨, 얼른 타요.”김시연이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는 온하랑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부승민을 째려보고는 잽싸게 조수석에 앉았다. 부승민을 볼 때부터 김시연은 그를 온하랑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현이 그녀를 막아 나서서 온하랑 스스로 해결하게 놔두고 온하랑이 해결할 수 없을 때 다시 두 사람이 돕자고 결정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