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선월의 집에서 밥을 먹은 후, 부승민은 온하랑을 호텔에 데려다주고는 바로 뉴욕으로 향했다.온하랑도 호텔에서 하룻밤 묵은 후, 다음 날 바로 강남시로 돌아갔다.추석 연휴의 여행이 이로써 끝이 났다.온하랑은 기사에게 연락하지 않고 대신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연락해 그녀를 마중 나와 달라고 했다.비행기에서 내린 그녀는 아주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가 산부인과 검사를 받았다.그녀는 이제 임신 14주 차가 되었다. 초음파 검사에서 태아가 이미 어느 정도 자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의사가 옆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여기 보이시는 게 아기 손이고요, 이게 발이에요. 여기가 머리인데 아직 눈이랑 코는 잘 안 보이네요. 아기는 건강하고요, 발육도 잘 되었네요.”의사의 말은 들은 아주머니가 매우 기뻐했다.산부인과 검사가 끝나고 진료실을 나서려고 할 때 의사가 당부했다.“임신 기간에는 성관계를 절제하실 필요가 있어요. 태아 발육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온하랑이 얼굴을 붉히며 알겠다고 대답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주머니가 부승민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지만 온하랑은 묵묵부답이었다.집에 돌아온 후, 온하랑은 짐을 간단히 풀고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10월 7일부터는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온하랑이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 급하게 노크했다.“들어오세요.”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온 전무님, 밖에 지금 형사님 두 분이 와 계시는데...”비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형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온하랑의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신분증을 보여주었다.왼쪽에 서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온하랑 씨 되십니까?”온하랑은 하고 있던 일을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네, 제가 온하랑입니다. 무슨 일이시죠?”“BX 그룹의 한 비서에게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상업 기밀을 유출했다는데 온하랑 씨에게 혐의가 있어서요
“알겠어요, 같이 가시죠.”온하랑이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그러자 형사 둘이 온하랑의 양쪽에 서서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그중 한 형사가 문밖으로 나서며 오상철에게 한마디 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상철 부대표님. 저희가 꼭 확실하게 조사하겠습니다.”경찰서에 들어선 후, 온하랑은 핸드폰을 바친 뒤 심문실에 들어갔다.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경찰이 그날의 CCTV를 보며 온하랑에게 물었다.“온하랑 씨, 그날 왜 부승민 씨의 사무실에 들어간 거죠? 들어가기 전에 부승민 씨가 회사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알고 있었어요. 제가 부승민 씨의 사무실에 간 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어요. 부승민 씨의 허락을 받았고요.”경찰이 그날 온하랑과 부승민이 나눈 대화 내역을 보며 말했다.“둘은 무슨 사이죠?”“부부예요.”경찰이 온하랑을 한번 보고는 심문실을 나갔고, 방 안에는 온하랑만 남게 되었다.온하랑은 그날 부승민의 허락을 받고 그의 사무실에 들어갔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있는 건 그것뿐, 중간에 부승민의 사무실에서 혼자 있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는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진짜 범인을 잡기 전까지 그녀는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하지만 혐의와는 별개로 그녀가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24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풀려날 수 밖에 없었다.문제가 있다면 24시간이 생각보다 긴 시간이라는 것이었다.심문실에는 의자와 책상만 있었다.온하랑은 의자에 기대 앉은 채 의자 손잡이에 팔을 대고 턱을 괬다.그 자세로 얼마 동안 있고 난 뒤, 온하랑은 일어서서 심문실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심문실 안은 그녀의 숨소리만 가득했고, 아무것도 없는 밀폐된 방에 할 일도 없이 혼자 있는 건 지루하고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점심시간이 되자 한 경찰이 간단한 밥과 반찬, 그리고 물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온하랑은 입맛이 없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 밥을 몇 입 정도 먹은 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
부승민을 따라 심문실을 나서던 온하랑이 계성진을 발견했다.그때, 부승민이 계성진의 곁을 지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여기는 알아서 처리해 줘, 우리는 먼저 가볼게.”“네.”온하랑도 계성진에게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했다.온하랑은 계성진과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가 BX 그룹 법무팀의 특채 변호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강남시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스타 변호사였다.온하랑은 계성진이 기밀 유출 사건의 조사 때문에 경찰서에 왔다가 그냥 온 김에 그녀를 빼내 준 것이라고 추측했다.온하랑이 부승민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뉴욕에 이틀 정도 있다 온다 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빨리 왔어?”부승민이 어두운 눈으로 온하랑을 보더니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어이없다는 듯웃었다.“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뭐 네가 진짜 안에서 밤이라도 새게 내버려 둬?”이틀은 그저 대략 예상한 시간이었을 뿐이고, 일을 일찍 끝낸 그는 바로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비행기가 착륙한 후 연민우가 남긴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바로 경찰서로 달려오며 계성진에게 연락했다.온하랑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오상철 부대표가 직원들 다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부부라는 사실을 공개할 수는 없었으니까.“고집은.”부승민이 그녀를 약간 질책했다.“할아버지나, 작은삼촌이나, 혹은 부민재한테 연락해도 넌 당장 거기를 빠져나올 수 있었어.”다른 사람이었다면 경찰서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혐의에서 벗어났을 텐데 온하랑만 미련하게 그 안에 갇혀 한나절을 보냈다.그녀는 상류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서민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마음가짐과는 별개로 이런 위치에 있으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온하랑이 회사에 금방 들어갔을 때 그녀가 부씨 집안 빽으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 일에 더 매진해서 자기 능력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온하랑은 만약 그녀가 회사
“여보세요? 대표님? 대표님?”전화는 오상철에게서 걸려 온 것이었는데, 그는 부승민이 전화를 받은 후 아무 말도 없자 더 불안해졌다.그러다가 오상철이 세 번째로 부승민을 불렀을 때 전화기 저편에서 느릿한 대답이 들려왔다.“오상철 부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시죠?”부승민은 방을 나와 방문을 닫은 후에야 오상철의 부름에 답했다.“대표님 귀국하셨나요? 연 비서한테서 들었는데 직원의 부주의로 뉴욕지사에 일이 터졌다면서요? 그래도 대표님이 계셔서 문제가 커지기 전에 잘 수습되었다고 들었어요. 역시 우리 회사는 대표님이 없으면 굴러가질 못한다니까요.”오상철이 전화하자마자 갑자기 아부의 말을 쏟아내자 부승민이 예의상 웃어 보이며 말했다.“무슨 용건으로 전화하셨죠?”오상철은 그제야 전화를 한 진짜 이유를 말했다.“회사 기밀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에 제가 맘이 너무 급한 나머지 온 전무님을 의심했습니다. 저는 그저 회사를 위하는 마음에 그랬을 뿐 온 전무에게 사적인 감정으로 그런 게 절대 아니니 대표님이 대신 온 전무에게 말 좀 잘 해주실 수 있을까요.”부승민이 온하랑을 경찰서에서 빼낸 후 집에 데려오자마자 오상철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건, 오상철이 그를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오상철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면 온하랑에게 직접 전화했을 테지만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건 이번 일에 대한 부승민의 태도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겠지.만약 부승민이 이 일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오상철은 걱정할 것 없이 평소처럼 지내면 된다.하지만 만약 부승민이 이번 일 때문에 오상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면 늦기 전에 오해를 풀고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나중에 부승민이 자신에게 복수하는 걸 방지해야 했다.“부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부대표님이 회사를 위하는 마음에 그렇게 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부대표님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거잖아요. 온하랑 씨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으니 이해할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말을
온하랑이 부승민과 추서윤 사이에 끼어든 바람녀라는 기사는 이미 발표된 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추서윤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 아래 댓글에 꼭 온하랑을 언급하고는 했다.특히 얼마 전 있었던 추서윤의 생일파티에 대해서도, 추서윤의 팬들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동시에 온하랑에게 저주를 퍼부었다.온하랑의 아버지 때문에 온하랑을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발표회에서의 일도 온하랑이 바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의거가 되었다.하지만 그 증거가 추서윤의 팬들을 설득할 정도로 유력하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여전히 온하랑을 바람녀로 생각하고 있었다.이 스캔들에 관해서는 정확한 증거가 없었기에 이제껏 다들 이렇다 저렇다 추측만 할 뿐이었다.하지만 방금, 더 이상 추측으로 넘길 수 없을 정도의 명확한 사실 근거를 기반으로 한 기사가 터지며 부승민과 온하랑이 다시 실검에 올랐다.오늘 연민우가 전화한 건 바로 이 일 때문이었다.기사에는 온하랑과 부승민이 같이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 두 사람이 같이 쥬얼리 샵에서 쇼핑하고 있는 모습, BX 그룹 주차장에서 둘이 같은 차에 오르는 모습 등을 담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더 이상 남매 관계라는 변명으로 넘어갈 수 없을 정도의 확실한 증거였다.이 사실을 가장 먼저 터뜨린 건 SNS에서 유명한 한 인플루언서였다.그는 사진들과 함께 긴 내용의 문자를 올렸는데 마치 부승민과 온하랑을 잘 아는 듯한 말투였다.[...사실 좀 슬퍼요, 저도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거든요. 대학교 때 부승민 씨와 추서윤 씨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어요. 능력도 비슷하고, 집안 상황도 비슷하고, 정말 하늘이 빚어 준 것 같은 선남선녀였는데. 참 아쉽게 됐네요... 사실 저는 지금도 부승민 씨가 추서윤 씨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쩔 수 없죠...][온하랑 씨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뭐랄까... 음... 되게 도도하고 고압적이었어요. 얼마 전에 온하랑 씨랑
만약 추서윤이 이 스캔들에 껴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온하랑은 일반인이었고, 부승민은 비록 공인이지만 연예계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연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하지만 연예인과 관련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기에 사람들은 이번 일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이 스캔들에서 추서윤이 피해자였고 온하랑이 가해자였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 스캔들에서 온하랑과 부승민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다 자본가의 발닦개 취급을 받으며 같이 욕먹고 있었다.순식간에 두 사람에 관한 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BX 그룹의 주식마저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연민우의 전화를 끊은 부승민이 연락처를 뒤지더니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몇초 후, 통화가 연결되어 전화 너머에서 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부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하루 줄게. 지금 당장 ‘스캔들 연구소’, ‘이슈텔러’, ‘연예계의 모든 것’, 이 세 SNS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 와.”아무래도 이제껏 언론에 너무 관대하게 대처했나 보다. 그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건들거리며 말했다.“부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내일 좋은 소식 들고 올게요!”부승민은 전화를 끊고 포털사이트에 다시 들어갔다.연민우가 일을 잘 처리했는지 언론은 어느 정도 통제된 상태였다.그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나간 거 아니었어?”문 닫는 소리에 눈을 뜬 온하랑이 부승민을 보며 말했다. 방금 잠에서 깬 탓에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잠에서 깬 걸 알고는 큰 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가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나가? 내가 가긴 어딜 가?”온하랑은 어둠 속에서 부승민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와 한참 동안 눈을 마주치던 부승민은 그제야 깨달았다. 온하랑은 그가 추서윤의
온하랑은 이주혁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이주혁에게서 카톡이 왔다.[인터넷에서 떠드는 건 신경 쓰지 마. 그 사람들은 그냥 분풀이할 데가 필요한 것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관심 가지는 사람 없을 거야.]연예인들은 다들 세컨드 계정이 있었고 이주혁도 마찬가지였다.게다가 그는 온하랑에게 관심이 있었기에 댓글에서 온하랑을 욕하는 걸 보고는 참지 못하고 세컨드 계정으로 그들과 한 판 붙었다.[어이구, 온하랑 발닦개 납셨네...]그러나 결국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산 채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온하랑은 그의 문자를 받고 어리둥절해졌다.[무슨 뜻이야?]채팅창의 1이 사라졌지만 이주혁은 오래도록 답장이 없었다.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온하랑이 스캔들이 터진 사실을 모른다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방금 그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서 문자를 취소하는 것도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온하랑도 뭔가를 눈치채고 다시 물었다.[안 알려줄 거야? 그럼 내가 알아서 찾아봐도 되고.]그러자 이주혁은 어쩔 수 없이 온하랑에게 ‘스캔들 연구소’가 올린 게시물의 링크를 보냈다.[이런 건 그냥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언론사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만 지어내고, 네티즌들도 그냥 생각 없이 따라서 욕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맘에 담아두지 마.]이주혁은 링크와 함께 위로의 말도 보냈다.이주혁이 보내준 게시물을 쭉 훑어본 온하랑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뭐, 글은 잘 쓰네. 말도 두루뭉술하게 잘하고. 딱 언론인이 쓸 법한 글이네.’스크롤을 아래로 쭉쭉 내리다가 게시물이 올라온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부승민을 보았다.“기사 봤어. 새벽에 연 비서님한테서 전화 온 거 이거 때문이야?”부승민은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미 사람 시켜서 다 처리했어.”“그래.”말은 마친 온하랑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그 사람
게다가 부승민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적의를 보이기도 했다.예전에 그냥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넘긴 것들이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온하랑이 말하는 남자 친구가 부승민 임을 가리키는 많은 단서들이 있었다.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던 중, 이주혁은 일전에 온하랑이 남자 친구와 곧 헤어질 것 같다고 얘기했던 때가 부승민이 추서윤을 위해 생일파티를 준비했을 때라는 걸 기억해 냈다.그리고 추서윤이 화상을 입었을 때 그녀가 별로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도 부승민이 그녀의 옆에서 밤새 간호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추서윤과 부승민의 관계가 이렇게 복잡하게 이어져 있는데, 그런 남자가 온하랑에게 어울리기나 할까?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주혁은 온하랑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하랑아, 만약 그 기사가 사실이라면 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부승민은 네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핸드폰을 켠 온하랑이 이주혁에게서 온 두 통의 문자를 확인했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이 상황에서 부승민을 두둔하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그저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온하랑이 답장을 보내려고 할 때 옆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그가 가소롭다는 듯 약간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누가 의지 할 만한 사람인데? 이주혁이?”깜짝 놀란 온하랑이 핸드폰을 몸 뒤로 숨기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부승민을 보았다.“왜 남의 핸드폰을 훔쳐봐?”“훔쳐본 적 없어. 당당하게 본 건데.”부승민은 밥 먹을 때 그녀가 계속 핸드폰을 붙들고 있기에 뭐하나 궁금해서 살짝 곁눈질했고 그때 이미 온하랑이 이주혁과 문자를 주고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온하랑이 차에 올라타서도 이주혁과 문자를 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부승민은 그녀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고 그 웃기지도 않는 대화 내용을 보게 되었다.“너...”온하랑이 부승민을 흘겨보고는 핸드폰을 다시 꺼내 이주혁에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