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어둑해지자 도로 옆의 가게들과 빌딩에는 환한 불이 들어와 도시를 밝게 비추었다.온하랑은 부승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승민이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그의 태도가 그의 진심 때문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게다가 추서윤의 존재는 온하랑에게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었다.추서윤이 있는 한, 온하랑과 부승민은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먼저 밥을 먹으러 간 후 클럽으로 갔다.차는 클럽으로 들어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갔다.부승민과 온하랑은 차에서 내린 후, 익숙한 길로 자주 가는 룸에 들어갔다.룸 안의 조명은 어두웠고 친구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부승민이 문을 열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한효건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부승민, 너 이러면 반칙이지. 우리는 다 파트너를 데려오지 않았는데 추서윤을 데려오면 어떡해. 자랑하는 거야?”온하랑은 부승민 뒤에 서서 가려져 있었다. 복도는 환하고 룸 안은 어두우니 한효건은 온하랑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려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바로 온하랑을 알아본 강민은 눈썹을 까딱거리고 부승민을 쳐다보았다.노준형은 마른 기침을 했다.“큼...”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온하랑은 어색해서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만 같았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오면서 얘기했다.“82년산 와인으로도 네 입은 못 막겠네.”한효건은 그제야 부승민 옆의 사람이 추서윤이 아니라 온하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했다.“하랑이었구나, 미안해. 내가 헷갈렸네. 이리 와 앉아. 일단 벌주 세 잔 마실게.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그렇게 말한 후, 한효건은 얼른 벌주 세 잔을 마셔버렸다.사실 한효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 몇 명도 온하랑을 추서윤으로 착각했다.두 사람이 닮아서가 아니었다. 전에는 친구들 모임에 여자 파트너를 데려오지 않던 부
그들은 부승민이 일부러 온하랑을 데리고 와서 그들 앞에서 친근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다.부승민이 전에 추서윤을 데려왔을 때, 그는 그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만 했었고 추서윤은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들은 부승민이 온하랑만 특별대우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친구 중에도 플레이보이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매일 여자를 갈아치우면서 갖고 놀았다.하지만 온하랑은 함부로 갖고 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렇지 않으면 부승호가 화를 낼 것이다.하지만 그렇다면 추서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노준형은 추서윤이 걱정되었다.“준형아.”부승민이 갑자기 노준형을 불렀다.“하랑이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아?”온하랑이 예전의 일을 떠올리자 부승민도 그제야 생각났다. 온하랑더러 추서윤을 ‘새언니’라고 부르라고 한 사람이 바로 노준형이었다.부승민의 눈을 마주한 노준형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바로 술을 가져와 얘기했다.“하랑아, 며칠 전에는 내가 실수로 말을 함부로 내뱉었어. 미안해. 이제야 사과하게 되네. 승민이 얼굴을 봐서라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줘. 사과의 의미로 잔을 비울게.”그는 먼저 잔에 있는 술을 다 마셔버렸다.한효건 등 사람들은 눈치를 보더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다들 부승민이 오늘 그들을 부른 것이 노준형의 사과를 받기 위해서라는 것을 눈치챘다. 노준형과 부승민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는 다들 알고 있던 일이다.두 사람은 오랜 친구일 뿐만 아니라 대학 친구이기도 했다. 노준형이 조금 모자라긴 했지만 부승민은 언제나 그를 곁에 두었다. 지금의 부승민은 노준형더러 온하랑에게 사과하라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온하랑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멀지 않은 곳의 술병을 가져와 그의 잔을 채우고 얘기했다.“추서윤 씨와 사이가 좋은 건 알아요. 나 같아도 내 친구를 위해 나설 거예요. 안 그래요?”노준형은 입꼬리를 겨우 올렸다.이 질문은 그를 기다리는 함정이었다. 어떻게 대답해도 결국에는 덫에 걸려들 것이다.“
예전의 온하랑은 부승민의 친구들 앞에서 그를 둘째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 되었다.하지만 부승민이 그렇게 물으니 온하랑은 웃으면서 되물었다.“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네 생각에는?”“승민 오빠.”부승민은 그저 웃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순간이었지만, 부승민은 온하랑이 그를 ‘여보’라고 불러줬으면 했다.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그들은 종래로 ‘여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 호칭은 그들에게 가장 어색한 호칭이었다.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노준형은 표정이 썩어갔다.강민은 자세한 일은 몰랐지만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것 같았다.그래서 얼른 일어나 화제를 돌렸다.“오늘 왜 늦은 거야? 오진무 때문에 늦은 거야?”“아니, 하랑이랑 반지 맞추느라 늦었어.”“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이제야 반지를 맞추는 거야?”강민이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한효건은 깜짝 놀랐다.강민의 말은, 부승민과 온하랑이 이미 결혼했다는 뜻인가?하지만 너무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부승민이 온하랑의 손을 잡고 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알 수 있었다. 부승호가 있으니 부승민과 온하랑은 꼭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며칠 전 부승민이 추서윤을 위해 아주 화려한 생일 파티를 준비하지 않았던가? 현장에 기자가 몰리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되었었다. 민윤 커플의 팬들은 이미 두 사람이 결혼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부승민은 온하랑을 데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왔고 또 반지까지 맞췄다.“그럴 줄 알았다니까. 부승민이 추서윤이랑 결혼할 리가 없잖아.”누군가가 수군거렸다.“연예계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데. 외국에서 온 추서윤이 우리나라 연예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 무슨 짓을 했을지, 누가 알아?”“그러게 말이야. 부승민도 그냥 추서윤을 갖고 논 것일 뿐이야.”“그러지 마. 승민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있겠지.”한효건이 얘기했다.한효건은 부승민과 몇년간
겨울에는 추워서 밖에 나오기 싫어했기에 사람들은 실내에서 같이 포커 게임을 했다. 그저 100원 내기만 했기에 버는 것도 적었고 밑지는 것도 적었다.어린 온하랑은 의자를 가져와 할아버지 뒤에 앉아 그들이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연스레 할 줄 알게 되었다.“그저 몇 번 보면 다 알아.”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의 핸드폰이 울렸다.핸드폰을 꺼내 보니 사업 문제로 걸려 온 전화였다.그는 일어나서 밖으로 가더니 온하랑에게 얘기했다.“나 대신 하고 있어.”그들이 놀던 것을 본 온하랑은 그들의 룰을 알 수 있었다.고개를 끄덕인 온하랑이 얘기했다.“오케이.”부승민의 자리에 앉은 온하랑은 게임을 이어나가다가 갑자기 물었다.“이거 얼마 내기예요?”한효건이 묵묵히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온하랑이 눈썹을 까딱거리자 강민이 해명했다.“4백만.”온하랑은 이를 꽉 깨물고 진지하게 게임에 임했다.복도 끝에서, 부승민은 전화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노준형이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왜 나왔어?”부승민이 물었다.“바람 좀 쐬려고.”노준형이 앞으로 다가가 부승민 곁에 멈춰 서서 물었다.“승민아, 내가 선 넘는 것일 수 있는데 그래도 물어봐야겠어. 너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부승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본 노준형이 계속 물었다.“서윤이를 평생 불륜녀로 만들 거야?”“아니.”“그럼 언제 온하랑이랑 이혼할 건데? 어르신께도...”부승민은 그의 말을 끊으며 얘기했다.“나랑 서윤이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노준형은 그대로 굳었다.“하지만 전에 서윤이를 데리고 왔잖아. 게다가 기자들도 따라붙었었고.”그건 추서윤과 다시 만나겠다는 뜻이 아니었나?노준형은 이해할 수 없었다.전의 부승민은 확실히 그런 생각이었다.그는 자기가 여전히 추서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감정이란 복잡해서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지금 확실한 것은, 온하랑과 이혼할 생각이 없다는 것
부승민은 노준형을 보면서 얘기했다.“응. 확신해. 난 이미 마음을 먹었어.”노준형이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그럼... 사랑해?”부승민은 노준형이 물은 사람이 온하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눈빛이 반짝인 부승민이 얘기했다.“그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건 분명해. 온하랑이 내 곁에 없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텅 빈 것 같으니까.”“그냥 이 결혼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지도 몰라. 이혼하고 솔로로 지내다보면 괜찮아질 거야.”부승민은 창밖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노준형의 말을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뜻이었다.노준형은 놀라서인지, 아니면 추서윤이 안타까워서인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서윤이는 헤어지겠다고 했어?”부승민은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별다른 선택지가 없을 텐데?”노준형은 부승민을 보면서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다.추서윤과 부승민이 함께한 시간이, 온하랑과의 3년보다도 못하다니.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과 다름없었다.노준형은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자리를 떴다.부승민은 창가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룸으로 돌아갔다.룸에서는 게임이 여러 번 계속되었다.온하랑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유심히 포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부승민이 들어온 것을 본 한효건은 장난스레 얘기했다.“승민아, 하랑이가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알아? 계속 이기고 있어!”부승민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온하랑 뒤에 와서 앉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을 보고 얘기했다.“승민 오빠, 오빠가 와서 해.”부승민은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네가 계속 해.”한효건은 또 부승민을 보고 다시 온하랑을 보면서 웃었다.“하랑아, 둘이 서로 양보해도 똑같잖아. 어차피 이겨도 다 너희 둘 돈인데.”부승민은 그저 미소 지으면서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은 게임을 이어나갔다. 다만 이번에는 운이 나빠서 지고 말았다.부승민이 오자마자 온하랑은 연속 몇 번이나 졌다.한효건이 딜러 카드를 들고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승민
온하랑은 약간 흠칫하고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우연인 줄 알았더니만, 일부러 올인한 거였어?’“아니야.”부승민은 부인했다.한효건은 믿지 않으며 그의 카드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부승민은 재빠르게 테이블 위의 패를 흩트려 놓았다.그 반응에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었다.한효건이 떼를 쓰며 얘기했다.“안돼, 이건 무효야! 이건 반칙이라고!”부승민은 한효건을 무시한 채 웃으면서 온하랑에게 물었다.“시간도 늦었는데 돌아갈까?”“그래.”“더 안 할 거야?”한효건이 물었다.“다음에 다시 모이자. 오늘은 내가 다 계산할게.”부승민은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눈 후 온하랑의 손을 잡고 나갔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가장 앞에 선 사람은 키가 크지 않고 배가 나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부승민을 보자마자 웃으면서 걸어와 얘기했다.“부 대표님.”부승민은 그 사람을 보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얘기했다.“추 대표님.”“여기서 부 대표님을 만나다니, 기막힌 우연이로군요.”두 사람은 간단하게 몇 마디 나누었다.“서윤이가 부 대표님 덕분에 생일 파티도 잘 열었다죠? 신경 써줘서 매번 감사합니다. 서윤이는 지금도 촬영 중인가요?”부승민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지 않았다.추서윤의 얘기를 더 나누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추장훈은 옆에 있는 온하랑을 보면서 떠보듯이 물었다.“시간도 빠르죠. 서윤이가 어릴 때 ‘큰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쫓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이제 나이도 적지 않은데 여전히 연기에 빠져서 살고 있으니... 또래 사람들은 이미 아이까지 다 있어요.”“사람들은 다 다른 인생을 사니까요.”부승민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추장훈은 부승민이 추서윤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고 시선을 돌려 온하랑을 보고 물었다.“부 대표님, 이분은?”부승민은 간단하게 얘기했다.“온하랑입니다.”추장훈은 그제야 알고 웃으면서 얘기했다.“온하랑 씨, 많이 들어봤습니다. 만
만약 부승민 곁의 여자가 다른 여자였다면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하필 온하랑이라니. 온하랑은 특별했다. 출신이나 배경은 평범해서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지 못하지만 온하랑은 부승호가 편애하는 사람이 아닌가.부승민도 부승호가 직접 키워온 손자이기에 더욱 감정이 남다를 것이다.만약 부승호가 부승민과 온하랑을 이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부승민은 부승호의 의견을 따를 것이다.그러니까 온하랑에게 있어서 추서윤은 가장 큰 위협이라는 것이다.“추 대표님, 따라가 볼까요?”“됐어. 부 대표의 일이 사업 문제가 아니라면 개인 사정이겠지. 더 파고들어서는 안 돼.”사는 게 지겹지 않은 이상 부승민을 미행할 용기는 없었다.“알겠습니다, 추 대표님.”집에 돌아가자 고용인이 차를 내오면서 얘기했다.“어르신, 둘째 어르신께서 온 지 한 시간이 거의 됩니다. 지금은 서재에서 어르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고용인이 얘기한 둘째 어르신은 바로 추서윤의 아버지인 추상훈이었다. 그 말을 들은 추장훈은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한 후 위로 올라갔다.2층으로 올라간 추장훈은 서재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안으로 들어갔다.“형님, 오셨군요.”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추상훈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돌려 인사를 건넸다. 추장훈이 걸어가서 앉아서 얘기했다.“응, 오늘은 무슨 일이야?”“형님은 너무 바빠서 일도 깜빡하는 것 같아요. 당연히 BX그룹과의 사업 때문에 왔죠. 안민수 부대표가 나한테 알려줬는데, 이번 투자는 이미 버는 거랑 다름없어요.”안민수도 추상훈의 얼굴을 봐서 어쩔 수 없이 얘기해준 것이었다.추상훈은 그럭저럭한 사람이지만 그의 딸이 부승민과 사이가 좋으니 언젠가는 BX그룹의 사모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때가 되면 추상훈은 부승민의 장인어른이 된다. 그래서 안민수는 그와 사이를 돈독히 하고 싶었다.추장훈은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서 얘기했다.“그 사람이랑 연락한 거야?”“왜요? 나도 회사의 주주인데, 연락하면 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회사가 이렇게 잘 된 건 우리 서윤이의 공이 있다는 거죠. 형님은 서윤이의 큰아버지니까 서윤이를 홀대할 일도 없고요. 그렇죠? 서윤이도 이 회사의 주축이나 다름없는데, 주식을 조금 나눠주는 것도 맞지 않아요?”추장훈은 추상훈이 추서윤을 내세워서 주식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반론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그럼 서윤이랑 부승민은 지금 어떻게 됐어?”“당연히 잘 사귀고 있죠. 며칠 전에 서윤이한테 생일 파티까지 열어준 거 다 봤잖아요?”추상훈은 오만한 표정을 드러냈다.추상훈은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딸은 꽤 출중했다. 그래서 그는 추서윤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다.“확실해?”“내가 형을 왜 속이겠어요.”추상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다.“서윤이는 BX그룹의 사모님이 될 사람이에요. 이건 이미 확정된 일이고요.”“어려울 것 같던데.”“형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추상훈은 추장훈을 흘겨보며 말했다.“서윤이와 부승민이 사귀는 건 우리 둘한테 다 좋은 일이에요. 아무리 서윤이한테 주식을 주기 싫어도 그런 저주는 삼가시죠?”“저주한 게 아니야. 솔직히 얘기할게. 오늘 클럽에서 사업 얘기를 마치고 나오다가 부승민을 만났어. 옆에 여자가 있더라.”추상훈은 의심스레 추장훈을 보면서 물었다.“누군데요?”“온하랑.”“온하랑? 부씨 가문의 그 양딸?”추상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온하랑의 이름을 들어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맞아. 그 양딸.”추상훈은 가볍게 웃었다.“형님, 괜히 걱정하셨네요. 부승민이 온하랑과 함께 있다고 해서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서윤이한테 주식을 주기 싫어서 아주 온갖 핑계를 다 대네요. 기자들이 찍은 사진까지 가져오겠네요?”추장훈이 얘기했다.“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야. 봤을 때부터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어. 그리고 스킨쉽도 계속했고. 내가 서윤이 얘기를 꺼내니까 말도 잘 하지 않더라. 나도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지만... 경각심을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