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보았다.VIP접대실의 샹들리에가 부승민의 눈을 비춰주어서 그런지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부드러워 보였다.온하랑이 눈빛을 피하며 자기 왼손을 보았다.커다란 다이아몬드가 화려한 불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점장이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부 대표님, 역시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 다이아몬드 반지는 디자인과 가공 모두 장인이 직접 손 본 하나뿐인 반지입니다. 온하랑 씨의 손도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요. 피부도 희신데 손가락도 길고 얇으시니 이 반지가 너무 세련되게 잘 어울리는데요.”온하랑이 자기 왼손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평소에 끼고 다니기에는 너무 과한 거 같아요.”그러자 부승민이 말했다.“그럼 두 개 사면 되지. 하나는 소장용, 하나는 평소에 낄 거.”점장이 눈을 빛내더니 얼른 말을 덧붙였다.“부 대표님께서 온하랑 씨를 많이 아끼시나 봐요. 온하랑 씨는 이 반지가 정말 잘 어울리시는 거 같아요. 손이 더 희고 가늘어 보이잖아요. 커플링으로 같이 나온 남자 반지도 예뻐요. 세련되고 기품 있는 디자인이죠. 만약 이 반지가 과하다고 생각되시면 이 반지는 어떠세요? 이것도 신상인데 데일리로 끼고 다니기 좋아요.”점장이 다른 반지 한 쌍을 들어 보이며 두 사람에게 추천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에 있던 알이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고 새 반지를 끼워주었다.“어때?”데일리용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끼고 있는 반지에도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다.온하랑은 탁자위에 놓인 반지들을 대충 한번 쭉 훑어보고는 말했다.“그럼 그냥 이걸로 해.”“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두 분 손가락 사이즈를 재 드릴게요.”점장이 웃으며 부승민을 흘긋 보았다. 그녀는 알이 큰 다이아몬드가 팔리지 않은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이 두 개 다 사는 걸로 하죠.”그때, 부승민이 입을 열었고 점장은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공손한 태도로 부승민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부 대표님,
날이 어둑해지자 도로 옆의 가게들과 빌딩에는 환한 불이 들어와 도시를 밝게 비추었다.온하랑은 부승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승민이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그의 태도가 그의 진심 때문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게다가 추서윤의 존재는 온하랑에게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었다.추서윤이 있는 한, 온하랑과 부승민은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먼저 밥을 먹으러 간 후 클럽으로 갔다.차는 클럽으로 들어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갔다.부승민과 온하랑은 차에서 내린 후, 익숙한 길로 자주 가는 룸에 들어갔다.룸 안의 조명은 어두웠고 친구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부승민이 문을 열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한효건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부승민, 너 이러면 반칙이지. 우리는 다 파트너를 데려오지 않았는데 추서윤을 데려오면 어떡해. 자랑하는 거야?”온하랑은 부승민 뒤에 서서 가려져 있었다. 복도는 환하고 룸 안은 어두우니 한효건은 온하랑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려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바로 온하랑을 알아본 강민은 눈썹을 까딱거리고 부승민을 쳐다보았다.노준형은 마른 기침을 했다.“큼...”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온하랑은 어색해서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만 같았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오면서 얘기했다.“82년산 와인으로도 네 입은 못 막겠네.”한효건은 그제야 부승민 옆의 사람이 추서윤이 아니라 온하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했다.“하랑이었구나, 미안해. 내가 헷갈렸네. 이리 와 앉아. 일단 벌주 세 잔 마실게.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그렇게 말한 후, 한효건은 얼른 벌주 세 잔을 마셔버렸다.사실 한효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 몇 명도 온하랑을 추서윤으로 착각했다.두 사람이 닮아서가 아니었다. 전에는 친구들 모임에 여자 파트너를 데려오지 않던 부
그들은 부승민이 일부러 온하랑을 데리고 와서 그들 앞에서 친근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다.부승민이 전에 추서윤을 데려왔을 때, 그는 그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만 했었고 추서윤은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들은 부승민이 온하랑만 특별대우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친구 중에도 플레이보이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매일 여자를 갈아치우면서 갖고 놀았다.하지만 온하랑은 함부로 갖고 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렇지 않으면 부승호가 화를 낼 것이다.하지만 그렇다면 추서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노준형은 추서윤이 걱정되었다.“준형아.”부승민이 갑자기 노준형을 불렀다.“하랑이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아?”온하랑이 예전의 일을 떠올리자 부승민도 그제야 생각났다. 온하랑더러 추서윤을 ‘새언니’라고 부르라고 한 사람이 바로 노준형이었다.부승민의 눈을 마주한 노준형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바로 술을 가져와 얘기했다.“하랑아, 며칠 전에는 내가 실수로 말을 함부로 내뱉었어. 미안해. 이제야 사과하게 되네. 승민이 얼굴을 봐서라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줘. 사과의 의미로 잔을 비울게.”그는 먼저 잔에 있는 술을 다 마셔버렸다.한효건 등 사람들은 눈치를 보더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다들 부승민이 오늘 그들을 부른 것이 노준형의 사과를 받기 위해서라는 것을 눈치챘다. 노준형과 부승민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는 다들 알고 있던 일이다.두 사람은 오랜 친구일 뿐만 아니라 대학 친구이기도 했다. 노준형이 조금 모자라긴 했지만 부승민은 언제나 그를 곁에 두었다. 지금의 부승민은 노준형더러 온하랑에게 사과하라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온하랑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멀지 않은 곳의 술병을 가져와 그의 잔을 채우고 얘기했다.“추서윤 씨와 사이가 좋은 건 알아요. 나 같아도 내 친구를 위해 나설 거예요. 안 그래요?”노준형은 입꼬리를 겨우 올렸다.이 질문은 그를 기다리는 함정이었다. 어떻게 대답해도 결국에는 덫에 걸려들 것이다.“
예전의 온하랑은 부승민의 친구들 앞에서 그를 둘째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 되었다.하지만 부승민이 그렇게 물으니 온하랑은 웃으면서 되물었다.“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네 생각에는?”“승민 오빠.”부승민은 그저 웃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순간이었지만, 부승민은 온하랑이 그를 ‘여보’라고 불러줬으면 했다.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그들은 종래로 ‘여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 호칭은 그들에게 가장 어색한 호칭이었다.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노준형은 표정이 썩어갔다.강민은 자세한 일은 몰랐지만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것 같았다.그래서 얼른 일어나 화제를 돌렸다.“오늘 왜 늦은 거야? 오진무 때문에 늦은 거야?”“아니, 하랑이랑 반지 맞추느라 늦었어.”“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이제야 반지를 맞추는 거야?”강민이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한효건은 깜짝 놀랐다.강민의 말은, 부승민과 온하랑이 이미 결혼했다는 뜻인가?하지만 너무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부승민이 온하랑의 손을 잡고 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알 수 있었다. 부승호가 있으니 부승민과 온하랑은 꼭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며칠 전 부승민이 추서윤을 위해 아주 화려한 생일 파티를 준비하지 않았던가? 현장에 기자가 몰리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되었었다. 민윤 커플의 팬들은 이미 두 사람이 결혼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부승민은 온하랑을 데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왔고 또 반지까지 맞췄다.“그럴 줄 알았다니까. 부승민이 추서윤이랑 결혼할 리가 없잖아.”누군가가 수군거렸다.“연예계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데. 외국에서 온 추서윤이 우리나라 연예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 무슨 짓을 했을지, 누가 알아?”“그러게 말이야. 부승민도 그냥 추서윤을 갖고 논 것일 뿐이야.”“그러지 마. 승민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있겠지.”한효건이 얘기했다.한효건은 부승민과 몇년간
겨울에는 추워서 밖에 나오기 싫어했기에 사람들은 실내에서 같이 포커 게임을 했다. 그저 100원 내기만 했기에 버는 것도 적었고 밑지는 것도 적었다.어린 온하랑은 의자를 가져와 할아버지 뒤에 앉아 그들이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연스레 할 줄 알게 되었다.“그저 몇 번 보면 다 알아.”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의 핸드폰이 울렸다.핸드폰을 꺼내 보니 사업 문제로 걸려 온 전화였다.그는 일어나서 밖으로 가더니 온하랑에게 얘기했다.“나 대신 하고 있어.”그들이 놀던 것을 본 온하랑은 그들의 룰을 알 수 있었다.고개를 끄덕인 온하랑이 얘기했다.“오케이.”부승민의 자리에 앉은 온하랑은 게임을 이어나가다가 갑자기 물었다.“이거 얼마 내기예요?”한효건이 묵묵히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온하랑이 눈썹을 까딱거리자 강민이 해명했다.“4백만.”온하랑은 이를 꽉 깨물고 진지하게 게임에 임했다.복도 끝에서, 부승민은 전화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노준형이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왜 나왔어?”부승민이 물었다.“바람 좀 쐬려고.”노준형이 앞으로 다가가 부승민 곁에 멈춰 서서 물었다.“승민아, 내가 선 넘는 것일 수 있는데 그래도 물어봐야겠어. 너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부승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본 노준형이 계속 물었다.“서윤이를 평생 불륜녀로 만들 거야?”“아니.”“그럼 언제 온하랑이랑 이혼할 건데? 어르신께도...”부승민은 그의 말을 끊으며 얘기했다.“나랑 서윤이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노준형은 그대로 굳었다.“하지만 전에 서윤이를 데리고 왔잖아. 게다가 기자들도 따라붙었었고.”그건 추서윤과 다시 만나겠다는 뜻이 아니었나?노준형은 이해할 수 없었다.전의 부승민은 확실히 그런 생각이었다.그는 자기가 여전히 추서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감정이란 복잡해서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지금 확실한 것은, 온하랑과 이혼할 생각이 없다는 것
부승민은 노준형을 보면서 얘기했다.“응. 확신해. 난 이미 마음을 먹었어.”노준형이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그럼... 사랑해?”부승민은 노준형이 물은 사람이 온하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눈빛이 반짝인 부승민이 얘기했다.“그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건 분명해. 온하랑이 내 곁에 없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텅 빈 것 같으니까.”“그냥 이 결혼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지도 몰라. 이혼하고 솔로로 지내다보면 괜찮아질 거야.”부승민은 창밖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노준형의 말을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뜻이었다.노준형은 놀라서인지, 아니면 추서윤이 안타까워서인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서윤이는 헤어지겠다고 했어?”부승민은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별다른 선택지가 없을 텐데?”노준형은 부승민을 보면서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다.추서윤과 부승민이 함께한 시간이, 온하랑과의 3년보다도 못하다니.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과 다름없었다.노준형은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자리를 떴다.부승민은 창가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룸으로 돌아갔다.룸에서는 게임이 여러 번 계속되었다.온하랑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유심히 포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부승민이 들어온 것을 본 한효건은 장난스레 얘기했다.“승민아, 하랑이가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알아? 계속 이기고 있어!”부승민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온하랑 뒤에 와서 앉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을 보고 얘기했다.“승민 오빠, 오빠가 와서 해.”부승민은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네가 계속 해.”한효건은 또 부승민을 보고 다시 온하랑을 보면서 웃었다.“하랑아, 둘이 서로 양보해도 똑같잖아. 어차피 이겨도 다 너희 둘 돈인데.”부승민은 그저 미소 지으면서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은 게임을 이어나갔다. 다만 이번에는 운이 나빠서 지고 말았다.부승민이 오자마자 온하랑은 연속 몇 번이나 졌다.한효건이 딜러 카드를 들고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승민
온하랑은 약간 흠칫하고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우연인 줄 알았더니만, 일부러 올인한 거였어?’“아니야.”부승민은 부인했다.한효건은 믿지 않으며 그의 카드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부승민은 재빠르게 테이블 위의 패를 흩트려 놓았다.그 반응에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었다.한효건이 떼를 쓰며 얘기했다.“안돼, 이건 무효야! 이건 반칙이라고!”부승민은 한효건을 무시한 채 웃으면서 온하랑에게 물었다.“시간도 늦었는데 돌아갈까?”“그래.”“더 안 할 거야?”한효건이 물었다.“다음에 다시 모이자. 오늘은 내가 다 계산할게.”부승민은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눈 후 온하랑의 손을 잡고 나갔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가장 앞에 선 사람은 키가 크지 않고 배가 나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부승민을 보자마자 웃으면서 걸어와 얘기했다.“부 대표님.”부승민은 그 사람을 보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얘기했다.“추 대표님.”“여기서 부 대표님을 만나다니, 기막힌 우연이로군요.”두 사람은 간단하게 몇 마디 나누었다.“서윤이가 부 대표님 덕분에 생일 파티도 잘 열었다죠? 신경 써줘서 매번 감사합니다. 서윤이는 지금도 촬영 중인가요?”부승민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지 않았다.추서윤의 얘기를 더 나누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추장훈은 옆에 있는 온하랑을 보면서 떠보듯이 물었다.“시간도 빠르죠. 서윤이가 어릴 때 ‘큰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쫓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이제 나이도 적지 않은데 여전히 연기에 빠져서 살고 있으니... 또래 사람들은 이미 아이까지 다 있어요.”“사람들은 다 다른 인생을 사니까요.”부승민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추장훈은 부승민이 추서윤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고 시선을 돌려 온하랑을 보고 물었다.“부 대표님, 이분은?”부승민은 간단하게 얘기했다.“온하랑입니다.”추장훈은 그제야 알고 웃으면서 얘기했다.“온하랑 씨, 많이 들어봤습니다. 만
만약 부승민 곁의 여자가 다른 여자였다면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하필 온하랑이라니. 온하랑은 특별했다. 출신이나 배경은 평범해서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지 못하지만 온하랑은 부승호가 편애하는 사람이 아닌가.부승민도 부승호가 직접 키워온 손자이기에 더욱 감정이 남다를 것이다.만약 부승호가 부승민과 온하랑을 이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부승민은 부승호의 의견을 따를 것이다.그러니까 온하랑에게 있어서 추서윤은 가장 큰 위협이라는 것이다.“추 대표님, 따라가 볼까요?”“됐어. 부 대표의 일이 사업 문제가 아니라면 개인 사정이겠지. 더 파고들어서는 안 돼.”사는 게 지겹지 않은 이상 부승민을 미행할 용기는 없었다.“알겠습니다, 추 대표님.”집에 돌아가자 고용인이 차를 내오면서 얘기했다.“어르신, 둘째 어르신께서 온 지 한 시간이 거의 됩니다. 지금은 서재에서 어르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고용인이 얘기한 둘째 어르신은 바로 추서윤의 아버지인 추상훈이었다. 그 말을 들은 추장훈은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한 후 위로 올라갔다.2층으로 올라간 추장훈은 서재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안으로 들어갔다.“형님, 오셨군요.”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추상훈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돌려 인사를 건넸다. 추장훈이 걸어가서 앉아서 얘기했다.“응, 오늘은 무슨 일이야?”“형님은 너무 바빠서 일도 깜빡하는 것 같아요. 당연히 BX그룹과의 사업 때문에 왔죠. 안민수 부대표가 나한테 알려줬는데, 이번 투자는 이미 버는 거랑 다름없어요.”안민수도 추상훈의 얼굴을 봐서 어쩔 수 없이 얘기해준 것이었다.추상훈은 그럭저럭한 사람이지만 그의 딸이 부승민과 사이가 좋으니 언젠가는 BX그룹의 사모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때가 되면 추상훈은 부승민의 장인어른이 된다. 그래서 안민수는 그와 사이를 돈독히 하고 싶었다.추장훈은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서 얘기했다.“그 사람이랑 연락한 거야?”“왜요? 나도 회사의 주주인데, 연락하면 안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