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은 몇 초 동안 고통이라는 감정에 휩싸였다. 마치 뜨거운 불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처했다.온하랑은 임가희의 부상을 크게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곧 부선월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온하랑이 입을 열었다.“부승민, 너가 출장 간다고 했던 날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지? 내가 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가던 길에 사고를 당할 뻔했어. 너는 그 일이 해외 경쟁자와 관련 있다고 했지만, 그때 필라시에 간 사람은 부선월 씨였고 날 해치려 한 사람도 부선월 씨였어. 맞아?”“...맞아.”부승민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그는 한 손으로 창턱을 짚고 무의식적으로 두드리며 온하랑이 말하기를 기다렸다.“부선월 씨가 내 목숨을 노렸던 거야?”부승민은 숨을 멈춘 채 대답했다.“...응.”“그 당시 부선월 씨가 병을 앓고 있었어?”“확실하진 않아. 다만 그때 이미 약을 복용 중이었어.”부승민은 부선월을 정신병원에 보낸 것이 어쩌면 의도치 않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정신질환이 있다는 게 증명되고 범행 당시 그 상태였다면 부선월 씨는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겠지?”“그렇지.”“그럼 넌 부선월 씨가 병원에서 얌전히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다시 탈출하지 않을 거라고?”부승민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과거였다.‘이번에도 부선월은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게 아니던가?’“하랑, 내가 약속할게. 부선월 씨가 다시는 병원을 마음대로 나올 수 없도록 할 거야. 경찰이나 최씨 가문 쪽에도 협조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막을 거고...게다가 아직 감정 결과가 나오지 않았잖아. 부선월 씨가 범행 당시 정말 발병 상태였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어. 결과는 아직 미지수야.”부승민의 말은 간절했지만, 온하랑의 마음은 여전히 요동치지 않았다.부승민이 아무리 단호하게 약속을 해도 현실이란 언제나 상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잘 알고
부승민의 정체는 원래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그의 모든 정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심지어 수십 년 전 최국환과 강윤희의 일까지도 파헤쳐졌다.이 정도로 격렬한 반응은 분명히 이례적이었다.“맞아. 내가 알아보라고 시켰더니 처음 폭로한 건 도시일보의 마감독 주필이었어. 마감독은 임 여사의 친구인데 두 사람은 예술 전시회에서 만나 종종 함께 전시회를 다녔다고 하더라.”온하랑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럼 임 여사가 폭로한 거네? 목적이 뭐야?”“아마 내가 정신적 검증을 신청한 것에 불만이 있어서 여론의 힘으로 날 압박하려는 것 같아. 얼마 전 최국환 씨도 날 찾아와 신청을 철회하라고 했거든.”“...결국 지금 넌 꼼짝 못 하게 된 거구나.”임 여사가 여론을 조작하고 있는 이상 부승민이 신청을 철회하더라도 그녀가 쉽게 물러날 리 없었다. 오히려 여론을 부추기며 부승민이 철회한 이유를 죄책감이나 찔림 때문이라고 몰아갈 가능성이 컸다.만약 감정 결과에서 부선월이 범행 당시 발병 상태가 아니라고 판정된다면 그녀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할 테니 비교적 간단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여론은 부승민이 뇌물을 써서 결과를 조작했다고 몰아갈 가능성이 컸다.결과가 어떻든 부승민은 각종 의혹과 압박에 직면할 운명이었다.“네 말이 맞아.”부승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그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번 일이 자신에게 큰 압력과 도전을 안겨줄 것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그래서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온하랑이 조용히 물었다.“계속 신청하고 결과를 기다릴 거야.” “...”“하랑, 미안해.”부승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그는 온하랑의 걱정을 잘 알면서도 이 상황에서 물러설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알아.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겠지.”온하랑의 목소리에는 아주 미묘한 동정심이 스며 있었다.다행히도 임 여사는 부
리우 그룹에서.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했다.비서는 책상 앞에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최동철에게 최신 상황을 보고했다.“최초 보도를 한 기자는 임가희 씨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백 선생님의 일이 드러나는 바람에 부승민이 그 혼란을 틈타 상황을 더욱 부추기며 모든 사람을 끌어들였습니다.”모든 이를 늪으로 끌어내리려는 의도였다.최동철의 얼굴은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비서는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감지하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최동철의 지시를 기다렸다.“이 화제를 잠재울 수 있나?”최동철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플랫폼 전반에서 강제로 게시물을 삭제하거나 계정을 정지시키지 않는 한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큽니다.”비서는 신중히 답하며 말을 아꼈다.“그렇다면 먼저 화제를 돌려야겠군.”최동철이 손가락을 비비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임가희가 그 노인과 어떤 관계였는지 사람들이 꽤 흥미로워할 테니 말이지.”부선월을 미워하는 것은 사실이었다.하지만 임가희가 자신의 어머니와 사적인 일을 대중 앞에 공개하며 자신과 강씨 가문을 이용하려 든 건 분명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임가희는 가만히 있어도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를 도와 부선월을 완전히 몰락시키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그러나 임가희는 그 기회를 거절했다.이제는 모두가 법적 감정 결과에 주목하고 있어 최동철이 직접 나서기도 껄끄러운 상황이었다.“알겠습니다.”비서는 신속히 응답하며 물러설 준비를 했다.사무실 안은 다시 깊은 침묵에 잠겼다.최동철은 책상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비서는 숨조차 크게 내쉴 수 없는 긴장 속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최 대표님,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손짓으로 비서를 불렀다.비서는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최동철의 지시를 기다리며 한 걸음 다가섰다.최동철이 차분한 목소
강기우는 웃으며 손을 뻗어 품에 안고 있던 여자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 치고는 술잔을 들었다.“소리, 최 대표님께 술 한 잔 따라드려.”“네.”그러나 최동철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괜찮습니다. 안 해도 돼요.”강기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래요? 아까 40년 된 브랜디 두 병을 호주에서 공수해 왔는데 나중에 한잔해봐요.”그는 다시 소리를 품에 안으며 능글맞게 웃었다.“감사합니다.”“그런데 소문에 동철 씨에게 새로 생긴 아이가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인가요?”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우리 최 대표님은 워낙 몸을 잘 아끼시는 편인데 언제 밖에서 자식을 남기셨어요?”최동철은 담담하게 웃으며 짧게 대꾸했다.“말하자면 길어요.”강기우는 더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마침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어 서비스 직원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문하신 브랜디가 도착했습니다.”강기우가 소파에 기대며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고 유니폼을 단정히 차려입은 직원이 트레이를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는 테이블에 브랜디를 내려놓으며 물었다.“강 도련님, 개봉하시겠습니까?”소리를 듣고 최동철이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개봉하세요.”직원은 능숙한 손길로 병을 열며 작업을 진행했다.그러는 동안 강기우의 시선이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혹시 새로 왔어요?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데.”“네.”설윤은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도련님, 저는 새로 온 직원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모시게 되었네요.”“이름이 뭐죠?”“설윤입니다. 모두 저를 윤이라고 부릅니다.”“설윤 씨, 이 사람 알아요?”강기우는 최동철을 향해 턱짓하며 물었다.설윤은 그의 시선을 따라 잠시 최동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답했다.“아니요.”“이분은 리우그룹의 최 대표님이셔요. 최 대표님께 술 한 잔 따라드려요.”“네.”설윤은 브랜디를 따라 조심스럽게 최동철 앞으로 술잔을 건넸
“최 대표님, 농담하지 마세요. 이 일은 최 회장님과 무관해요. 요즘 일자리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저는 이 기회를 정말 소중히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회장님 곁을 떠나야 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설윤은 겸손하면서도 약간의 확고함을 담아 대답했다.마치 이 일이 특별하고 소중한 기회라도 되는 듯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이었다.최동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더는 이 주제를 파고들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요?”“두 주요.”설윤이 대답했다.설윤은 최동철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과일 접시를 살짝 흔들었다.“혹시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저는 이제 일하러 가도 될까요?”최동철은 짧게 대답한 뒤 냉담한 태도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설윤은 과일 접시를 들고 룸으로 향하며 다시 일에 몰두했다.모퉁이를 돌던 최동철은 설윤의 뒷모습을 무심히 한 번 더 흘깃 바라봤다.‘늙은이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어린 여자를 탐하는군. 하지만 이렇게 깍쟁이는 아닐 텐데.’최국환 옆에서 얌전히 잘 모시며 얻은 재산으로 한평생 무리 없이 살 수 있다.‘늙은이를 달래지 않고 설윤 씨는 대체 왜 여기서 일하는 걸까?’최동철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딘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그러나 그 기분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온라인에서 논란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했다.사법감정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그때 인터넷에선 또 다른 큰 이슈가 터졌다.[피해자로 알려진 임 씨의 본명은 임가희였다. 강남 외곽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중학교까지만 학업을 마쳤으며 고인이 된 기자 온강호의 전처이자 온하랑의 친어머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온강호가 누구예요?]위 질문에 대한 답으로 몇 년 전의 기사들이 첨부되었다. [온하랑은 누구죠?][부승민의 전처입니다.][세상에 부
비록 최국환이 재혼을 했고 아들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젊고 잘생겼으며 최씨 가문의 미래 상속인으로서 경주에서 유명한 인기남으로 많은 가문들이 그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당시 최국환은 유명 가문의 딸과 연애 중이었고, 임가희는 어느 클럽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최국환과 알게 되었다.임가희는 교활하고 영리했다. 그녀는 한 차례의 교란을 일으켜 최국환과 그 명문가의 딸을 헤어지게 만들고 결국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정말 큰 이슈네요... 부 여사님, 우리 같은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속이 후련해졌어요.][부선월 씨가 이 이슈를 퍼뜨린 건가요?][이슈는 자신을 좀 더 천천히 음미하시라고 전해 달라고 할 지경이에요.][유명 가문의 딸: 임가희 씨, 고마워요.][진짜인가요? 혹시 게시자가 부승민이 고용한 사람은 아니겠죠?][너무 가짜 같아요. 부선월을 옹호하는 것 같네요. 부승민은 정말 돈이 많네요. 저는 부승민의 감정 결과를 똑똑히 지켜볼 거예요.][...]댓글에는 많은 의혹들이 제기되었고 게시자는 고정 댓글을 남겼다.[제가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요? 그때 임가희에게 당한 당사자가 바로 저희 이모입니다. 이모는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서 이 사건에 대해 불평하지 않지만, 이 얘기를 밝히고 싶었습니다. 모든 내용은 사실이며 만약 허위로 만든 것이 있다면 법적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를 임가희가 저를 고소해도 좋습니다. 과연 임가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이 글이 올라오자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 그 누구 하나 똑똑하지 않겠어요? 결국 모두 비슷한 급이네요. 다 좋은 사람들 같지 않아요.][다행히 나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어요. 그냥 계속 옆에서 후속 기사를 지켜볼 거예요.][남자들은 또 숨어버렸네요.][이미 말했잖아요. 부선월은 배경이 강해요. 임가희가 저렇게까지 몰아붙였으니 알겠죠. 부선월은 집안에서 보호받고 자란 순진한
이번에 작성자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글을 올렸다. 그는 민감한 정보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애매한 단어와 흐릿한 그림으로 암시하였다.진상이 어떻든 간 온라인에서의 논의는 갈수록 복잡한 방향으로 번져가고 있었다.임가희, 최국환, 부선월 세 사람을 둘러싸고 구성된 이야기는 부승민, 최동철, 온하랑 세 사람을 함께 엮어서 마치 드라마처럼 매일 새로운 스토리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병실 안에 있는 임가희의 두 눈에서는 음울한 빛이 흘렀다.박수아의 조카가 불쑥 튀어나와 지나간 옛일을 터뜨릴 줄은 그녀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당사자인 박수아도 진작 과거를 내려놓고 시집가서 애 놓고 잘 살고 있었기에 임가희도 옛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임가희도 최국환과 결혼하기 전에는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했었다. 혹시 다른 도련님들이 계속 찾아와서 집적거리지는 않을지, 박수아가 복수라도 하지 않을지, 최씨 가문의 어른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는 안 할지, 누군가가 그녀를 붙잡고 놓지 않으면 어쩔까…하지만 최국환과 결혼을 한 뒤 이 모든 걱정은 더는 문제가 아니었다.그녀는 몇 년이라는 청춘을 바쳐가며 끝내는 계급의 편견을 넘어서 최 부인이 되어 소망을 이루었다.옛날에 그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던 사람들은 뒤에서는 어떤 표정을 짓든 간에 그녀의 앞에서는 한결같이 상냥했다.최국환과 결혼하기 전의 몇 년은 그녀가 가장 돌이키기 싫은 기억으로 가득 찼다.마치 신체의 어느 한구석에 남아 있는 깊은 흉터처럼 분명히 아문지 몇 년은 퍽 되었지만 아무도 없는 조용한 저녁이 깃들면 가려워서 잠을 못 이루는 것과도 같았다. 그녀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각종 예의범절을 열심히 배워가면서 애써 최씨 가문의 사교계와 융합하여 완벽한 최 부인으로 탈바꿈하기에 온갖 힘을 다 썼다.그녀는 지나간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들은 언급하기도, 돌이키기조차 싫었다.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의 세례 속에서 천천히 잊어가면서 살아왔다.하지만 박수아 조카의 말이 그녀를 또다시 옛날의 기억 속
최국환 역시 박씨 가문의 사람이 터뜨린 기사를 보고 바로 달려온 것이었다.임가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탄을 했다. 밖에 드러난 두 눈동자는 햇살을 받은 호수처럼 반짝이였고 물안개가 자욱한 듯 몽롱했다.“이게 바로 제가 받아야 할 벌인가 봐요... 그들이 나를 증오하는 것은 응당해요. 제가 박수아 씨한테 상처를 줬으니 말이죠. 하지만 여보, 난 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만약 당초에 제가 조금만 더 일찍 당신을 만났더라도...”“지나간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내가 박수아 씨를 좋아하지 않았어. 설사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난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최국환은 임가희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으면서 부드럽게 위로해 주었다.그러던 최국환은 갑자기 화제를 돌리더니 날카로운 눈빛을 흘리면서 차갑게 말했다.“난 그래도 박씨 가문이 주제 파악은 잘하는 줄 알았어. 흥, 그 사람들이 지금 옛일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건 무조건 나를 견주고 한 짓이야. 여보, 걱정하지 마. 난 당신이 이대로 당하고만 있게 하지 않을 거야.”이런 상황에서 그는 임가희와 한 몸이 되어야 했다. 임가희가 불륜녀라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곧바로 자신이 외도한 남자라는 승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그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무척 큰 영향이 미칠 테였다. “여보, 난...”임가희는 뭔가를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순간 만감이 교차하여 목이 멘 채 말을 잇지 못했다.최국환은 그녀에게 이제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거려 주었다.“당신은 그냥 안심을 취하면서 몸조리나 잘해. 나머지 일은 다 나한테 맡겨.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이제는 그 누구도 당신을 다치지 못할 거야.” 임가희는 머리를 끄덕였다.최근에 박씨 가문이 저지르고 다니는 일들은 최국환의 영향력과 세력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갑작스레 그녀에게로 덮친 이 풍파가 하루 일찍 가라앉고 대중의 시선이 다시 부선월의 몸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