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이 면회를 신청했다. 면회 허가가 떨어진 후 형사가 부승민을 심문실로 안내했다. 부선월은 취조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옷에도 얼굴에도 여전히 핏자국이 남아있어 처참한 모습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확인한 부선월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왔니?”마치 시들어버린 한 떨기의 꽃처럼 마르고 비틀어져 더 이상 싱그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부승민은 자신이 곧 부선월의 히스테리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사람을 찌른 부선월은 오히려 평온하기만 했다. 너무도 평온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왜 그러셨어요?”부승민이 의자를 끌어와 부선월 맞은편에 앉았다. 부선월이 툭, 손바닥을 천장으로 내밀었다.“그거야 당연히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까.”“한 가지 소식을 알려드릴게요. 임가희 씨 안 죽었어요. 깨어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이미 나머지 생은 감옥에서 보낼 각오는 하신 거네요?”멈칫한 부선월의 얼굴에 순간 사나운 표정이 스쳐갔다. “안 죽었다고? 명도 길지. 아쉽게 됐네. 하지만 얼굴이 망가졌으니 그 얼굴을 최국환이 받아들일 리가 없어.”“또 다른 소식도 알려드릴게요. 최 회장님이 호수 별장에 다른 살림을 차리셨어요. 요 며칠 계속 거기서 지내셨고요. 임가희 씨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여자들이 있을 거예요. 하나하나 다 죽이실 만 하겠어요?”부선월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그녀의 눈빛이 음산하게 변해갔다. “요즘 힘들게 지내신 것 같던데요. 심지어 남은 인생까지 내던지셨어요. 이런 남자를 위해 굳이 왜요?”“남은 인생?”부선월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눈가에는 곧 눈물이 새어나왔다. 마치 미치광이 같은 모습이었다. “내 남은 인생은 진작 망쳤어. 난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 끝까지 가는 수밖에.”부승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부선월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돌아갈 수 있어요. 그러고 싶지 않으신 것뿐이
잠시 생각하던 설윤이 고개를 돌려 최국환을 힐끔 쳐다보았다.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를 보고는 곧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최국환 씨 휴대폰인가요? 여긴 경주세화병원입니다. 아내분께서 칼에 찔려 다치셨어요. 얼른 병원으로 오셔야 할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설윤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전 최국환 씨 비서예요. 말씀하신 건 지금 바로 전달해 드릴게요. 저기, 임가희 씨는 지금 어떠신가요?”“자상을 많이 입으셔서 출혈성 쇼크가 왔었어요. 다행히 빠르게 응급조치를 취한 덕에 생명에 지장은 없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얼굴이 칼에 베어 상처가 심한 편이라 성형외과 진료가 필요할 것 같아요.”“네.”전화를 끊은 설윤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그녀의 입 꼬리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임가희가 칼에 찔렸다고? 얼굴을 베였어?’‘대체 어떤 귀인께서 이렇게 좋은 일을 하신 거야?’평소의 최국환은 오후 2시 30분쯤이면 잠에서 깨어났다. 설윤은 2시 15분 쯤 방으로 들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최국환을 깨웠다. “국환 씨. 국환 씨?”“응? 무슨 일이야?”최국환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방금 경주세화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임가희 씨가 다치셨다고요. 가보시겠어요?”말하며 입을 삐죽인 설윤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각하대?”설윤이 최국환을 부축해 일으켰다. “잘 모르겠어요.”“그럼 가 봐야지.”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국환의 움직임은 느긋하기만 했다. “저녁 저랑 같이 드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돌아오실 거예요?”설윤이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최국환이 미소 지으며 설윤의 손등을 토닥였다.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당연하죠.”설윤이 최국환의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임가희 씨가 병원에서 기다리고 계시잖아요.”“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가방 있다고 했지?
부승민이 취조실을 나간 후 부선월은 곧 기대에 가득 찼다.잠시 후 최국환이 오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그가 믿어줄까?부선월은 단지 최국환을 너무 사랑한 죄밖에 없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저지른 일을 최국환은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자세를 바꾸며 고개를 숙인 부선월은 피가 잔뜩 튄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모습은 초라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부선월은 허둥지둥 옷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하지만 이미 옷에 스며든 핏자국은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이러면 좀 깔끔해졌겠지?’이 모든 걸 마친 부선월이 인내심 있게 최국환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부선월이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자 부선월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서렸다. 젊은 시절 그랬듯이 다정한 눈빛으로 최국환을 쳐다보았다. “국환 씨, 왔어?”최국환은 어두운 얼굴로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부선월, 아직도 웃음이 나와?”호통에 움찔한 부선월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최국환을 쳐다보며 가여운 모습으로 입을 삐죽였다. “국환 씨, 무슨 일 있어?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낼 수 있어?”“무슨 염치로 나한테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거야?”CCTV 속 장면을 떠올린 최국환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가희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 지금도 병원에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어. 이렇게 독하고 악랄한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최국환의 비난에 부선월이 순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뭐? 임가희가 왜? 내가 뭘 했다고 악랄하다고 하는 거야?”그 말에 최국환이 냉소 지었다. “부선월,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 연기를 하는 거야? 정말 너무 실망스럽군.”“국환 씨, 난 정말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그래? 그럼 고개 숙여서 네 손목에 차고 있는게 뭔지 봐봐. 주변도 자세히
“그러니까 자네 말은...”“이미 본인의 신분을 알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부선월 씨 정신감정을 의뢰했다고 해요.”“어느 호텔에 있는지 알아보게.”...병실 안.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베이비시터의 휴대폰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연지 씨, 고은이가 계속 울음도 그치지 않고 분유를 먹는 족족 토하고 있어요. 돌아오시는 게 어떠세요?”베이비시터는 임연지에게 고은은 처벌을 피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임연지는 아이의 아빠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임연지는 고은이 태어난 후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는 물리기는커녕 눈길조차 주길 거부했다. ‘가여운 것.’차가운 임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가 있으면 데리고 병원에 가세요. 저한테 연락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에요?”그 아이만 보면 임연지는 자신이 온 경주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모욕을 겪은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베이비시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연지가 뚝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막 산후조리를 끝내고 아이의 수유 기간은 대략 6개월 정도였다. 이 6개월 사이에 다시 임신을 해야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꼭 임신을 해야만 한다면 그녀는 꼭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고 싶었다. “아...”임가희가 어렴풋이 의식을 회복했다. 쓰러지기 전 마주했던 잔인한 장면이 파라노마처럼 머리에 스쳤다. 임가희는 공포에 질린 채로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닿은 건 얼굴의 피부가 아니라 둘둘 감아진 거즈였다. “고모, 드디어 일어나셨어요?”인기척이 들리자 침대 맡으로 다가간 임연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부상이 심각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의사가 그랬어요.”“내 얼굴...”임가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로 인해 얼굴의 근육이 움직이자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의사가 최선을 다해 봉합했어요... 나중에 성형외과 시술도 받으실 수 있고요... 고모,
계성진의 전화를 끊은 부승민은 소파에 앉아 물을 마셨다.계성진을 시켜 경찰에 신고를 하긴 했지만 부승민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부선월이 노린 게 아무리 임가희라 해도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시한폭탄이었기에 최씨 집안에서 반드시 나서서 처리하려 할 것이기에 부승민은 계성진에게도 최선만 다하면 된다고 일러두었다.그 결과가 어떻든 그건 부승민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때 갑자기 울리는 호텔 전화벨 소리에 생각을 멈춘 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여보세요?”“손님, 여기 최국환이라는 분이 손님 가족이라고 만나 뵙고 싶어하시는데 방 번호 알려드려도 될까요?”“올라오라고 하세요.”잠시 멈칫하던 부승민이 대답을 마치고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부선월이 최국환을 만나고 싶다 할 때도 연락을 하지 않았었는데 역시나 최국환은 제 아내인 임가희를 위해 이렇게 직접 부승민을 찾아온 것이다.몇 분 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자 문을 열어준 부승민이 밖에 서 있는 최국환을 보며 말했다.“오랜만이네요, 최 회장님.”“그러게요.”“저 계속 이렇게 밖에 세워두실 겁니까?”복도를 두리번거리며 묻는 최국환에 부승민은 누가 봐도 거리를 두는 것처럼 문틀에 기대며 말했다.“그냥 여기서 말씀하시죠, 용건이 뭡니까?”최국환은 저와 닮은 부승민의 얼굴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부 회장님만 괜찮으시면 제가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같이 내려갈까요?”“조금 있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그냥 여기서 얘기하시죠.”하지만 여전히 단호한 부승민의 태도에 최국환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승민아, 너도 네 신분에 대해서 이미 다 안 거지?”“네, 알아요.”표정 변화 하나 없이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부승민에 최국환은 그가 진작 자신이 친아빠인 걸 알았으면서도 부모로 인정하기 싫어 그동안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그래서 별다른 표정도, 대화도 나누지 않고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하지만 부승민이 제 아들이라는 걸 안
“심신이 불안정한 건 맞으니까 그냥 절차대로 진행한 것뿐이에요.”부선월이 그토록 죽고 못 사는 남자가 내뱉는 어이없는 말에 부승민은 냉소를 흘렸다.“감정 결과에는 아무런 관여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최 회장님도 결과엔 손대지 마세요. 검찰과 사법부에 맡겨야죠 그런 건.”부승민이 검사 결과를 조작할 거라고 생각했던 최국환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이 오해했나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할아버지가 잘 키웠나 보구나. 사실 나도 후회 많이 했어. 왜 그때...”“얘기 다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보세요.”제 말을 끊으며 방문을 닫아버리는 부승민에 최국환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부선월과 임가희 사이의 일은 빠르게 기사화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사람들은 피해자를 동정하고 가해자를 나무라고 있었다.얼마 못 가 사라질 사람들의 관심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가십거리를 즐기는 건 사람들의 본능이었다.그들이 특히 좋아하는 건 언제나 남녀 사이의 스캔들이었기에 이번에도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경주 백화점 가해자와 피해자 부부의 관계”기사를 클릭해보면 안에는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모를 비밀스러운 내용들이 적혀있었는데 칼부림 사건의 가해자는 BX 그룹 회장을 지냈었던 부선월이고 피해자는 경주 최씨 가문 최국환의 아내 임가희인데 최국환과 부선월 사이의 아들이 바로 부승민이라는 얘기였다.기사에는 BX그룹을 등에 업은 부선월이 평범한 집안 출신인 임가희를 여러 차례 도발해왔다고 서술되어있었다.온라인에서 내연녀는 누구나 다 욕하는 존재인데 이토록 기고만장하고 칼로 본처를 찌르기까지 하는 내연녀에게는 더욱더 자비가 없었다.내연녀가 권력까지 있으니 본처는 꼼짝없이 당했다는 내용과 재벌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그리고 부승민이라는 존재까지 더해지니 기사는 순식간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이 일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오며 가며 기사
소문은 퍼져나갈수록 과장되었고 핸드폰 화면을 방패 삼은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에 열광하는 대중들을 보며 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부선월이 경찰에 구속된 게 아니라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경찰이 발 빠르게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라며 용의자는 구속수사 중이라고 밝힘과 동시에 부승민이 정신과 검사를 의뢰한 건 용의자의 입원과 상담기록에 근거해서 진행한 합법적인 수사라고 강조했다.그러면서 사법부 정신과 검사 위원회는 공정하고 청렴한 수사를 바탕으로 용의자의 정신건강에 대한 보다 확실하고 근거 있는 진단을 진행할 거라고 발표했다.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전부 법에 따라 조사를 진행할 거라는 경찰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온라인에서 떠돌아다니던 피드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뭐가 진짠지 구별할 수도 없게 다양하던 소문들은 많이 사라졌는데 정신과 검사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면서 또 다른 화제를 만들어냈다.그건 바로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살인을 해도 무죄인가라는 내용의 주제였다.[정신과 질환이든 만 14세든 나는 다 폐지돼야 한다고 봐, 사람을 죽였으면 그게 누구든 벌을 받아야지!]이런 부류의 댓글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여론을 점점 더 뜨겁게 달구었다.이름 없는 온라인 탐정들은 이때를 빌어 부선월의 과거를 들추어내다가 임가희는 최국환의 첫 아내가 아니라 재혼대상이었고 최국환의 첫 아내는 강윤희라는 것까지 알아냈다.한 네티즌이 올린 피드에는 강씨 집안과 최씨 집안은 둘의 정략결혼으로 인연을 맺었는데 강윤희가 워낙 아름다워서 최국환과 그녀 사이에 아들도 있었다고 적혀있었다.그 아들이 바로 지금 리우그룹 대표로 있는 유명사진작가 최동철이었다.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강윤희가 최동철을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부선월이 임신을 핑계로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놔서 강윤희는 산후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한다.피드 아래편에는 사진도 몇 장 기재되어 있었는데 첫 장은 최국환과 강윤희의 결혼기
[역시 자본가들은 진짜 대단해, 딸의 안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네.][만약 법적인 책임을 물으면 부선월은 감옥에 가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강씨 집안은 최씨 집안 부씨 집안 모두와 척을 지게 되는 거지. 그래서 강씨 집안도 결국 부씨 집안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야.][안 보냈으면 부선월이 바로 최국환이랑 결혼했겠지. 최동철한테는 다행 아니야? 부선월이 들어왔어 봐, 최동철 괴롭히기만 했지.]그때 한 네티즌이 댓글 창에 사진 한 장을 게시하며 말했다.[왜 이렇게 익숙한가 했는데 며칠 전에 대선 탈락한 사람이 최동철 외동숙 강시우야.][와, 이건 또 무슨 일이야.]그 사진은 빠르게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갔고 사람들은 최동철의 인스타그램을 찾아내어 그에게 동정과 응원의 말을 보내주고 있었다.동시에 부승민의 인스타에는 험한 말들을 쏟아내었는데 그를 위해 나서주는 사람들한테는 “자본가의 개”라는 프레임을 씌워버리고 있었다.그런데 강시우의 일을 파던 사람 하나가 강씨 집안과 최씨 집안이 아직도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서 협업 관계를 유지 중이라는 걸 발견해내자 사람들은 강 씨, 부 씨, 최씨 상관없이 다들 미친 사람들이라며 댓글 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도시는 너무 위험해. 엄마, 나 시골로 돌아갈래요.][하루 만에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됐어.]그런 여론들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자 온하랑의 핸드폰에도 알고리즘으로 뜨게 되었다.제목을 보고 클릭해본 온하랑은 지금을 기회 삼아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분노를 터뜨리는 많은 사람들의 발언에 미간을 찌푸렸다.2분 뒤, 황은숙이 웃으며 걸어오더니 온하랑을 향해 말했다.“사모님, 오늘 핸드폰 너무 많이 보셨어요, 오래 보면 몸에 안 좋으니까 이제 저 주세요.”아직 시간이 안 된 것 같은데 핸드폰을 달라는 황은숙에 온하랑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승민 오빠한테 전화만 하고 줄게요.”“네.”부승민의 번호로 전화를 걸자 상대편에서도 빠르게 부승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하랑아.”여론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