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이 취조실을 나간 후 부선월은 곧 기대에 가득 찼다.잠시 후 최국환이 오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그가 믿어줄까?부선월은 단지 최국환을 너무 사랑한 죄밖에 없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저지른 일을 최국환은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자세를 바꾸며 고개를 숙인 부선월은 피가 잔뜩 튄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모습은 초라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부선월은 허둥지둥 옷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하지만 이미 옷에 스며든 핏자국은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이러면 좀 깔끔해졌겠지?’이 모든 걸 마친 부선월이 인내심 있게 최국환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부선월이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자 부선월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서렸다. 젊은 시절 그랬듯이 다정한 눈빛으로 최국환을 쳐다보았다. “국환 씨, 왔어?”최국환은 어두운 얼굴로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부선월, 아직도 웃음이 나와?”호통에 움찔한 부선월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최국환을 쳐다보며 가여운 모습으로 입을 삐죽였다. “국환 씨, 무슨 일 있어?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낼 수 있어?”“무슨 염치로 나한테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거야?”CCTV 속 장면을 떠올린 최국환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가희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 지금도 병원에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어. 이렇게 독하고 악랄한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최국환의 비난에 부선월이 순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뭐? 임가희가 왜? 내가 뭘 했다고 악랄하다고 하는 거야?”그 말에 최국환이 냉소 지었다. “부선월,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 연기를 하는 거야? 정말 너무 실망스럽군.”“국환 씨, 난 정말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그래? 그럼 고개 숙여서 네 손목에 차고 있는게 뭔지 봐봐. 주변도 자세히
“그러니까 자네 말은...”“이미 본인의 신분을 알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부선월 씨 정신감정을 의뢰했다고 해요.”“어느 호텔에 있는지 알아보게.”...병실 안.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베이비시터의 휴대폰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연지 씨, 고은이가 계속 울음도 그치지 않고 분유를 먹는 족족 토하고 있어요. 돌아오시는 게 어떠세요?”베이비시터는 임연지에게 고은은 처벌을 피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임연지는 아이의 아빠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임연지는 고은이 태어난 후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는 물리기는커녕 눈길조차 주길 거부했다. ‘가여운 것.’차가운 임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가 있으면 데리고 병원에 가세요. 저한테 연락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에요?”그 아이만 보면 임연지는 자신이 온 경주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모욕을 겪은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베이비시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연지가 뚝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막 산후조리를 끝내고 아이의 수유 기간은 대략 6개월 정도였다. 이 6개월 사이에 다시 임신을 해야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꼭 임신을 해야만 한다면 그녀는 꼭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고 싶었다. “아...”임가희가 어렴풋이 의식을 회복했다. 쓰러지기 전 마주했던 잔인한 장면이 파라노마처럼 머리에 스쳤다. 임가희는 공포에 질린 채로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닿은 건 얼굴의 피부가 아니라 둘둘 감아진 거즈였다. “고모, 드디어 일어나셨어요?”인기척이 들리자 침대 맡으로 다가간 임연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부상이 심각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의사가 그랬어요.”“내 얼굴...”임가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로 인해 얼굴의 근육이 움직이자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의사가 최선을 다해 봉합했어요... 나중에 성형외과 시술도 받으실 수 있고요... 고모,
계성진의 전화를 끊은 부승민은 소파에 앉아 물을 마셨다.계성진을 시켜 경찰에 신고를 하긴 했지만 부승민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부선월이 노린 게 아무리 임가희라 해도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시한폭탄이었기에 최씨 집안에서 반드시 나서서 처리하려 할 것이기에 부승민은 계성진에게도 최선만 다하면 된다고 일러두었다.그 결과가 어떻든 그건 부승민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때 갑자기 울리는 호텔 전화벨 소리에 생각을 멈춘 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여보세요?”“손님, 여기 최국환이라는 분이 손님 가족이라고 만나 뵙고 싶어하시는데 방 번호 알려드려도 될까요?”“올라오라고 하세요.”잠시 멈칫하던 부승민이 대답을 마치고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부선월이 최국환을 만나고 싶다 할 때도 연락을 하지 않았었는데 역시나 최국환은 제 아내인 임가희를 위해 이렇게 직접 부승민을 찾아온 것이다.몇 분 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자 문을 열어준 부승민이 밖에 서 있는 최국환을 보며 말했다.“오랜만이네요, 최 회장님.”“그러게요.”“저 계속 이렇게 밖에 세워두실 겁니까?”복도를 두리번거리며 묻는 최국환에 부승민은 누가 봐도 거리를 두는 것처럼 문틀에 기대며 말했다.“그냥 여기서 말씀하시죠, 용건이 뭡니까?”최국환은 저와 닮은 부승민의 얼굴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부 회장님만 괜찮으시면 제가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같이 내려갈까요?”“조금 있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그냥 여기서 얘기하시죠.”하지만 여전히 단호한 부승민의 태도에 최국환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승민아, 너도 네 신분에 대해서 이미 다 안 거지?”“네, 알아요.”표정 변화 하나 없이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부승민에 최국환은 그가 진작 자신이 친아빠인 걸 알았으면서도 부모로 인정하기 싫어 그동안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그래서 별다른 표정도, 대화도 나누지 않고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하지만 부승민이 제 아들이라는 걸 안
“심신이 불안정한 건 맞으니까 그냥 절차대로 진행한 것뿐이에요.”부선월이 그토록 죽고 못 사는 남자가 내뱉는 어이없는 말에 부승민은 냉소를 흘렸다.“감정 결과에는 아무런 관여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최 회장님도 결과엔 손대지 마세요. 검찰과 사법부에 맡겨야죠 그런 건.”부승민이 검사 결과를 조작할 거라고 생각했던 최국환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이 오해했나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할아버지가 잘 키웠나 보구나. 사실 나도 후회 많이 했어. 왜 그때...”“얘기 다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보세요.”제 말을 끊으며 방문을 닫아버리는 부승민에 최국환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부선월과 임가희 사이의 일은 빠르게 기사화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사람들은 피해자를 동정하고 가해자를 나무라고 있었다.얼마 못 가 사라질 사람들의 관심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가십거리를 즐기는 건 사람들의 본능이었다.그들이 특히 좋아하는 건 언제나 남녀 사이의 스캔들이었기에 이번에도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경주 백화점 가해자와 피해자 부부의 관계”기사를 클릭해보면 안에는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모를 비밀스러운 내용들이 적혀있었는데 칼부림 사건의 가해자는 BX 그룹 회장을 지냈었던 부선월이고 피해자는 경주 최씨 가문 최국환의 아내 임가희인데 최국환과 부선월 사이의 아들이 바로 부승민이라는 얘기였다.기사에는 BX그룹을 등에 업은 부선월이 평범한 집안 출신인 임가희를 여러 차례 도발해왔다고 서술되어있었다.온라인에서 내연녀는 누구나 다 욕하는 존재인데 이토록 기고만장하고 칼로 본처를 찌르기까지 하는 내연녀에게는 더욱더 자비가 없었다.내연녀가 권력까지 있으니 본처는 꼼짝없이 당했다는 내용과 재벌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그리고 부승민이라는 존재까지 더해지니 기사는 순식간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이 일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오며 가며 기사
소문은 퍼져나갈수록 과장되었고 핸드폰 화면을 방패 삼은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에 열광하는 대중들을 보며 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부선월이 경찰에 구속된 게 아니라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경찰이 발 빠르게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라며 용의자는 구속수사 중이라고 밝힘과 동시에 부승민이 정신과 검사를 의뢰한 건 용의자의 입원과 상담기록에 근거해서 진행한 합법적인 수사라고 강조했다.그러면서 사법부 정신과 검사 위원회는 공정하고 청렴한 수사를 바탕으로 용의자의 정신건강에 대한 보다 확실하고 근거 있는 진단을 진행할 거라고 발표했다.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전부 법에 따라 조사를 진행할 거라는 경찰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온라인에서 떠돌아다니던 피드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뭐가 진짠지 구별할 수도 없게 다양하던 소문들은 많이 사라졌는데 정신과 검사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면서 또 다른 화제를 만들어냈다.그건 바로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살인을 해도 무죄인가라는 내용의 주제였다.[정신과 질환이든 만 14세든 나는 다 폐지돼야 한다고 봐, 사람을 죽였으면 그게 누구든 벌을 받아야지!]이런 부류의 댓글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여론을 점점 더 뜨겁게 달구었다.이름 없는 온라인 탐정들은 이때를 빌어 부선월의 과거를 들추어내다가 임가희는 최국환의 첫 아내가 아니라 재혼대상이었고 최국환의 첫 아내는 강윤희라는 것까지 알아냈다.한 네티즌이 올린 피드에는 강씨 집안과 최씨 집안은 둘의 정략결혼으로 인연을 맺었는데 강윤희가 워낙 아름다워서 최국환과 그녀 사이에 아들도 있었다고 적혀있었다.그 아들이 바로 지금 리우그룹 대표로 있는 유명사진작가 최동철이었다.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강윤희가 최동철을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부선월이 임신을 핑계로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놔서 강윤희는 산후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한다.피드 아래편에는 사진도 몇 장 기재되어 있었는데 첫 장은 최국환과 강윤희의 결혼기
[역시 자본가들은 진짜 대단해, 딸의 안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네.][만약 법적인 책임을 물으면 부선월은 감옥에 가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강씨 집안은 최씨 집안 부씨 집안 모두와 척을 지게 되는 거지. 그래서 강씨 집안도 결국 부씨 집안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야.][안 보냈으면 부선월이 바로 최국환이랑 결혼했겠지. 최동철한테는 다행 아니야? 부선월이 들어왔어 봐, 최동철 괴롭히기만 했지.]그때 한 네티즌이 댓글 창에 사진 한 장을 게시하며 말했다.[왜 이렇게 익숙한가 했는데 며칠 전에 대선 탈락한 사람이 최동철 외동숙 강시우야.][와, 이건 또 무슨 일이야.]그 사진은 빠르게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갔고 사람들은 최동철의 인스타그램을 찾아내어 그에게 동정과 응원의 말을 보내주고 있었다.동시에 부승민의 인스타에는 험한 말들을 쏟아내었는데 그를 위해 나서주는 사람들한테는 “자본가의 개”라는 프레임을 씌워버리고 있었다.그런데 강시우의 일을 파던 사람 하나가 강씨 집안과 최씨 집안이 아직도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서 협업 관계를 유지 중이라는 걸 발견해내자 사람들은 강 씨, 부 씨, 최씨 상관없이 다들 미친 사람들이라며 댓글 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도시는 너무 위험해. 엄마, 나 시골로 돌아갈래요.][하루 만에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됐어.]그런 여론들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자 온하랑의 핸드폰에도 알고리즘으로 뜨게 되었다.제목을 보고 클릭해본 온하랑은 지금을 기회 삼아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분노를 터뜨리는 많은 사람들의 발언에 미간을 찌푸렸다.2분 뒤, 황은숙이 웃으며 걸어오더니 온하랑을 향해 말했다.“사모님, 오늘 핸드폰 너무 많이 보셨어요, 오래 보면 몸에 안 좋으니까 이제 저 주세요.”아직 시간이 안 된 것 같은데 핸드폰을 달라는 황은숙에 온하랑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승민 오빠한테 전화만 하고 줄게요.”“네.”부승민의 번호로 전화를 걸자 상대편에서도 빠르게 부승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하랑아.”여론
부승민은 몇 초 동안 고통이라는 감정에 휩싸였다. 마치 뜨거운 불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처했다.온하랑은 임가희의 부상을 크게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곧 부선월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온하랑이 입을 열었다.“부승민, 너가 출장 간다고 했던 날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지? 내가 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가던 길에 사고를 당할 뻔했어. 너는 그 일이 해외 경쟁자와 관련 있다고 했지만, 그때 필라시에 간 사람은 부선월 씨였고 날 해치려 한 사람도 부선월 씨였어. 맞아?”“...맞아.”부승민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그는 한 손으로 창턱을 짚고 무의식적으로 두드리며 온하랑이 말하기를 기다렸다.“부선월 씨가 내 목숨을 노렸던 거야?”부승민은 숨을 멈춘 채 대답했다.“...응.”“그 당시 부선월 씨가 병을 앓고 있었어?”“확실하진 않아. 다만 그때 이미 약을 복용 중이었어.”부승민은 부선월을 정신병원에 보낸 것이 어쩌면 의도치 않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정신질환이 있다는 게 증명되고 범행 당시 그 상태였다면 부선월 씨는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겠지?”“그렇지.”“그럼 넌 부선월 씨가 병원에서 얌전히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다시 탈출하지 않을 거라고?”부승민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과거였다.‘이번에도 부선월은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게 아니던가?’“하랑, 내가 약속할게. 부선월 씨가 다시는 병원을 마음대로 나올 수 없도록 할 거야. 경찰이나 최씨 가문 쪽에도 협조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막을 거고...게다가 아직 감정 결과가 나오지 않았잖아. 부선월 씨가 범행 당시 정말 발병 상태였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어. 결과는 아직 미지수야.”부승민의 말은 간절했지만, 온하랑의 마음은 여전히 요동치지 않았다.부승민이 아무리 단호하게 약속을 해도 현실이란 언제나 상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잘 알고
부승민의 정체는 원래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그의 모든 정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심지어 수십 년 전 최국환과 강윤희의 일까지도 파헤쳐졌다.이 정도로 격렬한 반응은 분명히 이례적이었다.“맞아. 내가 알아보라고 시켰더니 처음 폭로한 건 도시일보의 마감독 주필이었어. 마감독은 임 여사의 친구인데 두 사람은 예술 전시회에서 만나 종종 함께 전시회를 다녔다고 하더라.”온하랑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럼 임 여사가 폭로한 거네? 목적이 뭐야?”“아마 내가 정신적 검증을 신청한 것에 불만이 있어서 여론의 힘으로 날 압박하려는 것 같아. 얼마 전 최국환 씨도 날 찾아와 신청을 철회하라고 했거든.”“...결국 지금 넌 꼼짝 못 하게 된 거구나.”임 여사가 여론을 조작하고 있는 이상 부승민이 신청을 철회하더라도 그녀가 쉽게 물러날 리 없었다. 오히려 여론을 부추기며 부승민이 철회한 이유를 죄책감이나 찔림 때문이라고 몰아갈 가능성이 컸다.만약 감정 결과에서 부선월이 범행 당시 발병 상태가 아니라고 판정된다면 그녀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할 테니 비교적 간단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여론은 부승민이 뇌물을 써서 결과를 조작했다고 몰아갈 가능성이 컸다.결과가 어떻든 부승민은 각종 의혹과 압박에 직면할 운명이었다.“네 말이 맞아.”부승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그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번 일이 자신에게 큰 압력과 도전을 안겨줄 것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그래서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온하랑이 조용히 물었다.“계속 신청하고 결과를 기다릴 거야.” “...”“하랑, 미안해.”부승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그는 온하랑의 걱정을 잘 알면서도 이 상황에서 물러설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알아.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겠지.”온하랑의 목소리에는 아주 미묘한 동정심이 스며 있었다.다행히도 임 여사는 부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