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그룹 둘째 도련님 문윤재. 가수 겸 배우인 탑 연예인. 평판은 그닥 별로지만 워낙 잘사는 데다 대중들한테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최근 원후가 사나와 문윤재의 합작을 추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하필 이때 소문의 문윤재와 잠자리를 가질 줄이야.채림은 눈을 반짝이더니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으로 자신과 윤재의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비록 사랑에 눈이 멀어 원후 같은 쓰레기한테 당했지만 지금은 속상하다고 슬퍼할 때가 아니다. 생각 없이 그들에게 따지기만 할 때도 아니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작 그런 쓰레기가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순 없지, 당한 대로 모두 돌려줄 거야.’원하는 걸 손에 넣은 채림은 아래쪽의 불편함을 참으며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는 가기 전에 쪽지 한 장을 남겼다.철컥, 하는 문소리가 들리자 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는 눈을 천천히 떴다. 이윽고 차가운 눈으로 침대 머리맡에 있는 쪽지를 바라봤다.[조만간 또 만날 거예요.]...채림은 문을 나서자마자 전화 두 통을 하고는 호텔 CCTV 영상 자료를 입수했다. 비록 고화질은 아니지만 자기를 호텔로 데려온 남자가 훤칠한 키의 소유자인데다, 얼굴을 꽁꽁 감싸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상대가 톱스타 문윤재라는 확신이 더 강해졌다. 이 모습은 윤재가 카메라를 피하느라 감싸고 다니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채림의 눈빛은 순간 차갑게 식었다. 물론 본의 아니게 자기 몸을 내어주게 되었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아주 땡잡은 셈이다.MS 그룹 둘째 도련님을 손에 넣으면 원후와 사나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니.채림이 이제 막 호텔 문을 나섰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자기야.]약혼자 원후의 목소리에는 가식적인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어제 서프라이즈 준비했던데, 고마워! 트렁크를 연 순간 풍선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 엄청 낭만적이었어. 마음에 들었어.]“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채림은 눈살을 찌푸리며 울렁거리는 속
잠시 뒤, 윤재가 팬들을 돌려보내고 대기실에 들어오자 채림이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백채림이라고 해요.”“백채림이요?”윤재는 살짝 귀찮은 듯 말했다.“어디에 사인해 줄까요?”채림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우선 저 좀 볼래요? 저 모르겠어요?”“씁.”‘와, 몸매 죽이네.’윤재는 코에 걸려 있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채림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굿. 지팡이도 신선하고. 내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어요. 저녁에 사용하면... 꽤 재밌겠는데요?”윤재가 말하면서 지팡이를 툭툭 건드리자 채림은 언짢은 듯 손을 뿌리쳤다. “윽.” 윤재는 지팡이에 맞은 손을 입가에 갖다 대며 살짝 핥았다.“성깔 있네? 마음에 드는데?”그 순간 채림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왜 어제랑 완전히 다르지? 어제는 말도 안 하고 무게감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술 좋아하고 여자 밝히는 가벼운 한량 같네.’약간 넋을 잃은 채림을 보며 윤재는 눈을 깜빡였다.“오늘 밤에 나랑 같이 B국 갈래요?”그 말에 채림은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아니요. 다들 성인이니 어젯밤 일은 책임을 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간단한 조건이 있어요.”“어젯밤? 왜 난 기억이 없죠?”윤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 역시 남자들이란.’입 싹 닦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윤재의 뻔한 속셈에 채림은 싸늘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증거를 남겼으니 망정이지.’채림은 침착하게 핸드폰을 꺼내 자기는 희미하게 나오고 남자만 선명한 사진 두 장을 골라내 윤재에게 보여주었다.“어젯밤, B국 가든 호텔, 8868호실. 기억 안 나면 더 상세하게 설명해 줄까요?”놀란 듯 눈을 땡그랗게 뜨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윤재는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어... 어젯밤 B국 가든 호텔에 있었던 거 확실해요?”“호텔 CCTV 영상도 있어요.”채림은 귀찮은 듯 말했다.“간단한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돼요. 문윤재 씨한테 큰 피해는 안 갈 거예요. 하지만 끝까지 잡아뗄 생각이라면 나도 가
[발뺌할 생각하지 마요. 방금 미래 숙모를 만났어요. 숙모가 나를 삼촌으로 착각하던데요? 게다가...]“어떻게 만났는지 당장 말해.”지후는 윤재의 쓸데없는 말을 자르며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크흠.]그러자 윤재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방금 나눈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물론 자기가 채림을 놀린 부분은 생략하고 말이다. ‘내가 자기 여자를 놀렸다는 걸 알면... 으,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전화 건너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지만 윤재는 간담이 서늘했다....채림은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백씨 가문은 의료업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었다. 물론 채림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문도 몰락했지만, 여전히 의료 업계에서는 백씨 가문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채림은 그 길로 가장 믿음직한 병원의 정형외과 전문의를 찾아가 발을 검사했다.다행히 의사는 채림의 발 상태는 심각하지 않다는 진단을 내렸다. 잘못된 약을 사용하여 상처가 덧난 것이라 정상적인 약물 치료를 하면서 세심하게 관리하면 완치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 말이다.그 말을 들은 채림의 눈은 순간 차갑게 식었다. 진료받는 날이면 원후가 매번 채림을 병원에 데려갔다.‘뒤에서 손쓰려 매번 같이 가준 줄도 모르고.’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다.약을 챙긴 채림은 재활 치료를 받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이 시간이면 원후는 아마 그녀가 아직도 B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채림은 아예 입원 수속을 밟고 병원에 입원했다....다음 날 저녁, 재활 치료를 받은 채림은 곧장 퇴원 수속을 마치고 문라이트로 향했다. 원후가 채림을 위해 처녀 파티를 해주겠다던 곳이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을 들었을 때 원후가 자기를 생각한다고 흐뭇해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저를 모함하려는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무조건 잘 대비해야 해.’
띵!핸드폰이 울리자 채림은 얼른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그건 다름 아닌 위층에서 대기하고 있는 친구 도지수가 보낸 문자였다.[모든 게 순조로워. 걱정하지 마.]도씨 가문은 비록 H시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명문가가 두려워하는 존재다. 그 이유가 바로 도씨 가문에 소속된 실력 있는 사립 탐정들 때문이다. 그런 가문의 딸인 지수가 오늘 밤 계획을 도와주고 있으니 채림은 안심이 됐다.핸드폰을 내려놓고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며 계획을 실행하려 할 때,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채림의 정신을 앗아갔다.“백채림은 절름발이인데 이씨 집안에서는 왜 이 결혼을 강행하려고 하지?”“그것도 몰라? 의료업계에 진출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백채림을 이용해 먹으려는 거지.”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창백해진 채림을 바라보며 사나는 속으로 기뻐했다.사실 사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채림을 비난하게 만들기 위해 미리 자신의 사람을 이 자리에 심어두었다.채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장 신나게 떠드는 사람이 사나의 절친 한나영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백씨 가문 향수 사업은 망했지만 의료 사업은 아직 잘나가잖아. 백채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온 집안을 백채림 어머니 혼자 지탱하고 있는 걸 봐서 백채림 어머니도 참 대단해.”“다 늙어 빠진 여자가 무슨 수로 가업을 지탱하겠어? 다 몸 로비... 말 안 해도 알지?”나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분위기를 흐렸다.다음 순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채림이 나영의 뺨을 갈겼다.“아! 뭐 하는 거야?”나영이 비명을 지르자 채림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고했다.“부모가 살아계시면 뭐 해? 인간다운 게 뭔지 가르쳐주지도 않은 모양인데. 그러니 수고스럽더라도 내가 가르쳐 주는 거야. 입 똑바로 놀려.”채림이 이토록 강한 태도로 나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나는 언짢은 기분을 억누르고 달려와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됐어, 그만해. 오늘 우리 언니 처녀 파티인데, 내 체면 좀 봐주라.”“네 체면
만약 오늘 밤 일로 BM 그룹과 다른 그룹의 협력이 무산되면 이사진은 분명 모든 책임을 채림에게 돌릴 것이다.최근 사나의 아버지, 즉 채림의 셋째 삼촌 백성호가 주주들과 손을 잡고 채림의 어머니 민해란을 회장직에서 밀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걸 봐서, 이 소동은 사나가 제 아버지와 손을 잡고 꾸민 게 틀림없었다.그런 작자들이 원하는 대로 되게 하면 해외에서 BM 그룹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한테 너무 미안해진다.그때 지수가 숨을 헐떡이며 채림에게 달려왔다.“채림아, 내가 우리 쪽 사람한테 말해뒀어. 이제 곧 화면 꺼질 거야.”“필요 없어.”채림은 맑은 눈으로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소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했다.그 모습을 본 지수가 오히려 놀란 듯 물었다.“확실해?”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신속하게 이메일 계정에 접속하여 자료를 지수에게 보냈다.“네 사람들한테 이걸 아까 사진과 함께 재생하라고 해.”채림이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자 지수는 그제야 안심한 듯 자리를 떠났다.그때.“언니.”꿍꿍이를 숨긴 사나가 음흉하게 눈을 번뜩였다.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채림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한 사나는 채림을 걱정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망신 주었다.“어떻게 자기 즐거움만 챙기고 회사가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할 수 있어? 내가 아빠한테 들었는데 오늘 추진하던 계약이 BM 그룹에 엄청 중요한 거래.”“고작 사진 몇 장으로 오늘 계약이 무산된다고 어떻게 확신해?”채림은 지팡이를 짚으며 자세를 바꾸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우리 내기할래? 난 오늘 내가 계약 성사시킨다는 것에 걸겠어.”사나는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언니, 그 말 지금 취소해도 늦지 않아.”“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 내기할 거야 말 거야?”“좋아.”채림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자 사나는 동의했다. 채림이 번복할까 사나는 얼른 조건도 걸었다.“그럼
채림이 혼자 드림캐슬을 일궈 세웠다고 수군대는 게 내키지 않고 화가 났지만, 이철민과 장선화는 그저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BM 그룹 원로 이사들도 다시 성사된 계약에 너무 기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그때, 내색하지 않고 사람들의 두 얼굴을 지켜보던 채림이 교활한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내기에서 졌으면 패배를 인정해야죠. 우리 다 함께 사나의 노래 한 곡 들읍시다.”청아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웠던 현장에 순간 파고들었다.채림의 귀띔 덕에 사람들은 방금 전 했던 내기를 떠올렸고, 연예인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기쁨에 하나둘 호응하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발을 뺐다.“저, 저 오늘 목이 좀 쉬어서요.”“싱글 앨범도 낸 연예인이면서 노래 한 곡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핑계 대지 말고 졌으면 패배를 인정해야지. 목이 쉬었어도 노래는 할 수 있잖아. 설마 지금껏 냈던 싱글 앨범이 직접 부른 게 아니었던 거야?”궁지에 몰린 사나는 이를 악물고 무대에 올라가 고분고분 마이크 앞에 섰다.곧이어 전주가 흐르자 사나는 작은 소리로 흥얼대기 시작했다. 사나가 작은 소리로 노래하자 무대 뒤에 있던 음향사도 따라서 음량을 낮추었다. 그 때문에 음을 이탈한 목소리가 그대로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고 무대 아래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이게 뭐야?”“듣고 있기 너무 괴로운데!”“예전에 냈던 싱글 앨범은 분명 엄청 듣기 좋았는데, 설마 다 가짜였어?”그제야 원후는 다급히 직원들에게 명령했다.“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 오디오 꺼!”“죄송해요. 어떻게 된 이유인지 오디오에 문제가 생겨 꺼지지 않아요.”“당, 당장 가서 전원 끊어!”원후가 화를 내며 또다시 버럭 소리쳤다.다음 순간 전원이 끊기면서 현장은 암흑에 빠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또 수군대기 시작했다.“이원후가 백사나를 지켜주려고 너무 목숨 거는 거 아니야?”“그러게? 왜 자기 약혼녀보다 더 아끼는 것 같지?”“아까 백채
방에 있는 남자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데도 훤칠하고 늠름한 체격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간 병든 안색이었지만 잘생기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지 못했고, 장애가 있는 몸 역시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를 숨기지 못했다.채림은 순간 눈을 가늘게 접었다.‘분위기만 보면 이 사람이 B국 가든 호텔에서 만난 그날의 남자인데? 문윤재보다 더 비슷하잖아!’그때 경호원 한 명이 다른 방에서 걸어 나와 채림에게 말했다.“문 대표님이 백채림 씨를 지금껏 기다리고 계셨습니다.”‘문 대표님?’소문에 의하면 MS 그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문씨 가문 둘째 문지후인데, 항상 신출귀몰하여 누구도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성정이 포악하고 오랫동안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데다, 장애인이라는 소문만 무성하게 돌고 있었다.채림은 지후가 왜 자기 방에 나타났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H시가 원래부터 그의 구역이니까. 하지만 지후의 얼굴을 보니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남자의 거만한 두 눈에는 마치 건드리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숨어 있어 있는 듯했다. 게다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자꾸만 채림의 시선을 끌어당겼다.지후는 그날 밤 기억 속의 남자와 너무 닮아 있었다.채림은 표정 관리를 하며 그날 밤 호텔에서 있었던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그날 밤 남자는 분명 힘이 셌어. 그러니 절대 장애인일 리 없어. 만약 문지후가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다면 그날 밤 남자는... 역시 문윤재겠지?’채림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하지만 지후가 저를 보는 눈빛이 너무 복잡하다고 느껴졌다.“문윤재한테 한 제안 내가 동의하죠.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요.”지후의 목소리는 채림의 생각을 끊어버렸다. 도도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고귀함이 묻어 있었다.“네?”“문씨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와요.”지후는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조용히 결혼해서.”“왜요?”채림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왜인지... 모르겠어요?”채림을 바라보는 지후
채림은 다시 지후 앞에 다가가 직설적으로 말했다.“죄송하지만 아까 제안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네요.”하지만 지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아까 누군가 이 방에 남자를 숨겨뒀어요. 아주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것 같던데요.”“문 대표님이 걱정할 일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해요.”채림의 견결한 태도에 지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총명한 머리로 내가 어젯밤 그 남자였다는 걸 알았을 텐데, 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나?’“내가 언제든지 한 명 더 데려올 수 있어요.”약간 위험한 분위기를 띤 지후의 목소리에 채림의 눈은 일순 어두워졌다.“지금 협박하는 거예요?”“나도 협박하기 싫어요.”지후는 느긋하게 말했다.“동의만 한다면 MS 그룹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지 않나요? 내가 채림 씨 발도 고쳐줄 수 있어요.”자비를 베푸는 듯한 어조에 채림은 순간 기분이 언짢았지만 지후가 내건 조건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채림의 약점을 건드렸다.채림은 온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자신의 왼발을 바라봤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반격할 건데? 그 양심 없는 연놈을 어떻게 상대할 건데?’‘셋째 삼촌의 세력이 점점 BM 그룹 이사회를 삼키고 있어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텐데,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을까?’채림은 숨을 들이켜더니 다시 물었다.“어떻게 치료해 줄 건데요? 얼마나 걸리죠?”“여기로 가면 의사가 침술로 치료해 줄 거예요. 사흘이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거예요.”지후는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명함 한 장을 던졌다.‘사흘?’채림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채림의 부상은 이미 2년이나 지체되었다. 게다가 알고 지내던 의사도 언제 완치될 수 있는지 확답을 주지 않았는데, 사흘 내로 완치할 수 있다니?‘어이없네.’하지만 너무 확신에 찬 남자의 표정 때문에 채림은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만약 정말 그런 명의가 있다면 왜 본인부터 치료하지 않았죠?”“믿든
급히 진행된 모임이 끝나자, 강숙자는 특별히 차를 준비해 채림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마침 그 시각은 증권소 거래가 막 마감된 시간이었다. 채림은 서둘러 드림캐슬 주식 상황을 확인했지만, 놀랍게도 주가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백성호와 이철민이 손을 잡고 여론을 막아보려 했지만, 제국 빌딩에서 생중계된 영상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기사 대부분은 사나가 홍보 모델과 드라마, 예능에서 퇴출되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심지어 국제적인 유명 브랜드들마저 계약 위반을 빌미로 사나에게 터무니없는 위약금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게다가 사나와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과 동료들이 하나둘씩 사나의 인성을 폭로하는 글을 올리면서 여론은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채림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들을 확인하며 입가에 냉소를 띄웠다.‘평소에 좀 착하게 살지 그랬나. 얼마나 최악이었으면 편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채림은 집 대신 회사로 향해 향수 라인을 담당하는 동료들과 신제품에 대해 토론했다. 회의가 끝난 후, 폰을 확인해 보니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전부 사나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채림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려 했지만, 마침 또다시 사나의 전화가 걸려왔다. 결국 채림은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 전화를 받았다.[언니.]전화 건너편에서 사나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하.”채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빌어 봐.”[그래, 내가 이렇게 빌게.]사나는 당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교통사고를 꾸며 내 다리를 망가뜨리고, 가짜 약을 복용하게 해 회복하지 못하게 하고, 내 약혼자를 꼬셔 2년 동안이나 나를 바보 취급한 건 너야. 난 오히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채림은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그러자 한참 뒤 건너편에서 사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우리 자매잖아...]“
“이게 정말인가요? 정말 절름발이를 H시 대표로 선정한 거예요?”옆에 있던 귀부인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크흠.”하지만 강숙자의 헛기침 한방에 귀부인들은 바로 조용해졌다.“혹시 아는 사람인가?”강숙자의 물음에, 나영은 강숙자가 채림한테 화가 났다고 착각해 얼른 부채질했다.“아니요. 몰라요. 하지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 H시에서 저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오늘 오전만 해도 저 여자의 약혼자가 저 여자 사촌 동생이랑 몸을 섞는 영상이 제국 빌딩에 생중계됐거든요...”“저 아가씨가 백씨 가문 아가씨였군요. 하긴, 최근 백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유명해지긴 했죠. 다들 제국 빌딩에서 상영된 영상을 못 보셨나요?”“그럴 리가요. 생방송이라 보고 싶지 않아도 안 볼 수가 없었어요...”귀부인들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더 자신감을 얻은 나영은 이미 어두워진 강숙자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채 부채질 해댔다.“어르신, 너무 우습지 않나요? 집에 그런 추한 일이 벌어졌으면서 어르신께 줄을 대려고 쪼르르 달려오다니요.”“상대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동정하는 게 아니라 비웃는 건가?”쩌렁쩌렁한 강숙자의 목소리에 수군대며 떠들던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나영도 너무 난감해 다급히 핑계를 댔다.“저... 어르신, 개인사는 제쳐 두더라도 절름발이가 H시를 대표하여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하는 걸 두고 보실 건가요? 그러면 백채림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물론, H시까지 웃음거리로 전락할 거라고요!”안으로 들어오던 채림은 마침 나영의 발언을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강숙자에게 다가갔다.채림의 등장에 깜짝 놀란 나영은 눈을 땡그랗게 뜨며 삿대질했다.“어르신, 이것 보세요. 얼마나 교양 없나. 어르신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들어왔잖아요!”강숙자는 아무 말 없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그 순간 강숙자가 자기 의견을 동의했다고 착각한 나영은 다급히 저한테로 뻗어 온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
나영의 어머니 최영애는 경멸하는 듯 채림을 바라봤다.“절름발이 주제에 아부해 봤지. 무서워할 거 뭐 있어?”그 말에 안심한 나영은 최영애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엄마 말이 맞아요. 국내에서 강숙자 어르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그중 한 명이 엄마잖아요.”“걱정하지 마. 문 대표님이 효성이 지극한 분이라고 하니 이따가 너만 얌전하게 굴어. 어르신의 동의만 떨어지면 네 아빠 회사도 정상 가동될 거야. 그러면 미스 글로벌 파티에 가게 될 사람도 자연스럽게 네가 될 거고.”최영애는 손을 들어 어깨에 걸친 숄을 정리하며 말했다.그 말에 더욱 자신감이 생겨난 나영은 최영애와 함께 가슴을 편 채 앞으로 걸어갔다....나영 모녀가 밖에서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두 사람을 안으로 모시러 오지 않았다. 결국 짜증이 난 나영은 목표를 돌려 벚꽃 나무 아래에 있는 채림을 찾아갔다.“어머, 이게 누구야? 백씨 가문 아가씨잖아. 문씨 저택에 오면서 예의 갖춰 차려입지 않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오더니, 백씨 가문이 이 정도로 몰락했나?”고개를 돌린 채림의 눈에는 보석을 칭칭 휘감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저를 몰아세우는 여자가 들어왔다.‘한나영?’‘한나영도 여기 올 줄이야.’채림은 남의 집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나영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동생한테 약혼자를 뺏겼는데도 슬픈 기색 하나 없네? 게다가 은근히 야망 있네? 곧바로 어르신한테 줄을 대러 달려오다니.”“엄마, 그런 남녀랑 한데 엮여서 사람들 입에 오른 사람의 인성이 어디 가겠어요, 안 그래요?”채림은 싸늘한 눈빛을 내뿜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렇게 죽고 못 사는 베프인 척하더니, 벌써 선을 긋는 거야? 쓸모 없어지니 자기 친구도 버리는 사람은 수준이 얼마나 높을까?”“지금 나 욕했어?”나영이 민감하게 반응하자 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제 발 저리니 바로 인정하네. 그래도 본인 주제는 좀 아나 봐!”“백채림! 아직 좋아하
어찌 됐든 윤재가 어르신 앞에서는 독서를 즐기고 명상을 즐기는 이미지인 터라 채림은 적절한 표현을 골라 대답했다.“웃음이 헤프고 자유분방하거든요.”강숙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고개를 돌려 류옥화를 바라봤다.그러자 류옥화도 진땀을 빼며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다가 강숙자의 귓가에 소곤댔다.“문 대표님이 채림 씨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모양이네요...”‘그럴 수 있지.’강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8년 전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후도 이렇게 무뚝뚝한 성격으로 변하지 않았을 텐데. 진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을 열 수도 있지.’“그거참 좋네.”강숙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네, 참 좋아. 어쩜 이렇게 참한지. 그런데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라고 해서 많이 속상했지?”“아니요. 속상하지 않아요. 이것도 다 대의를 위한 거잖아요.”‘오히려 계속 숨겼으면 좋겠는데요.’강숙자는 채림이 너무 만족스러웠다.‘문씨 가문에서는 어떻게 딸을 이렇게 이해심 많고 착하고 귀엽게 키웠지? 지후가 그런 일을 당하고 마음의 문을 닫은 줄 알았는데 복은 역시 따라오는군.’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강숙자는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이 할미가 강원에 집 한 채 마련했는데, 앞으로 둘이 거기서 지내.”아무 생각 없이 거절하려던 채림은 결혼까지 했는데 따로 사는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앞으로 몇 달간 윤재의 스케줄을 몰래 확인해 봤는데, 집에 돌아올 가능성의 거의 없었기에 안심이 되었다.얼마 뒤, 가사도우미 한 명이 들어와 손님이 도착했다고 알리자마자 강숙자의 표정은 어두워졌다.채림이 밖을 내다봤더니 정원에 거의 소규모 파티를 열어도 될 만한 인원이 모여 있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휴식하고 싶은 것 같은데, 할머니의 귀국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아부하러 줄지어 왔나 보네. 그러니까 할머니 얼굴이 바로 어두워지지.’강숙자가 손님들을 상대하기 시작하자 지후는 시간 낭비를 하기 싫어 바로 휠체어를 돌렸다. 그러면서
차에서 누군가 내리더니 공손한 자세로 지수의 차 앞에 멈춰 섰다. 채림은 그 사람이 오디션 때 지후 휠체어 뒤에 서 있던 비서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어제 윤재의 약속을 떠올린 채림은 지수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얼른 차에서 내려 그 사람을 따라갔다.“백채림 씨, 문씨 고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현은 말하면서 채림에게 자료를 건넸다.“주말이라고 하지 않았나요?”“어르신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셔서 당장 채림 씨를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알겠어요.”채림은 자기가 입은 드레스를 보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죄송하지만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야 해서 집에 데려다줄래요?”강현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어 얼른 전화를 걸더니 지후한테 상황 설명을 하고 나서 폰을 채림에게 건넸다.“채림 씨, 대표님이 전화 바꾸랍니다.”채림이 전화를 받자 지후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분부했다.“나중에 심문당하더라도 넘길 수 있도록 차에 있는 자료 미리 숙지해 둬요.”채림은 미간을 팍 구겼다.‘문윤재는 역시 믿으면 안 되겠네. 자이언트 베이비도 아니고, 나더러 자기 아내인 척하라고 부탁했으면서 뭐든 산촌이 해주다니.’자료를 확인하니 생년월일, 취미, 습과 등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취미가 독서와 명상이라는 걸 본 순간 채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래요?”이상함을 느낀 지후가 바로 물었다.그러자 채림은 얼른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잘 기억해 둘 테니.”‘문씨 가문 어르신 눈에 문윤재 취미가 독서와 명상이라고? 집에서 연기를 참 잘하나 보네.’...한참 뒤, 문씨 고택에 도착하자 눈앞에는 고풍스러운 정원이 펼쳐졌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채림의 눈에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지후가 보였다.매번 지후를 볼 때마다 채림은 저도 모르게 B국 가든 호텔에서 있었던 그날 밤 일이 떠올랐다. 심지어 그 상대가 지후가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만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아무
쨍그랑!이철민이 들고 있던 와인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이 후레자식!”“당장! 당장 화면 돌려!”이미지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럭 화를 내는 이철민에 부하 직원들은 겁에 질려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도 원후와 사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고, 심지어 제국 빌딩의 시스템마저 해킹을 당해 화면을 멈출 수 없었다.결국 H시 전체가 이씨 가문 도련님과 유명 연예인 백사나의 생방송 영상으로 떠들썩해졌다. 길 가던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두 사람을 욕했고, 창립 기념 행사에 초대받은 게스트들과 기자들마저 혀를 차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터넷이 순식간에 마비되었다.H시가 떠들썩하든 말든 이 난리를 전혀 모르는 원후와 사나는 건물 꼭대기에서 몸을 섞는 모습을 계속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어젯밤에 백채림과 함께 있었으면서 아직도 날 속일 생각이야?”“아니야! 너 미쳤어?”원후는 사나를 뿌리쳤지만, 사나는 오히려 그 틈에 달려들어 원후의 어깨를 깨물더니 그의 몸에 올라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오빠 몸은 나한테만 반응한다며? 다른 사람은 대신할 수 없다며?”결국 사나의 유혹을 참지 못한 원후는 그대로 쾌락에 몸을 맡겼고, 곧이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상영되었다.순간 인터넷은 폭발하고 말았다.[평소에 청순한 이미지더니 뒤에서는 언니 약혼자를 꼬셔 붙어먹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혼전 임신에 중절 수술까지 하고는 대중을 속이려 들었다고? 인성 나락이네, 사람 맞아?][이원후도 약혼녀를 그렇게 사랑하는 척 떠들고 다니더니, 다 가짜였네! 백사나도 내연녀 주제에 어쩜 저렇게 당당하게 여자 친구와 자지 말라고 할 수 있지? 소름 끼쳐!]그로부터 약 10분 뒤, 드림캐슬 직원은 겨우 제국 빌딩 외곽에서 상영되는 영상을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핸드폰과 머릿속에 방금까지의 영상이 저장된 상태였다.이철민과 장선화 그리고 드림캐슬 주주들은 황급히 회사 건물 내부로 도망쳐 문을
채림은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쥔 채 원후의 옆에 서 있었다. 그 꽃다발은 원후한테서 받은 건데, 너무 과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이원후 씨, 백채림 씨가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던데 정말인가요?”“맞아요!”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은 열띤 취재 끝에 두 사람의 약혼식이 깨진 상황에 이목을 집중했다.그러자 원후는 얼른 채림의 손을 잡으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채림을 바라보더니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혹시 약혼식은 나중에 다시 치르나요?”“당연하죠!”원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다면 부인될 사람이 밖에 나도는 건 괜찮나요?”“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여자들도 자기 가치를 실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원후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없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채림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기쁘다면 저도 기뻐요.”그 순간 현장은 화기애애해졌고, 백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불화설과 원후가 결혼 전에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원후 도련님은 역시 모범적인 남자 친구네요!”“어디 모범적인 남자 친구뿐이겠어요? 모범적인 후계자이기도 하죠!”그러자 기자들은 얼른 맞장구쳤다.“지금껏 H시 명문가 후계자 중에서 원후 도련님이 단연 돋보이네요!”“그러게요, 늘 겸손하고 성품 논란 같은 건 한 번도 없었잖아요!”이철민과 장선화는 제 아들을 칭찬하는 말에 흐뭇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하죠, 우리 원후가 어릴 때부터 항상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사리 분별을 잘했거든요.”“저는 어릴 때부터 우리 원후를 후계자로 키웠습니다. 원후의 품행이 제가 드림캐슬을 운영하는 품행입니다. 늘 당당하고 결백한 품행 말입니다.”맞장구 치며 아첨하는 기자들을 보며 채림은 감정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눈가에 싸늘한 냉기가 맴돌았다.‘이따가 이원후가 얼마나 결백한지 알게 될 거예요.’“다들 자리를 이동합시다. 10분 뒤에 강 건너편에 있는 제국 빌딩에서 드림캐슬 30주년 창립
원후의 사무실에는 진작 카메라가 설치되어, 채림은 핸드폰으로 사무실 안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사나가 도착한 걸 확인한 채림은 이내 집으로 가자고 기사에게 부탁했다.잠시 뒤, 지수의 사람들이 파파라치 행세를 하며 드림캐슬 문 앞을 가로막았다. 원후의 사무실에서 밖을 확인하던 사나는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파파라치가 여기까지 쫓아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른 원후에게 전화했다.그때, 차에 있던 채림이 진동하는 원후의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원후 오빠, 나 드림캐슬에 갇혔어. 빨리 와줘...]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림은 컴퓨터에서 재생 버튼을 눌러 지수가 미리 준비해준 녹음 파일을 사나에게 들려주었다.[누구야?][중요하지 않아. 내 눈엔 자기밖에 없어.][그래?][당연하지. 자기랑 이사회 지지만 있으면 내가 바로 인생 승자인데, 다른 게 뭔 소용이겠어?][그런데 평소 사나랑 가까이 지냈잖아, 난 자기가 사나 같은 스타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 걔는 연예계에 있어서 그런지 모든 남자들한테 다 애교 부리고 친한 척해. 그에 비해 자기는 우아하고 똑똑하고 능력 있잖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누가 더 좋은지 모르겠어? 걱정하지 마, 예전에는 회사 이익을 위해 잠깐 사나를 이용한 거야.]이건 채림과 원후의 목소리를 인터넷 기술을 이용하여 합성한 거다. 하지만 너무 진짜 같아 사나는 듣는 내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주저앉았다.‘내일 있을 행사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연락하지 말라더니, 바쁜일이 이거였어?’사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원후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그 소리는 사나한테 너무 익숙했기에 듣는 순간 진짜라고 확신했다.‘지금껏 백채림을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다더니, 나랑 백채림 사이에서 간 보며 누릴 거 다 누리고 있었던 거였네!’‘감히 나를 속여?’사나는 화가 나고 원망스러워 당장이라도 원후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원후와 사나가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를 스쳤다.그것은 다름 아닌 채림이 평소에 사용하던 그 브랜드의 향수였다.‘하.’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사실 예전에 채림이 원후한테 낯선 여성 향수 냄새가 난다고 두 번이나 따져 물은 뒤로 사나가 찾아와 그녀의 말을 꿰어낸 적이 있다. 그것도 가식적으로 채림의 향수가 마음에 든다는 핑계로.그 뒤로 사나는 원후와 몰래 바람피우기 위해 항상 채림과 같은 향수를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뜩이나 없는 머리를 이런 짓 하는데 모두 써버렸다는 게 한심할 정도였다.채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사나는 채림의 비위를 맞추며 싱긋 웃었다.“언니, 내가 일부러 형부를 여기로 불러냈어. 우리 삼자대면으로 오해는 말끔히 풀자. 맺힌 응어리도 풀고.”“내가 미스 글로벌 파티 참석자로 선발됐는데. 따지고 보면 작은 응어리는 아니지 않아?”채림이 비아냥거리자 사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미소 지었다.“그럴 리가. 오히려 너무 기쁜걸.”그때 원후가 앞으로 다가와 카리스마 있는 척 채림을 와락 끌어안았다.“채림아, 그날은 술 때문에 실수한 거야. 앞으로 절대 술 그렇게 많이 안 마실게. 하지만 나랑 사나 정말 결백해. 믿어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며칠 뒤 우리 다시 약혼식 올리자.”‘역시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는 게 맞나 보네. 내가 예전에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법에 놀아났다니.’채림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겨우겨우 화를 억눌렀다.하지만 원후는 오히려 채림이 저를 믿었다고 착각해 은근슬쩍 찔러봤다.“채림아 내일이 드림캐슬 30주년 행사가 있는 날이야. 아버지가 정식으로 내 이름을 드림캐슬 이사회에 올리고 그걸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겠다고 했어. 그러니 내일이 지나면 내가 더 좋은 생활을 약속할게.”자기한테 차려질 이익을 생각하니 원후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러니 채림아, 내일 아침 나랑 같이 행사에 참석해 줄 수 있어? 그래야 매체들도 의심하지 않을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