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그룹 둘째 도련님 문윤재. 가수 겸 배우인 탑 연예인. 평판은 그닥 별로지만 워낙 잘사는 데다 대중들한테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최근 원후가 사나와 문윤재의 합작을 추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하필 이때 소문의 문윤재와 잠자리를 가질 줄이야.채림은 눈을 반짝이더니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으로 자신과 윤재의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비록 사랑에 눈이 멀어 원후 같은 쓰레기한테 당했지만 지금은 속상하다고 슬퍼할 때가 아니다. 생각 없이 그들에게 따지기만 할 때도 아니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작 그런 쓰레기가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순 없지, 당한 대로 모두 돌려줄 거야.’원하는 걸 손에 넣은 채림은 아래쪽의 불편함을 참으며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는 가기 전에 쪽지 한 장을 남겼다.철컥, 하는 문소리가 들리자 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는 눈을 천천히 떴다. 이윽고 차가운 눈으로 침대 머리맡에 있는 쪽지를 바라봤다.[조만간 또 만날 거예요.]...채림은 문을 나서자마자 전화 두 통을 하고는 호텔 CCTV 영상 자료를 입수했다. 비록 고화질은 아니지만 자기를 호텔로 데려온 남자가 훤칠한 키의 소유자인데다, 얼굴을 꽁꽁 감싸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상대가 톱스타 문윤재라는 확신이 더 강해졌다. 이 모습은 윤재가 카메라를 피하느라 감싸고 다니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채림의 눈빛은 순간 차갑게 식었다. 물론 본의 아니게 자기 몸을 내어주게 되었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아주 땡잡은 셈이다.MS 그룹 둘째 도련님을 손에 넣으면 원후와 사나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니.채림이 이제 막 호텔 문을 나섰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자기야.]약혼자 원후의 목소리에는 가식적인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어제 서프라이즈 준비했던데, 고마워! 트렁크를 연 순간 풍선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 엄청 낭만적이었어. 마음에 들었어.]“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채림은 눈살을 찌푸리며 울렁거리는 속
잠시 뒤, 윤재가 팬들을 돌려보내고 대기실에 들어오자 채림이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백채림이라고 해요.”“백채림이요?”윤재는 살짝 귀찮은 듯 말했다.“어디에 사인해 줄까요?”채림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우선 저 좀 볼래요? 저 모르겠어요?”“씁.”‘와, 몸매 죽이네.’윤재는 코에 걸려 있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채림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굿. 지팡이도 신선하고. 내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어요. 저녁에 사용하면... 꽤 재밌겠는데요?”윤재가 말하면서 지팡이를 툭툭 건드리자 채림은 언짢은 듯 손을 뿌리쳤다. “윽.” 윤재는 지팡이에 맞은 손을 입가에 갖다 대며 살짝 핥았다.“성깔 있네? 마음에 드는데?”그 순간 채림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왜 어제랑 완전히 다르지? 어제는 말도 안 하고 무게감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술 좋아하고 여자 밝히는 가벼운 한량 같네.’약간 넋을 잃은 채림을 보며 윤재는 눈을 깜빡였다.“오늘 밤에 나랑 같이 B국 갈래요?”그 말에 채림은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아니요. 다들 성인이니 어젯밤 일은 책임을 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간단한 조건이 있어요.”“어젯밤? 왜 난 기억이 없죠?”윤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 역시 남자들이란.’입 싹 닦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윤재의 뻔한 속셈에 채림은 싸늘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증거를 남겼으니 망정이지.’채림은 침착하게 핸드폰을 꺼내 자기는 희미하게 나오고 남자만 선명한 사진 두 장을 골라내 윤재에게 보여주었다.“어젯밤, B국 가든 호텔, 8868호실. 기억 안 나면 더 상세하게 설명해 줄까요?”놀란 듯 눈을 땡그랗게 뜨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윤재는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어... 어젯밤 B국 가든 호텔에 있었던 거 확실해요?”“호텔 CCTV 영상도 있어요.”채림은 귀찮은 듯 말했다.“간단한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돼요. 문윤재 씨한테 큰 피해는 안 갈 거예요. 하지만 끝까지 잡아뗄 생각이라면 나도 가
[발뺌할 생각하지 마요. 방금 미래 숙모를 만났어요. 숙모가 나를 삼촌으로 착각하던데요? 게다가...]“어떻게 만났는지 당장 말해.”지후는 윤재의 쓸데없는 말을 자르며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크흠.]그러자 윤재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방금 나눈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물론 자기가 채림을 놀린 부분은 생략하고 말이다. ‘내가 자기 여자를 놀렸다는 걸 알면... 으,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전화 건너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지만 윤재는 간담이 서늘했다....채림은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백씨 가문은 의료업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었다. 물론 채림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문도 몰락했지만, 여전히 의료 업계에서는 백씨 가문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채림은 그 길로 가장 믿음직한 병원의 정형외과 전문의를 찾아가 발을 검사했다.다행히 의사는 채림의 발 상태는 심각하지 않다는 진단을 내렸다. 잘못된 약을 사용하여 상처가 덧난 것이라 정상적인 약물 치료를 하면서 세심하게 관리하면 완치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 말이다.그 말을 들은 채림의 눈은 순간 차갑게 식었다. 진료받는 날이면 원후가 매번 채림을 병원에 데려갔다.‘뒤에서 손쓰려 매번 같이 가준 줄도 모르고.’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다.약을 챙긴 채림은 재활 치료를 받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이 시간이면 원후는 아마 그녀가 아직도 B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채림은 아예 입원 수속을 밟고 병원에 입원했다....다음 날 저녁, 재활 치료를 받은 채림은 곧장 퇴원 수속을 마치고 문라이트로 향했다. 원후가 채림을 위해 처녀 파티를 해주겠다던 곳이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을 들었을 때 원후가 자기를 생각한다고 흐뭇해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저를 모함하려는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무조건 잘 대비해야 해.’
띵!핸드폰이 울리자 채림은 얼른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그건 다름 아닌 위층에서 대기하고 있는 친구 도지수가 보낸 문자였다.[모든 게 순조로워. 걱정하지 마.]도씨 가문은 비록 H시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명문가가 두려워하는 존재다. 그 이유가 바로 도씨 가문에 소속된 실력 있는 사립 탐정들 때문이다. 그런 가문의 딸인 지수가 오늘 밤 계획을 도와주고 있으니 채림은 안심이 됐다.핸드폰을 내려놓고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며 계획을 실행하려 할 때,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채림의 정신을 앗아갔다.“백채림은 절름발이인데 이씨 집안에서는 왜 이 결혼을 강행하려고 하지?”“그것도 몰라? 의료업계에 진출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백채림을 이용해 먹으려는 거지.”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창백해진 채림을 바라보며 사나는 속으로 기뻐했다.사실 사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채림을 비난하게 만들기 위해 미리 자신의 사람을 이 자리에 심어두었다.채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장 신나게 떠드는 사람이 사나의 절친 한나영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백씨 가문 향수 사업은 망했지만 의료 사업은 아직 잘나가잖아. 백채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온 집안을 백채림 어머니 혼자 지탱하고 있는 걸 봐서 백채림 어머니도 참 대단해.”“다 늙어 빠진 여자가 무슨 수로 가업을 지탱하겠어? 다 몸 로비... 말 안 해도 알지?”나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분위기를 흐렸다.다음 순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채림이 나영의 뺨을 갈겼다.“아! 뭐 하는 거야?”나영이 비명을 지르자 채림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고했다.“부모가 살아계시면 뭐 해? 인간다운 게 뭔지 가르쳐주지도 않은 모양인데. 그러니 수고스럽더라도 내가 가르쳐 주는 거야. 입 똑바로 놀려.”채림이 이토록 강한 태도로 나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나는 언짢은 기분을 억누르고 달려와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됐어, 그만해. 오늘 우리 언니 처녀 파티인데, 내 체면 좀 봐주라.”“네 체면
만약 오늘 밤 일로 BM 그룹과 다른 그룹의 협력이 무산되면 이사진은 분명 모든 책임을 채림에게 돌릴 것이다.최근 사나의 아버지, 즉 채림의 셋째 삼촌 백성호가 주주들과 손을 잡고 채림의 어머니 민해란을 회장직에서 밀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걸 봐서, 이 소동은 사나가 제 아버지와 손을 잡고 꾸민 게 틀림없었다.그런 작자들이 원하는 대로 되게 하면 해외에서 BM 그룹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한테 너무 미안해진다.그때 지수가 숨을 헐떡이며 채림에게 달려왔다.“채림아, 내가 우리 쪽 사람한테 말해뒀어. 이제 곧 화면 꺼질 거야.”“필요 없어.”채림은 맑은 눈으로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소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했다.그 모습을 본 지수가 오히려 놀란 듯 물었다.“확실해?”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신속하게 이메일 계정에 접속하여 자료를 지수에게 보냈다.“네 사람들한테 이걸 아까 사진과 함께 재생하라고 해.”채림이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자 지수는 그제야 안심한 듯 자리를 떠났다.그때.“언니.”꿍꿍이를 숨긴 사나가 음흉하게 눈을 번뜩였다.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채림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한 사나는 채림을 걱정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망신 주었다.“어떻게 자기 즐거움만 챙기고 회사가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할 수 있어? 내가 아빠한테 들었는데 오늘 추진하던 계약이 BM 그룹에 엄청 중요한 거래.”“고작 사진 몇 장으로 오늘 계약이 무산된다고 어떻게 확신해?”채림은 지팡이를 짚으며 자세를 바꾸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우리 내기할래? 난 오늘 내가 계약 성사시킨다는 것에 걸겠어.”사나는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언니, 그 말 지금 취소해도 늦지 않아.”“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 내기할 거야 말 거야?”“좋아.”채림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자 사나는 동의했다. 채림이 번복할까 사나는 얼른 조건도 걸었다.“그럼
채림이 혼자 드림캐슬을 일궈 세웠다고 수군대는 게 내키지 않고 화가 났지만, 이철민과 장선화는 그저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BM 그룹 원로 이사들도 다시 성사된 계약에 너무 기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그때, 내색하지 않고 사람들의 두 얼굴을 지켜보던 채림이 교활한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내기에서 졌으면 패배를 인정해야죠. 우리 다 함께 사나의 노래 한 곡 들읍시다.”청아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웠던 현장에 순간 파고들었다.채림의 귀띔 덕에 사람들은 방금 전 했던 내기를 떠올렸고, 연예인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기쁨에 하나둘 호응하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발을 뺐다.“저, 저 오늘 목이 좀 쉬어서요.”“싱글 앨범도 낸 연예인이면서 노래 한 곡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핑계 대지 말고 졌으면 패배를 인정해야지. 목이 쉬었어도 노래는 할 수 있잖아. 설마 지금껏 냈던 싱글 앨범이 직접 부른 게 아니었던 거야?”궁지에 몰린 사나는 이를 악물고 무대에 올라가 고분고분 마이크 앞에 섰다.곧이어 전주가 흐르자 사나는 작은 소리로 흥얼대기 시작했다. 사나가 작은 소리로 노래하자 무대 뒤에 있던 음향사도 따라서 음량을 낮추었다. 그 때문에 음을 이탈한 목소리가 그대로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고 무대 아래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이게 뭐야?”“듣고 있기 너무 괴로운데!”“예전에 냈던 싱글 앨범은 분명 엄청 듣기 좋았는데, 설마 다 가짜였어?”그제야 원후는 다급히 직원들에게 명령했다.“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 오디오 꺼!”“죄송해요. 어떻게 된 이유인지 오디오에 문제가 생겨 꺼지지 않아요.”“당, 당장 가서 전원 끊어!”원후가 화를 내며 또다시 버럭 소리쳤다.다음 순간 전원이 끊기면서 현장은 암흑에 빠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또 수군대기 시작했다.“이원후가 백사나를 지켜주려고 너무 목숨 거는 거 아니야?”“그러게? 왜 자기 약혼녀보다 더 아끼는 것 같지?”“아까 백채
방에 있는 남자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데도 훤칠하고 늠름한 체격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간 병든 안색이었지만 잘생기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지 못했고, 장애가 있는 몸 역시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를 숨기지 못했다.채림은 순간 눈을 가늘게 접었다.‘분위기만 보면 이 사람이 B국 가든 호텔에서 만난 그날의 남자인데? 문윤재보다 더 비슷하잖아!’그때 경호원 한 명이 다른 방에서 걸어 나와 채림에게 말했다.“문 대표님이 백채림 씨를 지금껏 기다리고 계셨습니다.”‘문 대표님?’소문에 의하면 MS 그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문씨 가문 둘째 문지후인데, 항상 신출귀몰하여 누구도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성정이 포악하고 오랫동안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데다, 장애인이라는 소문만 무성하게 돌고 있었다.채림은 지후가 왜 자기 방에 나타났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H시가 원래부터 그의 구역이니까. 하지만 지후의 얼굴을 보니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남자의 거만한 두 눈에는 마치 건드리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숨어 있어 있는 듯했다. 게다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자꾸만 채림의 시선을 끌어당겼다.지후는 그날 밤 기억 속의 남자와 너무 닮아 있었다.채림은 표정 관리를 하며 그날 밤 호텔에서 있었던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그날 밤 남자는 분명 힘이 셌어. 그러니 절대 장애인일 리 없어. 만약 문지후가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다면 그날 밤 남자는... 역시 문윤재겠지?’채림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하지만 지후가 저를 보는 눈빛이 너무 복잡하다고 느껴졌다.“문윤재한테 한 제안 내가 동의하죠.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요.”지후의 목소리는 채림의 생각을 끊어버렸다. 도도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고귀함이 묻어 있었다.“네?”“문씨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와요.”지후는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조용히 결혼해서.”“왜요?”채림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왜인지... 모르겠어요?”채림을 바라보는 지후
채림은 다시 지후 앞에 다가가 직설적으로 말했다.“죄송하지만 아까 제안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네요.”하지만 지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아까 누군가 이 방에 남자를 숨겨뒀어요. 아주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것 같던데요.”“문 대표님이 걱정할 일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해요.”채림의 견결한 태도에 지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총명한 머리로 내가 어젯밤 그 남자였다는 걸 알았을 텐데, 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나?’“내가 언제든지 한 명 더 데려올 수 있어요.”약간 위험한 분위기를 띤 지후의 목소리에 채림의 눈은 일순 어두워졌다.“지금 협박하는 거예요?”“나도 협박하기 싫어요.”지후는 느긋하게 말했다.“동의만 한다면 MS 그룹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지 않나요? 내가 채림 씨 발도 고쳐줄 수 있어요.”자비를 베푸는 듯한 어조에 채림은 순간 기분이 언짢았지만 지후가 내건 조건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채림의 약점을 건드렸다.채림은 온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자신의 왼발을 바라봤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반격할 건데? 그 양심 없는 연놈을 어떻게 상대할 건데?’‘셋째 삼촌의 세력이 점점 BM 그룹 이사회를 삼키고 있어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텐데,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을까?’채림은 숨을 들이켜더니 다시 물었다.“어떻게 치료해 줄 건데요? 얼마나 걸리죠?”“여기로 가면 의사가 침술로 치료해 줄 거예요. 사흘이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거예요.”지후는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명함 한 장을 던졌다.‘사흘?’채림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채림의 부상은 이미 2년이나 지체되었다. 게다가 알고 지내던 의사도 언제 완치될 수 있는지 확답을 주지 않았는데, 사흘 내로 완치할 수 있다니?‘어이없네.’하지만 너무 확신에 찬 남자의 표정 때문에 채림은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만약 정말 그런 명의가 있다면 왜 본인부터 치료하지 않았죠?”“믿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양아치들입니다.”사립탐정은 간단하게 요약했다.“하지만 백채림 씨 외모나 재산을 보고 노리는 건 아닌 듯합니다. 경매장에서 손쓰는 게 좋은 선택도 아니고요.”“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채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저 사람들의 배후가 누군지 아직 모르니, 당분간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요. 상대가 오히려 경계할 지도 모르니까요. 몰래 저 둘을 감시하면 돼요.”“그런데 저놈들 위치가 하필 백채림 씨와 인접해 있어, 만일의 경우는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사립탐정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그럴 거예요.”채림은 확신했다.“저들을 지시한 사람은 내가 망신당하기를 원하니, 경매장에서 악랄한 수법은 쓰지 않을 거예요. 우리 암호부터 정해요. 이따 내가 모자를 벗으면 그때 기회를 봐서 움직여요.”“네.”사립탐정은 짤막하게 답하고 뒤돌아서더니 자리에 들어서는 사람들 속에 재빨리 숨었다.채림도 얼른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얼마 뒤, 두 남자도 잇따라 그녀 곁에 앉았다.경매가 시작되자마자 공개된 처음 몇 경매품을 채림은 그냥 지나쳤다. 경매에 참여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수중에 있는 가이드북만 살폈다. 그때, 경매사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다음 경매품입니다.”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대형 스크린에 아름다운 디자인의 왕관이 펼쳐졌다.이윽고 현장 스태프가 경매품을 무대 위로 가져왔다. 오래된 왕관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유백색 진주들이 박혀 있어,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냈다.“여러분이 기대하셨던 왕관입니다. 왕자와 왕비의 50년 넘는 사랑을 증명한 물건이죠. 게스트분들 모두 이 왕관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거라는 걸 잘 압니다. 그러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열정적으로 경매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진주 왕관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경매사가 무대 위에서 나무망치를 두드렸다.“경매가 4억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 번호판을 들 때마다 2,000만 원씩 올라갑니다.”경매사의 목소리는
“사나야, 그동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편히 몸조리해. 오경수의 화가 가라앉으면 이 일도 지나갈 거야.”진옥경도 딸을 위로했다.“우선 마음을 가라앉혀. 너도 다시 백씨 가문 아가씨 신분을 되찾아야지. 나와 네 아버지도 퇴로를 찾고, 새로운 백을 찾으면, 더 이상 백채림 모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정말이에요?”그 말을 들은 사나의 눈은 다시 생기가 돌았다.“당연하지, 엄마 아빠가 나서는데, 뭔들 못 하겠어?”진옥경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한가족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그때, 병실 티비에서 갑자기 BM 그룹 의료팀에 관한 뉴스를 보도했다.그런데 맨 처음에 BM 그룹을 손가락질해대던 국면은 채림이 나타난 뒤 180도로 뒤바뀌었다. 백승호 부부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서둘러 밖으로 나와 대책을 논의했다.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BM 그룹에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DL 그룹에 아부하려고 생각했던 계략도 채림한테 완전히 간파 당할 줄은 몰랐다. 물론 CS 바이오 일은 아직 진옥경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DL 그룹과 계속 손을 잡는 건 이미 물 건너 갔다. 때문에 백승호는 DL 그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새로운 계략을 생각해야 했다.병상에 누워 있던 사나는 뉴스를 보면서 리모컨을 들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채림이 대중 앞에서 우쭐대는 꼴을 눈으로 직접 보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더욱이 인터넷에는 백채림과 BM 그룹 칭찬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대중들은 백채림이 BM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마저 예쁜 데다 마음씨까지 착하고, 지혜롭기까지 하다며, H시가 이런 훌륭한 여성 후계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나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얼른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 마침 지금 방송되고 있는 현지 뉴스를 보게 되었다. 오늘 H시 전시회장에서 마침 그 진주 왕관을 경매품으로 내놓았다.채림이 그 왕관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던 사나는 머리를 굴
추종현은 격분한 듯 말하고는 뒤돌아 민해란에게 말했다.“민 회장님, 가시죠.”“교수님, 먼저 가시면 제가 뒤따르겠습니다.”민해란은 경호원들에게 눈치를 주어 추종현을 모셔가게 하고는 대뜸 돌아서서 채림에게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한다던 건 또 뭔 소리고? 너 어디 다쳤어? 또 엄마한테 뭐 속이는 거 없어?”“엄마.”채림은 을른 웃으며 어머니를 달랬다.“봐요,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확실히 말해.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민해란은 채림을 차에 태웠다. 차가 출발한 뒤 채림은 의료팀이 산지에서 겪었던 일을 대충 말해주었다.물론 산사태가 벌어진 상황을 조금 약화시켰지만, 민해란은 여전히 걱정되어 몇 번이고 캐묻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임 실장 얘기를 들어보니 네가 직접 산지에 약을 날랐다던데. 산길이 위험한 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위험할 줄은...”민해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네가 총명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추 교수님을 그냥 빼앗겼을 거야. 우리 채림이 많이 컸네.”채림은 활짝 웃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러니까 엄마를 도와 부담을 덜어주는 건 당연하잖아요.”“이미 충분해.”민해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미스 글로벌 파티에서 우승을 따낸 뒤로, BM 그룹이 해외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몰라. 최근에 엄마가 사업을 두 건 추진했는데, 상대가 글쎄 네 덕분에 BM 그룹을 알았대.”“그래요?”채림은 눈웃음을 쳤다.“그런데 명성이 높을수록 시기와 공격을 받을 거야.”민해란은 소중한 듯 제 딸의 손을 꼭 잡았다.“네가 BM 그룹에 가져다주는 이익이 많을수록 질투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니까 조심해.”“걱정하지 마요. 엄마 딸 총명해요.”채림은 턱을 살짝 쳐들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약혼식에서 그런 해프닝이 벌어지고 난 뒤, 채림은 이원후를 떠나고 백사나의 얼굴을 진짜 얼굴을 알아봤으며 다친 발도 고쳤다. 그것도 모자라 혼자서 향수
한편, 스크린 속.기자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인터뷰에 열기를 더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민은 오히려 놀라우리만치 냉정했고, 심지어 뜬금없이 피식 웃었다.결국 기자는 마지 못해 산지 주민이 손에 든 약을 카메라에 담았다.약병이 점점 확대되자 티비와 컴퓨터 앞에서 생방송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하지만...약병에 적힌 생산 날짜와 마감 날짜는 아무 문제 없었다.공상에서 민해란과 추종현을 둘러싼 기자들은 본인이 잘못 봤을까 봐 안경을 밀어 올리는가 하면, 눈을 비비댔다.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도 당황한 듯 물었다.“어르신, 이 약이 혹시 BM 그룹 의료팀이 나눠준 건가요?”어르신들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아니면 우리가 어디서 이런 약을 얻겠어요?”“여기에 외부인이 전혀 없는데, 누가 우리를 위해 병을 고쳐주겠어요?”기자는 살짝 당황했다. 사실 그들은 DL 그룹 제보를 받고 BM 그룹이 유통 기한이 지난 약물을 사용한다는 소식을 취재하러 나왔다. 그런데 취재 도중 이런 반전이 숨어 있어 어떻게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다른 매체 기자가 나서서 말했다.“저희 측에서 방금 현지에 남아 있는 BM 그룹 의료팀 담당자와 연락이 닿아 그동안 의료팀이 현지 주민을 위해 진찰하고 처방한 영상과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저와 동료들이 비교해본 결과, BM 그룹이 이번에 주민들에게 나눠준 약품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유통기한 마감일은 2년 뒤였습니다.”“권 박사님, 한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기자는 마이크를 권경민에게 건넸다.그러자 경민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산지 주민들이 방금 두 가지 고혈압약을 드시고 기침을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셨는데, 이건 정상 반응입니다. 캡토프릴을 복용 시 나타나는 부작용이거든요. 현재 의학적으로 이런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가끔 하는 기침은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H시 국제공항.민해란이 추종현을 모시고 공항을 나올 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지 모를 기자들이 갑자기 몰려와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다.“추 교수님, 4년 만에 귀국하시는데 BM 그룹 회장님과 함께 귀국하신 건, 앞으로 BM 그룹을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까?”“네.”민해란이 추종현 대신 대답했다.“추 교수님은 BM 그룹 약물 연구팀 고문을 맡아 BM 그룹의 발전을 도울 겁니다.”“일전에 DL 그룹도 교수님께 도움을 청했다고 들었는데, 왜 결국 BM 그룹을 선택했나요?”기자의 끈질긴 질문에 추종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BM 그룹의 발전 계획에 마음이 동했습니다. 저와 BM 그룹의 이념 역시 일치하고요.”“혹시 DL 그룹과는 이념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기자들은 말끝마다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이에 민해란이 나서서 추종현을 도왔다.“죄송하지만, 추 교수님은 말주변이 뛰어나지 않습니다.”경호원더러 길을 트라는 눈짓을 보낸 민해란은 추종현을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그때 변형빈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 앞에 막아섰다. 이윽고 그는 추종현의 옆에 다가가 말했다.“추 교수님, BM 그룹의 위선적인 모습에 속으면 안 됩니다. 저희 DL 그룹은 비록 노이즈 마케팅에 능하지 않지만 절대 양심을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변 대표, 그게 무슨 말이죠?”민해란은 불쾌한 듯 따져 물었다.“BM 그룹 의료팀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설마 몰라서 그래요?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변형빈은 자신만만한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기자가 갑자기 떠들썩해졌다.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한 기자들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민해란을 바라보더니 결국 추종현에게 따져 물었다.“추 교수님, BM 그룹 의료팀이 가난한 산지 주민들에게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을 사용한 소식이 터졌습니다. 본인 이익을 위해 남의 목숨을 마음대로 짓밟은 BM 그룹이 추구하는 이념이 정녕 추 교수님 이념과 일치한가요?”“뭐요?”추종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채림은 희고도 깨끗한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제야 채림은 제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이곳 의료 시설은 그 시골 마을 조건으로 갖출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살짝 움직여보니 사지가 쑤시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옆 병실에 앉아 있던 경민은 그 인기척을 듣고 달려오더니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이제 정신이 들어요? 어때요? 몸은 좀 괜찮아요?”채림은 제 느낌을 대충 말했다. 그러자 경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럼 문제없네요. 머리가 어지러운 건 너무 오래 자고 오래 굶어서 그런 거예요.”“우리 안 죽었어요?”채림이 다급히 물었다.“당연하죠. 설마 지금 우리가 천당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경민은 농담조로 말하며 피식 웃었다.“여기 천당이 아니라 병원이에요.”“그럼 문... 제 둘째 삼촌은요?”채림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그분은 어제 가셨어요.”“안 다쳤어요?”“채림 씨와 비슷하게 가벼운 부상이에요. 그분은 더 빨리 회복했어요.”경민이 말했다.채림은 그제야 한시름 놓더니 한참 생각고는 다시 물었다.“그때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어요? 기억아 하나도 없어서 이미 죽은 줄 알았어요.”“말하자면 참 운이 따라줬어요.”경민은 감개했다.“사실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우리를 구해준 마을 주민이 말해줬어요. 저희가 도망칠 때 마침 큰 구덩이를 지났었잖아요, 먼저 굴러 떨어진 바위가 그 구덩이에 들어가면서 나중에 멈춰서 뒤에서 굴러 내린 돌멩이를 막아줬대요. 만약 그런 우연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바위에 깔려 죽었을 거예요.”“그럼 다친 사람이 있다는 말이에요?”걱정 섞인 채림의 물음에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채림 씨 둘째 삼촌의 부하 두 명이 좀 심하게 다쳤어요. 다리가 골절됐거든요. 그것도 그나마 다행이에요. 채림 씨 둘째 삼촌이 이미 그 두 분을 큰 병원으로 옮겼어요.”“아.”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시름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우리가 입원해 있으면 의료팀은 일을 어떻게 해요?”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채림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지후와 강현은 먼저 깨어나 채림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채림은 그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기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얼마 걷지 않았을 때,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맨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경민이었고, 그의 뒤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백 대표님!”“여긴 어떻게 왔어요?”채림은 사람들과 가까워진 뒤 물었다.“이틀 동안 돌아오지 않아 현지 주민들이 찾아왔었어요. 하루 전에 폭우가 쏟아졌는데 이 일대는 산사태가 쉽게 일어나는 곳이라 지난 2년간 수차례 사고가 났다고 하면서요. 그 말에 다들 걱정돼서 찾아온 거예요.”경민의 설명에 채림은 싱긋 웃으며 그와 그 뒤에 있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말했다.“고마워요.”“이분은 누구세요?”경민은 채림 옆에 서 있는 지후를 보며 물었다. 그저께 소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카리스마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미처 누구인지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이 분은...”채림은 고개를 들어 지후를 바라봤다. 지후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채림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경민은 아무래도 연예인 덕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니, 당연히 윤재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채림 역시 지후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한참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제 둘째 삼촌이에요.”“아, 둘째 삼촌. 안녕하세요.”지후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팔로 허리를 짚은 채 한참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등 뒤에 서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실수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연말 보너스라도 깎일까 봐 참느라 애를 먹었다.“우선 나가서 얘기해요.”채림은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깼다.경민도 뒤에 있던 현지 주민들에게 말했다.“그럼 저희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그들은 현지 주민들을 따라 푹 꺼진 땅과 흔들리지는 출렁다리를 지나 옆 마을로 향했다.하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마침 도착한 이춘덕은 명훈네 집 마당에 들어와 소리쳤다.“이게 다 뭐 하는 겁니까? 백채림 씨는 우리 마을 은인의 따님입니다. 자선 활동하러 이곳에 온 분한테 무슨 무례입니까!”“그런데 저 여자가 명훈의 새색시를 풀어줬어요.”성훈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백 대표님이 없었더라면 새색시를 살 돈이나 있었겠어요?”이춘덕의 말은 힘이 있었다.현장 사람들은 모두 냉정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니 이장의 말이 맞았다. 결국 낫과 호미를 들고 달려들던 사람들은 손에 든 도구를 모두 내려놨다.“사람이 도망쳤으면 쫓아가서 찾아와야지, 여기서 왜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요? 가만히 손 놓고 있다고 사람이 돌아오겠어요?”이춘덕이 말했다.“이장님 말이 맞아요.”성훈도 어느새 진정했는지 얼른 이웃을 불러 손전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이장님, 고마워요.”채림은 앞으로 다가가 진심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다들 좋은 일 하는 건데요.”이춘덕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요. 저 사람들이 이따가 사람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또 시비를 걸 거예요.”채림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지후와 함께 집을 나섰다. 밖에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얼른 두 사람을 엄호하며 산계 마을을 떠났다.이제 막 마을을 빠져나왔을 때, 채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지후에게 말했다.“둘째 삼촌,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 혹시 삼촌 부하더러 사람을 끝까지 도와주라고 할 수 있어요?”“또 뭘 하려는 겁니까?”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채림은 얼른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새색시를 다시 찾아오는 건 불가능할 거고, 그 집안 사람들도 우리를 찾지 못하면 결국 또 인신매매를 할 거예요. 이런 악랄한 집단은 뿌리 채 뽑아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요.”“우리 문씨 가문에서 아주 부처님을 들였군요.”지후는 불호령을 내리더니 손을 저으며 이 일을 강현에게 맡겼다.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 이어서 그 명령을 다른 경호원들에게 전달한 뒤, 조용히 채림
“음, 힘이 없다면 내가 도와주지.”부인은 인내심 있게 말하면서 채림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채림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상대가 저를 마음대로 다루도록 가만히 있었다.지금은 그저 옷장 안에 있는 사람의 인성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알아서 눈을 감았으리라고...옷을 갈아입은 채림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이미 발그르슴해졌다.부인은 채림을 거울 앞에 앉히더니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또 처음 보네. 명훈이 물론 바보라지만, 바보에게도 복은 있나 보네!”여자는 혼자 구시렁거리며 낡은 싸구려 화장품을 채림의 얼굴에 펴 발랐다. 파우더를 바른 뒤 블러셔를 바르고, 풀어진 채림의 머리를 얹더니 싸구려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모양을 고정했다. 결국 부인의 손길을 거친 채림은 빛 바랜 벽화 속 도자기 인형처럼 변했다.약 30분 뒤,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화장품 상자를 닫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신부 준비 끝났어. 명훈아, 첫날밤 보내야지.”바깥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던 명훈을 끌고 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바보 같은 웃음을 짓던 명훈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저 여자가 네 새색시야. 얼른 봐. 예쁘지?”부인이 조롱하듯 물었다.“예뻐요! 예뻐요!”명훈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채림을 덮쳤다.“어머머, 우리는 이만 가자고.”부인은 주위 구경꾼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명훈은 방 안에 있던 남자의 발에 걷어차여 멀리 내동댕이쳐졌다.“내 색시! 새색시!”명훈은 끊임없이 반복하며 채림을 덮치려고 했다.지후는 명훈을 또다시 발로 찼다. 명훈은 지후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후는 얼른 채림을 제 뒤에 보호했다.그때 문밖에 있던 사람들이 인기척을 듣고 다시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역시 얌전하게 있지 않을 줄 알았어! 약 더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