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뺌할 생각하지 마요. 방금 미래 숙모를 만났어요. 숙모가 나를 삼촌으로 착각하던데요? 게다가...]“어떻게 만났는지 당장 말해.”지후는 윤재의 쓸데없는 말을 자르며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크흠.]그러자 윤재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방금 나눈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물론 자기가 채림을 놀린 부분은 생략하고 말이다. ‘내가 자기 여자를 놀렸다는 걸 알면... 으,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전화 건너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지만 윤재는 간담이 서늘했다....채림은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백씨 가문은 의료업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었다. 물론 채림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문도 몰락했지만, 여전히 의료 업계에서는 백씨 가문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채림은 그 길로 가장 믿음직한 병원의 정형외과 전문의를 찾아가 발을 검사했다.다행히 의사는 채림의 발 상태는 심각하지 않다는 진단을 내렸다. 잘못된 약을 사용하여 상처가 덧난 것이라 정상적인 약물 치료를 하면서 세심하게 관리하면 완치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 말이다.그 말을 들은 채림의 눈은 순간 차갑게 식었다. 진료받는 날이면 원후가 매번 채림을 병원에 데려갔다.‘뒤에서 손쓰려 매번 같이 가준 줄도 모르고.’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다.약을 챙긴 채림은 재활 치료를 받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이 시간이면 원후는 아마 그녀가 아직도 B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채림은 아예 입원 수속을 밟고 병원에 입원했다....다음 날 저녁, 재활 치료를 받은 채림은 곧장 퇴원 수속을 마치고 문라이트로 향했다. 원후가 채림을 위해 처녀 파티를 해주겠다던 곳이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을 들었을 때 원후가 자기를 생각한다고 흐뭇해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저를 모함하려는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무조건 잘 대비해야 해.’
띵!핸드폰이 울리자 채림은 얼른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그건 다름 아닌 위층에서 대기하고 있는 친구 도지수가 보낸 문자였다.[모든 게 순조로워. 걱정하지 마.]도씨 가문은 비록 H시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명문가가 두려워하는 존재다. 그 이유가 바로 도씨 가문에 소속된 실력 있는 사립 탐정들 때문이다. 그런 가문의 딸인 지수가 오늘 밤 계획을 도와주고 있으니 채림은 안심이 됐다.핸드폰을 내려놓고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며 계획을 실행하려 할 때,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채림의 정신을 앗아갔다.“백채림은 절름발이인데 이씨 집안에서는 왜 이 결혼을 강행하려고 하지?”“그것도 몰라? 의료업계에 진출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백채림을 이용해 먹으려는 거지.”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창백해진 채림을 바라보며 사나는 속으로 기뻐했다.사실 사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채림을 비난하게 만들기 위해 미리 자신의 사람을 이 자리에 심어두었다.채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장 신나게 떠드는 사람이 사나의 절친 한나영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백씨 가문 향수 사업은 망했지만 의료 사업은 아직 잘나가잖아. 백채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온 집안을 백채림 어머니 혼자 지탱하고 있는 걸 봐서 백채림 어머니도 참 대단해.”“다 늙어 빠진 여자가 무슨 수로 가업을 지탱하겠어? 다 몸 로비... 말 안 해도 알지?”나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분위기를 흐렸다.다음 순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채림이 나영의 뺨을 갈겼다.“아! 뭐 하는 거야?”나영이 비명을 지르자 채림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고했다.“부모가 살아계시면 뭐 해? 인간다운 게 뭔지 가르쳐주지도 않은 모양인데. 그러니 수고스럽더라도 내가 가르쳐 주는 거야. 입 똑바로 놀려.”채림이 이토록 강한 태도로 나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나는 언짢은 기분을 억누르고 달려와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됐어, 그만해. 오늘 우리 언니 처녀 파티인데, 내 체면 좀 봐주라.”“네 체면
만약 오늘 밤 일로 BM 그룹과 다른 그룹의 협력이 무산되면 이사진은 분명 모든 책임을 채림에게 돌릴 것이다.최근 사나의 아버지, 즉 채림의 셋째 삼촌 백성호가 주주들과 손을 잡고 채림의 어머니 민해란을 회장직에서 밀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걸 봐서, 이 소동은 사나가 제 아버지와 손을 잡고 꾸민 게 틀림없었다.그런 작자들이 원하는 대로 되게 하면 해외에서 BM 그룹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한테 너무 미안해진다.그때 지수가 숨을 헐떡이며 채림에게 달려왔다.“채림아, 내가 우리 쪽 사람한테 말해뒀어. 이제 곧 화면 꺼질 거야.”“필요 없어.”채림은 맑은 눈으로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소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했다.그 모습을 본 지수가 오히려 놀란 듯 물었다.“확실해?”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신속하게 이메일 계정에 접속하여 자료를 지수에게 보냈다.“네 사람들한테 이걸 아까 사진과 함께 재생하라고 해.”채림이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자 지수는 그제야 안심한 듯 자리를 떠났다.그때.“언니.”꿍꿍이를 숨긴 사나가 음흉하게 눈을 번뜩였다.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채림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한 사나는 채림을 걱정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망신 주었다.“어떻게 자기 즐거움만 챙기고 회사가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할 수 있어? 내가 아빠한테 들었는데 오늘 추진하던 계약이 BM 그룹에 엄청 중요한 거래.”“고작 사진 몇 장으로 오늘 계약이 무산된다고 어떻게 확신해?”채림은 지팡이를 짚으며 자세를 바꾸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우리 내기할래? 난 오늘 내가 계약 성사시킨다는 것에 걸겠어.”사나는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언니, 그 말 지금 취소해도 늦지 않아.”“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 내기할 거야 말 거야?”“좋아.”채림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자 사나는 동의했다. 채림이 번복할까 사나는 얼른 조건도 걸었다.“그럼
채림이 혼자 드림캐슬을 일궈 세웠다고 수군대는 게 내키지 않고 화가 났지만, 이철민과 장선화는 그저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BM 그룹 원로 이사들도 다시 성사된 계약에 너무 기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그때, 내색하지 않고 사람들의 두 얼굴을 지켜보던 채림이 교활한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내기에서 졌으면 패배를 인정해야죠. 우리 다 함께 사나의 노래 한 곡 들읍시다.”청아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웠던 현장에 순간 파고들었다.채림의 귀띔 덕에 사람들은 방금 전 했던 내기를 떠올렸고, 연예인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기쁨에 하나둘 호응하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발을 뺐다.“저, 저 오늘 목이 좀 쉬어서요.”“싱글 앨범도 낸 연예인이면서 노래 한 곡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핑계 대지 말고 졌으면 패배를 인정해야지. 목이 쉬었어도 노래는 할 수 있잖아. 설마 지금껏 냈던 싱글 앨범이 직접 부른 게 아니었던 거야?”궁지에 몰린 사나는 이를 악물고 무대에 올라가 고분고분 마이크 앞에 섰다.곧이어 전주가 흐르자 사나는 작은 소리로 흥얼대기 시작했다. 사나가 작은 소리로 노래하자 무대 뒤에 있던 음향사도 따라서 음량을 낮추었다. 그 때문에 음을 이탈한 목소리가 그대로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고 무대 아래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이게 뭐야?”“듣고 있기 너무 괴로운데!”“예전에 냈던 싱글 앨범은 분명 엄청 듣기 좋았는데, 설마 다 가짜였어?”그제야 원후는 다급히 직원들에게 명령했다.“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 오디오 꺼!”“죄송해요. 어떻게 된 이유인지 오디오에 문제가 생겨 꺼지지 않아요.”“당, 당장 가서 전원 끊어!”원후가 화를 내며 또다시 버럭 소리쳤다.다음 순간 전원이 끊기면서 현장은 암흑에 빠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또 수군대기 시작했다.“이원후가 백사나를 지켜주려고 너무 목숨 거는 거 아니야?”“그러게? 왜 자기 약혼녀보다 더 아끼는 것 같지?”“아까 백채
방에 있는 남자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데도 훤칠하고 늠름한 체격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간 병든 안색이었지만 잘생기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지 못했고, 장애가 있는 몸 역시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를 숨기지 못했다.채림은 순간 눈을 가늘게 접었다.‘분위기만 보면 이 사람이 B국 가든 호텔에서 만난 그날의 남자인데? 문윤재보다 더 비슷하잖아!’그때 경호원 한 명이 다른 방에서 걸어 나와 채림에게 말했다.“문 대표님이 백채림 씨를 지금껏 기다리고 계셨습니다.”‘문 대표님?’소문에 의하면 MS 그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문씨 가문 둘째 문지후인데, 항상 신출귀몰하여 누구도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성정이 포악하고 오랫동안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데다, 장애인이라는 소문만 무성하게 돌고 있었다.채림은 지후가 왜 자기 방에 나타났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H시가 원래부터 그의 구역이니까. 하지만 지후의 얼굴을 보니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남자의 거만한 두 눈에는 마치 건드리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숨어 있어 있는 듯했다. 게다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자꾸만 채림의 시선을 끌어당겼다.지후는 그날 밤 기억 속의 남자와 너무 닮아 있었다.채림은 표정 관리를 하며 그날 밤 호텔에서 있었던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그날 밤 남자는 분명 힘이 셌어. 그러니 절대 장애인일 리 없어. 만약 문지후가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다면 그날 밤 남자는... 역시 문윤재겠지?’채림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하지만 지후가 저를 보는 눈빛이 너무 복잡하다고 느껴졌다.“문윤재한테 한 제안 내가 동의하죠.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요.”지후의 목소리는 채림의 생각을 끊어버렸다. 도도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고귀함이 묻어 있었다.“네?”“문씨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와요.”지후는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조용히 결혼해서.”“왜요?”채림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왜인지... 모르겠어요?”채림을 바라보는 지후
채림은 다시 지후 앞에 다가가 직설적으로 말했다.“죄송하지만 아까 제안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네요.”하지만 지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아까 누군가 이 방에 남자를 숨겨뒀어요. 아주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것 같던데요.”“문 대표님이 걱정할 일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해요.”채림의 견결한 태도에 지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총명한 머리로 내가 어젯밤 그 남자였다는 걸 알았을 텐데, 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나?’“내가 언제든지 한 명 더 데려올 수 있어요.”약간 위험한 분위기를 띤 지후의 목소리에 채림의 눈은 일순 어두워졌다.“지금 협박하는 거예요?”“나도 협박하기 싫어요.”지후는 느긋하게 말했다.“동의만 한다면 MS 그룹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지 않나요? 내가 채림 씨 발도 고쳐줄 수 있어요.”자비를 베푸는 듯한 어조에 채림은 순간 기분이 언짢았지만 지후가 내건 조건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채림의 약점을 건드렸다.채림은 온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자신의 왼발을 바라봤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반격할 건데? 그 양심 없는 연놈을 어떻게 상대할 건데?’‘셋째 삼촌의 세력이 점점 BM 그룹 이사회를 삼키고 있어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텐데,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을까?’채림은 숨을 들이켜더니 다시 물었다.“어떻게 치료해 줄 건데요? 얼마나 걸리죠?”“여기로 가면 의사가 침술로 치료해 줄 거예요. 사흘이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거예요.”지후는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명함 한 장을 던졌다.‘사흘?’채림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채림의 부상은 이미 2년이나 지체되었다. 게다가 알고 지내던 의사도 언제 완치될 수 있는지 확답을 주지 않았는데, 사흘 내로 완치할 수 있다니?‘어이없네.’하지만 너무 확신에 찬 남자의 표정 때문에 채림은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만약 정말 그런 명의가 있다면 왜 본인부터 치료하지 않았죠?”“믿든
채림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일부러 놀란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왜 다들 여기로 왔어요?”“너 깨워주려고 왔지. 너 오늘 원후랑 약혼식이잖아. 얼른 일어나 치장해야지.”셋째 숙모 진미애는 채림을 밀치며 맨 처음 방 안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이내 어질러진 방안을 빙 둘러보더니 침실 안 커다란 침대에 시선을 고정했다.그곳 주위에는 옷이 이곳저곳 널브러져 있었고 이불이 불룩 올라와 있었다.“아유, 너도 참, 얼른 준비해야지. 이따가 스타일리스트가 곧 올 텐데.”진미애는 말하면서 막무가내로 침실에 쳐들어갔다.그 뒤로 채림이 바싹 따라 들어가며 말했다.“제가 알아서 정리할게요.”“숙모가 도와줄게.”진미애는 채림의 비밀을 까발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때문에 거의 달리다시피 침대로 달려가 이불을 확 걷어 바닥에 내팽개쳤다.하지만 이불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진미애는 침대 위를 멍하니 바라보며 굳어버렸다.침대는 너무나도 깨끗했고 그토록 바라던 외간 남자는 없었다.진미애는 너무 수상해서 목을 한껏 움츠리더니 의아한 시선으로 남편 백성호를 바라봤다.‘사나가 분명 백채림 방에 외간 남자가 들어왔다고 했는데? 남자는 어디 있지?’“여긴 제가 알아서 치울 테니 셋째 숙모는 숙모 딸이나 신경 써요.”채림은 이불을 주우며 비아냥거렸다.하지만 채림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채지 못한 진미애는 뒤돌아 백성호에게 물었다.“사나는 왜 아직도 안 깨어났대? 이상한데? 내가 가볼게.”백성호가 진미애를 데리고 옆방으로 향하자 채림은 얼른 뒤따르며 사람들을 부추겼다.“우리도 가볼까요?”“...”사람들은 너도나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도 그럴 게, 오늘 분명 원후와 채림이 약혼식 날인데 아침 댓바람부터 대신 증명해달라는 백성호 부부한테 끌려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이상할 만도 하지.대체 뭘 증명해달라는 건지. 답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의심하면서도 마지못 해 채림의 뒤를 따랐다.그때 사나 방 앞에 도착한 진미애가 여분 카드키를 꺼내
“흥!”BM 그룹 원로 이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며 잊지 않고 경고를 날렸다.“오늘 일은 조만간 책임을 물을 겁니다!”그 말에 백성호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고 이철민과 내외 역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이철민과 장선화는 자기 아들이 어떤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방에 들어선 순간 우물쭈물하는 아들과 사나를 보고 상황을 대충 짐작했다.하지만 사나가 어떤 신분인가? 고작 백씨 가문 방계 가족 딸이라 채림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한다.때문에 이 순간 우선 채림을 다독이는 게 중요했다.원후는 부모의 눈빛을 받고 얼른 채림한테 달려와 설명했다.“채림아, 믿어 줘. 우리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어...”채림이 원후의 손을 뿌리치고는 울면서 떠나려 했다. 그러자 장선화가 얼른 채림을 붙잡았다.“아가야, 이따가 약혼식도 해야 하는데 네가 가면 어떡해?”“어머님, 원후가 저를 배신하고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저더러 약혼을 계속하라는 거예요?”흔들림 없는 채림의 눈동자를 보자 장선화도 더 이상 그녀를 말릴 면목이 없었는지 몸을 돌려 백성호한테 버럭 소리쳤다.“백사나 저 계집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래요! 우리 이씨 가문에 시집오려고 머리를 굴린 것 같은데, 어림도 없어요!”“어디서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해요? 누가 머리를 굴렸다는 거예요? 말은 똑바로 해야죠!”진미애도 마음이 급해 제 딸을 감쌌다.“누구긴 누구예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 몰라요?”두 집안이 서로 개처럼 물고 뜯고 하는 틈에 채림은 방을 빠져나왔다.방금 방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지수가 미리 설치해둔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채림은 그 영상으로 원후와 사나를 제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다....오전 9시약혼식이 시작될쯤 하객들은 갑작스럽게 약혼식이 취소되었다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이게 무슨 일이래? 어제까지 좋았잖아?”“소문에 이원후가 바람 피웠대...”하객들은 자리를 떠나면서 저마다 수군댔다. 사람들이 술렁이는 틈에 채림은
“채림 씨, 또 만났네요.”먼저 입을 연 건 건욱이었다.그러자 그레이스가 곧이어 비아냥거렸다.“그러게. 또 만났네. 참 인연이 깊어.”채림은 입꼬리를 움찔거렸다.“인연인지 아닌지는 그쪽이 더 잘 알 텐데.”감독과 PD는 차 안에서 촬영 절차를 설명했고 채림은 스태프들과 세부 사항을 논했다. 건욱도 그 사이에 끼고 싶었으나 끼지 못해 그레이스가 옆에서 눈짓을 하는 것도 무시했다.“채림 씨, 이번에 C시 소개 멘트는 원래 채림 씨가 하기로 했는데 그레이스 씨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인문 경관의 해설은 그레시스 씨가 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그 부분은 그레이스 씨한테 나눠주세요.” PD는 살짝 난감한 듯 말했다.“소개는 저희가 이미 써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중에 경관 선택은 채림 씨가 먼저 할 거예요.”채림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먼저 선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번에 미스 글로벌 파티 주최 측에서 도시 홍보 영상을 찍는 건 순전히 공익성 활동이다. 때문에 채림은 각 지역의 인문경관과 민속 습관을 더 통속적인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싶은 마음이지 절대 노이즈마케팅 할 생각이 없었다.한참 뒤, 차는 어느새 C시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그레이스는 겨우 기회를 잡아 채림에게 다가갔다.“C시는 정말 좋은 곳이야. 사람들 인심은 후하고 경치는 아름답고. 네티즌들도 C시 홍보 영상에 기대가 커. 그러니 네가 여기에 촬영 온 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뭐?”채림은 헛웃음이 나왔다.“본인이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퀸이 되었다고 후원사가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인터넷에 우리의 불화설이 떠도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 일부러 우리를 같은 조에 배정했고, 그 덕에 너도 C시에 오게 된 거야.”“아하.”채림은 두 손을 들어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뒤 차갑게 웃었다.“그 자신감에 박수를 보내. 하지만 한 가지 잘못 말한 게 있어.”“뭔데?”그레이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불화설이 아니라 우리는 진짜 안 맞는 거
채림은 순간 가슴이 멎는 기분이었다. 지후가 사람들 앞에서 저를 희롱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주위 사람들은 지후가 채림을 협박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채림은 한마디만 듣고 고개를 푹 숙였으니까.지후의 입가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현장 스태프들을 바라볼 때 눈빛은 다시 싸늘해졌다.“어떻게 된 일이죠?”“문 대표님, 그게 사실은 제가 기획안이 별로인 것 같아... 의견을 조금 냈거든요...”지후 앞에서 미아는 순한 양이 되어 누구보다 예의를 차렸다.“지후는 차가운 눈빛을 보내더니 불만 투로 물었다.“그쪽은 누구죠?”주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삐 눈알을 굴렸다. 지후가 미나를 아예 모른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전에 미나는 분명 자기를 MS 그룹이 띄워주는 연예인이라고 소개했다. 게다가 문지후 여자 친구라는 스캔들도 터졌었고.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니...미나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못 들은 척 무시한 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뭐가 어찌 됐든, 이번이야말로 자기를 소개할 좋은 기회였다.“문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지후는 미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얼굴로 명령했다.“기획안에 어떻게 나왔으면 그대로 촬영해요. MS 그룹 소속 연예인은 많아요. 미나 씨가 정말 독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말을 마친 지후는 성큼성큼 채림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따라와요.”채림은 잠깐 망설이다가 얼른 지후를 따라 나갔다.“기획안은 수정할 거 없으니 나랑 같이 집에 가요.”지후는 문을 나서자마자 말했다.“전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따로 갈게요.”“가면서 데려다줄게요.”지후는 채림에게 바짝 다가가면서 그녀의 맑은 두 눈에 질투가 드리웠는지 자세히 보려고 했다.하지만 채림은 오히려 고개를 더 숙이며 입술을 오므린 채 여전히 거절했다.“문 대표님 회사에 여자 연예인도 많을
“지금 나를 비꼬는 거야?”미나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자 쪽팔렸는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아니요, 사실을 서술한 것뿐입니다.”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이번 기획안은 계약하기 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촬영 중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면 저희 측 문제는 아닌 거죠.”미나는 여우 같은 눈매를 치켜 올리며 채림을 날카롭게 째려봤다.“지금 계약서로 날 압박하겠다는 거야?”“만약 미나 씨는 계약서도 안중에 없다면, 계속 협력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채림은 상대의 협박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안 찍으면 안 찍었지!”미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내가 촬영 안 하면 당신들 일정에 차질이 생기잖아!”막무가내로 나오는 미나를 보고 유미를 포함한 기타 BM그룹 직원들은 모두 초조해 났다. 하지만 채림은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자기한테 방법이 있다고 눈빛을 보냈다.“미나 씨가 촬영 안 하면 우리 일정에만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니라 윤재 씨 일정에도 차질이 생겨요.”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윤재 선배 들먹이지 마! 나 윤재 선배님 직속 후배야. 우리 사이가 설마 스캔들을 조작해 엮인 두 사람보다 못할까?”미나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우리 회사가 계약한 상대가 윤재 씨인데, 윤재 씨를 들먹이지 않으면 누구를 들먹이겠어요?”채림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하지만 윤재 씨와 친하다니 더 잘됐네요. 미나 씨가 대신 말 좀 전해줘요. 이따 윤재 씨 스케줄 뒤로 미뤄졌다고.”“뭐?”미나는 순간 허리를 곧게 폈다.“윤재 씨 촬영은 미나 씨 촬영 마치고 나서 시작할 거거든요. 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했으면서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윤재 씨 곧 도착해요.”채림은 고개를 숙인 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시간 다 됐네요. 아마 도착했을 거예요.”미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채림이 이토록 말주변이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물러서지
채림은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H시로 돌아갔다.윤재의 1분기 광고 촬영도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채림은 사전에 윤재의 매니저먼트팀과 소통하고, 암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향수 기획팀 직원 두 명더러 촬영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그러고 본인은 사무실에서 조향 대회를 준비했다.저녁 무렵.강원의 자사도우미, 김선주한테서 전화가 왔다.“사모님, 오늘 저녁 집에 돌아와 식사하실 겁니까?”채림은 약 1초간 반응하고는 물었다.“둘째 삼촌은 집에 있나요?”“네, 돌아오셨습니다. 만약 사모님도 돌아오신다면 문 대표님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김선주는 재빨리 대답했다.채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이런 말을 들어 본지도 참 오래된다. 집에서... 누군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이고...채림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한테 선물한 진주 왕관이 떠올라, 집에 돌아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하려고 결심했다.“그래요. 이따 바로 갈게요.”채림이 대답했다.한편, 전화를 끊은 김선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주인어른의 머리 위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단번에 가시고 강원에 다시 봄바람이 부는 듯한 분위기가 찾아왔으니까.채림의 마음도 가벼웠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정리하고는 문을 닫고 퇴근했다.하지만 그때, 핸드폰이 울리면서 향수팀 직원 소유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백 대표님, 한번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쪽에서 촬영 진행이 안 되고 있어요...”“다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요? 윤지 씨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채림은 의아했다.“윤재 씨가 아니라 같은 소속사 윤미나 씨가 문제예요... 상대는 문지후 대표님 여자 친구라고 소문난 스캔들 상대인데 우리를 계속 괴롭혀요. 저희도 더 이상 시중들기 힘들어요...”소유미가 억울한 듯 말했다.‘하.’채림은 입꼬리가 파르르 떨면서 흔들림 없는 눈을 깜빡거렸다. ‘스캔들 상대도 있었어?’“알았어요, 바로 갈게요.”채림은 전
사실 백성호는 J시에 온 지 며칠이 된다. BM 그룹에서의 지위를 잃은 그는 변씨 가문에 빌붙으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다른 살길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찾은 목표가 바로 방민수다. 하지만 여러 번 방문 요청을 드렸지만 한 번도 얼굴을 만나지는 못했다.결국 그는 큰돈을 들여 파티 초대장 한 장을 구했고, 그 파티에서 겨우 방민수를 만나 안부 좀 전하고 명함을 건넸다. 그게 끝이다.“마침 잘됐네. 그럼 우리 아빠 앞에서 그렇게 말해 봐. 아빠가 당신을 어떻게 할지 궁금하니까.”은솔은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발버둥치던 백성호 그대로 굳어버린 채 멍한 눈으로 은솔을 바라봤다.이 작고 여린 여자애가 방 회장 따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미처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방씨 가문 경호원에게 끌려 나갔다.변형빈은 밖으로 끌려 나가는 백성호를 보자마자 모든 더러운 물을 그에게 뿌렸다.“협회장님, 보세요. 백성호는 궁지에 빠지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입니다. 프롬프트도 분명 백성호가 사람을 시켜 망가뜨린 게 틀림없어요. 그랬으면서 나를 모함하다니...”“변형빈! 이 사람도 아닌 놈! 내가 네놈이 한 파렴치한 짓을 모두 까발릴 거야!”백성호는 이미 나갔으면서도 형빈의 목소리를 듣고 고래고래 소리쳤다.그 순간 형빈은 눈동자가 축소되면서 겁을 먹었다.“하...”고강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변형빈은 역시 싹수가 노래서 약이 없었다. 그래도 공을 세워 잘못을 덮을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이토록 식견이 짧으니 채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고강섭은 몸을 돌려 채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백 대표님, 위급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모습 잘 봤습니다. 제 주변 교수님들이 백 대표님 칭찬뿐이에요.”“과찬이십니다.”채림은 대범하게 말했다.고강섭은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이번 일은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선 증거를 찾고 조사해 봐야 한다.협회에 DL그룹을 지지하는 세력
협회장은 ‘고맙다’는 단어를 강조하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뒤돌아 형빈을 꾸짖었다.“변 대표님, 남을 모함하기 전에 머리를 쓸 수는 없나요?”“협회장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형빈은 뜬금없이 꾸지람을 들어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가 원했던 상황이 아닌데 말이다.“무슨 말이냐고?”고강섭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세미나 시작 전, 내 비서가 분명 여러 번 강조했을 텐데요? 내 연설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연설문은 그동안 우리 업계에 도움을 준 제조 업체와 해외 업체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하필 중요한 시간에 프롬프트조차 없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게 세미나를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장담한 결과인가요?”“그럴 리가 없어요.”형빈은 조급한 나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프롬프트는 분명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쳐 놨어요.”“그러니까 프롬프트는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 고장 났다는 거네요?”채림은 형빈의 말실수를 잡고 늘어졌다.그 순간 형빈은 멍해졌다. 그제야 본인이 함정에 빠졌다는 게 실감 났다.고강섭은 연신 한숨을 쉬며 뒷짐을 쥔 채 형빈을 비난했다.“변 대표님, 내가 세미나 주최 권한을 변 대표님께 맡기면서 연신 강조했을 텐데요? 동종 업계 사이 경쟁이 필요하긴 하다지만 건전하게 경쟁해야죠. 어쩜 매번 이렇게 남의 등에 칼 꽂는 짓을 할 수 있죠?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이네요.”그때 형빈의 비서 엄태식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귀에 아까 전 발생한 일을 설명했다. 프롬프트는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치지 못했다고.”“아까는 어디 갔었어? 왜 그걸 바로 보고하지 않았어?”형빈은 쪽팔리는 한편 화가 났다.“저도 그동안 잡혀 있어서 올 수 없었어요...”태식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백 대표님이 결단을 내려 협회장님 연설문을 무대 위에 준비해 두어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어요.”고강섭의 비서가 옆에서 말했다.“변 대표님, 이번 일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고강
협회장이 해야 할 멘트는 무척 길기에 프롬프트도 없이 멘트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본인이 아무리 상투적인 말로 억지로 짜 집기 해서 지어낸다고 해도, 오늘 현장에 수많은 파트너가 와 한 분 한 분 감사 인사드리려면 회사 이름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을 모두 외울 리는 만무했다.‘DL그룹!’며칠 전 DL그룹 회장이 직접 고강섭을 찾아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사정했었다. 결국 마음 약해진 그는 마지막 기회를 줬다. 하지만 DL그룹이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고강섭은 난처하기도 하고 화도 나 얼굴이 자줏빛을 띄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채림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협회장님, 저를 따라 세컨드 스테이지로 갑시다.”고강섭 눈에는 혼란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채림이 계속 웃는 바람에 그는 마지 못해 채림을 따라 나섰다.그러다 세컨드 스테이지 위에 도착했을 때, 고강섭은 무대 바닥에 자신이 해야 할 멘트가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고강섭은 카메라 뒤에서 눈을 반짝이더니 자신만만하게 무대를 내려가는 채림을 대견스러운 듯 바라봤다.잠시 당황했던 고강섭은 무사히 연설을 마치며 세미나의 막바지를 알렸다.채림이 백스테이지에 도착하자 변형빈이 부르는 것처럼 다가와 버럭 소리쳤다.“백채림, 뭐 하는 거야? 왜 협회장님을 데리고 빙빙 돌았어? 협회장님이 너 때문에 어지러워하셨잖아!”“내가 왜 협회장님을 모시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채림은 침착하게 반격했다.은솔의 경호원이 일을 깔끔히 처리했는지 형빈은 아직도 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모른 채 어릿광대처럼 채림을 비난했다.“어디서 변명이야!”형빈은 사나운 말투로 윽박지르더니 뭔가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였다.“그만!”그때 노기가 담긴 나지막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중단시켰다.형빈은 뒤돌아서서 잔뜩 화가 난 고강섭을 바라보더니 얼른 다가가
채림과 같은 줄에 앉은 변형빈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도발하는 듯 바라봤다. 보아하니 이따 또 그녀에게 덫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하지만 지금 채림은 밝은 곳에 있고 상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기에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조심을 다하는 수밖에.채림이 경계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채림 씨! 뭘 그렇게 걱정해요?”채림은 고개를 돌려 흘긋 바라봤다.“은솔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채림 씨가 연설한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죠.”은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보탰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 저 오늘 혼자 온 거 아니에요.”은솔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보니 시선 끝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몇 명 서 있었다. 심지어는 모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모양인지 분위기가 남달랐다.채림은 입꼬리를 말아 올랐다.“오늘 정말 은솔 씨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너무 잘됐네요!”은솔은 기대되어 미칠 지경이었다.채림은 어처구니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뭔 일을 당하는 게 그렇게 기대되나?’채림이 은솔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당부하자 은솔은 이내 옆에 앉은 변형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 이내 흉악한 얼굴을 한 백성호를 보더니 호언장담했다.“걱정하지 마요. 제가 오늘 이 두 사람 죽어라 감시할게요! 만약 두 사람이 채림 씨한테 뭔 짓을 하려 한다면 오늘 내 손에 죽었어요!”채림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뭐 깡패도 아니고, 적당히 해요.”“그래요. 채림 씨 말대로 할게요.”은솔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당부했다.채림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대 아래에 조용히 앉아 청중이 되었다.세미나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시상 순서가 되자 채림을 포함한 몇몇 기업 대표는 함께 무대에 올라 업계 청년 공로상을 수상했다.수상을 마친 뒤 바로 채림의 연설이 시작되었다.사회자의 짧은 멘트가 끝나자, 은솔은
[우리 참 안 맞아. 어쩜 내가 도착하자마 H시를 떠났어?]건너편 상대는 계속 농담조로 말했다.“왜 돌아왔어?”문지후는 방금 풀었던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산사태 때 본인 목숨도 상관하지 않고 그 여자를 구했다던데? 상대한테 홀리기라도 했어? 오히려 바위 아래로 밀어야 하는 거 아니야?]상대의 목소리는 음흉하고 섬뜩했다.“정말 그 여자가 죽길 바라는 거야?”지후는 차갑게 되물었다.“그 여자는 이 세상에서 예진과 유일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인데?’[예지는 예지고 그 여자는 그 여자야! 그 계집이 예지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내가 왜 그 여자를 살려 둬야 해?]상대는 조급해졌는지 소리 질렀다.하지만 지후는 귓가에 들려오는 으르렁거림을 무시한 채 냉정을 되찾았다.“우리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달랐어. 난 그때의 진실을 알아내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게 할 거야!”[하하!]전화 건너편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칼 같은 문 대표가 언제부터 이렇게 꾸물대는 성격이 된 거야?]“내가 칼 같다고 해서 무고한 사람까지 베어 버리는 건 아니야!”지후는 차가운 말투로 위협했다.[정말 그 여자한테 푹 빠지기라도 했어? 계속 계획을 미룬다면,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어디 그래 봐!”지후의 몸은 순간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더니 협박과 경고를 날렸다.“내가 귀국을 결심한 날부터 그 여자는 내 사람이었어! 어떻게 처리할지는 내가 결정해. 만약 내 계획을 망치면 그게 당신이라도 가만 안 둬!”지후는 말을 마친 뒤 전화를 팍 끊었다. 그러다 한참 뒤 어디론가 전화했다. 2분 뒤, 강현은 그의 방에 나타났다.“차 대기시켜. H시로 돌아갈 거야.”지후가 대답했다.“하지만, 대표님...”강현은 말을 더듬다가 지후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 입을 열었다.“방금 소식을 접했는데, 사모님께서 내일 향수 업계 세미나에 참석한답니다. 주최 측이 DL그룹이라 사모님께 불리할 것 같습니다.”지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동방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