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가슴을 바라본 순간, 그는 자신의 앞가슴의 살갗이 터지게 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가슴에 난 큰 구멍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게 내 심장이라고?’ “한...”곽연은 말을 반쯤 내뱉기도 전에 갑자기 눈앞이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그는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큰비 속에 쓰러지게 된 곽연의 시체를 본 곽 씨 집안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크게 놀랐다. 그제야 한지훈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에는 줄곧 한지훈이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크게 후회하게 됐다. ‘한 손으로 숨통을 조여버릴 수 있는 괴물은, 회피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많은 사람들은 내심 크게 놀란 한편, 저도 모르게 한지훈이 원효천에게 대한 태도를 다시금 연상하게 되었다. 설마... 그중에서도 나한비는 역시나 나 씨 그룹의 사업을 물려받을 가장 유력한 젊은 상속자답게, 머릿속에 이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눈치 빠르게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한 선생님, 강 회장님, 어서 오세요!” 전부터 나계홍이 한지훈에게 인생을 걸었을 때, 줄곧 불쾌한 기색을 보였던 나한비의 태도는 아예 180도로 바뀌게 됐다. 그는 주동적으로 한지훈과 강우연을 도와 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뒤에서 그들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던 졸개들까지 한쪽으로 밀쳐내며 아부를 하였다. 그로 인해 빗물이 자신의 몸을 젖게 되어도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한지훈 같은 사람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한지훈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이내 강우연과 팔짱을 낀 채 망성루로 들어갔다. 뒤이어 나 씨 집안사람들도 황급히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지훈에게 대해 험담을 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도 나계홍의 안목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한 선생님, 여기... 이쪽으로 오세요!”어느새 나계홍의 얼굴색은 백지장처럼 창백
원효천의 말을 듣고 난 한진욱은 그제야 크게 안심했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들은 모두 똑똑히 보아냈다. 원효천이 당당하게 한지훈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지훈은 아예 무시하고 바로 차에 올라타 떠나버렸다는 것을. 그 말은 즉, 한지훈은 정면승부할 용기가 없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감히 상대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이젠 마음가짐을 잘해야 합니다. 원 가주님께서 이렇게 흔쾌히 저희를 도와주려고 한 이상, 저희 또한 굳게 마음먹고 우연 그룹과의 모든 협력을 끝내야 합니다!”이때 무리 속에서 한 40대 중년 남자가 일어서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적지 않은 의약 회사 대표들은 하나같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모두들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한지훈은 이제 더 이상 북양 왕도 아닙니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권력도 없고 병권도 없기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도 못할 겁니다. 오직 죽음의 길밖에 없다고요!”옆에 앉아있던 원상용도 이 틈을 타 한마디 덧붙였다. ‘한지훈이 이젠 북양 왕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 소식은 아직 강중에까진 전해지지 않았었다. 설사 용경에 전해졌다 하더라도 진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상위층 사람들뿐이었다. 사실 이 일에 대해 국왕은 철저히 비밀로 하라고 명령했었다. 일단 한지훈이 옷을 벗었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면 용국 변경의 각 나라들은 또 움직이려고 수를 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 가주님, 그게 사실입니까? 한지훈이 이젠 일반 서민이라고요?”여전히 의심 가득하던 상업계 거물들은 일제히 물었다. 그들의 질문에 원상용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원효천을 한 번 흘깃 보았다. 원효천 또한 더 이상 숨길 의사가 없어 보이자 그제야 그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한지훈은 용경에서 국왕과 갈등이 생긴 후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떠났고, 그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던 국왕도 이젠 포기한 겁니다. 즉 그는 스스로
은행의 지원이 없으면 우연 그룹은 더 이상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화물 운송 회사와도 더 이상 협력을 하지 않으면 우연 그룹의 사업은 결국 강중에만 국한되는 게 뻔했다. “말도 안 돼!”강우연은 곧바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한지훈은 하얗게 질린 강우연의 얼굴을 보고는 급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큰 일 났어요. 각 은행과 화물 운송 회사들이 모두 저희와의 협력을 종료했어요!”강우연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한지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내심 이 모든 일의 배후가 떠올랐다. 바로 원 씨 집안이 뒤에서 모든 걸 꾸민 거라 거의 확신했다. “걱정하지 마. 돈과 화물 운송에 관한 모든 건 내가 다 해결해 줄게!”한지훈은 비록 더 이상 북양 왕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강중의 주둔군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군의 수송 트럭은 얼마든지 우연 그룹의 운송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돈에 대해서는 한지훈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즉시 많은 국제적 대재단을 동원하여 우연 그룹에 자금을 투입하게끔 할 수 있었다. “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강우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나계홍은 눈치를 보고 급히 일어섰다. “강 회장님, 저희 나 씨 그룹에도 30대의 운수 트럭 차량이 있습니다. 비록 차가 좀 적긴 하지만 얼마든지 물자를 운반할 수 있습니다.”“매일같이 쉬지 않고 달리면 30대의 차로도 얼마든지 발등의 불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나한비도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입을 열었다. “저희 나 씨 집안은 강중 부근에 일부 약재 산지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곳에도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큰 트럭들이 있습니다. 만약 모두 동원한다면 최대 50대까지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아니... 그럼 나 씨 그룹한테 너무 신세를 지는...”강우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계홍이 말을 이어갔다. “강 회장님, 사실 이젠 저희 나 씨 그룹과 우연 그룹은 한 배에 탄 운명으
경호원의 목소리는 딱히 크지는 않았지만, 순간 홀 전체는 조용해졌다. 소식을 접한 원효천은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눈에서는 정광이 뿜어져 나왔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한진욱에게 경호원이 무사할 거라고 장담까지 했었다. 그런데 결국 한 시간도 안 되어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야?”원효천은 한진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술잔을 탁자 위에 내던지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 시간쯤 전에 곽 선생께서 한지훈을 찾아갔는데, 결국 살해되었다고 합니다!”경호원은 용기를 내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한지훈 이 미친놈. 원 가주님이 이렇게 계신데 감히 살인을 저질러?”“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한지훈 이 녀석한테 평생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줘야겠어!”“맞아요! 지난번에도 바로 이 녀석이 저희 모두를 우연 그룹 앞에서 오전 내내 무릎을 꿇게 만들었어요! 이 원수, 어떻게든 갚아주고 싶어요!”모두들 한 마디씩 얹고는 하나같이 이를 갈며 노기를 드러냈다. “흥!”마찬가지로 언짢은 기분이 든 원효천은 화가 난 나머지 한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자 그 원탁은 단번에 산산조각 났다. 탁자 위의 유리컵들은 이내 쨍그랑하는 소리를 내며 모두 바닥에 쏟아졌고, 물은 사방으로 튀어버렸다. “가주님, 화 푸세요! 한지훈 그놈, 감히 가주님과 겨룰 용기가 나지 않아 이렇게 괜한 사람만 건들면서 심통을 부리는 겁니다!”원상용은 급히 원효천의 달래주기 시작했다. “맞아요. 방금 문어귀에서 가주님을 마주하고도 겁먹고는 감히 달려들지 못해 한지훈 그놈이 마음속으로 화를 쌓아둔 거예요.”“한지훈은 고작 곽 선생을 괴롭히는 거로 자신의 체면을 되찾으려 했을 뿐이에요. 이건 마치 세 살짜리 아이나 하는 바보짓 같잖아요.”“제가 보기에는 한지훈은 틀림없이 원 가주님의 계획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인은커녕 곽 선생의 솜털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텐데요!”상업계 거물들은 잇달아 나서며 아부를 하였다. 그제야 원효천의 표정이
그렇게 성검종 수좌와 장교는 점점 한진욱을 외부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서로 간에는 자주 연락도 오고 가게 됐다. 곧이어 한진욱의 전화를 받게 된 수좌 장위성은 냅다 큰 소리로 외쳤다. “한 선생, 평소에는 정말 바빠서 얼굴 한번 보기 어려운 사람인데 어쩌다가 갑자기 나한테 전화를 한 거지?”이전의 한진욱은 보통 명절이나 공휴일이 아니면 딱히 장위성에서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공휴일도 아닌 오늘 갑자기 연락을 받게 되자 장위성은 꽤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 수좌, 곽 선생이...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됐어!”한진욱은 최근 발생한 모든 일을 장위성에게 얘기해 주었다. 곽연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또한 단지 들은 이야기뿐이었기에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뭐라고?”자조치종을 들은 장위성은 벌컥 화를 냈다. 곽연은 바로 그의 수제자이자 유일한 제자였다. 한평생 훌륭한 제자 한 명을 가르쳐낸 그는 원래 제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3개월 전의 만남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 수좌, 이... 이번 일은 절대 나를 탓하지 마. 모두 한지훈 그 녀석이 미쳐 날뛰면서 저지른 일이야. 결국 곽 선생이 화를 참지 못하고 혼자서 한지훈을 찾아갔다가 당하게 된 일이고...”한진욱은 황급히 자신의 결백을 밝혔다. 이 말을 들은 장위성은 약 5분간 침묵하고 난 후에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대가 누구든, 감히 내 제자의 목숨을 앗아간 놈이라면 우리 성검종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말이 끝나자마자 장위성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한진욱은 전화를 내려놓은 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장위성의 마지막 말투에서, 곽연의 죽음으로 인해 성검종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한 대표님, 곽 선생의 시신은 어떻게 안치할까요?”이때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한 명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안치해? 일단 성검종으로 돌려보내!”한진욱은 짜증
이튿날 아침, 회사 입구에 도착한 강우연과 한지훈은 문어귀에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그 속에서는 처참한 울부짖음 소리도 들렸다. “정말 양심 없는 사람들이네! 이 회사의 약을 먹고 목숨까지 잃은 사람이 있어 내가 직접 들어가서 따지겠다는데, 왜 이 놈의 경비원들은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돌아갈 수가 있어?”목놓아 통곡하는 소리가 수없이도 울렸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얼굴이 창백한 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얼핏 봐도 노인은 이미 숨이 멎은 듯했다. 어느새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우연 그룹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젠장, 약 장사꾼이라는 사람들이 환자 목숨은 아예 무시하네!”“그러니까 말이야. 노인네가 틀림없이 저놈들이 생산한 어떤 혈압약을 먹고 죽게 됐을 거야!”사람들은 분분히 의논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몇 대의 기자 차량들이 갑자기 도로 맞은편에 멈춰 서더니 이내 10여 명의 기자들이 사진작가들까지 동원하여 재빨리 현장으로 달려갔다.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는 이 장면을 본 한지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기자들이 속보를 받고 설사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온다 하더라도 최소 반시간 이상은 걸리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시위단이 노인의 시체를 들고 우연 그룹 입구에서 울부짖은 지 20분도 안되어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게 됐다. “무슨 일이야?”결국 참다못해 한지훈은 당직을 서고 있는 한 경비원을 불러 물었다. 곧이어 경비원은 한지훈과 강우연에게로 급히 달려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한 선생님, 바로 방금 약 10분 전에 이 사람들이 단대를 들고 저희 회사로 들어와서 시위를 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들은 죽은 영감이 저희 회사에서 생산한 혈압약을 먹고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역시 예상처럼 흘러가는 전개에 한지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기, 선생님. 어르신은 어쩌다가 돌아가시게 된 겁니까?”이내 한지훈은 무리 속을 비집고 들어가 노인의 시
이내 큰 함성과 함께, 이 회장은 백의를 걸친 연구 요원 4~5명을 데리고는 인파를 비집으며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본 한지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나 일이 공교롭게 벌어질 줄은 몰랐다. 기자들이 몰려든 지 고작 10분도 지나지 않아 의약 협회에서 직접 찾아올 줄이야. 그야말로 서로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한곳에 모여들게 된 것이다. 한지훈은 내심 이 모든 상황을 꾸민 배후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한지훈! 너희가 만든 약을 먹은 사람이 죽게 됐으니, 어쨌든 해명은 해야겠지? 그리고, 오늘부로 그 어떤 혈압약이든지 즉시 생산을 중단하고 당장 우리 의약 협회의 조사에 응해!”이 회장은 두말없이 중재 결과를 내놓았다. 한지훈은 그런 이 회장을 힐끗 훑어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회장, 방금 한 말에 대해 확실한 근거라도 있긴 해? 첫째, 경찰 조사도 하지 않았고 둘째, 아직 부검도 안 했는데 대체 뭔 근거로 노인이 약을 먹고 죽었다고 확신하는 거지?”“그...”이 회장은 한참을 머뭇하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사실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다 들었어. 너희들이 만든 혈압약에는 금지된 성분이 있다고. 사람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그런 성분!”그러자 강우연은 바로 앞으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 우리가 만든 혈압약은 제대로 된 임상 실험을 거쳐서 개발된 것으로 인체에 무해한 건 확실해! 절대 사람이 죽을 일은 없다고!”“죽을 일이 없다면서, 그럼 이번 일은 어떻게 해명할 건데?”이 회장은 여전히 뻔뻔한 태도로 죽은 노인을 손으로 가리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렇게나 많은 연구원을 데리고 온 참에, 차라리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한번 검사해 보자고!”한지훈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한지훈, 끝까지 네 잘못을 인정 안 하겠다는 거지? 여봐라, 당장 현장에서 검사 진행해!”이 회장은 자신의 뒤를 지키던 몇 명의 연구원을 향해 손을
뜻밖의 상황에, 웅성웅성 구경하던 군중들과 기자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은 몰랐다. 사전에 미리 돈을 받고 일을 처리하려 했던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난감했던 사람은 바로 그 중년 남자였다. 그는 한지훈의 손에 들린 어두운 은침을 보고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옆에 있던 이 회장조차도 말문이 막혔다. 이내 한지훈은 차가운 표정으로 중년 남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젠 말해! 대체 누가 너희들을 이곳까지 보낸 거야? 너희들한테 마지막 기회를 줄게!”한지훈은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며 중년 남자를 죽어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놀란 중년 남자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됐다. 공포스러운 한지훈의 기운에, 우연 그룹 밖을 에워싸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움찔했다. “당신, 당신 대체 뭐 하려는 거야?”등골이 서늘해진 중년 남자는 이마를 따라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우리 아버지는 너희들이 만든 혈압약을 먹고 갑자기 돌아가신 거라고! 이 상황에 뭔 은침을 가지고 검증한다는 거야? 헛 수작 부리지 마!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바로 우연 그룹에서 개발한 약이 우리 아버지를 죽게 만든 거야!”그러자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다시 소란을 피웠다. “우연 그룹, 이렇게나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네!”“어떻게 대기업에 이렇게나 큰 흑막이 있을 수가 있어? 감히 가짜 약품을 만들어 사람들을 해치려 하다니! 크게 벌 받아야 돼!”“당장 문 닫고 파산이나 신청해! 강중에 계속하여 이런 기업이 남아있는 이상,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들의 시험품이 될 거잖아!”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는 갈수록 시끄럽게 울렸다. 뒤따라 기자들도 편파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한쪽에 서있던 이 회장은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우연 그룹을 향해 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보며 끊임없이 고
메이어는 더없이 건방진 태도를 보였다. 상대는 용국의 북양 왕이자, 무려 과거 5개 국까지 점령한 한지훈이었기에 절대 그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만약 한지훈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진작에 돈을 받고 통행증을 나국화에게 넘겨줬을 것이다. 메이어 성격 상, 굳이 평범한 사람을 상대로 겨냥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는 한지훈더러 술을 권하게 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사진까지 찍으려는 계획이었다. 인증 숏을 남기면 앞으로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 거리가 될 것 같았다. 미국 수뇌나 응국 수상, 지어는 용국의 국왕한테서도 술을 권해 받은 사람은 있겠지만 이 세상에 한지훈으로부터 술을 받은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내 한지훈이 술 병을 들고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격동하기 시작한 메이어는 담배를 든 손까지 떨기 시작했다. 쾅! 방심하고 있는 순간, 한지훈이 갑자기 술병을 들어 올려 직접 메이어의 머리를 찧었다. 술 병은 바로 산산조각 났고, 술은 핏물과 함께 섞여 주르륵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메이어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지훈 이 놈, 나한테 술을 권하러 온 게 아니었어? 갑자기 술병은 왜 깨뜨린 거야?’ ‘이 새빨간 것들은 또 뭐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국화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쏜살같이 달려들어 급히 한지훈 앞을 가로막았다. 나머지 대원들도 잇달아 급히 둘러서서 메이어를 지켜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메이어는 겨우 정신을 차렸고, 이내 휴지를 들고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한지훈을 주시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메이어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고 소리치지도 않고 화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나국화와 대원들의 표정은 매우 어두워졌다. 자신들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확신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분위기였다. 이 술 병으로 인해 눈앞의 통행증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살아남아서 이곳을 떠날 수 있게
이내 도련님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경호원을 흘깃 보았다. “충성심 가득한 거 보소... 여봐라! 당장 술 열 상자 들고 와. 이 놈이 얼마까지 마실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안됩니다! 도련님, 이 술은 제가 마시겠습니다!”뜻밖의 상황에 조급해난 진강은 급히 앞으로 나아가 그 술잔을 받았다. “팍!”바로 그때, 도련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어 그 경호원의 얼굴을 내리쳤다. “네가 대체 뭔데 진강의 술을 대신 마시겠다고 하는 거야? 그럼 밥도 대신해서 먹지 그래?”곧이어 그 경호원의 멱살을 잡고는,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 그의 머리를 겨누었다. “도련님, 제발 노여움 푸세요! 제가 버릇없게 키운 탓입니다. 이 놈을 대신해서 제가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이내 진강은 코를 막고는, 바로 술을 원샷하였다. 거하게 한 잔 들이키지마자, 위에서는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진강은 이를 악문 채 겨우 통증을 참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바로 그 순간, 도련님이 든 총구는 바로 진강을 겨누었다. “경호원이 이렇게 철이 없는 놈이란 거, 너도 알고 있었어?”“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진강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니었기에 딱히 긴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주먹을 꽉 쥐고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자신을 격려하였다. 한편 옆 룸에서는, 어느 정도 술을 걸친 나국화는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메이어 선생님, 그 특별 통행증 말입니다. 혹시...”“자고로 모든 일 처리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 거야!”방금까지만 해도 흐뭇하게 웃고 있던 메이어는, 나국화가 또다시 통행증을 요구하자 순간 표정이 어두워나더니 손에 든 술잔을 바로 탁자 위로 내리쳤다. “그건 걱정 마세요. 원칙에 대해서는 저희도 다 알고 있습니다!”이내 나국화는 트렁크 하나를 꺼내 메이어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메이어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보였다. “이건 원칙이 아니라 응당 거쳐야 될 절차야.
과거 팀원들과 함께 백전백승하여 열국을 휩쓸었던 그 강자. 진강은 매번 위기에 처하게 될 때마다, 정신적 지주인 그를 떠올렸다. 한편 옆 룸에서는, 나국화와 몇몇 대원들이 메이어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에게서 통행증을 얻어내야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메이어가 직접 명령을 내려 군대를 보내 그들을 호송하게끔 해야 했다. 통행증을 가져도, 군대의 호위 없이는 온갖 갑질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청렴한 용국과는 정반대였던 이곳은, 낮은 계급의 공무원들도 사람을 죽일 듯이 괴롭히는 일들이 흔하게 발생했다. 그리하여 다들 번갈아 메이어에게 술을 권하고 있는 한편, 한지훈은 자신의 차례가 다가와도 그저 조용히 음식만을 먹으며,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유회원을 용국으로 데려갈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사실 유회원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곳에 있는 신룡전의 세력을 동원하면 곧바로 찾을 수가 있다. 다만 문제는 아시란치 가문, 그리고 용국을 노리는 작은 나라들이 반드시 그 과정에 그들을 가로막으려 할 것이다. 한지훈은 전혀 끄떡없었다. 도보를 한다 하더라도 보름 안이면 용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저 평범한 일반인인 유회원을 데리고 수천 리의 사막을 건너가는 건 분명히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한지훈의 모습에, 나국화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방금 자신이 경고를 한 것 같은데, 한지훈이 여전히 조각처럼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이내 나국화는 어두운 표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양령아에게 눈짓을 했다. 바로 눈치챈 양령아는 다소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한지훈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한 선생님, 메이어 선생은 저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나 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번쯤은 메이어 선생한테 술을 권해주는 건 어떨까요?”나국화는 마음속의 분노를 겨우 참아내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한지훈을 향해 말했다. “한 선생님, 이 분은 메이어
이내 나국화는 한지훈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는 다시 술잔을 들어 술을 권했다. 그의 목표를 확고했다. 순리롭게 피라미드에 들어가 유회원의 행방을 똑똑히 조사하려면 반드시 이 기회를 잡아 순순히 메이어에게 아부해야 했다. 그러나 한지훈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나국화를 쳐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메이어한테 아부하라고?’ 북양 왕이라는 신분에서 더 나아가 신룡전의 전주였던 한지훈은, 굳이 그한테 아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전화 한 통이면 도리여 메이어가 순순히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옆 룸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로 예상되는 한 젊은이는 미친 듯이 날뛰는 모습을 보이며, 어린 모델 몇 명을 옆에 껴안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린 모델들은 한눈에 봐도 이곳 비육의 현지인들은 아니었다. 하나같이 피부가 하얗고 훌륭한 미모에, 몸매까지 섹시한 게 딱 봐도 유럽 쪽의 유명한 모델들이었다. 그렇게 옷차림과 용모가 비슷한 7~8명 되는 어린 모델들은, 작디작은 한 룸에 비집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한 손은 어린 모델의 어깨에 걸치고 다른 한 손에는 술잔을 든 채 거들떠보지도 않는 표정으로 그의 눈앞에 있는 한 용국 남자를 바라보았다. “진강!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장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 절대 이 문을 나설 수가 없어!”“도련님, 어제 일은 정말 저와는 무관합니다. 그리고 도련님, 제발 그 사람들을 건드리지는 말아 주세요. 그들은 저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진강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거 한지훈의 통신병이었던 진강은, 전투 과정에 부상을 입고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쪽 다리가 파편에 맞아 심하게 절뚝거렸던 그는, 제대 후 마땅한 일자리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함께 귀화한 옛 전우 몇 명을 따라 비육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를
만약 평소의 나국화였다면, 그는 메이어와 같은 인물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몇 급이나 높은 관원이라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필경 그의 신분은 특수 요원이자 암살조의 일원이기도 했기에, 그의 서열은 메이어보다도 훨씬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예외였다. 지금으로선 메이어가 소유하고 있는 특별 통행증이 반드시 필요했다. “메이어 씨, 여기 있는 분들 모두 제 친구들입니다!”이내 나국화는 메이어에게 일행들을 소개했다. 그 와중에, 메이어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반면 일행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메이어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한지훈은 줄곧 제자리에 앉아있었고, 심지어 엉덩이도 떼지 않았다. 꿈쩍도 않는 한지훈의 모습에 나국화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북양 왕으로 세상을 거느린 것도 한때였지, 이젠 실권도 없는 한지훈이 비육까지 와서 감히 이렇게나 건방지게 굴 줄은 몰랐다. 이미 비육에서 근 20년을 생활해 온 나국화는 수많은 고위층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메이어와 동급인 사람들도 적지 않게 알고 지내고 있었다. 그런 메이어조차도 고위층 관원들한테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데, 한지훈이 대체 왜 허세를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한지훈이 이번 작전의 총사령관이라면 나국화도 뭐라 반박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국화는 단지 진우의 부탁대로, 한지훈을 작전에 투집시 킨 것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국화와 한지훈은 종속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였다. 그리하여 나국화는, 한지훈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이곳에서만큼은 허세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하고, 때로는 사람이 굽힐 줄도 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 피라미드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통행증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로지 메이어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었다. 이 상황에 괜히 메이어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하나도 좋을 게 없었다. 필경 이곳은 비육의
현지 장관이 특별히 비준한 통행증이 없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기는커녕 그 주변에 얼씬거리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설령 그들의 손에 통행증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단지 고고학 연구의 핑계로 들어가 상황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역시 현명하시네요. 사실 저도 방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이 틈을 타 대원 중 한 명이 아부를 하였다. 한편으로 이는, 현지에서의 나국화의 영향력과 인맥이 꽤나 넓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에휴, 난 누구와는 달리 천성적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건 아니라서 말이야. 무슨 북양 왕이고, 전부 총사령관이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난 오직 나 자신한테만 의지할 수 있거든! 그래도 그동안 쌓아둔 인맥은 좀 있지!”나국화는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 식사를 마친 한지훈과 양령아는, 나국화 일행이 있는 맞은편 작은 음식점으로 향하여 그들과 합류했다. “팀장님, 저희 다음 계획은 뭐죠?”양령아는 고개를 돌려 나국화에게 물었다. “유회원을 찾으려면 우선 배제법을 이용해야 돼. 하지만 배제법도, 일단 통행증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지. 아, 맞다. 한 선생님께서는 각국 기밀 요원들과 모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여기서도 어느 정도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요?”“아니면, 사적인 관계를 통해 현지의 장관이라도 찾아서 저희한테 특별히 통행증이라도 발급해 달라도 부탁하면 안 될까요?”나국화의 말투는 매우 듣기 거북했다. 사실 그는 한지훈의 표면적인 직무 외에, 또 다른 하나의 신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신룡전의 전주라는 것이다. 물론 진우 또한 이 사실을 나국화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나국화는, 한지훈이 일단 비육에 도착하게 되면 오직 자신들의 인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 몇 명 있긴 하죠!”한지훈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나국화의 얼굴은 갑자기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는, 황량한 사막과 넓은 모래 바다가 깔려 있었다. 햇살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그 열기는 파도처럼 일파만파 밀려왔다. 한지훈은 모래 바다를 주시하며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는 어느새 이곳의 환경에 완전히 적응했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유회원이었다. 이런 날씨에 피라미드에 갇혀있다면 오랫동안 견디기 힘들 것이다. 밖은 매우 더운 반면, 안은 아주 추웠기에 공기도 극도로 습할 것이다. 그런데 그저 평범한 일반인일 뿐이었던 유회원이 이런 환경에서 장기간 구금되어 있다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한지훈의 모습에, 나국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웃으며 말했다. “한 선생님, 왜 그러세요? 이곳의 기후가 아직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전에 사막에서 지내본 경험이 풍부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그러나 한지훈은 대꾸도 하지 않고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얼굴에는 근심 가득한 기색을 띠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구 호텔인 이곳은 현지에서도 5성급 호텔로 불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용국의 호텔과 비교하면 전혀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인테리어도, 환경도 매우 처참했다. 이내 한지훈이 문을 밀고 차에서 내리자, 이목구비가 뚜렷한 한 20대 여성이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를 맞이했다. 너무나도 무서운 날씨였기에, 여성은 매우 짧은 청 반바지에 몸매가 드러나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얗고 긴 두 다리와 피부가 눈에 뜨였고, 보기와는 다르게 평평한 흰 신발 한 켤레를 신고 있었다. “한 선생님! 저 양령아라고 합니다!”여성은 차 문 앞까지 다가와 먼저 한지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순간 어리둥절 해난 한지훈은 일단 양령아와 악수를 나누었다. 적극적인 양령아의 모습에, 나국화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청년 남자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전날 양령아가 이곳에 온 이후로, 청
오래동안 해외에 있었던 탓에 국내의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나국화는, 북양 왕을 제외한 한지훈의 신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한지훈이 원 씨 집안 가주들을 죽인 소식 또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직감으로만 봤을 때, 한지훈 이 사람은 연약하기만 한 선비처럼 보였다. 이런 사람은 괜히 자신의 소대에게 있어 짐만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비육은 지형만 복잡한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도 매우 복잡했다. 각종 세력들이 얽히고설킨 상황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재앙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그리하여 나국화는 사실 한지훈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가 않았다. “괜찮아요!”한지훈은 담담하게 한마디 대답했다. 그는 진작에 자신을 아니꼽게 보는 나국화의 태도를 간파했다. 다만 처음 낯선 곳에 오게 됐기에 될수록 그와 충돌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과거 한지훈은 종횡무진했었다. 정글이나 사막은 말할 것도 없고, 공중에서도 결투를 펼치며 한지훈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홀몸으로 전투를 하는 과정에 당연히 그는 몇 번이나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었다. 나국화가 말한 그런, 사무실에 앉아 전방을 지휘만 하는 문관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러나 설령 한지훈이 자신에 대해 해명한다 하더라도, 나국화의 인정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사실 나국화의 경계는 그리 높지 않고 단지 오성 용수의 실력에만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근 몇 년간 그는 칼끝에 피를 묻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고로 흑병대는 정보 조직이자 암살 조직이기도 하다. 나국화는 일찍이 삼성 지급 천왕계의 고수를 암살한 경험도 있고, 또한 순조롭게 현장을 탈출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한지훈은 그동안 삼성 천왕계의 강자를 한 번도 마주하기 못한 새내기 같았다. 게다가 한지훈의 나이는 기껏해야 20대였기에 더욱 무시하게 됐다. 그런 그가 이 나이에 북양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집안의 관계를 이용하여 직위를 남용한 거라 확신했고, 나국화는 이런 낙하산들을 절
사실 양 씨 어르신은 처음으로 진우에게 이런 요구를 한 것이었다. 그의 손녀인 양령아는 흑병대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비육에서 일하지는 않고 유럽에서 킬러 소대의 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한지훈이 비육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재빨리 자신의 할아버지한테 연락하여 자신을 비육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사실 한지훈은 용국 내에서만 명성이 자자한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도 일찍이 신화 속 인물처럼 소문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오래전부터 한지훈을 숭배하고 있었던 양령아는 이 기회에 한지훈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모처럼 다가온 귀한 기회에 그녀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우는 양령아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일성 사령관의 실력이었다. 비육의 그 소대 성원 중에서도 실력이 가장 약했다. 그리하여 진우는 한지훈에게 그녀의 안전을 꼭 확보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이튿날 아침, 한지훈은 비육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한지훈은 줄곧 머릿속으로 비육에 도착한 후 어떻게 유회원이 감금되어 있는 그 피라미드를 찾아갈 것 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필경 비육에는 피라미드가 수백 개에 달했고, 그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었다.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놈이 눈치를 채면, 즉시 유회원을 다른 곳으로 옮겨가 계속 수감하고 자칫 했다가는 죽일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 나자 한지훈은 일단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고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는 착륙하였다. 한지훈은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는 기내를 나섰다. 사실 이 비행기는 한지훈을 위해 특별히 안배된 전용기였기에 다른 여행객은 전혀 없었다.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사다리 아래에는 일찍이 젊은 남녀 몇 명이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지훈을 가장 먼저 발견한 한 젊은 여자가 옆에 있는 중년 남자에게 말했다. “대장 님, 그분 맞죠?”젊은 여자는 손으로 한지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