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강현준이 왔다.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고월영이 누군가의 부추김으로 일어섰다.어딘가로 이동한 듯했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하얀 옷차림의 두 여자에 의해 의자에 던져졌다. 칼을 뽑은 다른 한 여자가 나타나 그녀를 노리고 있다.“무엇 때문에 이러시는 거죠?”강현준의 시선이 고월영에게 향했다.눈을 뜬 그녀도 강현준을 응시했다.그녀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그의 실루엣만 간신히 잡을 수 있을 정도이지 또렷하지 않다.그저 그녀를 힐끗 보고 시선을 돌린 강현준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저의 사람을 여기로 끌고 온 교주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그는 무홍일을 보았다.높이 자리 한 무홍일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운조에 왔으니 전부 제 손님이죠. 전 그저 현왕을 백교단에 초대한 것 뿐이에요.”“이것이 교주님이 손님을 대하는 방식인지요?”고월영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칼자루에 그의 시선이 꽂힌다.하지만 그의 표정엔 아무런 동요도 없다.무홍일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현왕은 최고의 무예를 지녔으니 전 단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죠.”“전 돌려서 말하는 걸 질색하는 성격입니다.”“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현왕을 가슴 아프게 해야겠네요.”그녀의 손에 날카로운 철핀이 쥐어져 있었다.고월영은 정신을 차려보려 애썼지만, 몸속에 남아있는 약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강현준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교주님도 제가 여자 때문에 고통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겠죠? 차라리 여기에서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무홍일은 손가락 끝을 튕기며 고월영 옆에 서 있는 부하에게 신호를 보냈다.“그럼 우리의 수련법도 보여줄 겸 먼저 얼굴부터 건드려라.”“네.”여자의 손에 들린 칼이 고월영의 얼굴에 닿았다.고월영은 눈을 감았다.하지만 두려움의 흔적은 없었다.꽤 재밌는 여자네.그녀의 얼굴을 한번 슥 보던
큰 소리와 함께 강현준은 고월영을 안은 채 문밖으로 쓰러지고 말았다.무홍일의 손바닥이 강현준의 몸에 닿았다.진동만 간접적으로 느낀 고월영이었지만, 입속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급기야 피까지 토했다.이것만으로 그 손바닥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현준은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헌신했다.두 사람이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강현준이 몸을 굴려 모든 충격을 흡수했기 때문이다.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그들은 바닥에 쓰러졌다.강현준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고 새빨간 피가 그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고월영은 그의 몸 위에 쓰러졌다. 빨갛게 물든 그의 옷이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가요. 난 당신을 두려워했을 뿐이지, 한 번도 좋아한 적은 없어요.”강현준이 혼자였다면 이런 상황에 놓이지도 않았을 것이다.그에게 그녀는 그저 짐일 뿐이라 생각했다. 강현준은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김... 치국을 들이킨 모양이네. 내가 너 때문에 이런다고...?”그는 또다시 피를 토했다.“하! 의외네요. 냉혈한 현왕에게도 오늘 같은 날이 있군요.”무홍일이 밖으로 걸어 나오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인 무홍일의 모습은 너무 차갑고 무자비했다.그녀의 뒤에는 딸 무안희가 따르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강현준을 바라본 그녀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그도 이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자신의 몸도 기꺼이 바칠 만큼 좋아하고 있었다!그녀의 손뿐만 아니라 온 몸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그때 고월영을 품에 안은 강현준이 갑자기 몸을 돌리며 일어났다.다리에 아직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고월영이 있는 힘껏 그를 밀쳤다.“고집 부리지 마라!”강현준이 무섭게 으름장을 놓았다.고월영이 고개를 저었다.“종일 비난만 하는 당신과 내가 진짜 함께 있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오라버니만 아니었다면 한시도 당신 옆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너...”강현준의 호흡은
고월영이 깜짝 놀라 외쳤다.“전하! 조심하세요!”하지만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잊은 듯했다.그 손바닥의 위력은 거센 바람을 일며 주위를 휩쓸고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하지만 그는 아무 미동도 없었다.그에게는 오직 한마디만 맴돌고 있었다.‘당신이 나를 만질 때마다 너무 역겨워요.’매번, 그녀는 역겨워하고 있었다니…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강현준은 그만 바닥에 쓰러졌다.그때 누군가가 그를 감싸며 모든 충격을 대신 받았다.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고월영이었지만 힘이 하나도 없었다.강현준을 대신해 몸을 던진 그 여자는 바로 방에서 그녀의 얼굴을 만지면서 혼잣말을 했던 그 여자였다.무안희!“안희야!”무홍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바로 무안희의 상처를 확인하려 했지만, 강현준이 이미 냉정을 되찾은 상태라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강현준이 무안희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까요?”그때, 마침 도착한 12대가 안으로 진입했다.연이수도 고월영에게 급히 다가갔다. “왕비님, 괜찮으신가요?”고월영은 연이수의 도움을 받으며 강현준의 뒤로 몸을 숨겼다.강현준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홍일을 노려보았다.“어떻게 감히!”무홍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애한테 어떻게 이런 모욕을 줄 수 있죠?”“허.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나를 모르셨다고요?”강현준이 무자비하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그의 가벼운 손짓에 무안희의 옷이 벗겨졌다.뽀오얀 피부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났다.무안희는 여전히 피를 토하고 있었다. 시야의 모든 것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주 위태로웠다.그녀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 했던 그 남자는 정작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강현준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고용기를 당장 데려오지 않으면 옷을 몽땅 벗기겠습니다.”“강현준!”“농담 아닙니다. 백교단의 여신이 알몸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 선다면 과연 어떤
강현준의 눈빛이 짙어졌다.갑자기 그가 무안희를 번쩍 들더니 입을 열었다.“돌아가라!”12대는 두 사람을 호위하며 백교단과 대치 상태로 조심스럽게 후퇴했다.고용기도 무기력한 고월영을 부축하며 뒤를 따랐다.한 여인이 둘을 쫓아오며 다급하게 붙잡았다.“고용기, 거기 서!”고용기는 그저 한번 힐끗 보고는 대꾸하지 않았다.그러자 그 여인이 다시 덧붙였다.“이렇게 가 버리면 죽는다!”“내가 그걸 두려워할 것 같으냐?”고용기는 고월영을 부축하며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문을 나서니 현영이 다가왔다.강현준은 무안희와 함께 말에 올랐다.그녀의 옷은 온통 피범벅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지금이 제일 행복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그의 품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았다.“장군님, 제 말에 타세요.”단번에 말에 몸을 실은 고용기는 고월영에게 손을 뻗었지만, 고월영의 시선은 정작 앞장선 그의 뒷모습에 머물러있었다.움직이려 하지 않던 그녀는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고용기가 그녀를 끌어올렸다.“이랴!”강현준을 태운 현영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갔다.한 손에 고삐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고월영을 감싼 고용기가 그들의 뒤를 바짝 따랐다.뒤에는 12대가 따라오고 있었다.연이수가 맨 뒤를 지켰다.그러다 그들을 따라오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날이 밝았다.그들은 다행히도 무사히 운조를 떠났다.무안희의 상태는 조금 심각했고 계속 피를 토하고 있었다.강현준은 숲이 울창한 곳에서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는 직집 무안희를 안고 말에서 내렸다.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히자 무안희가 그의 옷을 힘겹게 잡으며 말했다.“... 날 두고 가지 마세요.”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는 표정이 어두웠다.“제가 한번 볼게요.”고월영이 고용기의 부추김을 받으며 다가왔다.체력은 이미 상당히 회복된 상태였다.다행히도 그녀가 들고 있던 가방은 그대로 있었다.강현준에 다가간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하지만 그는 너무 쌀쌀맞았다
무안희는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을 호소했다.“가슴이 너무 아파요. 나...”그녀의 얼굴색이 갑자기 바뀌더니 또다시 새빨간 피를 토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고월영은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그럴 리 없어요. 금방 나아져야 하는데?”“만지지 마세요!”무안희는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거절했다.너무 흥분한 탓에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하지만 난...”“그만 해라!”강현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제지했다. 그러더니 옆으로 밀쳐 버렸다. 오늘따라 힘이 없던 그녀이기도 했고 약 기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에 맥없이 밀린 그녀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급기야 쿵- 하더니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영아!”고용기가 재빨리 움직여 그녀를 부축했다.“무홍일에게 당한 거라 쉽지 않을 거다. 그만 해도 된다.”“치료할 수 있어요. 오라버니.”고월영은 고개를 들어 고용기를 바라보았다.고개를 끄덕이던 고용기는 또 다시 고개를 저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라버니는 그녀를 믿고 있다는 것을 고월영도 알고 있다.하지만 오라버니는 현왕과 저 여자가 그녀를 믿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하여 계속한다면 무의미한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라 판단했다.“너무... 아파요.”무안희는 강현준을 잡으며 애원했다.“저... 이대로 죽는 건가요?”강현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표정만 한층 어두워졌을 뿐이다.그가 몸을 돌려 고용기를 보았다.고용기가 즉각 반응했다.“전하!”“여기는 이제부터 자네가 지휘하거라. 수성에서 보자!”강현준은 무안희를 번쩍 안아 들고 말에 올랐다.무안희도 자연스럽게 그의 품속에 안착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어깨너머로 고월영에게 날아가 꽂힌다.차갑게 식은 눈빛이다.고월영도 그저 한번 쳐다봤을 뿐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강현준은 무안희를 데리고 사라졌다.그는 아마도 먼저 수성에 도착해 의사를 찾아 그녀를 치료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그들이 떠나고 연이수가 고용기에 다가왔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월영은 고용기가 수성을 비운 그 잠깐동안 궁에서 일어 난 일들을 간략하게 알려주었다.그 얘기를 들은 고용기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난.. 마법에 걸렸다.”“아까 쫓아오던 그 여자애가 한거에요?”그 여자의 모습은 한눈에 보아도 알 것 같았다. 오라버니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흑심이 가득했다.하지만 태도가 너무 거만하다.“아니야. 그 여자는...”고용기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심지어 고월영의 시선마저 피하는 듯했다.“그 사람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난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 했을 거다.”“그럼 지금은...”“많이 괜찮아졌다.”고용기는 마법에 걸린 것에 대해 길게 얘기하려 하지 않았다.“운조가 쳐들어오고 있으니 하루빨리 돌아가서 성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다간 가족들이 나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될 거다.”그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고월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그저 무사하게 돌아왔으니 된 거라고 생각했다.“여기에 오면서 운조와 수성의 지형에 대해 알아봤습니다.”도둑 마친 짐을 다시는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연이수가 그대로 돌려주었다.고월영은 지형도를 펼치며 설명했다.“여기는 수성의 병사들의 방어가 허술하지요. 그러니 그들은 특수부대를... 다시 말해, 아주 강력한 정예부대를 투입해 이곳을 돌파구로 삼아 공격할 겁니다.”그녀가 표시한 곳을 살펴보던 고용기는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다.“맞다, 여기는 방어력이 약한 곳이다!”그는 놀란 표정으로 동생을 보았다.“너도 전술에 대해 아느냐?”고월영은 입술을 깨물며 쭈뼛거렸다.“군사 서적을 조금 읽었을 뿐입니다.”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21세기에 그녀가 공부한 학문은 특수 군사 의학이었다. 실전에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은 모두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 것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이다.이 지형도는 현대의 표시 습관과 많이 다른게 있어 처음에는 보기가 조금 어려웠지만, 몇 번 더 보고 나니
수성까지 반나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고용기는 12대에게 다섯 갈래로 나뉘어 걸음을 재촉하라 명령했다. 그리고 고월영의 우려도 알리게 했다.그날 밤, 고용기와 고월영의 옆에는 연이수와 또 다른 한 명만 남았다.연이수는 여정을 미리 확인하러 갔다.요 며칠 잘 먹지 못하고 있는 고월영이 신경 쓰였던 연일은 그들이 휴식하는 동안에 산에 한 번 오르기로 했다.그는 산닭이라도 잡아 고월영을 몸보신 해주고 싶었다.그래서 고용기와 고월영을 지키던 진영에 공백이 생겼다.고용기의 안색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자정이 가까워지자, 고용기는 그녀더러 숲속 사냥꾼의 오두막에서 한숨 돌리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뒤편에 자리 잡았다.오라버니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했다. 몰래 맥박을 재 보았지만, 별다른 증산도 없었다.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그때, 갑자기 돌풍이 휘몰아쳤다.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고월영은 재빨리 칼을 손에 쥐고 문 뒤로 몸을 숨겼다.아니나 다를까, 오두막밖에 하얀 형체가 나타났다.또 백교단 사람이었다!적이 오라버니가 쉬고 있는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었다.적이 한 명임을 확인한 고월영은 곧바로 그들에게 덮쳤다.누군가가 급습할 거란걸 예상하지 못했던 여인은 하마터면 칼에 찔릴 뻔했지만,그 여인의 무술 실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민첩하게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꺼내 뒤로 휘둘렀다.고월영은 살짝 몸을 숙여 칼을 피했다.그녀의 날카로운 칼날이 또 다시 여인의 가슴을 향했다.여인은 상대의 실력에 놀라는 듯했다. 백교단으로 잡혀 온 고월영은 아주 연약한 존재였는데 말이다.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그녀의 팔이 칼에 긁혔다.퍽- 소리와 함께 소매가 찢어지고 팔에 칼자국이 찍혔지만, 다행히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순간, 허술한 바늘이 여인의 다리에 꽂혔다. 여인은 자신을 찌르고도 또 은색 침까지 날릴 줄은 생각지 못해 그만 맞고 말았다. 그러자 반신이 마비되어 갔다.쿵- 소리와 함께 여인은 바닥에
고용기는 그날따라 너무 이상해 보였다.해 질 무렵부터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벽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하마터면 걸음이 꼬여 넘어 쓰러질 뻔할 정도였다. “오라버니.”깜짝 놀란 고월영이 그에게 급히 다가갔다.“다친 겁니까? 대체 누구 짓입니까?”“난 괜찮으니 다가오지 마라.”고용기는 연일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녀를 해치지 말라.”고개를 돌린 고월영은 그제야 연일에 의해 바닥에 쓰러진 여인을 볼 수 있었다.그날, 그들을 끝까지 쫓으며 떠나지 못하게 막았던 그 여자였다.“그 사람은 오라버니 생명의 은인입니다.”고월영은 다급하게 해명했다.잠시 멈칫하던 연일이 손에 힘을 풀었다.잽싸게 몸을 일으킨 여인은 입가에 흐르는 피도 닦지 않은 채 고용기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고월영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여인이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사흘이 지났으니 오늘 마법이 몸에서 나타날 거예요! 난 그걸 막으러 왔고요.”마법?고월영의 심장이 쫄깃해졌다.오라버니의 마법을 이 생명의 은인이 풀어준 게 아니었어?그때 뒤에 서 있던 고용기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고월영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분명히 고통을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여인은 급히 달려와 고월영을 밀치고는 그를 부축했다.“얼른 약으 드세요!”...약을 삼킨 고용기는 금방 잠이 들었다.얼마 안 되어 원래의 혈색도 되찾았다.고월영과 무아린이란 이 여자는 고용기의 옆에 서서 곁을 지켰다.문밖에는 연일이 지키고 있었다.그는 여전히 무아린이 불안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문 바로 밖에 서 있어 무아린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막을 생각이었다. 연이수도 돌아왔지만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리에 앉은 무아린은 고용기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월영이 입을 열어 정적을 깨지 않았다면 문아린은 날이 밝을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