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린과 무안희는 동복자매가 아니었다.무홍일에게는 아직까지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장남이 한 명 있었다.그는 어렸을 때 백단교를 떠났기에 무아린이나 무안희도 그의 얼굴을 거의 본 적 없었다.어쩌면 만나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무아린과 무안희는 성격도 서로 달라서 자매지간인데도 별로 친분이 없었다.잠시 고민하던 무아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건 잘 모르겠네요. 모르는 사이 같기도 한데….”“두 사람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고월영이 물었다.무아린은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냥 제 느낌이지만 어쩐지 아예 모르는 사이 같지는 않아서요.”“알겠어요.”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 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무안희는 제 손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언젠가는 한번 찾아가 봐야 할 수도 있겠네요.”“걔가 마마 손에 중상을 입을 리 없는데요?”무아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무안희는 마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합니다.”“그렇다면 안 죽을 걸 알고 일부러 나섰을 가능성이 크겠네요.”무안희가 강현준의 신변에 남기 위해 그런 방법까지 생각했을 줄은 몰랐다.얼마나 애모하면 그런 방법까지 생각했을까?무아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현장을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지 않았나요?”무아린의 말투나 행동에서는 언니에 대한 걱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같이 수련한 건 아닙니다. 무안희는 어머니와 함께 수련하고 저는 혼자 했지요.”고월영은 차라리 무아린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만약 같이 수련했다면 무아린도 무안희나 무홍일처럼 잔인무도한 성격으로 길러졌을 수도 있었다.“어쩌다가 무 교주 같은 사람과 함께하게 된 건가요?”“어릴 때 그분이 다 죽어가던 저를 주워다 키우셨습니다. 저는 그분께 목숨을 빚졌지요.”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침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 그녀는 외출 준비를 했고 무아린
여왕 강현우였다.안비나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고월영과 빨리 만나기 위해 홀로 산을 내려온 것이다.그렇게 반가운 마음에 영하각으로 달려갔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그는 지나가던 시종에게서 그녀가 현왕의 처소 뒤뜰에 있는 작은 처소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그리고 그 시종에게서 고월영을 모시던 시안이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강현우는 고월영의 손을 꼭 잡고 모두를 물린 채, 영하각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지언과 마찰이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지언은 어쩔 수 없이 홀로 강현준에게로 명을 전하러 돌아갔다.여왕이 먼저 돌아왔다는 소식은 강현준도 궁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듣게 되었다. 현왕의 첩자마저 따돌리고 돌아온 것이다.“형님께서 왜 너한테 그렇게 모질게 대하신 거지?”강현우는 여전히 고월영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그녀는 지난번에 헤어졌을 때보다 많이 야위어 있었다.초췌하지는 않았지만 불면 쓰러질 것처럼 살이 다 빠진 그녀를 보자 안쓰러웠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마마마께 아이가 낙태되었다는 얘기는 들었다.”“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요.”고월영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잔뜩 상심한 그에 비해 그녀의 태도는 차분하기만 했다.“그때는 회임한 사실도 모르고 제 피로 오라버니께 혈청을 제련하느라 아이가 죽어가는 줄도 몰랐어요. 그러다가….”“나중에 어떻게 되었는데?”강현우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캐물었다.사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 관한 소식을 간간히 듣기는 했지만 당사자에게서 직접 들으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나중에요?”그녀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미소가 강현우를 불안하게 했다.“어마마마께서 뭐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월영아!”강현우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여기서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말해 보거라. 말을 해
강현준이 영하각으로 찾아왔고 형제는 정자에서 독대하게 되었다.“월영이는 저의 왕비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한, 여왕비의 자리는 평생 월영이의 것입니다.”강현우가 이토록 강경한 말투로 강현준에게 요구한 건 처음이었다.강현준이 싸늘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내 여인이다!”그 말에 강현우는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팠다.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고월영이 내전에서 걸어나왔다.“저는 망월각의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그녀의 말에 강현우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월영아, 아까는….”“전하의 병을 고쳐드리면서 저는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합니다.”그녀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강현우는 조바심이 났다.“넌 처음부터 나한테 빚진 게 없었다. 오히려 내가 너한테 목숨을 빚졌지!”고월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강현준의 앞으로 다가갔다.“전하, 저는 자의로 무언가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화가 나시더라도 저한테 화풀이하지는 마세요. 저는 억울합니다.”강현준은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는 뒤돌아섰다.“형님!”강현우가 그들을 뒤쫓아왔다.강현준은 싸늘한 목소리로 동생에게 말했다.“현우야, 난 항상 너에게 양보만 해왔다.”그 말에 강현우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달려가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는 집요한 시선으로 고월영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말하거라. 네 입으로 말한다면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그녀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제 입으로 여왕비의 신분을 원한다고 말한 건 고월영이었다.그런데 강현준이 오자마자 태도를 바꾼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월영은 말없이 강현준의 옷깃을 잡았다.이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강현준은 싸늘하게 동생을 지나쳤고 고월영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머릿속이 하얘졌다.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그렇게 그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서 있다가 뒤늦게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한 사람이 저를 끌고 가면 한 사람이 잡으러 오고! 제가 어떤 선택을 하시길 바라십니까?”매번 스스로 원해서 한 선택이 아닌데도 그녀는 모든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고월영은 너무 억울하고 원통했다.강현준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고월영은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해졌다.매번 그녀가 이런 표정을 보일 때마다 강현준은 화가 치밀었다.“대체 현우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이냐?”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월영 아씨라는 신분이 싫다고 했습니다. 죽든가 왕비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아직도 여왕비라는 신분에 미련을 못 버린 게냐?”강현준의 두 눈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고월영은 한숨을 쉬며 그에게 물었다.“현왕비는 안 됩니까?”순간 그는 할 말을 잃었다.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그녀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직접 그를 위해 비 간택을 준비한다고 설치던 그녀였다.“말이 아씨지 첩이나 다름없잖습니까. 누구든 저를 괴롭힐 수 있고 신변을 시중 들던 시종마저 누군가의 입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현왕비라는 단어가 그의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고월영은 침상을 내려 그에게 손을 뻗어 목을 끌어안았다.강현준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그녀가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행동이었다.또 무슨 꿍꿍이지?“조금 전에야 알았습니다. 현우 오라버니는 전하에 비하면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요.”“그래서?”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제가 원하는 건 제 앞에서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강한 사내입니다. 풋내 나는 어린아이는 싫어요.”그녀는 고개를 들고 촉촉한 눈망울로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과거의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처음에 저에게 다가와 주신 분이 현우 오라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분을 연모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하에게 있었습니다.”“고월영!”강현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이런 말로 나를
그날 밤 고월영은 현왕의 침소에 머물렀지만 그는 놀랍게도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그토록 반항할 때는 오기로라도 그녀를 정복하려 했는데 고분고분해진 지금은 그녀를 껴안고 잠들었다.강현준 본인도 자신이 뭘 어쩌자고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반면 고월영은 그의 품에서 아주 단잠을 잤다.다음 날 아침, 밤새 잠에 들지 못한 강현준은 문밖에서 들리는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문밖을 지키던 지언은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은 소리로 소식을 아뢰었다.“전하, 폐하께서 급히 입궁하시랍니다!”강현준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지언과 함께 입궁했다.그런데 대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강현우와 고용기였다.“아바마마, 왕비만 홀로 남겨두고 설산에 가 있으면서 왕비가 왕부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 장군을 왕부에 보낸 것인데 그 일로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강현준은 대전으로 들어서자마자 강현우가 하는 말을 듣고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입성하자마자 고용기를 구한답시고 달려왔단 말이지?’그는 동생의 태도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형님, 오셨습니까.”공손한 태도였지만 전처럼 살갑지는 않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아바마마, 오해로 인하여 벌어진 일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 담보드리건대, 고 장군은 절대 형님께 불경한 마음을 품고 왕부에 잠입하지 않았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고용기는 감격한 눈빛으로 여왕을 바라보고 있었다.고고한 황족인 그가 고월영을 위하여 목숨까지 담보로 내놓다니. 동생을 향한 그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황제는 어릴 때부터 병약한 여왕에게 항상 관대한 편이었다.항상 앓기만 하던 아들의 병이 다 나았고 활기가 넘쳐 보이는데 당연히 이런 일로 아들의 기분을 상할 이유가 없었다.“현준아, 현우가 오해라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강현준이 직접 끌고 온 사람이니 겉치레라도 그의 의견을 물을 수밖에 없었
고월영의 예상은 적중했다.황궁에서 돌아온 강현우는 곧바로 그녀를 데리고 입궁해서 태후전으로 갔다.“이러다가 현왕 전하께서 뒷목 잡고 쓰러지시겠어요.”고월영은 강현우에게 다가가 말했다.조금 전에 태후께 인사를 드리고 지금은 별채로 가는 길이었다.“아바마마께 현왕부에서 독립하겠다고 동의를 구했다.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저택을 새로 짓지 않고 기존에 있던 저택을 수리해서 들어가겠다고 했어. 아바마마도 흔쾌히 동의하셨고.”“왕부를 새로 명명하는 일인데 어찌 낡은 저택을 수리해서 들어간다고 하십니까? 사람들이 여왕 전하께서 재정이 궁핍하다고 오해할 겁니다.”길을 걷던 고월영은 그네를 보고 다가가서 그네에 앉았다.강현우는 그녀의 뒤에서 가볍게 그네를 밀어주며 말했다.“돈이 궁하지는 않다만 형님에 비하면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 겁니까?”고월영이 인상을 찌푸렸다.“너만 개의치 않는다면 너를 먹여 살리는데는 문제 없을 거란 말이다.”그 말에 고월영이 웃었다.“제가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인가요? 현왕부에서 시첩으로 살기보다는 낫겠지요. 적어도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안 해도 되고 매일 누가 괴롭힐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니까요.”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이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월영아.”“예, 전하.”고월영은 그의 손을 살짝 밀치고 그네를 탔다.강현우는 옆에서 드디어 홍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내가 지킬 것이다.”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월영은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내 말을 못 믿는 것이냐?”그가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쩌면 형님의 가호 아래 살아온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믿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전하의 진심을 믿어요. 하지만 황족으로써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상황도 도래할 겁니다. 다른 걸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전하의
하지만 고월영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혹시 폐하께서 너무 흔쾌히 승낙하셔서 불안하신 겁니까?”눈치 빠른 무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폐하께서는 현왕 전하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게 불안하실 겁니다. 황위에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그러니까 사실 폐하께서도 처음부터 두 전하를 갈라놓을 생각이 있으셨던 거지요?”무아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고월영과 함께한 뒤로 점점 머리 쓸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장기간의 병을 극복하고 드디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아들인데 황제도 어느 정도 실권을 쥐여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하지만 실권을 장악한 여왕이 현왕의 편에 서게 된다면 현왕의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여왕이 아니더라도 현왕이 가진 세력은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데 여왕까지 복귀했으니 정왕 혼자서는 현왕과 대적하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황제가 바라는 건 세력의 균형이었다. 어느 하나라도 기울기 시작하면 황제에게는 득 될 것이 없었다.고월영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황제의 마음은 가장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여왕 전하는 바로 떠날 수 없겠지만 장군부가 먼저 움직이는 건 나쁘지 않지요.”고월영이 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장군부 가족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전하의 옥패를 가지고 장군부에 한번 더 다녀오세요. 황제 폐하의 성지가 떨어지면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바로 수성으로 출발하라고 하세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만류하고 싶었지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낭자가 오라버니를 따라가고 싶다고 하면….”“전하의 곁에 남겠습니다.”“오라버니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요?”고월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아린이 옆에 있으면 그녀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뛰어난 무공 실력이 있었기에 중요한 심부름을 시키기에도 편했다.만약 그녀가 떠난다면 고월영은 그녀보다 믿을만한 사람을 당분간은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하지만 오라버니를 연모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보내
강현준의 등장은 고월영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그가 방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계했다.“태후 마마의 궁으로 숨어들면 나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을 고월영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장군부의 사람을 몽땅 수성으로 옮기고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면 나에게서 완전히 멀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하찮은 벌레가 살 길을 도모한 것뿐입니다. 전하께서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듯이 저도 가족들에게 살 길을 찾아준 것뿐입니다.”고월영은 뒤로 뒷걸음질치다가 결국 침상에 부딪혀 주저앉았다.“전하께서 미워하는 사람은 저이지 않습니까. 가족들이랑 이 일은 무관하니 그냥 살 길을 찾아가도록 내버려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강현준은 성큼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래서 어제까지 내 품에서 비바람을 막아줄 남자를 원한다고 했던 네가 오늘은 현우의 품으로 찾아들었단 말이냐?”그는 이 여자의 가식에 분노했다.가장 화가 나는 건 어제 그 말을 믿었던 자신이었다.황제의 임무를 받고 황성을 나간지 하루만에 벌어진 일이었다.황제마저 일부러 그를 그들에게서 멀리 떼어냈고 황태후마저 고월영과 강현우를 돕고 있었다.그들은 마치 일가족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를 홀로 외부에 고립시켰다.“고월영, 그분들을 동원하면 나를 고립시킬 수 있을 것 같았어?”고월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남자는 손을 뻗어 우악스럽게 그녀의 턱을 잡았다.그녀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하, 사실 아무도 전하를 고립시키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시겠나이까?”강현준은 말없이 손에 힘을 꽉 주었다.통증을 느낀 고월영이 미간을 찌푸렸다.“전하, 이 상황을 만든 사람은 전하이십니다. 태후마마마저 전하께서 저에게 다른 감정을 품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날 연회에서 전하께서 억지를 부려 생긴 결과이지요.”“전하는 황족이라 잘못을 해서 폐하의 심기를 건드린다고 해도 훈계 몇 마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