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도련님은 지금 숲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초가집에서 지내고 있다.이 초가집은 분명 임시로 지은 것이다.초가집은 아주 간단했고 그저 며칠 동안 지낼 뿐 오래 살 수 없어 보였다."저는... 도련님께서 바늘 열 개만 만들어 주시길 바라옵니다. 길이는 일반 은침의 두 배여야 하옵니다."고월영이 숨을 헐떡이며 쫓아갔을 때, 무 도련님은 이미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보수는 무엇이옵니까?"그가 물었다."도련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사옵니다."돈은 부족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다른 나라의 첩자다. 아마도 정보 따위를 달라고 할 것이다.고월영이 먼저 말을 했다."현왕부의 모든 정보를 제외한 나머지는 도련님께서 얼마든지 말만 하십시오."무 도련님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만약 내가, 당신의 하룻밤을 원한다면 어찌하겠사옵니까?"고월영은 눈빛이 어두워졌고 불쾌했다."저는 남편이 있는 여인이고 유산을 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사옵니다. 설령 제가 원한다 하더라도 도련님께서는 싫지 않으십니까?""그럼 이리 오십시오. 내 침대에 누워 내가 싫어하는지 보십시오."그는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침대를 한 번 보았다. 그 모습은 보기에 장난 같지 않았다.고월영은 손바닥을 꽉 움켜쥐었다.무 도련님은 다시 말했다."그저 내 뒤에 있는 침대에서 한잠 주무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든 반항하지 않으면 돼옵니다.""따를 수 없사옵니다!""허, 유산을 한 지 한 달도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싫어하오니 걱정하지 마시지요."고월영은 여전히 경계를 하는 표정이었다.무 도련님은 웃으며 말했다."내 생김새를 보아 여자가 모자란 남자로 보이십니까?"고월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이 조건으로 여인을 원하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들러붙을 것이다.그러나 낯선 사람의 침대에서 자는 것도 원치 않았다."설마 현왕 전하께서 나아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옵니까?""무엇을 아시는 것이옵니까?"그녀는 마음속으
그 사람은 아직도 그녀의 옷을 풀고 있었다.고월영은 사색이 되어 갑자기 너무 울고 싶었다.그녀는 이미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렇게 그녀를 대하는 것인가?그녀는 자신을 냉정해지게 하려 애썼다.겁내지 말자!그저 결백의 잃은 것이고, 안되면 이 목숨도 버리면 그만이다.그녀의 인생은 사실 잃을 것도 별로 없다.그 사람은 그녀의 옷자락을 풀었고 그녀는 자신이 곧 모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심문이 있는 위치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그는 그녀에게 침을 놓고 있는 것 같았다.은침이 그녀의 심문에 찔러진 후, 침대 옆의 사람은 또 그녀 복부의 옷을 열었다.고월영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이 행동은 너무 고상하지 않았다.만약 의사라면 현대인인 그녀는 받아들일 수 있다.다만 이곳은 그녀에게 족쇄와도 같다. 분명 스스로 침을 놓아 치료를 할 수 있는데도 그녀는 시종 건드리지 못했다.그곳은 아이가 잠들었던 곳이다...남자의 손이 그녀의 복부에 떨어졌고 이내 따뜻한 기운이 그의 손바닥을 거쳐 그녀의 복부로 전해졌다.그 후 온몸에 퍼졌다.오랜만에 홀가분한 느낌이 몰려왔고 고월영의 의식은 점점 흩어졌다.그녀는 완전히 잠에 들었다.눈가에 맺힌 눈물 두 방울이 그녀가 잠든 순간 흘러내려왔다.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악의가 가득할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참을 수 있었다.그러나 이 세상에 아직도 낯선 사람이 그녀에게 이렇게 선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감동은 사람을 한없이 약하게 만든다...침대 옆에 있던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그녀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놀랄 정도로 차가웠던 아랫배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그제야 그는 진기를 거두었다.그 후 또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몸에 혈기가 돌게 했다......고월영이 깨어났을 때 초가집에는 그녀 혼자만 남아있었다.옷차림이 단정하지 않다!그녀는 다급히 앉아 재빨리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
"이 여자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옵니까?"고월영의 말은 연일에게 한 것이다.연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전하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고 하셨사옵니다.""방법이 무엇이냐?"고월영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흰옷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안희였다."지금 무슨 신분으로 나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이냐?"무안희는 차갑게 눈을 흘겼다.그리고 그녀는 연일을 바라보았다."그녀조차도 방법이 없는 이상 저의 방법으로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무방하옵니다. 그러나 제가 현왕 전하에게 치료를 할 때, 이 여자를 보고 싶지 않사옵니다."연일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월영의 곁으로 걸어갔다."여왕비, 어서...""저 여자가 오늘 밤 사황형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말을 했습니까?"고월영이 다시 물었다.연일은 비록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예."그러니 이곳에는 더 이상 고월영이 필요 없다.그녀가 어젯밤 전하에게 맥을 짚어 주었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스스로 아직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연일 나리는 이 여자가 악랄한 것을 알면서도...""누구든 전하를 깨울 수만 있다면 그 자는 우리 현왕부의 은인이옵니다."그래서 무안희가 사람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마라 해도 상관없다.연일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난원도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보아하니 난원마저도 설득된 것 같았다."저는 이 여자가 어떻게 나리들을 설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여자가 무슨 수를 쓰고, 그 수가 가져오는 결과는 결코 나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고월영, 이간질을 그만하거라!"무안희는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이곳은 너를 반기지 않으니 어서 꺼지거라!"그녀가 손바닥으로 그녀를 공격하려 하자, 고월영은 빠른 걸음으로 뒤로 물러가 난원을 보면서 낮게 말했다."이 여자는 사황형에게 충독을 써, 충독으로 사황형을 깨우겠다 하지 않았는가?"난원의
지언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월영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강한 기세에 고월영은 어쩔 수 없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오늘 무 도련님이 그녀를 도와 치료를 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허약했던 체질로는 이미 지언의 진기로 인해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흐릿해질 것이다."3일!"밖으로 던져지기 전에 고월영은 연일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3일 안에 반드시 그를 깨울 수 있사옵니다. 만약 사황형이 3일 뒤에도 깨어나지 못한다면 저는 나리가 처리하도록 가만있겠습니다.""너는 저들이 너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무안희는 그녀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그럼 스스로 저의 목숨을 매듭지어 죽음으로 사죄하겠사옵니다. 그럼 되는 것이옵니까?"고월영은 그녀를 보지 않고 연일만 바라보았다."저의 방법이 사황형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면, 그의 몸속에 충독을 남기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나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하를 대신하여 이 결정을 내릴 엄두가 나십니까? 그의 체내에 충독을 남겨 언제든지 무안희에 의해 통제되게 할 것이옵니까?"그녀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연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전하의 성격으로 보아, 차라리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에게 통제를 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전하에 대한 나의 감정은 바다보다도 더 깊다. 나는 통제를 하지 않을...""좋사옵니다! 3일!"연일은 고개를 돌려 무안희를 노려보았다."무안희 아가씨, 돌아가십시오!"아직 한 가닥의 희망만 있다면, 그는 엉망진창인 충독을 전하의 존귀한 몸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다!그는 비록 고월영을 싫어하지만 고월영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누가 무안희가 장차 전하를 통제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연일, 또 저 여자의 감언이설에 속은 것이옵니까? 대체 저 여자에게 몇 번이나 속았습니까?"무안희는 화가 나 피를 토할 뻔했다!방금 분명 얘기가 잘 되었다!모두 이 망할 고월영 때문이다! 그녀는 왜 외출을 했
고월영은 무 도련님이 강현준이 말한 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 도련님의 목적이 강현준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그 사람의 성이 무 씨입니까? 그 자가 알려준 것이옵니까?"연일은 눈을 가늘게 떴고, 고월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더욱 강한 경계와 혐오가 담겨있었다."그래서 도대체 그 자와 무슨 사이십니까?""저는 그 자가 무슨 사람인지 모르옵니다. 그저 그 자의 성만 알고 있고, 계속 무 도련님이라 불렀지요.""지난번에 그를 찾아 물건을 만든 것까지 포함해서, 지금껏 저도 두 번 만났을 뿐이옵니다.""정왕의 사람들이 그를 찾고 있는데도 그의 종적을 찾아내지 못했사옵니다. 저도 사람을 보내 찾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여왕비는 그리 쉽게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이옵니까?"특별한 사이가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나?"제가 갔을 때, 그 마당은 이미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침 그가 물건을 되찾으러 와서 마주쳤을 뿐이옵니다.""여왕비는 뛰어나게 똑똑하십니다. 전하께서 이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그 마당의 모습도 보았는데 난적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리가 있사옵니까?"이 말에 고월영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확실히 알아맞혔다."그래서 알고 계셨사옵니까?"연일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고월영은 핍박에 못 이겨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손에 든 은침을 재빨리 거두었다. 지언이 갑자기 성질을 내어 그녀의 침을 망가뜨릴 가봐 걱정되었다.지금 망가진다면 그녀에게 무 도련님을 찾아 다시 열 개의 침을 만들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없을 것이다."저는 확실히 추측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찾은 것은 단지 기구를 만들기 위해서이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그래서, 그가 전하를 다치게 한 장본인이라 하여도 개의치 않으시는 것이옵니까?""예?"고월영은 두 눈을 크게 떴고 시선은 연일을 넘어 여전히 쓰러져 있는 강현준의 몸에 옮겨졌다.무 도련님이 그를 다치게 했다니, 무 도련님이 그 난적들의 주모인 것인
”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연일이 약간 분노한 기색으로 말했다.하지만 이번에는 고월영도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히 앞으로 다가와서 온몸으로 진기를 뿜어내는 연일과 시선을 마주했다.“그럼 어디 해보거라!”“이….”연일은 당연히 그녀에게 실질적으로 상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여왕비였고 상전이었다.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고 미운 상전이라도 아랫것이 상전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이때, 난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무 공자가 무슨 목적으로 이걸 만들었든, 그자가 만든 도구는 최상품 중의 최상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지언이 다가와서 연일을 잡아당겼다.“전 의원님까지 좋다고 하시니 그쪽에서 무슨 목적으로 이걸 보냈든 이것에 독이 있는지만 확인하면 될 것 같사옵니다.”도구는 도구일 뿐,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사용처가 달라진다.지언은 아직까지는 고월영을 믿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현왕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믿고 있었다.조금 전에 그녀가 한 말들을 들어봐도 그랬다.적어도 여왕비는 이 왕부에서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힌 적은 없었다.오히려 여왕을 구한 사람도 고월영이었다.여왕의 몸을 오랫동안 잠식시켰던 그 독을 제거한 사람이 고월영이었다.난원까지 3개월의 시간밖에 안 남았다고 포기했던 독이었다.그런데 여왕비는 혼자 힘으로 여왕을 살렸다.그것은 아주 대단한 업적이었다.지언은 연일을 힐끗 바라봤다.연일도 고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까 했던 말은 아마 분을 참지 못해서 홧김에 나온 말이 분명했다.지언의 말에 그는 이성을 되찾고 옆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지언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약조 하나 해줄 수 있겠느냐?”“무슨 약조 말씀입니까?”“이따가 현왕께서 발작을 일으키실지도 모른다. 침관을 뽑으려고 하면 지언 네가 전하를 꽉 잡아주거라. 이 침관은 나도 어렵게 구한 거라 다시 무 공자께 부탁을 드릴 수도 없어.”연일이 그녀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
고월영의 침관은 강현준의 사혈을 뚫고 그녀가 직접 제작한 약물을 그의 체내로 흘려보냈다.초저녁까지는 딱히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지만 자정이 되자 그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오르다가 자줏빛을 띄기 시작했다.육안으로 봤을 때는 중독된 것 같기도 했다.그러다가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의식을 회복하고 있다는 징조였다.난원은 크게 기뻐하며 강현준의 맥을 짚었다.“왕비마마, 전하의 맥상이 이상합니다!”그가 고월영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고월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난원, 내 현왕 전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자리를 좀 비켜줬으면 하네.”난원은 말없이 강현준을 빤히 바라보며 머뭇거렸다.“내가 현왕 전하를 해칠 거라고 생각하는가?”고월영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전하를 해친 진짜 가해자가 누군지 난원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난원은 말없이 물러갔다.밖으로 나오자 지언과 연일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난원은 아무 말없이 그들의 옆에 서서 문 앞을 지켰다.고월영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끝내고 침관과 약물을 정리해서 상자에 넣었다.그녀는 침상 옆에 앉아 멍하니 강현준을 바라보았다.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정신을 차렸을 텐데 그는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눈꺼풀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강현준 본인이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상황이었다.“그 정도로 이 세상에 실망하셨습니까?”고월영은 그의 손을 꼭 잡아주며 구슬프게 중얼거렸다. 손바닥에 온기가 돌아와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강현준은 눈을 뜨기를 거부했다.“전하, 아직도 저에게 화가 나 계신 겁니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저도… 회임 사실을 몰랐단 말입니다.”강현준의 눈꺼풀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사실은 눈을 뜨고 싶은 거지요? 뭐가 전하를 이토록 힘들게 만든 걸까요?’“전하, 눈을 뜨고 저를 한번 보세요.”그와 처음 만난지도 벌써 일년이 지났다. 둘이 언제부터 서로를 사무하게 되었는지 기
진심으로도 그의 의식을 불러올 수 없다면 복수심을 자극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그녀가 그 말을 내뱉기 바쁘게 방 안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오므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고월영은 다급히 그에게 손을 뻗으며 울먹였다.”전하….”그런데 그녀의 손길이 닫기도 전에 강현준이 손을 번쩍 들었다.이어진 건 숨막히는 고통이었다.사내가 그녀의 숨통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침상에 던져버렸다.눈을 뜬 고월영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사나운 눈빛과 마주했다.강현준은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노려보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조금 전에 했던 소리, 다시 지껄여 보거라!”“전하….”남자가 손가락에 힘을 꽉 주자 고월영은 순식간에 숨이 확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드디어 인정하는구나! 네가 내 아이를 죽였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는 점점 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그가 의식을 회복한 건 고월영에게도 기쁜 일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죽을 것 같았다.무안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의식을 회복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그녀를 죽일 거라는 말.설마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리다니!“현왕 전하….”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숨이 안 쉬어지고 심장박동도 느려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월영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전하….”고월영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눈을 떴다.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목안이 쓰리고 아직도 그가 숨통을 조이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아가씨, 드디어 깨셨군요!”그녀의 옆을 밤새 지켜준 시안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언이 기절한 채 꼼짝도 않는 고월영을 안고 돌아왔을 때, 시안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물 좀….”고월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목안이 너무 아파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시안은 다급히 달려가서 따뜻한 물을 잔에 따라 가져다 주었다.물을 마실 때조차도 그녀는 쓰린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너무 아파서 눈물이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