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준은 이름 없는 패위 앞에 꿇고 앉았다.채찍은 매몰차게 그의 등 뒤를 치고 있고, 빠르게, 그의 검은색 옷은 피로 한곳이 물들어갔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눈가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결국은, 채찍을 쥐고 있는 안비의 손만 계속 떨려왔다. 그녀는 다시 높이 들었지만, 계속 때려나갈 방법이 없었다.그를 때리면 무슨 소용인가?그를 때려죽인다 해도, 그의 결정을 바꿀 순 없다.그가 하려는 일은, 자신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안비는 화를 못 이겨 의자에 주저 앉았고, 두 눈은 총기를 잃었다."그 아인 3개월의 수명만 남았다."잠긴 말 한마디가,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강현준의 눈가에 조금의 흔들림을 더했다.그는 손바닥을 조금씩 조여 쥐었다.안비의 눈물은 참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왜 조금 기다려주지 못하는 거냐? 적어도, 그 아이가... 그 아이가 후회 없이 떠난 뒤에...""현우는 죽지 않습니다, 아들이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것입니다!"강현준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안비는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그의 등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그녀는 갑작스레 슬피 울기 시작했다."그렇게 현우를 좋아하는데, 왜 현우의 소원을 이뤄주지 못하는 거냐? 그 아이가 얼마나 고월영을 좋아하는지,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지 않냐! 현우는 그 여자애를 정말 좋아한다!"안비는 구슬프게 울었다.어떤 일이, 뜬 눈으로 아들이 세상을 곧 떠나게 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욱 비참할까?십여 년이 지나도록, 모든 사람들도 다 손을 쓰지 못했고 방법이 없었다.난원마저도 말했었다, 많아서, 3개월만 남았다고.3개월뿐이다!"3개월 뒤, 그 아이가... 그 아이가..."안비는 목이 메어왔고, 몸은 참을 수 없이 떨려왔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들을 설득하려 노력했다."현우가... 다음, 네가 무엇을 원하던, 본 궁이 다 들어주마, 응?""조금만 기다려주거라, 어떠냐?"하지만 강현준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안비는
고월영은 눈을 내리깔고, 앞에 놓인 차를 바라보았다.어젯밤의 일들을 겪고, 고월영은 안비가 자신을 보면, 무슨 기분일지 생각했었다.두 아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여자를 두고, 안비는 아마 그녀를 품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고월이 예상치 못한 건, 안비가 독을 탄 차로 해결하려는, 이리도 직접적인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고월영은 두 손으로 받아들고, 마시지 않은 채 탁자에 올려놓았다.안비는 그 차를 보며, 눈가에는 무언가가 스쳐지났다.안비는 겉으로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영이 너 설마, 본 궁이 사람을 명해 저 차에 독을 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고월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를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눈가에는 웃음기가 없었다.그녀는 담담히 말했다."모비는 농도 심하십니다, 모비는 사려가 깊으시고 현명하시니, 소첩을 독해하면 두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자연스레 아시겠지요."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모비께서 어찌 제게 독을 내리겠습니까?""그럼 왜 마시질 않는 게냐?"안비는 입꼬리의 웃음기를 버티지 못하고, 안색이 점점 싸늘해졌다.고월영은 진퇴에 능했다. 그녀는 담담히 답했다."소첩 오늘은 속이 안 좋아, 차를 마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마신다면, 구토를 할 수도 있습니다."안비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손을 휘둘렀다.청아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안비의 뒤로 가 서서 말없이 고월영을 노려보았다.고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모비, 사황형이 간택을 하는 일은, 소첩은 정말 모르겠사옵니다, 이 일은, 향후 모비께서 직접 결정하시면 돼옵니다, 소첩은 더 얘기를 할 자격도 없으니까요.""네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구나!"안비는 차갑게 ‘흥’소리를 내었다.고월영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어디 불쾌한 데도 없어 보이는듯 했다.그녀는 진심이었다."소첩은 확실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비께선 앞으로 소첩이 난감하게 하지 말아주시어요."여러 번 그녀를 이 일에 참여하게 하는 것. 사실 그녀는
그 약은, 결국 고월영의 손에 들어갔다.그녀는 잘 알고 있다. 오늘 밤 모든 게 순조롭든 아니든, 그녀는 이미 강현준을 배반하는 일을 한 것이다.그리고, 강현준은 앞으로 그녀를 원망할 것이다.안비의 이런 안배가, 어쩌면 가장 명석하고 정확할지도 모른다.그녀를 원망하는 게, 그녀를 시시각각 생각하는 것보다는 낫다.이런 삐뚤어진 관계는, 빨리 끝내야 한다.그날 저녁의 연회에 대해, 고월영은 많이 나서지 않았다.현왕부의 사람들이 알아서 하고 있다.그저, 대외적으로는, 여왕비가 이번 연회를 책임지었다 말했다.무엇을 위해 차린 연회인지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다."현왕 전하께서는 오늘 성을 나가셨습니다, 저녁에 오실지 모르겠네요."시안은 소식을 알아본 후, 바로 돌아와 고월영에게 고했다.고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돌아오는지 마는지와, 그녀가 연회를 차리는지 마는지는 다른 일이다.어차피, 청해야 할 사람은 다 청하였다."난 두 아가씨들을 만나러 가야겠어."고월영은 자신을 간단히 정돈하고, 객실로 향했다.오늘은 여왕비의 명의로, 두 아가씨를 청해왔다.객실은 전부 후원의 방들로 안배했다.강현준의 망월각과 머지않은 곳에 위치했다.고월영은 먼저 전옥빈을 만났다."지금, 현왕 전하를 취하게 만들 테니, 저한테 주동적으로 전하의 침실에 들어가라고요?"이 말을 들은 뒤, 전옥빈은 화를 못 이겨 얼굴을 붉혔다."여왕비 마마, 전 당신이 솔직하고 대범해, 친하게 지낼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고월영은 그녀의 분노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그저 그녀를 바라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나도 그저 내 생각을 얘기해 주는것일 뿐, 아가씨가 원하는지 아닌지는, 아가씨의 일입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옥빈을 향해 웃었다."어차피, 시간은 바로 오늘 밤, 망월각에 갈지 말지는, 아가씨께서 결정하세요."전옥빈은 화를 내며 말했다."전 절대로 그런 풍기문란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래
어젯밤의 고난을 겪고 난 뒤, 지금 강현준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고월영은 무의식 간에 도망가고 싶어졌다.지나온 일 년 동안, 대체 어떻게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와 그런 시절들을 보냈는지 알수 없다.그저 그가 충분히 잘 숨겼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 년 동안,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게 했으니, 대체 그는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고월영은 고개를 돌려 시안을 쳐다봤다.시안은 곧바로 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고월영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하지만 강현준이 옷을 갈아 입고 있는 건 예상치 못했다.고월영은 금방 들어서자마자 다시 나가려 했다.하지만 냉랭한 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들어오던가, 아니면 꺼지던가!"고월영은 깊은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숙인 채 들어섰다."지금 밖에 있는 사람이, 본 왕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았으면 하는 건가?"강현준은 그녀 뒤의 널찍한 방문을 노려보았다.하지만 이번엔, 고월영은 그의 말을 듣고 방문을 닫지 않았다.그녀는 문 앞에 서, 가까이에 가는 것조차 두려웠다."사황형, 오늘 밤 현왕부에 연회가 열리니, 시간을 내어 와주셨으면 합니다.""본 왕이 왜 참석해야 하지?"강현준은 자신의 갑옷을 벗어던졌다.갑옷이 긴 의자에 떨어지는 부딪힘 소리를 듣고서야 고월영은 저 갑옷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았다.적어도 몇십 근은 된다!고대의 장군들이 행군하고 전쟁을 하는 게, 진짜 이리도 고생스러웠구나.오전에 성을 나섰는데, 지금 이렇게 온몸에 혈흔을 묻히고 돌아왔다. 이 반날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난적들을 죽였을까?살생이 심하다."본 왕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시중들지 않으려는 거냐?"강현준은 안에 옷의 단추를 풀어헤쳤다.고월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린듯했다.그녀는 순간 마음이 불안해져, 조건 반사적으로 문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하지만 ‘펑’소리와 함께, 방문이 자신의 뒤에서 닫혀버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저도 몰래 시안을
’깊이 괴롭히지 않았다’는 말 한마디에, 고월영의 작은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변해버렸다.하지만 다시 빠르게 창백해졌다!그녀는 이미 그 일을 잊으려고 많이 노력했다!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림자 하나를 바라보며, 그녀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현실은 바로, 저는 지금 확실히 아현의 왕비라는 것입니다.""아니, 넌 틀렸어."강현준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안중에는 그 누구도 없이 고고했다."현실은 바로, 너의 아현은 본 왕이 널 몇 번을 가져도 신경 쓰지 않는 거지!""그럼 사황형도 아현이 저를 몇 번 가지든지 신경 쓰지 않으시겠네요?"이 말은, 강현준의 발걸음을 급작스레 멈추게 만들었다.고월영은 그를 노려보며 화가 난 듯 웃었다."사황형은 역시나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나 보네요, 혼례를 올린 부부는, 살결을 맞닿아야 하는 겁니다!""현우는... 안된다."강현준은 큰 손바닥을 살짝 조여 쥐었다."그가 중독되었기 때문인가요?"고월영은 풍자적인 웃음을 지었다."설마 사황형은 친동생의 맹독이 풀리기를 바라지 않는 건가요?""그의 독이 풀리기만 한다면, 그가 낫기만 한다면, 저와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겠죠.""너희는 안된다!"강현준이 화가 나 말했다.고월영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아현은 절 좋아하고, 저도 점차 그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저와 그는 왜 안되는 거죠?""네가 감히!""내가 감히 그럴 수 있는지 시험해 봐요!""너!"강현준은 큰 손바닥을 움켜쥐고 재차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그녀가 감히 그러기만 해봐!그녀가 감히!눈앞에, 한기가 서려왔다.고월영이 단도를 뽑아 들고 그의 가슴을 향해 칼날을 돌리고 있다.강현준은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네가 이런다고, 본 왕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아?""그럼, 이런다면요?"고월영은 그를 노려보며 갑자기 칼날을 돌려, 칼날을 자신의 얼굴에 향해 쥐었다."그만해!"강현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어두워졌다."오지 마세요, 아니면, 이
고월영은 시종 담담한 표정이었다."제가 사황형의 간택을 원하는 게 아니라, 모비가 원하시는 것이에요.""그러니, 사황형, 제 일에 협조 부탁합니다, 연회에 나오셔서 옥빈 아가씨, 유진 아가씨와 잘 지내보세요.""본 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그럼 사황형은 이 흠 없이 완벽한 얼굴을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겁니다."고월영은 손에 쥔 단도를 눌렀다.얼굴엔, 진짜 한 방울의 피가 스며나왔다!"허락할게!"강현준의 안색이 확 변했다. 화가 나고 원한스러운 동시에, 극에 달하는 인내까지, 거의 폭발한 지경이었다."허락할게! 꺼져! 당장 꺼지거라!""사황형, 먼저 맹세를 해주시는 게 어떤가요?"고월영은 심지어 기어오르고 있다.만약 그가 정말 후회한다면 어떡하지?강현준은 그녀를 눌러 죽이고 싶었다!정말 아주!그의 가슴팍은 격렬한 기복을 하고 있지만, 어둡고 잠긴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본 왕이 맹세하지, 기필코 오늘 저녁의 연회에 참가할게! 지금, 당장 꺼져! 멀리 꺼질 수 있을 만큼 꺼져! 꺼져!"고월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고 몸을 돌려 방안을 나왔다.시안과 함께 피난을 하듯 망월각에서 도망쳐 나왔다.뒤에 있는 현왕의 방에서는, 여전히 ‘콰르릉’ 거리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그 녀석이 성질을 내고 있다. 또 무엇을 망가트렸는지 모른다.남아있는 지언은 아마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들은 도망쳐 나왔으니, 천만다행이다!망월각에서 멀어진 뒤, 시안은 갑자기 다리가 풀려, ‘쿵’하고 바닥에 꿇어앉았다.고월영은 멈춰서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나한테 무릎을 꿇어서 뭐 하는 게냐?"시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곧 울음을 터트릴 모양을 하고 있었다."아, 아가씨, 저 무서워요."정말 시안이 그녀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던가?정말 무서워서다!현왕의 모습을 볼 기회가 없어도, 그가 이를 악무는 소리만 들어도 시안은 현왕 전하가 고월영 아가씨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고 알 수 있었다.시안은 놀라 넋이 나간 듯했다. 그러다
확실히 지언이 왔다.고월영은 겨우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시안은 놀란 나머지 거의 바닥에 쓰러져있었다."왕비마마."지언이 방문을 두드렸다.시안은 고월영을 쳐다보며, 가서 문을 열 엄두도 나지 않았다.결국은 고월영이 직접 가서 문을 열었다.지언은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한 고월영을 보며, 조금 난감했다."왕비마마 오해 마세요, 그저 전하께서 왕비께 약을 보내라 명하셨습니다."지언은 손에 들려있던 함을 건넸고, 방안을 힐긋 쳐다보더니 불렀다."저기 시안이라는 시녀, 잠깐 나와봐."시안은 거의 기어서 나왔다."지, 지언 나리...""너희 아가씨께 약을 발라드려라."지언은 그녀에게 함을 건네며 정색을 하였다."전하께서 소신이 직접 보라 명하였습니다.""하지만 저희 아가씨의 얼굴은,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시안은 고개를 돌려 고월영을 힐긋 보았다."좋은 약입니다, 궁 안의 최상품으로, 전체 왕부에서 여왕 전하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그러니, 이건 현왕 전하마저도 쓰기 아까워하는 성약이란 말인가?시안은 건네받아, 안에 놓인 병을 들어 뚜껑을 열었다.그저 맡아보았을 뿐인데, 바로 청량한 향기가 느껴지며 코를 찔렀다.고월영의 마음이 조금 떨려왔다.약, 정말 좋은 약이다, 최상품!그저 냄새만 맡아만 보아도 그녀는 알 수 있다. 이 약고는 수백 가지의 최상품 약재들로 배합되었다.아현만 쓸 수 있다... 그 녀석은 자신의 친동생을 참 애지중지하네."내 얼굴은 그저 살짝 벗겨진 것일 뿐, 상처에도 속하지 않아요, 이렇게 진귀한 약은, 필요 없어요.""전하께서는 왕비마마가 약을 바르시는 것을 소신이 직접 보라 하였습니다."지언은 재차 이 말을 반복하며 진지한 표정을 하였다."마마, 소신을 난처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고월영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시안에게 얼굴의 약고를 닦아내게 하고, 다시 조심스레 이 최상의 약을 발랐다.사실 이 정도 작은 상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수년간 의학을 공부해 온 그녀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강현우는 그녀 얼굴의 상처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피가 담겨있던 사발을 놓고 뒤돌아 어딘가에 가려고 했었다. “사황형한테 좋은 약 한 병이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이거 말이에요?"라고 월영은 나무함 하나를 열더니 말했다. 그 안에는 녹색의 연고가 반듯이 놓여있었다. 강현우는 잠깐 사색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황형도 네가 다친걸 알았나 봐. 이 약은 굉장히 효과가 좋은 약이야, 꼭 매일 사용해야 돼!”고월영은 사실 이 상처는 약을 바르지 않아도 이틀이면 낫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옅은 상처기 때문에 나아도 허물은 남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들 너무 긴장해하였다. 주의력을 돌리기 위해 고월영은 상위에 놓여있는 피가 담겨있는 사발을 보더니 “이건 어찌 된 일이에요?"냄새를 맡았더니 분명 사람의 피였다. “무안희의 피를 요구하지 않았느냐? 내가 가져왔어!”라고 강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무안희를 죽였어요?”라고 고월영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경악하고 조급하게 물었다. “당신…”“뭔 생각하는 거야?”강현우는 그녀가 매번 놀라 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더욱이는 그녀가 커다란 두 눈을 깜박거리며 자기를 쳐다볼 때 자칫하면 빠져서 정신이 팔리기 쉬웠다.“내가 그녀의 동의를 구하고 피를 요구했어.”전에 무안희의 피를 찾아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 얘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네요!” 한 사발 가득했다. 죽을 지경이었겠다!“저는 두 방울이면 되는데 이렇게 많이 가져오면 저는 채 쓰지도 못해요! 너무 사람을 괴롭혔겠네요!” 맘속으로 무안희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사람한테 이 정도로 보복할 지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무안희는 강현우를 구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찌 이렇게 백은망덕할 수 있었을까?“무아가씨의 의견을 구했고 그녀를 강박하지 않았어.” 강현우는 무고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피를 뽑을 때까지 그녀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