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건곤전에서 물러나자, 태상황은 상공공을 언짢게 바라보았다. 이 자는 왜 나무토막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눈치가 없는 것인가?상공공은 서러운 눈길로 원경능을 바라보았다. 초왕비가 입궐하여 병시중을 든 후로 자신은 태상황 앞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와 초왕이 복보를 구했는데, 이런 걸 따져 무엇 하겠는가?상공공은 물러가면서 밖의 시중드는 궁인들도 함께 물렸다. 궁전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태상황은 원경능을 한번 훑어보고는 물었다.“복보의 배 위에 저건 무엇이냐?”“지네…가 아닐까요?”원경능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방금 전 사람들은 온몸이 피로 흥건한 복보의 배를 주시하지 않았었다. 오직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주인만이 그것을 발견했다.“사실대로 고하지 못할까? 다섯째에게 죄를 물어야만 입을 열 참이냐?”태상황이 차가운 목소리로 문책했다.우문호에게 죄를 묻는 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왕이면 곤장 서른 대 정도 쳐주길 바랐다. 그러면 원한이 조금은 풀릴 것만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감히 이런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태상황의 매서운 눈초리 아래 그녀가 대답했다.“복보의 비장이 찢어졌기에 개복해서 그곳을 봉합했습니다. 지네 같이 생긴 것은 꿰맨 자국입니다.”태상황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어떻게 했는지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치료 방법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자금단은 누가 먹었느냐?”태상황의 이어진 질문에 원경능이 대답했다.“제가 먹었습니다.”“다섯째가 네게 잘 해주는 모양이구나.”태상황은 고개를 끄덕였다.원경능은 결코 이 말에 수긍하지 못했다. 걸핏하면 곤장을 치고, 뺨도 때리는 사람인데, 어딜 봐서 잘해주는 것인가?“너는 어째서 다친 것이냐?”태상황이 다시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원경능은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정말 넘어진 것입니다.”“고집도 세고, 거짓말도 잘하니 참으로 매를 버는구나. 아직도 매가 모
그러나 원경능은 조용히 서있기만 했다. 화가 난 표정도 아니었다. 심지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저명취는 그녀가 정말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여 계속 도발했다.“그분이 왜 제게 그런 말들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이때 원경능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그녀를 끌고 안으로 걸어갔다.“궁금해요. 하지만 저는 네 사람이 앉아서 못 나눌 이야기는 없다고 생각해요.”원경능은 우문호와 제왕이 안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제왕 부부가 우문호를 찾은 목적을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랬기에 저명취는 문 밖에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그녀는 원경능을 만난 뒤로 계속해서 도발하고 끊임없이 모욕하며 원경능을 분노하게 했다. 저명취는 그녀가 더는 궁에 머물지 못하게 함으로써 태상황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이 손 놓으세요!”그러나 저명취는 그녀의 이런 행동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대경실색하며 새끼 손가락으로 원경능을 그어 버렸다. 뾰족한 새끼 손가락의 끝이 원경능의 팔목을 할퀴었다. 그녀는 강제로 원경능의 손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으려 했다.원경능은 어려서부터 집요한 구석이 있었는데, 할 일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저명취를 끌고 들어가다가 피가 떨어져 바닥은 어느새 석류꽃 모양의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초왕, 제왕!”원경능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굳이 예의를 차리고 싶지 않았기에 저명취를 질질 끌어와 의자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상처를 싸맸다. 그녀는 잊지 않고 덧붙여 말했다.“제왕비가 할 말이 있다고 하네요.”우문호는 저명취를 거칠게 대하는 그녀를 어두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무슨 짓이지?”방금 전까지 낭패를 보았던 저명취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차림새를 가다듬고는 차분한 얼굴로 원경능을 쳐다봤다.저명취는 그녀가 민망함
우문호는 젓가락을 들어 식어버린 반찬을 입에 가져가며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끔 바라봤다.“싸우자는 건가? 배불리 먹어야 싸울 힘도 생기지.”원경능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조금 민망해졌다. 그녀는 다시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녀는 심하게 허기진 상태였다. 이 곳에 도착해서부터 줄곧 배가 고팠었다.마음속에 계속 경계심을 품고 있었기에 그녀는 허겁지겁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었다.한편 우문호는 매우 평온하게 느릿느릿 먹었지만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평온함은 마치 요동치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마음을 졸이며 식사를 마친 원경능은 병풍 뒤에 숨어 자신에게 주사를 놓고 약을 꺼냈다.명주실로 만든 병풍은 빛을 투과시킬 수 있었기에 우문호는 그녀가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전부 볼 수 있었다.그는 뚫어지게 관찰했다. 요 며칠, 상황은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범위로 번져갔다. 원경능의 변화는 궁내 기존의 형세도 개변시켰다. 그는 다시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게 되었다.이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황조부의 병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그는 개의치 않았다.원경능의 변화는 왕부로 돌아가 천천히 지켜보며 조사해도 될 일이었다. 어짜피 그녀가 갑자기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닐 테니.주사를 다 맞은 원경능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찬물로 삼켰다.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 우문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침전으로 돌아가 얌전히 있도록 해. 아무것도 묻지 말고, 상관하지도 말고, 변명도 하지 말고. 본왕은 궁 밖으로 나가야 한다.”원경능은 그가 왜 갑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나쁜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제가 상처를 동여매 드릴게요.”원경능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의 못된 행동들을 떠올리니, 실로 마음이 내켜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그러나 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원경능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하다 생각했다. 사실 그는 이
석양이 정원을 뒤덮을 때까지 우문호는 입궁하지 않았다.원경능은 오늘 하루가 순조롭게 지나갔다는 것이 다소 불안했다. 이곳에 타임슬립 해 온 이후로 한 번도 이런 평온한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복보의 상처를 소독했다. 상공공은 그녀에게 서난각으로 돌아가 쉬라고 하였다.건곤전 밖으로 나간 원경능은 명원제의 난(銮-천자가 타는 수레)이 건곤전 대문 앞에 당도한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떠날지 아니면 그가 오기를 기다려 문안인사를 하고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호위 복식을 한 사람이 다가가 몇 마디를 했다. 명원제는 안색을 바꾸더니 몸을 돌려 가버렸다.‘문 앞까지 오고도 다시 돌아가다니,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걸까?’원경능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채로 서난각으로 돌아왔다. 희씨 어멈이 붕대를 갈아주고 뜨거운 물을 주었다. 몸을 닦고 세수를 하니 한결 개운해졌다. 소염제를 먹고 그녀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요 며칠간 계속 먹은 소염제로 인해 그녀는 정신이 쇠약해지고 온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침대에 몸이 닿자 마자 눈꺼풀이 감겼다. 명원제가 왜 왔다 그냥 돌아갔는지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한밤중에 희씨 어멈이 들어와 그녀를 깨웠다.원경능은 눈을 비비며 등불을 들고 한 쪽에 서있는 희씨 어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슬픔이 묻어있는 것을 본 원경능은 벌떡 일어나 쉰 목소리로 물었다.“태상황께서…”“아닙니다, 아닙니다!” 희씨 어멈이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왕비, 어서 일어나시지요. 환복하고 출궁하셔야 합니다. 고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출궁?” 원경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밤중에 출궁이라니.“묻지 마시고 얼른 준비하시지요!” 희씨 어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불을 걷고 고개를 돌려 침착하게 분부했다.“왕비의 환복을 거들거라.”원경능의 눈에 그제서야 침전에 희씨 어멈말고도 두 명의 궁녀가 더 있는 것이 보였다.차가운 물수건을 그녀의 얼굴에 갖다 대며 희씨 어멈이 말했다. “왕비께선 필히
그녀는 가볍게 그의 뺨을 쳤다.“우문호, 우문호.”“건드리지 말거라. 이미 기절했다.”제왕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원경능은 여전히 그의 뺨을 쳤다. “우문호, 정신차려요. 눈 한번 떠볼래요?”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가볍게 펼쳤다. 그리고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눈 좀 떠봐요.”“이 여인이 정말, 황조부께서 왜 당신을 보내셨는지 모르겠군.”제왕이 급히 다가오며 손을 뻗어 그녀를 떨어트리려 했다. 그런데 이때 우문호가 천천히 눈을 뜨는 것이었다.원경능은 제왕을 밀어젖히며 조금 화를 냈다.“저리가요. 방해하지 말고.”제왕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여인은 어찌 이리 사나운 것인가?원경능은 두 손으로 우문호의 머리를 감싸며 질문했다.“우문호, 날 봐요.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우문호는 눈앞이 흐릿했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못난이.”원경능의 입술 끝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당신은 누구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나요?”“본왕은 습격을 당했다…”의식은 또렷했다.“좋아요. 지금부터 간단한 검사를 진행할 거예요. 아프면 나한테 말해요. 뇌출혈과 다른 출혈 상태를 파악하는 거예요.”원경능의 두 손이 가볍게 머리를 눌렀다. 이어서 심장과 폐부에 손을 가져갔다.우문호의 흉강에서 천명(哮鸣)소리가 났고 그가 몸을 떨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내상이 있었고, 기침에 의해 기흉(气胸)이 발생했다고 그녀는 신속하게 판단했다.“다섯째 형님….”“왕야….”뭇사람들이 우문호가 갑자기 위독해지자 앞으로 달려 나와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원경능은 이미 빠른 걸음으로 병풍 뒤로 가서 약상자를 열고 그 안에서 바늘을 갖고 나왔다.“탕양, 왕야를 꽉 잡아주게. 왕야께선 기흉 증상을 보이고 있네, 이대로는 목숨이 위험할 수 있으니 공기를 빼내야 하네.”“네?”탕양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바늘을 보고 경악했다. 설명을 길게 하고 싶지
원경능은 일어서서 자신의 시큰한 손을 움직였다. 어깨와 경추 모두 아픈 나머지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인턴이나 간호사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도 없었다.“왕비마마, 너무 힘드시면 기씨 어멈에게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그녀의 바느질 솜씨가 꽤 괜찮습니다.”서일이 멋쩍게 말했다. 그는 조금 전 구겨진 체면을 이번엔 어떻게 해서라도 만회하고 싶었다.“만약 초왕이 옷감이라면, 기씨 어멈을 불러 도와 달라고 해도 무방하겠군.”원경능이 담담하게 말했다.제왕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도대체 뭘 하는 거지? 상처는 자연히 아물텐데, 도대체 왜 꿰매는 거야?”제왕이 보아하니 이 여인은 의술을 좀 아는 듯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의술이 아니라 무의(巫醫-무술로 병을 치료하는 의원)같은 거였다. 저 약상자가 바로 무의의 약상자였다.만약 태상황의 명령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 그녀가 이렇게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가장 웃기는 건 그녀가 제왕 자신의 피를 다섯째 형님께 드릴 수 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자신과 다섯째 형님은 한 아버님 밑에서 태어난 형제이고 한 핏줄인데 어찌 쓰이지 못한단 말인가?원경능은 제왕을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천천히 목을 돌리고 몸에서 힘을 뺐다.제왕은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명취의 말이 맞았다. 이 원경능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댔고 거만했으며 안하무인이었다.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다섯째 형님의 상태가 호전된 건 자신의 자금단 덕이지 절대 원경능 때문이 아닐 거라고.하지만 이 밉살스러운 원경능은 계속해서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우문호는 중간에 깨어났었지만, 의식이 불분명하여 어렴풋이 원경능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원경능은 초왕이 매우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의식은 없었지만, 그의 몸은 통증으로 인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약상자에는 마취약이 없었기 때
원경능은 기씨 어멈을 보며 물었다.“어떤 불편함을 말하는 것이냐?”원경능의 몸은 온갖 불편함을 다 호소했었다. 그저 궁에서 너무 큰 부담감에 짓눌려 감지하고 자세히 생각해볼 틈이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앉아 있거나 엎드려 있을 때 오장육부가 다 뒤틀려 한데 뭉친 듯한 느낌에 상처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 기씨 어멈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사실 소인도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어쩌면 탕 대인이나 서 시위께서 더 잘 아실 수도 있습니다. 소인은 그저 자금탕을 마시면 오장육부가 손상되고 피를 토하며, 기침이 나고 놀라서 꿈에서 깨는 정도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머슴애 하나가 왕부의 골동품을 훔쳐다 판 적이 있는데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벽에 머리까지 박으며 자살을 시도 했었습니다. 탕 대인께서 그에게 자금탕을 먹이셨습니다. 후에 자백은 받아냈지만, 아마 보름 뒤에 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원경능은 들을수록 간담이 서늘하였다.“보름 만에 죽었다고? 자금탕 때문에?”“탕 대인의 말로는 자금탕을 마신 후 반드시 일년 반 정도는 몸을 잘 관리해야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하였습니다. 그저 그 머슴이 너무 가증스러워 탕 대인이 관리를 잘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버린 겁니다. 죽기 전에 피도 토하고 배도 아파하고 기침도 심하게 했습니다. 한번 기침하면 멈추지 못했고요. 죽을 땐 얼굴이 자주색이었다 합니다.” ‘산소가 부족할 정도로 기침을 한다고?’기씨 어멈은 조금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뿐만 아니라 그가 죽기 전에 늘 귀신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저승에 데려다가 단죄한다며 아주 무서워했습니다. 하여 자금탕을 ‘황천길을 꿈꾸는 탕’이라고도 하옵니다. ”원경능은 멍하니 기씨 어멈을 바라보다 서서히 쓴 웃음을 지었다. ‘우문호, 당신 도대체 원경능을 얼마나 미워하는 거야?’더 역설적인 건 그녀의 ‘대역’인 자신은 또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우문호를 살려내야 한다는 것이었다.만약 정말 윤회라는 게 존재한다면, 자신과 이 몸의
원경능은 그에게 수액을 놓고는 처소로 돌아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돌아왔다. 이때 저명취가 시녀를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구름모양을 수놓은 옅은 보라색의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넓은 소매엔 푸른 테를 둘렀고 허리엔 같은 색의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허리가 한 손에 잡힐 듯 하늘거리는 모습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머리 위에는 금과 옥으로 만들어진 봉미채(凤尾钗-봉황꼬리모양의 비녀)를 꽂고 있었고 새하얀 귀에는 금으로 투조한(镂空) 작은 등불 모양의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귀걸이가 피부에 닿으면서 옥이 부서지는 듯한 청아한 소리를 냈다.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본 제왕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달려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마차에 앉아있느라 피곤하진 않았어?”저명취도 온화한 기색으로 화답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피곤하지 않아요.”두 사람은 서로 손에 깍지를 끼고 돌계단을 올라 갔다. 원경능은 문 앞에 서서 차분한 기색으로 저명취를 바라보았다.저명취는 슬그머니 제왕이 잡은 손을 빼면서 원경능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초왕비, 안녕하세요.”“네!”원경능이 짧게 대답했다. 제왕은 기가 막혔다. 예의에 따르면 ‘네’ 한마디가 아니라 응당 제왕비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네’가 말인가? 너무 거드름 피우는 것 아닌가?저명취는 손으로 제왕의 손등을 내리누르며 그를 향해 머리를 가로 저었다. 원경능과 똑같이 굴지 말라고 눈으로 말했다.제왕은 저명취의 사리에 밝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섯째 형님이 불쌍해졌다. 하필이면 원경능 같은 여인을 왕비로 맞이하다니. 전생의 원수나 다름없어 보였다.“들어가지.”제왕은 다시 저명취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저명취는 벌써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원경능은 따라 들어가지 않고 그저 문가에 기댄 채 조용히 보고 듣기만 했다.침대 옆으로 다가간 저명취가 근심스러우면서도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왕야, 괜찮으신 가요?”그녀의 눈길은 초왕
이 문제에 우문호는 잠시 멍을 때렸다. 왜냐하면 자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당연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원씨가 임신한 뒤로부터 그의 눈과 마음에는 다른 것들을 담지 못했었다.현재 제왕이 물으니 우문호는 잠시 멍을 때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어디 그렇게 많은 왜가 있어, 놓으면 놓는 거지.'"다섯째 형님."제왕은 우문호가 머뭇거리자 조금 몸을 일으키더니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혹 아직도 명취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우문호는 그를 흘겨보았다."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네 다섯째 형수는 속이 매우 좁아.""형님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겁니까?"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좋아하지 않아.""어떻게 했습니까? 이렇게 빨리 명취를 잊다니."우문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뭘 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한참 뒤에 우문호가 고개를 들었는데 빛이 반짝였다."너의 다섯째 형수가 있었기 때문이지.""그 말인즉, 다른 사람이 생기면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건 아마 대체하는 방법인 듯 하군요. 다른 여인을 찾아야 되지요, 맞나요?"제왕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우문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연구해본 적도 없는 걸.'허나 표면상으로는 적극적으로 말했다."맞아, 넌 동그란 얼굴의 계집애와 자주 있도록 시도해봐. 아마 곧 잊을 수 있을 거야."원영의를 말하니 제왕이 탄식하며 말했다."이번에 영의가 조태의를 데리고 돌아왔기 다행이지 아니면 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네 다섯째 형수가 보낸 거다."우문호는 원경능을 위해 공을 쟁취했다. 일곱째는 늘 원씨에게 편견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해 우문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공을 쟁취하여야만 했다.그러나 제왕은 그 말을 흘려 보내고 홀로 중얼거렸다."사실, 동그란 얼굴도 괜찮아요. 자상하게 왕비를 소개해줄 것이라 했거든요."우문호가 불현듯 물었다."참, 오늘밤 돌아갈 거야?"제왕은 생각에 잠겼다."돌아갈 거예요. 동그란 얼굴이 있으니 절 괴롭히
우문호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부황...."부황께서 합의 이혼을 동의하시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또한 그 말투에 불쾌한 느낌이 상당했다."그대로 하면 되느니라."명원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저명취가 시집온 뒤로부터 사단이 끊인 적이 없었다. 작은 일은 저수부의 체면을 보아 눈 감아줄 수 있었다. 이렇게 방임했더니 결국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황실의 체면을 깎는 건 괜찮으나 사적으로 친황들의 사이를 이간질 하니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었다.애당초 그녀의 명성은 그렇지 않았다. 밖에서는 다들 그녀가 현명하고 정숙하며 대가의 풍격이 있다고 했다.그러나 오늘 저씨 노태부인의 그 말을 해 이미 화가 치밀었었다. 저씨 가문의 체면이 참으로 대단했다."부황."우문호가 정색하더니 재빨리 물었다."부황의 뜻은 일곱째의 요구를 동의한다는 겁니까?""동의하지 않을 수 있느냐? 무기를 휘두르기까지 하는데."명원제가 아비로써의 인내를 보여주었다."합의 이혼한 뒤 각자 재혼한다면 두 가문에게 모두 좋은 일이다."우문호는 매우 우러러보았다. 부황의 이 말은 참으로 가식적이었다. 너무 가식적이어서 전혀 가식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각별히 마음을 쓰는 것 같았다."이 일을 일주일 내에 해결하거라. 해결하지 못하면 곤장을 맞으러 와야 한다. 꺼지거라."명원제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문호는 명을 받고 제왕을 찾으러 들어갔다. 두 형제는 서로를 부축하면서 출궁했다.그러나 명원제는 계속 상소문을 읽어야 했다. 군주로써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의자가 있는 이외에 뭐가 나은 것이 있던가?황제란 수명이 짧은 직업이었다.옆에서 묵을 갈던 목여공공이 기쁘게 말했다."제왕과 초왕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음을 보셨으니 폐하께서도 시름을 놓으실 수 있습니다."명원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는 떳떳하고 일곱째는 단순하다. 그렇기에 다행인 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일찍부터 크게 다투었을 것이다. 다투지 않더라도 이후에는 암투를 벌일 것이지.
우문호가 위로했다."그만 소리 질러, 부황 앞에서도 네가 계속 신음소리를 낸다면 네가 겁쟁이라고 꾸짖으실 거야."제왕은 아픔에 말도 하지 못했다. 끙끙 신음소리와 함께 발을 질질 끌며 가고 있었다. 결국에는 실로 참을 수 없어 말했다."형님, 절 업어줘요.""상처가 앞에 있는데 내가 널 없으면 더 아프지 않을까?"우문호는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근심스러워졌다. '왜 이렇게 아픔을 참지 못한단 말인가? 예전에 원씨는 온몸에 부상을 입고 입궁하여서도 억지로 버텼었는데, 일곱째는 여인보다 못하는군.""다쳐서 아픈 것이 낫지 이렇게 상처가 찢기는 고통은 원하지 않습니다." 제왕은 걸음을 멈추고 무기력하게 손을 저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입술에도 혈색이 보이지 않았다.우문호는 그를 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업고 나니 제왕이 또 "아아아"하고 소리를 질렀다.우문호가 물었다."되겠어?"제왕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목여공공을 바라 보더니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아니면 나를 들고 가게."목여공공은 이미 성지를 전하러 출궁한 궁인에게 물어보았었다. 부상 정도가 그렇게 엄중하지 않다고 조태의가 말했다고 전했다. 가슴팍의 상처는 괜찮고 복부의 상처가 조금 깊다고 했다.그리하여 제왕의 이러한 모습을 본 목여공공은 근심을 금할 수 없어 물었다."태의가 확실하게 진찰한 게 맞습니까? 내장이 상한 건 아닙니까?"제왕은 숨을 들이쉬었다."내장이 상한 건 아니네."목여공공은 제왕의 이런 모습으로 실로 궁전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말했다."좋습니다. 그렇다면 들고 갑시다."어깨 가마와 들것이 없으니 한 사람은 어깨를, 한 사람은 두 다리를 들고 갔다. 제왕의 머리는 떨어져 있었는데 입에 초롱 손잡이를 물로 있었다. 허나 자신이 걷는 것보다는 나았다.제왕은 칠흙같은 하늘을 바라 보았다. 등불의 빛은 궁중의 밤을 밝히기엔 부족했다. 그는 그저 딴 세상에 온 듯 하였다.왜 살아가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은 여전
황후는 완전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곱째가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 죄명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죄명이 실증되고 정말 백관 앞에서 죄를 심의 받는다면 절로 미래를 망친 것이었다.그리하여 이 일의 진위를 막론하고 재빨리 답했다."합방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이야 말로 전해진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태노부인도 바보가 아니었다. 저명취의 낯빛을 보고 태후가 말한 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다만 바보가 아닌 태노부인은 멍해졌다. '측비 때문이 아니라면 제왕은 왜 합의 이혼하려고 하려는 걸까? 설마, 그 원측비의 말이 진실이란 말인가? 명취와 초왕 사이가 애매하단 말인가?'태노부인의 얼굴은 당장에 어두워졌다. 다만 태후가 자리에 있는지라 무엇이라 말할 수 없어 일단 이 화를 가라앉혔다.그러나 태후는 태노부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노부인, 한마디 묻겠네. 한 여인이 처로써 작은 일로 자결하고 또 낭군을 중상한 뒤 회개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군다면, 노부인의 부중에서는 어떻게 처단하는가?"태노부인은 실로 체면이 깎였으나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제왕부부는 예전에 화목했었고 측비가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합방도 하지 않았으니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다고 억지를 부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태노부인은 그저 기가 죽어 말했다."태후마마, 제가 아둔했습니다. 명확하게 묻지 않고 입궁하여 태후마마와 황후를 귀찮게 했습니다. 다만 젊은 부부가 다투는 건 자주 있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쉽게 처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합의 이혼이네."태후가 차가운 낯빛으로 곧 시정했다."황실의 체면이 중요하나 황실의 혈육도 잃을 수 없네. 제왕은 황제의 적자네. 부부가 작은 일로 모순이 생겨 무기를 휘두른다면 철로 만든 몸이라 하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네."태후는 고개를 돌려 황후를 바라 보았다."너의 며느리고 또 너의 조카니 네가 알아서 이 일을 해결하
황후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안절부절하여 명원제를 흘깃 보았는데 명원제의 낯빛이 매우 어두웠다. 이에 황후는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는 말 몇 마디 하라고 태노부인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러나 태노부인이 싸늘하고도 딱딱하게 말했다."폐하, 황후마마, 제왕은 황실자손으로써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렸습니다. 비록 명취가 충동한 것은 잘못이나 모든 잘못이 명취에게 있는 건 아닙니다. 현재 제왕이 측비로 인해 합의 이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니 소문이 퍼진다면 실로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이에 황실과 저씨 가문의 체면이 깎일 겁니다. 폐하께서 성지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제왕의 상처가 호전되면 백관들 앞에서 죄를 심의 받고 합의 이혼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태노부인의 이 말은 절대 사정의 의미가 아니라 몰아붙이는 느낌이었다.심지어 태노부인이 황실의 체면과 저씨 가문의 체면을 함께 논할 때 황후의 낯빛이 돌연 변했다. 크게 경악하더니 고개를 홱 돌려 명원제를 바라 보았다.아까만 해도 낯빛이 어둡던 명원제는 태노부인의 이 말을 듣고 도리어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으며 말했다."노부인, 조급해하지 말게. 이 일은 짐이 자세하게 물어볼 것이네. 노부인의 신체가 편찮다고 수부에게 들었으니 돌아가 푹 쉬게. 자손들은 자연히 자손들만의 복이 있을 것이니 노부인이 염려해서 되는 것이 아니네."말을 마친 명원제는 몸을 일으켜 떠났다. 나가기 전에 담담하게 저명취를 흘깃 보았다.태노부인은 기가 차 멍해졌다. 명원제가 위로의 말 한마디도 없이 이렇게 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자신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었다.명원제는 나간 뒤 목여공공에게 분부했다."초왕과 제왕을 부르거라."목여공공은 잠시 머뭇거렸다."폐하, 제왕은 아직 부상 당한 몸입니다.""죽지 않을 거다."명원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만일 중상이라면 일찍이 부중에서 보고를 했을 것이었다."그리고 이 일을 태후께 아뢰거라. 태후께 한 번 들리라고 전하고."목여공공은 명을 받
다만 저명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눈을 감고 울고 있었는데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제왕은 조태의와 원영의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에 원영의는 매우 눈치가 빨랐다. 조태의를 이끌고 나가려는데 조태의가 약가루를 내려놓으며 시녀에게 분부했다."이건 지혈약이다. 상처부분에 뿌리고 살짝 동여맨다면 이틀 뒤 바로 괜찮아질 거다."시녀는 이미 놀라 손발이 나른해진 상태였다. 약가루를 건네 받고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제왕은 모든 사람들을 물리고 저명취의 곁에 앉아 물었다."왜 그러는데?"저명취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제왕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그러나 늘 흐리멍덩했던 머리가 이번에는 도리어 맑아졌다. 사실 원영의의 말들이 그를 정신차리게 했던 것이다.만일 명취가 정말 자신을 생각했다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은 째지게 가난한 사람도 아니었고 당당한 친왕이었다. 다른 것을 쟁취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평생의 부귀영화를 줄 수 있었다.누구도 그를 경쟁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도 한가하게 놀고 있는 왕야를 상대하지 않았다. 명취는 그렇게 총명하니 알고 있을 것이었다. 또한 자신은 저수부의 외손자였고 현재 황후의 적자였다.큰 형님이 태자로, 황제로 된다고 하여도 감히 자신에게 어쩌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천하 사람들의 공론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당연히, 좀 못나게 말한다면 큰 형님은 애초에 자신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그리하니 명취는 정말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그렇다면 그가 한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을까? 그리하여 제왕은 마음이 아프지만 계속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끝내. 그대가 시집온 날부터 난 그대의 마음 속에 내가 없다는 걸 알았어. 난 자연히 다섯째 형님과 비할 바가 못되지. 나도 내 자신을 알아. 그대는 시종일관 다섯째 형님을 좋아했던 거야. 다만 다섯째 형님이 그대를 저버리자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시집온
탕양은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아사가 들어와 앉더니 물었다."뭐가 산 것이라고요?""본왕의 아들 말이다!"우문호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아사는 머뭇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턍양을 바라 보았다. 탕양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왕야가 이미 미쳤다는 손짓을 했다.원경능은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됐어요, 식사나 해요.""우리 큰 언니는요?""돌아갔어."원경능이 답했다. 아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제왕에게 정말 화가 나요. 글쎄 큰 언니와 서일이 노닥거린다면서 큰 언니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겠어요? 큰 언니가 화를 참고 때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우문호는 기분이 매우 좋은지라 이 말을 듣고 아사를 흘겨봤다."이 계집아이 좀 봐, 일곱째가 매우 연약한 것처럼 말하네. 일곱째도 무술을 연마했었어.""설마요?"아사가 경악했다."그런데 왜 그렇게 연약하게 굴어요?"우문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연약하지 않아, 최소한 손으로 계란을 한 알 깰 수 있으니.""전 돌을 깰 수 있어요."아사가 답하니 우문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원경능이 호기심에 물었다."제왕이 정말 무술을 배운 적이 있나요?""배웠지, 황자로써 누가 배우지 않아도 되겠어? 마술과 궁술, 무술 모두 익혀야 하지. 일곱째도 배웠었는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후로는 배우지 않았어. 싸우는 것도 원하지 않고 말이야."아사는 의아해졌다."왜요?""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무술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어."우문호가 말했다. 아사는 믿을 수 없었다."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정말 무술을 익혔다면 왜 반격을 하지 않았겠어요?""일곱째는 여인을 때리지 않아."우문호가 답했다****여인을 때리지 않는 제왕은 제왕부로 돌아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곧장 저명취의 방으로 향했다.요 이틀간 저명취는 많이 울었는지라 눈이 계속 부어있었다. 제왕이 들어오는 것을 보아도 그저 담담히 눈길을 위로 들었다."성지가 내려진 건가요
제왕은 기가 막혔다."당신의 말투가 왜 아이를 달래는 것 같지? 본왕에게 정비를 소개하다니. 본왕의 혼사는 모후의 뜻을 따라야 해."원영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눈에 하얀 이, 옴폭 파인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조모께서 말씀하셨어요. 남자는 모두 애라 달래면 된다고요. 그리고 당신의 모후는...."제왕이 화를 냈다."당신의 모후이기도 하잖아!"원영의는 그제야 두 사람 사이가 생각난 듯 무미건조하게 코를 만졌다."전 정비가 아니라 모후라고 부르면 안돼요."제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당신 계속 본왕에게 합의 이혼하라고 하고 지금 또 이러한 말을 하는군. 당신 정비가 되고 싶은 거 아니야?"원영의가 물었다."정비가 되면 좋은 점이 뭔데요?""좋은 점이 많지."제왕은 잠시 생각했다."최소한 당신은 본왕과 명분이 정당한 부부로 되는 거지.""명분이 정당한 부부가 된다면 뭐가 좋아요?"원영의가 다시 물었다. 제왕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당신은 부중에서 뜻대로 할 수 있어. 하인들도 모두 당신의 명을 따를 것이고."원영의가 반문했다."제가 지금 부중에서 뜻대로 살고 있지 않나요? 지금 하인들이 제 명을 따르지 않나요?""당신 본왕과 함께 여러 장소로 출석할 수 있지."원영의가 웃었다."지금은 제가 여러 장소에 출석할 수 없나요? "제왕은 그녀에게 눈을 부릅떴다."당신 지금 고의적으로 엇나가는 거야? 당신이 정비와 측비의 다른 점을 모를 리가 없잖아. 정비는 처고 측비는 첩이야, 명분부터 다르잖아.""처도 좋고 첩도 좋아요. 그러나 제가 저인 사실은 번함이 없어요."원영의는 손을 내저었다."전 당신의 처가 되기 싫어요 .좋기는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그리고 당신이 저명취와 합의 이혼하는가를 관심하는 것은 저와 직접적인 이해득실이 있어서예요. 누가 부중에 그러한 정실이 있기를 원하겠어요? 전 그녀를 보는 것조차 싫어요."말을 마치고는 곧 일어났다. 원영의가 떠나려 하자 우문경이 손을 잡았다."가자마, 본왕과 이야기나 좀
아사는 돌아간 뒤 부두에서 만아를 본 일을 원경능에게 알렸다.원경능은 이를 듣고 조금 마음이 시큰거렸다.이러한 시대에 여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아는 남정네들과 함께 막노동을 하고 있으니 어디 얼굴을 드러내는 정도인가?다만 자신의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아사더러 만아에게 은 열 냥을 가져다 주라고 하였다.다음날 아침 아사가 돌아왔다. 만아가 안받으려고 하였는데 억지로 만아에게 넣어주고 달아났다고 전했다.원경능이 묵묵히 말했다."그 아이에게 주었으면 되었다.""왕비께서는 참 선량하십니다."아사가 칭찬했다. 원경능은 속으로 자신이 선량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은 열 냥은 준 것도 사실 자신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원경능은 이 은 열 냥으로 자신을 홀가분하게 만들려고 했다.엄격하게 따진다면 그녀는 만아에게 빚진 것이 없었다.다만 원경능은 자신의 동정심이 점차 사라짐을 느꼈다. 원래의 원경능도 점차 모진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혹 자기 보호를 더 잘할 수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자신을 잃게 된 것이었다.우문호가 저녁에 돌아올 때 제왕을 데리고 함께 돌아왔다.그은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초왕부에 도착하더니 바로 소월각으로 들어가 숨었다.원경능이 호기심에 물었다."왜요? 왜 구신이라도 본 듯이 숨어요? 누가 기분을 상하게 했기에 노기등등한 얼굴이에요?"우문호는 자리에 앉아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원경능은 자신 곁으로 끌어오고는 배를 어루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들아, 기억하거라. 네가 이후에 만일 일곱째 삼촌처럼 못난 짓을 한다면 뺨을 갈겨 죽일 것이야."원경능은 그의 손을 두드리며 웃었다."무슨 아들이에요? 딸이면 안되나요? 제왕이 왜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어요?"우문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이 놈이 연속 이틀 동안 관아로 와 나를 찾았어. 공무가 가득한데 저놈 때문에 한 건도 해결하지 못했잖아. 이것 봐, 오늘밤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