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자신, 반년 동안 제게 손을 댄 게 몇 번인지 기억이나 하고 계시나요?”온자신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네가 막내한테 맞서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막내는 가장 어린 동생이니, 당연히 내가 보호해야 하거늘!”온사는 또 한 번 실망스러웠다.그녀는 온자신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말했다.“하지만 저도 오라버니들 동생인걸요.”그들은 마치 온모가 온씨 가문에 오기 전에 집안에서 가장 어린 동생이 그녀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진작부터 마음에 상처가 가득했던 온사는 더 이상 그들과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 그곳을 떠나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그 자리에 서있던 온장온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온자신을 바라보았다.온장온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둘째야, 네가 최근 다섯째에게 자주 손을 댄 것은 사실이다. 지난 성년식에서도 어떤 자리인지 고려하지 않고 다섯째 얼굴을 때려서 붉게 만들었지 않느냐.”“그건 왜냐하면…… 왜냐하면……”온자신은 또 무의식적으로 온사의 잘못이라고 얘기하려 했다.하지만 이번엔 말을 내뱉고 나서 갑자기 그 일은 확실히 온사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다섯째가 관복을 막내에게 주었지만, 그는 막내의 반응 때문에 다급해진 나머지 다섯째에게 누명을 씌우고 그녀의 뺨을 때렸었다.이 생각이 들자, 온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온모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온모에게 향하자 온모는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눈을 깜빡이자 온모의 표정이 마치 그가 착각이라도 한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온자신은 순간 망연자실했다.그가 모르고 있던 건, 방금 온모는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이라, 애초에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실수로 그가 그 모습을 보았고, 그제야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한 것이었다.그녀는 이 바보가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그저 양심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뿐이었다.하지만 만약 이렇게 그가 정말 양심적으로 잘못을 깨
온자신 일행은 온사에게 가려고 했지만 온사는 애초에 그들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쾅’소리와 함께 문을 닫은 그녀는 바로 방 안의 모든 그녀의 물건들을 옥패의 공간에 집어넣었다.그녀는 어머니의 방에 가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온자신 일행이 문밖에 있었다.비록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몇 해가 흘렀지만, 방은 항상 그대로 있었고, 매일 누군가 청소를 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은 그녀의 아버지였다.전생에 그녀는 이 일로 인해 온권승과 온모의 관계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온모가 정말 아버지 말대로 그저 은인의 딸인 줄로만 알았다.나중에 온모가 그녀 앞에서 의기양양해져 스스로 폭로하고 나서야 자신과 어머니가 아버지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온모는 애초에 무슨 은인의 딸이 아니라, 온권승과 백월광의 딸이었다.그녀를 가장 화나게 한 것은 그녀가 이 사실을 가장 마지막에 안 사람이라는 것이었다.그녀의 오라버니들은 그녀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어머니를 위해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온모를 더 아껴주었다.그래서 온사는 미웠다.온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미웠다.그녀는 절대 그들 중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온사, 문 열거라!”“계속 문을 열지 않으면, 문을 부술 것이다!”온자신이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온모는 옆에서 다정하게 타이르고 있었다.“둘째 오라버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언니가 지금 바쁠 수도 있으니 일단 밖에서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기다리긴 무엇을 기다리느냐? 분명 짐을 챙기고 있을 텐데! 출가를 하면서 오라버니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다니, 정말 제멋대로구나!”온자신은 화를 내며 말했다.“괜찮아요, 둘째 오라버니. 언니가 아마 잠깐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 그런 걸 거예요. 이따가 아버지께서 오시면 분명 언니를 잘 타일러 줄 겁니다.”온모는 ‘순수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온자신 일행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온사가 이렇게 큰일을 저질렀으니 온권
심지어 그가 몇 년 전 병세가 심각해져 고열은 내리지 않고 누워만 있을 때, 그녀는 꼬박 사흘 밤낮으로 그를 지켰고, 그가 열이 내리고 깨어난 뒤에야 쉬었었다.온모는 온옥지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입꼬리에 알아차리기 힘든 만족감이 걸렸다.비록 온사가 무슨 방법으로 폐하께 가서 성녀의 신분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온씨 가문 사람들이 아직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으니 그녀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은 없었다.그게 아무리 온사의 성녀 신분이라고 해도 결국 온모의 것이 될 것이다.온모는 이렇게 생각하니 속으로 질투하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든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우선 온사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폐하를 설득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설마 그녀의 몸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가?온모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눈가에 포악한 기운이 스쳤다.이때 온사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나왔다.그들에게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고 다시 문을 닫고 뒤돌아서 갔다.온자신은 그녀가 도망가려는 줄 알고 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말했다.“거기 서, 어딜 가려느냐! 온사야 내 말 잘 듣거라.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한, 너는 온씨 가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온사는 가차 없이 그를 밀치고 말했다.“착한 개는 길을 막지 않습니다.”온자신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지금 누구더러 개라고 한 것이냐?!”온사는 처음으로 그녀의 둘째 오라버니가 정말 바보라고 느껴졌다.그녀는 걸어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대답한 사람을 욕하지요.”온자신은 순간 화가 나서 펄쩍 뛰며 따라갔다.“온사, 너 우황청심환이라도 먹은 게냐? 감히 날 개라고 욕해?!”“그런 거 먹을 필요 없습니다. 없어도 욕할 수 있으니까요! 욕은 물론, 때릴 수도 있습니다!”온사는 갑자기 뒤로 돌아 급히 걸음을 멈추는 온자신에게 경고했다.“당신이 누구든, 오늘 감히 절 가로막는 자는 절대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좋아 온사! 너 정말 대단하다. 내가 너를 혼내
온사는 눈을 내리깔고 스스로를 비웃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 도대체 어찌 그럴까요?”“이 문제의 답은 분명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을 터인데, 설마 아버지께서 모르고 계시지는 않으시겠지요?”온권승의 눈에 분노가 일었다.“온사야, 다시 한번 말하겠다. 네가 만약 또 이런 소란을 일으킨다면 이번엔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만약 제가 그리 하겠다면요?”온사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하나도 겁을 먹지 않고 온권승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또 어떻게 하시려고요? 곤장 50대로 부족하면 100대는요? 100대도 부족하면 그냥 절 때려죽이시는 것은 어떠하십니까?”“온사!”“아버지!”온자신과 온장온이 동시에 소리쳤다.온자신은 온사가 오늘 정말 미친 것 같았다.갚아주려는 건 그렇다 치고,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도발을 하다니!정말 죽고 싶은 걸까?온장온도 비록 온사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온사를 때려죽이게 할 순 없었다.그는 급히 타이르며 말했다.“아버지,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온사를 혼내시더라도 일이 해결되고 난 뒤에 다시 말씀하시지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폐하의 어명을 다시 거두느냐입니다.”온권승도 하마터면 온사에게 정말 화를 낼 뻔했다.온장온이 그를 타이른 뒤에도,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반항을 하는 딸이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설마 다 지 어미를 따라 하는 건가?온권승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이틀 못 본 사이 지금 네 능력이 아주 대단해졌구나. 어찌 폐하를 설득하여 네가 출가하여 여승이 되는 것을 허가해 주셨든 지금 당장 궁으로 가 폐하께 어명을 거두시라 하거라.”“우리 온씨 가문의 명성은 이미 네 만행들로 참을 수 없어졌다!”온사는 딱 잘라 대답했다.“안 갑니다.”그녀도 똑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전 출가해서 여승이 되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모든 관계를 끊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온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최소택은 그녀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그럼 내가 네 진심을 알게 하려고 일부러 남산까지 가서 나랑 잘 지내는 형제들에게 네가 참배하면서 산에 오른 걸 보게 한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이게 다 네 계획이 아니었단 말이냐?”온자신은 경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네가 이 애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이냐?”온모도 잠시 어리둥절하다2025-02-05가 곧 반응해 일부러 슬픈 척하며 말했다.“모두 제 탓입니다. 제가 그날 밤 언니 말대로 하지 않아서, 언니가 소택 오라버니를 위해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괴롭힌 것입니다.”사람들은 바로 온모의 말에 설득당했다.“온사, 네가 남자 하나 때문에 이리 죽고 살며, 심지어 온씨 가문의 명성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온사, 만약 네가 진정 후회된다면 어찌 진작 말하지 않았던 것이냐?”“할 말이 있으면 우리에게 말하면 되지 않느냐?”“겨우 이런 사소한 일로 어찌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떠드는 것이냐?”온씨 가문 형제들은 모두 온사에게 한마디씩 했다.지금 옆에 있는 도련님들은 제 도련님을 필두로 온사의 ‘성의’를 생각해서 좋은 마음으로 얘기했는데 그들이 최소택에게 ‘진실’을 얘기해서 온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줄은 몰랐다.잠시 후, 도련님들은 모두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은 망연자실한 채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온씨 가문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손가락질 당하며 질책을 받고 있는 온사를 보았고, 온사의 표정은 말이 안 될 정도로 평온했다.마치 그 모습이 진작에 습관이 된 것 같았다.순간, 제 도련님 일행은 속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온씨 가문에서 온사는 그들이 생각한 것과 처지가 달랐다.그녀는 자신이 진국공 정실의 딸이라는 것을 믿고 온모를 괴롭힌 것이 아니었나?그녀 모습을 보아하니, 왜 되려 마치 온씨 가문의 모든 사람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지?온사는 그들의 설교에 짜증이 나서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최소택이 이어서 말했다
최소택은 갑자기 얻어맞았다.옆에서 멍하니 있던 사람들 중 그를 위해 온자신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온씨 가문 형제들은 물론이고, 옆에서 그의 말을 들은 도련님들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위대한 진국공 가문의 딸이 모두 최소택과 혼인을 하다니, 감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그가 말을 뱉었을 때 진국공의 얼굴이 다 타버린 냄비처럼 새까매진 건 못 봤나?!조카라는 관계가 아니었으면 진국공은 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온권승이 참고 넘어간다고 해도 온자신 일행은 참을 수 없었다.온장온은 손을 들지 않았지만 온자월은 온자신이 손을 쓸 때 싸움을 말리는 척하면서 몰래 한 대 때렸다.조금 뒤, 최소택은 맞아서 코가 멍들고, 얼굴이 붓고, 온몸이 아팠다.도련님 일행은 흉악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다가 순간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혹시나 진국공 저택의 분노가 본인들에게까지 번질까 봐 급히 온권승에게 인사를 하고 하나 둘 재빨리 자리를 떴다. 애초에 아직도 바닥에서 맞고 있는 친한 친구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었다.온자신 일행이 실컷 때린 뒤, 속에서 천불이 나는 온모는 그제야 겨우 웃음을 쥐어짜내며 이를 악물고 충동을 참고 있었다.“됐습니다, 됐어요, 둘째 오라버니 그만 때리세요. 소택 오라버니도 잠깐 충동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그도 분명 그렇게 온사를 싫어하는데, 또 왜 갑자기 단번에 온사에게 첩의 자리를 내주기로 했겠는가?온모는 최소택이 분명 온사가 일을 크게 벌린 것을 보고 당황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다!”온자신은 온모의 체면 때문에 화가 나도 손을 멈추고 최소택을 놓아주었는데 여전히 생각을 고쳐먹지 않았을 줄 생각도 못 했다.처음으로 온모의 말에 반박했다.“난 진심으로 온모를 좋아한다. 그리고 온사도 진심으로 날 좋아하고. 지금 이지경까지 왔으니, 남자 된 입장에서 어찌 둘 중 한 명을 버리겠느냐?!”온사는 토가 나올 뻔했다.너무
얼마 지나지 않아, 온사는 그들에게 따라잡혔다.“다섯째야, 제멋대로 굴지 마.”“더 이상 아버지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온자신과 온자월은 앞뒤로 그녀를 가로막았다.온권승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했다.“데리고 내려가서 잘 가두어 두거라. 내 명령 없이는 아무도 꺼내주어서는 아니 된다!”이때, 갑자기 나지막하고 여유로운 목소리가 대문 쪽에서 들려왔다.“오늘 진국공 저택이 참으로 활기차구나.”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바라보자, 신처럼 아름다운 은발을 한 남자가 검은 깃발을 든 군사 몇 명을 데리고 국공 저택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봉황 눈을 가늘게 뜨고 기세등등하게 온모 일행을 훑어보았다.북진연이 물었다.“이게 뭣들 하는 것이오?”온장온은 낯빛이 살짝 변하며 온사와 온모를 잡아끌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섭정왕 전하를 뵙습니다.”온모는 북진연을 쳐다보고 있었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온권승은 예를 갖추지 않고 그저 미간만 살짝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께서 오셨군요. 하지만 오늘은 제가 전하를 접대할 시간이 없사오니, 전하께서는 다음에 다시 오시지요.”찾아온 사람이 그 일 줄은 몰랐다.정말 귀찮게 되었다.“괜찮습니다. 오늘은 저도 손님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북진연은 온권승의 예의 없는 말투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려 온사를 보며 말했다.“복명 성녀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온사도 폐하께서 그녀를 데려갈 것이라고 한 사람이 이렇게 위대한 인물일 줄은 몰랐다.평소의 그녀였다면 조금 무서웠을 텐데, 지금 북진연을 보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선왕께서 돌아가신 뒤, 그녀의 아버지는 재빨리 중요한 문신들을 회유했기 때문에 지금의 조정에서 아버지의 권력은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었다.게다가 여우처럼 간사하고 교활해서 왕이 이곳에 있었다면 왕도 그를 조금은 신경 썼을 것이다.하지만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선왕을
“진국공 걱정 마시오.”검은 깃발을 든 군사들은 북진연에게 의자를 하나 가져오게 해, 의자에 앉아서 꽤 자유분방하게 말했다.“내 부하들은 모두 전장에서 수많은 적군을 죽인 숙련자들이오. 검을 다루는 일은 그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니, 당신과 당신 아들들이 우리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저들도 당연히 정말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이 말은 오늘 감히 날 막으면 저들이 손을 쓸 것이라는 말이었다.온권승은 북진연의 행실이 항상 제멋대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진국공 저택까지 올 정도로 제멋대로 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온권승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온사는 내 딸이오. 저 아이는 내 허가 없이 순간적인 충동으로 폐하께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고 하였소. 지금 내가 저 아이에게 다시 폐하께 찾아가 어명을 거두라고 하였으니, 폐하께 저 아이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하시오. 그리고 섭정왕께서 저 아이를 수월관까지 데려가실 필요도 없소.”북진연은 발걸음을 멈춘 온사를 보고 담담히 그녀에게 물었다.“이것은 당신의 뜻이오?”“아닙니다.”온사는 고민도 하지 않고 부정했다.“나라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는 것이 여전히 저의 바람입니다. 앞으로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온사!”온권승은 화를 내며 호통쳤다.“너 설마 지금 정말 온씨 가문과 연을 끊고자 하는 것이냐?”온권승의 분노를 마주한 온사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말했잖습니까, 아버지께서 도와주시면 감사하다고요.”순식간에 온권승의 낯빛이 무섭게 변했다.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온사는 속으로 두려웠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이 모습을 본 북진연은 온사의 입장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소. 시간이 꽤 지났으니, 성녀님께서는 서둘러 채비를 마치시오.”이 말을 들은 온사는 더 이상 온권승의 얼굴은 고려하지 않고 뒤로 돌아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온권승은 다시 북진연을 보며 차가운
밭을 확인한 그녀는 활짝 웃으며 냇물을 길어 밭에 물을 주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옆에 있던 회춘초에 어느새 꽃봉오리가 피어 있었다.온사는 웃으며 꽃들을 쓰다듬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그녀는 약초를 지날 때마다 약재대전을 꺼내 일일이 대조를 했는데, 그러다가 또 한 약재가 눈에 들어왔다.약재대전에서 다른 약재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있었지만 유독 이 약초만 대략적인 모양과 이름, 출처를 제외하고 효능에 대해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서홍화, 먼 타국에서 나는 약초라….”온사는 재차 대조한 후에야 이 약초가 서홍화가 맞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효능을 알 수 없어 아쉬웠다.‘한번 먹어봐?’온사는 호기심에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독성이 있는지도 모르잖아.’만약에 강한 독성을 가진 약초라면 그걸 먹고 저 세상 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그녀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막수 사부께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떴다.며칠 후, 온씨 가문에서 또 사람을 보내왔다.이번에는 온모가 아니었다.그녀도 혼자 온사를 찾아오면 물을 맞거나 매를 맞는 결과밖에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번에는 온자월과 함께 왔다.온장오는 조정에 나가야 하고 온자신은 옥에 있고 온옥지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같이 올 수 있는 사람은 온자월뿐이었다.마침 아침 수업을 하고 있던 온사는 사저의 전갈을 듣고 손을 저으며 사저에게 말했다.“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세요. 기다리기 싫으면 말라고요.”어차피 급한 건 그녀가 아니었다.사저는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두 사람에게 전했다.수월관 밖에서 기다리게 된 온모와 온자월의 표정을 좋지 못했다.기도 의식이 이미 끝났기에 수월관은 대문을 열고 손님을 받고 있었고 산기슭의 흑기군도 철수했다. 손님들과 신도들은 평소처럼 수월관으로 들어와서 참배하고 향을 피울 수 있었다.온자월은 수월관에 와본 횟수가 적어서 거절당한 경험도 거의 없었기에, 기다리라는 말에 짜증스럽게 말했다.“금방 입관한 막내 여승이 무슨 할 일이 그렇게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회춘초는 내가 알아서 찾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눴던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북진연은 눈을 감고 턱을 매만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간도 크지. 이렇게 큰 비밀을 제대로 감추지도 않고 말이야.’고요 일행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살폈다.임자부는 북진연의 표정을 살피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왕야, 설마 그분에게 회춘초의 행방을 알아볼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북진연이 질문에 답하지 않자, 임자부는 그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왕야, 병세를 오래 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간을 길게 끌수록 발작의 빈도가 잦아지고 점점 힘들어질 겁니다. 회춘초가 코앞에 있는데 왜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겁니까?”“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단 회춘초만 확보하면 마지막 서홍화만 찾으면 모든 약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왜 주저하시나요?”고요 일행도 임자부의 말에 동의했다.“왕야, 어쨌거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왕야의 치료 아니겠습니까!”북진연은 부하들의 심정을 이해했다.하지만 수월관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녀를 생각하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그렇긴 하지만 두 가지 약재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서홍화를 찾지 못하면 쓸모없는 일 아니냐.”그 말에 임자부와 부하들은 입을 다물었다.북진연의 말처럼 백년 자령지와 회춘초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세 번째 약재인 서홍화는 임자부가 선배들이 남긴 고대 의술 서적에서 본 것이었고 그것에 대해 들어보거나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그래서 그들은 줄곧 바다에서 바늘 찾는 식으로 온 나라를 뒤지고 다녔다.“됐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북진연은 기가 푹 죽은 부하들을 보며 담담히 위로를 건넸다.그러자 임자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북진연까지 이렇게 말하는데 더 이상 재촉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한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임자부와 고요가 방
그의 속셈을 꿰뚫어본 북진연이 담담히 말했다.“그 사람이 의술을 배우는 중인 건 맞지만 진짜 배우고 싶은 건 독이야. 영감은 독학에 대해 알아?”“독이요… 제 전문은 아니지만요, 조금은 알죠?”독 얘기가 나오자 임자부는 금세 시무룩해졌다.비록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소문난 의술의 성자이긴 하지만 독은 그의 전문이 아니었다.“독을 잘 쓰는 사람이라면 귀의 독왕 그 녀석이 있겠군요.”독왕과 의술을 비긴다면 그가 이길지 몰라도 독은 아니었다.“안 그래도 최근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귀의 독왕 그 녀석이 경성에 있다고 하더군요.”임자부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듯 무심코 한마디 했다.그러자 북진연이 물었다.“그자와 연락이 닿을 방법은 있고?”“저 그 녀석이랑 안 친합니다.”북진연이 물었다.“그럼 전에 의술 시합은 어떻게 했지?”“제가 도전장을 써서 거리에 붙여 놓았는데 마침 귀의가 그걸 보고 일년 안에 누가 사람을 더 많이 살리는지 내기하기로 했지요. 결국 제가 상대보다 열 명을 더 살렸고요.”“도전장이라...”잠시 고민하던 북진연은 이내 고요 일행에게 지시했다.“사람을 보내 귀의 독왕의 행방을 알아보거라. 못 찾겠거든 임자부의 명의로 도전장을 써서 붙여.”“예, 알겠습니다!”“저는 반대예요! 제 동의도 안 받으셨잖습니까!”“항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북진연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말했다.임자부는 홧김에 그를 향해 눈을 한번 부릅뜨고는 백년 자령지에 시선을 돌렸다.그런데 이때, 자령지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던 임자부의 표정이 순간 급변했다.“잠시만요!”문턱을 나서던 고요 일행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임자부는 자령지를 코에 대고 계속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는데, 북진연이 짜증을 내려던 순간, 그가 갑자기 흥분의 비명을 질렀다.“회춘초입니다! 여기에 회춘초의 향기가 묻어 있어요!”백년 자령지도 진귀한 약초지만 그것에서 두 번째로 찾고 있던 진귀한 약재의 향을 맡았을 때 임자부는 더욱 더 흥분을
“아이고 이른 아침부터 대체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정신 차리고 이것부터 좀 봐주세요!”새벽에 섭정왕부의 하인에 의해 끌려온 임자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나무 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하고는 잠이 확 깨기라도 한듯 놀라했다. “세상에나! 이건 자영지 아닙니까!”그러자 임자부는 곧바로 조심스럽게 영지를 꺼내들었다.“최상급 품질이네요!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해왔답니까?”임자부는 자영지를 가까이 들이대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만 감탄하고 이 자영지가 백년짜리인지나 좀 봐주쇼!”다급해진 고요가 옆에서 재촉했지만, 유독 자리에 앉은 북진연만 덤덤한 표정이었다.임자부는 주저없이 답했다.“당연하지요! 이 크기를 좀 보십시오! 백년 자영지가 틀림없습니다!”“너무 잘됐네요!”그러자 고요와 부하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왕야! 이것이 정말 백년 자영지가 맞답니다!”“이제 다 됐네요. 왕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했던 세 가지 약재 중에 한 가지를 찾은 것 아닙니까!”“게다가 이렇게 쉽게 구하다니!”북진연은 살짝 놀란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그는 빈 상자를 빤히 보다가 그날 담담하게 선물을 건네던 온사를 떠올렸다. 그녀에게서 이런 큰 선물을 받게 될 줄이야!임자부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북진연에게 물었다.“왕야, 이 백년 자영지는 누구한테서 받은 것입니까? 신선한 정도를 보니 금방 딴 게 분명합니다.”임자부는 북진연의 부하가 캐왔다고 생각해, 만약 약재를 캔 장소만 알아낸다면 어쩌면 횡재할 수 있겠다고 기대하며 손을 비볐다.“꿈 깨. 그건 내 부하가 캔 것이 아니다.”그러자 북진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임자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예? 그럼 누가 캔 겁니까?”임자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북진연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누가 나에게 선물로 주더군.”“선물이요?”임자부는 순간 아쉬운듯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기에 이런 보물을 선물한답니까!”본디
온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온사가 자신도 몰랐던 정곡을 찔렀으니 말이다. 그녀는 독기 어린 눈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온씨 가문에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거야?”온사도 사실 그럴 생각이었지만 온모가 편하게 살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온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상황을 봐야겠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돌아가서 진국공부의 적녀의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적녀라는 두 글짜가 온모의 자존심을 찔렀다.대외적으로 그녀는 온권승이 은인의 딸을 입양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단지 그녀의 어머니가 정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제대로 따지면 온모는 서녀의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비천한 사생아에 불과했다.온사의 어머니인 란자군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우고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써넣지 않는 한은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영원히 온사를 뛰어넘어 진국공부 적녀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전생의 온모가 죽은 온사의 어머니를 괴롭혔던 이유기도 했다.“꿈 깨!”온모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잔뜩 분노한 눈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가문에서 나갔으면 다신 돌아오지 마!”온사의 말은 일부분 사실이었다. 그녀는 온사를 집에 다시 데려다가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기를 원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온사는 이미 예전처럼 그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밖에서 해결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온모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는 등 뒤가 무엇인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돌린 온사의 눈에는 막수 사태와 다른 사태들의 싸늘한 눈동자가 들어왔다.“이곳은 수월관 승려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입니다. 함부로 침입하지 마시지요.”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흉악한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온모는 처음부터 이 여승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그래서 곧바로 표정을 수습하고는 온사에게 미
“수상한 여자?”온사는 멈칫하며 되물었다.“사람들과 같이 오고 있어?”“아니요. 혼자인 것 같았습니다.”온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그럼 넌 일단 숨어 있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예.”추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자취를 감추었다.온사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밖으로 향했다.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온사는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피하고는 손을 뻗어 상대의 귀뺨을 쳤다.선수를 치려다가 된통 당한 온모는 얼굴을 감싸며 분노해서 소리쳤다.“온사, 네가 감히 나를 쳐?”“그래 쳤다. 그래서 뭐?”온사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정말 머리가 안 좋은 건가. 내가 또 말해줘야 해? 내가 널 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말이야.”“너!”분노한 온모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온사가 더 빨랐다. 그녀는 바로 상대의 손목을 낚아채고 주저없이 귀뺨을 날렸다.짝!방금 전보다 더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온모는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매를 맞은 탓에 볼이 빵빵하게 부어올랐다.온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디 다시 쳐봐. 내가 한대라도 맞나?”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전에는 기회가 없어서 못했는데, 그럼 지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온사는 몇 대 더 때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그러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온모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그녀는 힘겨루기로 온사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화제를 돌렸다.“언니, 어떻게 동생한데 이렇게 할 수 있어? 내가 당장 폐하한테 가서 이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위선자 같으니라고! 네 본모습을 폐하한테 다 까발릴 거야!”“동생?”온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웃기지 마. 내 어머니는 내게 여동생을 낳아주지 않으셨어.”“그래. 같은 배에서 나온 게 아닌 건 인정해. 하지만 그래서 뭐?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다들 날 친딸,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챙겨줬어.”온모는 의기양양하게 온사를 도발했다.
오늘의 온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태어나기를 성녀로 태어났다고 감탄하며, 앞으로 본분을 다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성녀로 존중해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온사 본인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진짜 성녀로 거듭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삼촌, 보세요. 짐이 선택한 성녀 괜찮지요?”한편, 어린 황제는 조정의 대신들과 백성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그는 점점 더 온사가 마음에 들었다.처음에는 그저 기회를 준 것뿐이었지만, 그녀가 지금 보여준 모습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폐하의 안목이 참 탁월하십니다.”북연진도 어린 황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동안 온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북연진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기도 의식에 필요한 경문은 총 아홉 장,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전부 암기해서 읊어야 했다.이것이 온사가 급하게 수월관으로 돌아온 이유이기도 했다.다행히도 남은 며칠 동안 막수 사태의 도움으로 그녀는 결국 기도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아홉 장절의 경문을 모두 암기하는데 성공했다.“그런데 나보다 나이도 많은 영감탱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어요.”어린 황제는 피식 웃으며 온씨 가문 일행을 힐끗 바라보았다.온자신을 제외한 온씨 가문의 모두가 무대 아래에서 행사를 참여했지만, 온권승은 그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관망대에 올라간 딸을 바라볼 뿐이었다.온장온과 다른 형제들의 표정은 착잡했다. 지금도 그들은 여동생이 성녀이자 여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리고 온사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눈빛 한번 안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분명 가족인데도 그녀는 그들을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고 있었다.“온사 쟤는 정말 저렇게까지 우리랑 멀어지고 싶은 걸까?”하지만 온장온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그건 아닐 겁니다.”옆에 있던 온자월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집에서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으면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온사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사부님이… 독왕이셨다고요? 귀의라고 불리는 독왕이요?”막수 사태가 눈썹을 찡긋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대명 왕조에는 두 명의 유명한 의술 천재가 있었다.한명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성 임자부, 그리고 또 한명은 의술과 독학을 겸비한 귀의 독왕이었다.그들의 명성은 안방에서 곱게 자란 온사마저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중 신출귀몰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귀의 독왕이었는데, 소문에 지금까지 귀의 독왕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그런데 오늘 온사가 그런 인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신비에 둘러싸인 귀의 독왕이 여승들만 사는 허름한 사찰의 주지 사태인 줄을 누가 알았을까?“그럼 사부님, 정말 저에게 독학을 가르쳐 주신다는 말씀인가요?”“왜? 싫으냐?”“그럴 리 없잖아요!”온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냥 제가 이렇게 큰 행운을 가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요.”안 그래도 직전에 북진연이 믿을만한 스승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일깨워 줬었는데 독왕이 바로 신변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분이 자신의 사부라니!온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지금 기뻐하긴 일러. 독학을 배워주는데 있어서 만큼은 나도 아주 엄격할 거니까.”막수는 온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지금은 먼저 날 따라서 의술부터 배우겠다고 맹세하렴.”“무슨 맹세요?”막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불가에서 해서는 안 될 것 중에 하나가 살생이야. 독을 배우겠다면 그 독으로 절대 살인을 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그러자 온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그녀는 한참의 고민 끝에 막수에게 말했다.“걱정 마세요, 사부. 비록 독을 이용해서 복수할 생각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제 신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녀는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는 이유로 가문을 떠났고 나라를 위해 기도
“이건 섭정왕 전하께 드리는 저의 답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 드리는 거예요. 귀찮으시겠지만 섭정왕 전하께서 소인을 대신해 폐하께 전해주셨으면 합니다.”북진연은 나무 상자를 건네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렇게 북진연이 돌아간 후, 온사는 다시 경문을 베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사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바로 막수 사태였다! “무우야.”막수 사태는 진지하게 경문을 필사하는 온사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사부님?”온사가 이내 붓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섭정왕 전하께서 그림자 호위 한 명을 데려왔다지?”“예. 감사히 받았습니다. 제가 추월이라는 이름도 지어줬어요! 그 아이를 만나보시렵니까?”사람을 수월관에 들이는 일은 막수 사태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럴 필요까지 없다. 네 사람이니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막수는 손사래를 치고는 온사가 건넨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아 보거라. 내가 너한테 긴히 물어볼 게 있으니.”온사는 찻잔을 내려놓고 사부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무슨 일입니까?”막수는 온순한 그녀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너… 최근에 독약을 연구하고 있었니?”온사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다급히 해독약을 그녀에게 먹여준 사람이 바로 사부였으니 말이다.“예.”온사는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막수 사태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불가에 발을 들인 제자는 독을 연구하면 안 되는 겁니까?”막수 사태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아니다. 독이라도 잘 쓰면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거니까.”온사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막수 사태가 말을 이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몰래 독을 연구하는 것은 안 된다.”막수는 엄중한 표정으로 온사를 바라보았다.“그날 자칫 잘못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하지만 사부님, 저 이미 독경을 손에 넣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