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빨리 식사를 마친 북진연은 온사가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바라보던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에게 물었다.“왜 고기는 안 먹고 풀만 드시오?”온사는 아까부터 줄곧 야채만 집고 있었다.북진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이 집 고기반찬이 입맛에 안 맞아서 그러시오?”그러자 온사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전하, 잊으셨습니까? 저 출가인입니다. 출가인은 고기를 먹을 수 없어요.”온사는 현재 법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북진연도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그 말을 들은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한창 자랄 나이인데 저 자그마한 체구에 고기도 안 먹고 어찌 성장한단 말인가?“조금도 먹으면 안 되오?”온사가 고개를 저었다.“안 되죠.”북진연은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여긴 수월관도 아닌데, 몰래 먹어도 괜찮지 않소.”온사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됩니다. 수월관이 아니더라도 저는 수련 중이라, 계율을 어기면 수련의 법도를 어긴 거나 마찬가지인게 될 것입니다.”북진연은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비록 그는 수련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온사가 이렇게나 단호하게 말하는데 더 이상 권했다가는 그녀의 기분만 상하게 할 것 같았다.하지만 마음속 걱정이 계속 해결되지 않으니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잠시 후, 온사가 드디어 식사를 마치자, 북진연이 그녀에게 깨끗한 손수건 하나를 건넸다.“입 좀 닦고 위층으로 올라가 잠시 쉬고 계시오. 이따가 나도 올라가겠소.”“예.”온사는 그가 뭘 하려는지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그녀는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요, 넌 가서 성녀 전하를 지키거라.”“예!”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고요는 거대한 검을 들고 사람들 틈을 지나 온사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온사가 모퉁이로 사라지자 북진연은 싸늘한 시선으로 손님 행색을 하고 있는 오합지졸들을 바라보았다.그들 중 일부는 북진연을 알아보고 지레 겁을 먹은 자들도 있
“예.”지시를 마친 그가 뒤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가며 심부름꾼에게 따뜻한 물을 부탁했다.“예… 바로 가겠습니다!”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심부름꾼이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갔다.위층으로 올라간 북진연은 온사를 놀래키지 않기 위해 일단 방으로 돌아가 옷부터 갈아입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올라가자 마자 삼층 방 문 앞에 앉아 있는 온사의 모습이 보였다.북진연이 흠칫 놀라며 그녀에게 물었다.“어찌 밖에 앉아 있소? 먼저 방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소?”“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죠. 몸에 무슨 피를 그리도 많이 뒤집어썼나요? 다친 곳은 없나요?”그를 본 온사는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괜찮소, 내 피가 아니니까.”북진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랑하듯 말했다.“저런 오합지졸들로는 서른 명 더 와도 내 상대가 아니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옆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요. 아무도 우리 전하의 실력을 못 따라온답니다. 전장에 나가 있을 때 혼자서 수백 명의 적군을 무찌른 분인데 말이에요!”고요는 주절주절 북진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진연이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고요는 의아해하며 멍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내가 뭘 잘못했나?’북진연은 눈치 없는 부하의 엉덩이를 걷어찼다.“당장 안 꺼져?!”고요는 그제서야 기죽은 얼굴로 도망쳤다.그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북진연과 온사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낀 온사가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말했다.“다친 게 아니라면 됐습니다. 약을 바를 필요도 없겠네요.”북진연은 그제야 온사가 들고 있는 약병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가 다칠까 봐 걱정돼서 약병까지 들고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아, 이제야 기억나는군. 방금 뒤에서 습격하던 놈들이 있어서 좀 다친 것 같소.”방으로 돌아가려던 온사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예? 전혀 안 다쳤다고 하지 않았나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른 더 와도 문제없다고 하던 사
온사는 섭정왕이 준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매혹적인 미모의 소유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온사는 더 보고 있다가는 갖지 말아야 할 생각까지 가질 것 같아서 다급히 시선을 거두었다.“서… 섭정왕 전하, 머리가 좀 흐트러지셨네요. 먼저 머리부터 묶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따가 약 바를 때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요.”북진연은 일부러 이러고 나온 것이었기에, 온사의 눈빛이 요동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평소에는 외모에 신경도 쓰지 않던 그였지만, 오늘은 마치 구애 중인 공작새처럼 깃털을 활짝 펼치고 자신의 매력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싶었다.“그런가? 방해가 될 줄은 몰랐는데… 사태가 한 번 봐주겠소?”북진연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온사에게로 다가가 일부러 옷섶을 헤치고 빵빵한 팔근육과 등근육을 보여주었다.왜소해 보이던 섭정왕 전하가 이런 근육질의 몸매를 갖고 있을 줄은 온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왜 그러시오? 안 보여서 그러시오? 옷을 조금만 더 내리면 보이려나?”그 말을 들은 온사는 다급히 그를 말렸다.“내리지 마세요!”옷을 더 벗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전하, 상처는 확인했으니 일단 그 옷 좀 입으시는 거 어떤가요?”온사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북진연은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몸매에 굉장히 자신이 있었다.하물며 그의 얼굴은 몸매보다 훨씬 공격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그러니 누가 본들 두근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온사는 정신이 혼미했다.그녀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눈을 가린 채, 한손으로 그의 옷섶을 끄집어서 위로 올렸다.북진연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장난을 더욱 치고 싶어졌다.하지만 그랬다가는 소녀가 도망갈 게 번하기에 치솟는 감성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은발을 하나로 묶었다.비록 무시한 동작이긴 했지만 매혹적인 어깨선이 잘 드러났다.“봤으면 약 좀 발라주시오.”북진연이 은은한 미소를
온사는 상처에 약을 바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부하들 있잖아요? 설마 부하들이 전하의 명령까지 거부하겠어요?”북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내 명을 거절할 자들은 없겠지만 그자들이 내 몸에 손 대는 것은 싫소.”사내가 그의 몸에 약을 바른다?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북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온사를 달랬다.“방금 사태가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면 상처가 있는 것도 까먹었겠소. 부하들이라고 해도 나보다 더 덤벙대는 놈들인데 그런 놈들한테 어찌 그런 부탁을 하겠소.”비록 상처를 입지도 않았지만 소녀가 약병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없던 상처도 만들어낸 그였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계속 그렇게 장난치면 저 약 못 발라드립니다.”북진연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소.”온사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며 북진연의 어깨를 툭 쳤다.북진연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모르는 척했다.북진연이 속으로 웃으며 뭐라고 하려던 찰나, 온사의 방에서 한 소리가 들려왔다.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방 안을 바라보았다.온사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는듯 조심스레 불러보았다.“추월이니?”“사태?”안에서 추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사는 약병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으로 들어가자 추월이 거기 있었고 그녀의 발치에는 큰 자루 하나가 놓여 있었다.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거기 사람이 들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벌써 납치해온 것인가?”온사는 다가가서 자루를 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온모가 그 안에 있었다.온모는 손발이 묶이고 입이 틀어 막힌 상태로 힘껏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온사는 손을 뻗어 온모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헝겊을 빼주었다.드디어 말을 할 수 있게 된 온모가 욕설을 퍼부었다.“온사, 너 미쳤어?! 감히 진국공 저택에 사람을 보내 나를 납치해? 아버지께서 아시면 너희 모두를 잡아가실 거야!”“그런 건 전혀 겁나지 않아.”온사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너 설마
온사는 전생을 통해 온모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녀의 어미가 남긴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독을 사용할 줄 아는 자와 암살자도 있었다.전생의 그녀는 그들의 손에 온갖 고통을 받았다. 이번 생에는 온모가 성급하게 그들을 불러들인 만큼 초조하다는 의미일 것 같았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온사는 이번 기회에 뒤에서 온모를 돕고 있는 자들을 전부 색출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물론 혼자서는 힘드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온사는 고개를 돌려 문밖에 있는 북진연을 불렀다.“섭정왕 전하…!”안에 있는 자가 추월이란 것을 확인한 북진연은 밖에서 온사를 기다리기로 했다.그는 느긋하게 방문에 몸을 기대고 온사가 두고 간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온사가 다시 나와 계속해서 약을 발라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안에서 나는 대화를 듣고 있던 그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왜 그러시오?”그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그냥 죽일 거요? 아니면 목숨은 붙여놓을까?”그는 온사가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북진연은 온사의 검이 되고 싶었다.그녀는 그의 무우 사태이기에, 사태가 하는 부탁이라면 그게 살인이라고 하더라도 다 들어줄 수 있었다.어차피 이미 너무도 많은 살육을 저지른 그였으니 손에 피를 좀 더 묻힌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그녀가 원한다면 수십 명, 몇백 명, 그리고 몇 명을 죽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온사는 순순히 자신의 말을 따라주는 북진연이 고마웠다.심지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도 존귀하신 섭정왕 전하께서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돌이켜보면 북진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주었다.처음엔 여자의 접근을 혐오한다고 해서 조심스레 다가갔지만, 지금은 그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사이가 되었고 섭정왕도 흔쾌히 그녀의 검이 되어주었다.그녀가 무리한 부탁을 해도 북진연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싸늘하게 대한 적
“이름은….”온사는 고개를 돌려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온모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제 기억에는 김사도라는 자였던 것 같아요.”이름까지 온사의 입에서 나오자 온모는 경악하며 몸부림쳤다.“웁! 웁!”안타깝게도 입이 봉인되어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온사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네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네가 어떻게 그 사람의 생김새랑 이름까지 알아?’분명 그녀의 기억에 김사도는 경성에 나타난 적도 없었고 온사와 만난 적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온사는 어떻게 그의 존재를 아는 것일까?온사는 분명 김사도를 만난 것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김사도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겨준 이국인 자객이었고 온모가 가장 믿는 패였다.이 패를 감추기 위해 진국공부에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김사도와 연락을 취한 적이 없었다.진국공가의 사람들이 점점 통제를 벗어나자 어쩔 수 없이 하루 전에 서신을 보낸 게 전부였다.그런데 온사는 마치 진작에 김사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김사도가 날 배신한 걸까?’하지만 그것도 영 신통치는 않았다. 온사는 분명 김사도를 잡아달라고 말했기에, 만약 김사도가 그녀를 배신했다면 온사가 섭정왕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 리 없었다.충격을 받은 온모는 초조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방금 전까지는 김사도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바랐지만, 지금은 그저 그가 하루라도 빨리 이상함을 느끼고 철수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김사도만 살아 있다면 온사는 절대 쉽게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김사도마저 잡히거나 죽는다면 그녀는 가진 모든 패를 잃게 되는 셈이었다.다음 날, 북진연은 아니나 다를까 온모를 묶어서 마차 지붕 위에 매달았다.그러고는 흑기군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자객의 우두머리를 자극해서인지, 이어지는 며칠 간 수많은 자객들이 몰려들었다.하지만 워낙 적은 인원수에다가 북진연과 흑기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들의 우두머리는 드디
“동생도 미인에게 홀렸구먼! 그런데 여자가 둘이라면 차라리 둘 다 살려서 우리가 사이좋게 나눠가지는 건 어떤가?”이태성의 입에서 상스러운 요구가 튀어나왔다.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산채 대문 앞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김사도를 위해서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아직은 김사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 같았다.김사도가 그들 몰래 움직이고 있을 때, 이태성도 몰래 부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산채에 있던 산적무리들은 몰래 산길을 돌아 김사도를 포위했다.“너희들이 데리고 있어도 되긴 하지. 하지만 너희들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있을까?”김사도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동생 말을 들어보니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하군. 그런데 방금 전에는 이득이 될 것만 얘기하고 우리한테 주의해야 할 점은 전혀 말해주지 않았지 않나?”그러자 이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쾌한 어조로 김사도에게 말했다.“망자에게는 당연히 얘기해 줄 필요가 없으니까.”“뭐? 너!”김사도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머금고 오른손을 들었다. 언제 접근했는지 모를 지네가 순식간에 이태성의 머리를 공격했다.“악!”이태성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형님?”“당장 저 자식 죽여버려!”“죽여!”산적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김사도는 등 뒤에서 쌍검을 꺼내며 냉소를 지었다.“너희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나한테 항복하는 이는 죽이지 않을 거야.”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산적들을 무자비하게 도살하기 시작했다.흑호굴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그렇게 한 시진 후, 흑호굴의 산적의 반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남은 자들은 김사도에게 항복했다.그들이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이 사내가 너무나 강력했다.김사도는 시작하기 전 말했던 것처럼 항복한 산적들을 죽이지 않고 항복을 거부한 자들의 시신을 토막내는 모습들까지 그들에게 보여주었다.너무나 잔인해서 현장에 있던 산적들마저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남은 산적들이 반항을 포기하자 김사도
마침 저녁식사 준비를 마친 고요가 커다란 그릇 두개를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왕야, 성녀 전하, 어서 식사하세요!”온사는 자기 몫의 그릇을 받아들었다. 냄새만 맡아도 흑기군의 요리사가 꽤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성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반찬과 국물 모두 채식이었다.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니 맛이 아주 좋았다.온사는 그릇을 들고 밥을 먹으며 속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며칠 전까지 끊임없이 몰려오던 자객들이 오늘에 와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폭풍우 전야의 고요함과 흡사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오?”정신이 다른데 팔린 온사의 모습을 보고 옆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던 북진연이 물었다.“그자들이 오늘 밤 찾아올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오늘 밤에 무조건 올 거요.”북진연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고개를 돌린 온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오늘 밤이 그들이 움직이기 가장 최적의 시기이니까. 오늘 밤이 지나가면 앞으로 우리가 도착할 곳은 활동하기에 꽤 불편할 것이오. 이틀만 지나면 우린 목적지에 도착할거예요.”김사도가 만약 또 암살자를 보낸다면 오늘 밤이 최적이라는 얘기였다.“오늘 밤도 푹 자기는 글렀네요.”온사가 웃으며 말했다.북진연의 예상처럼 군대가 교대로 식사하는 시간에 갑자기 수림에서 놈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저 놈들이다! 죽여라!”“식량이야! 저렇게나 많은 식량을 갖고 있었다니!”“역시 사도 형님 말이 사실이었어! 은화도 있다니!”“그럼 일단 은화부터 빼앗자고!”“한 놈도 빼놓지 말고 다 죽여!”식량과 은화를 담은 차를 알아본 흑호굴 산적들은 광기에 미쳐서 우르르 달려들었다.식사 중이던 흑기군은 들고 있던 그릇을 바닥에 버리고 검을 빼들었다.“물자를 보호하라!”처음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흑기군은 곧 침착하게 검을 빼들고 산적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이때, 화살 하나가 온사를 향해 날아갔다.북진연
“좋아.”사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막수 사태가 주저없이 요구를 승낙했다.막수는 고개를 들려 단호한 눈빛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갈 테니 넌 여기 가만히 있어.”온사는 자기가 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상의할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막수 사태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예, 그렇게 할게요. 조심해요, 사부님.”김사도는 몰래 온사를 힐끗 보고는 짐짓 여유 넘치는 어투로 물었다.“내가 갈까?”사구가 담담히 말했다.“아니, 사칠 네가 가.”눈만 빼고 온몸을 꽁꽁 사맨 사칠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형님.”저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사구는 일당 중에서도 꽤 지위가 있어 보였다.김사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사칠을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길을 비켰다.사칠은 관을 내려놓고 맞은편을 향해 걸어갔다.그와 동시에 막수 사태도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사구는 눈앞의 늙은 여승을 빤히 노려보았다.3일 전 수월관에서 만났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악취미가 발동해서 상대를 겁주려고 시도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참 재미없었던 거로 인상에 남았다.그런데 그 여승이 성녀의 사부이자 수월관의 주지 사태였을 줄이야.사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한편, 사칠이 다가오자 검은 인영이 온사의 뒤편에 나타났다.추월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칠이 자칫 조금만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당장 죽여버릴 기세였다.거래 과정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사칠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온사는 칼로 온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옮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그녀는 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관에서 안고 돌아올 때에야 천천히 비수를 내렸다.“아가씨, 가시죠.”사칠의 목소리는 사구보다도 더 흉측했는데 마치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그는 예의고 뭐고 다짜고짜 온모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일행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가자! 빨리 가자!”온모는 허둥지둥 사칠을 따라갔다. 만
‘사구? 사구가 왔어! 드디어 날 구하러 온 거야!’‘온사 이 망할 년! 넌 이제 죽었어!’온모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온사에게 붙잡혀 있는 신세가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사구에게 달려가고 싶었다.“온사 네 이년!”사구 일행은 처참한 모습의 온모를 확인하고 분노를 터뜨렸다.물론 김사도는 예외였다.그는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이 광경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물론 동료가 보고 있으니 안 그런 척은 해야 했다.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짐짓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어찌 우리 아가씨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지금 저 꼴을 봐! 대체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뭔지 모르지만 아주 잘했어!’온사도 그의 눈빛에 숨은 찬탄과 희열을 알아보았다.그녀는 한심한 눈으로 김사도를 바라본 뒤, 담담히 말했다.“난 약속 지켰어. 너와 약속한 이후로는 얘 털끝 하나 안 건드렸으니까.”“그럼 저 상처들은 대체 어떻게 난 거야!”김사도의 목소리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앙칼졌다.온사는 그를 무시하고 음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니 누가 늦게 오래? 뭐 너무 늦은 건 아니지만. 하루만 더 늦게 찾아왔으면 아마 온모의 시신을 마주했을 텐데 말이야.”적나라한 협박에 사구와 그의 동료는 이를 갈았다.사구는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성녀, 네 어머니의 시신이 우리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마. 넌 우릴 자극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온사는 냉소를 짓고는 온모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리고 김사도의 충격 어린 눈빛을 무시한 채, 사구를 협박했다.“어디 해봐. 내 어머니의 시신에 손이라도 대는 날엔 나도 너희의 아가씨를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악! 뭐 하는 거야!”온사는 그대로 칼을 빼들어 온모의 목을 겨누었다.“해볼래, 사구?”위협적인 온사의 말투에 온모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눈을 가린 천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지
너무 동생이 그리웠던 온자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을 뒤쫓아갔다. 그는 뒤늦게야 온사가 경성 방향이 아닌 근처의 마을로 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한참 후, 앞에 정자 하나가 나타났다.온자신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피월정이잖아? 여긴 왜 온 거지?”그가 의혹에 빠져 중얼거릴 때, 이상한 복장을 입은 세 명의 사내가 피월정에 나타났다.온자신은 인상을 찌푸리고 걸음을 멈추었다.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그쪽을 주시했다.“온자신이 따라왔어.”막수는 뒤쪽을 힐끗 보고는 온사에게 말했다.온사는 그쪽에 시선도 주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상관없어요. 이따가 제가 하는 일을 방해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막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둘은 전방에서 다가오는 사구 일행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들 중에는 김사도도 있었다.나머지 한명은 온사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얼굴을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서 눈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등에 관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온사 어머니의 관이었다.이들은 도굴할 때 관까지 통째로 가져갔던 것이다.온사는 주먹을 꽉 쥐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성녀 전하, 이건 우리가 3일 전에 했던 약속과 얘기가 다르잖아?”사구는 온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식간에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지금 약속을 번복하는 건가?”온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너희 아가씨는 이곳에 있어. 다만 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한 후에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너희가 어머니 시신에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그녀는 어머니의 시신이 온전한지, 아니면 이들에 의해 훼손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똑같이 돌려줄 것이다.사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걱정 마, 성녀 전하. 네 어머니의 시신은 아주 온전한 상태니까.”말을 마친 그는 장풍으로 관 뚜껑을 열었다.이미 그들이 한번 열었어서 그런지 뚜껑은 아주 쉽게 열렸다.
북진연이 떠난 후, 온사도 공간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온모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삼일 후가 약속한 날이니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특히나 사구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완벽히 준비하고 가는 게 맞았다.독은 사부가 더 뛰어나다고 하지만 상대는 뱀을 부릴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었다.게다가 전부 다 강한 독성을 가진 독사였다.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그들은 수동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뱀에게 물릴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게 싫었다.온사는 2층 연금대로 바로 갔다.이곳에는 독성이 강한 약재들 외에도 독벌레도 있었다.불개미와 독거미, 지네도 있었다.온사는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맨 마지막에 전갈에게 시선이 갔다.오독 중에 가장 독한 것이 전갈 독이라고 했다.독성도 강할 뿐만 아니라 전갈 자체가 아주 흉포한 벌레였다.온사는 사구를 상대하려면 전갈이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했다.그런데 아직은 체형이 너무 작고 독성이 약했다.온사는 3일 안에 이 전갈을 제대로 육성하기로 마음먹었다.공간에 영수는 넘쳐나고 가진 독약까지 합치면 대왕 전갈을 육성해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삼일 간 온사는 공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그 기간에 막수가 찾아왔지만 추월이 나서서 응대했다.시간은 어느덧 흘러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그날 아침, 온사는 아침 일찍 공간에서 나왔다.3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았지만 워낙 공간 안에 농후한 영기로 가득찼기에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정원을 나가자 막수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준비는 다 됐니?”온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예, 가시죠.”막수는 의아한 얼굴로 온사의 등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온모는 어디 있니?”“데리고 가는 중이니 걱정 마세요, 사부.”그 말을 들은 막수는 온사가 추월에게 맡긴 줄로만 알고 더 캐묻지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당나귀를 끌고 산을 내려갔다.막수는 당나귀 따위를 타기 싫었기에 온사를 위에 태우고 자신은 고삐를 잡고 앞에서 걸었다.남산 산기슭에 다다랐을
그는 혹시라도 막수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해명을 덧붙였다.하지만 그럴수록 막수의 눈에는 더 수상해 보일 뿐이었다.온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랬군요. 어서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오죠.”그녀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고 북진연과 막수만 정원에 남았다.막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의 마음이 너무 티가 납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다 보일 정도예요. 무우는 현재 우리 수월관 사람이니 전하께서 이럴수록 무우의 수행을 망치는 것입니다.”북진연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서신을 받은 후,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온 그였다.수월관에 도착하고 막수와 부딪쳤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위가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밤중에 여인의 처소로 달려오다니, 다른 사람이 봤으면 온사의 명성에 큰 누를 끼칠 것이다.북진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군. 사태,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다음엔 더 주의하겠습니다.”막수는 다음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북진연을 노려보았다.이때, 온사가 뜨거운 차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세 사람은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사는 북진연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막수와 아까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했다.“사부님, 독사의 사체는 어디에 쓰려고 남기라고 한 건가요?”온사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구석 쪽을 바라보았다.북진연은 그제야 구석진 곳에 쌓인 피 묻은 보따리를 발견했다.살짝 풀어진 틈새로 독사의 머리가 보였다.비취색의 영롱한 색상을 보고 북진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독성이 매우 강한 독사인데다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보따리의 형태로 봐서 적어도 열 마리는 될 것 같았다.이게 모두 온사의 정원에서 나왔고 오늘 온사가 하마터면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고 생각하니 북진연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이미 죽은 녀석들이고 좋은 약재로 쓰일 수 있어. 마침 3일 후에 그 사구라는 인간을 만나야 하니 그 전에 이것들로 좋은 선물을 준비할
약속 시간을 잡은 사구는 그 길로 뒤돌아섰다.그렇게 온사의 정원을 지나던 그는 뭔가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늙은 여승이 있었다.사구는 그 여승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그가 옷소매를 휘두르자 뱀들이 소매에서 기어나와 여승이 있는 곳을 향해 기어갔다.사구는 그걸 본 여승이 겁에 질려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흥미가 사라진 사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길로 수월관을 벗어났다.사구가 떠난 후, 추월은 정원 안팎을 꼼꼼히 확인했다.그리고 정원 곳곳에서 십여 마리의 뱀을 잡아냈다.“사구 놈이 다녀간 후로 내 처소가 뱀 소굴이 다 되었네.”독사를 전부 처치한 추월은 굳은 표정으로 뱀의 사체를 한곳에 모아 불사르려 했다.그리고 이때, 막수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잠깐, 그 독사들은 그대로 둬.”고개를 돌린 온사가 물었다.“사부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내가 안 왔으면 네가 나 몰래 이렇게 큰 일을 치르고 있을 줄도 몰랐잖니.”막수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사를 쏘아보았고 온사는 괜히 찔려서 어깨를 움츠렸다.사부는 밖에서 그녀와 사구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온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사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작정하고 숨긴 게 아니라 확실해지면 사부님께 말하려고 했어요!”“정말이니?”막수 사태는 못 믿겠다는 어투로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온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저도 출가인입니다, 사부님!”“하, 말은 잘해.”막수는 냉소를 지으며 온사에게 말했다.“일단은 믿어주도록 하마. 허나 삼일 후 나도 너와 같이 가겠다.”“그건 안 돼요, 사부님!”온사는 당황하며 막수를 말렸다.“아주 위험한 상황이란 말이에요. 상대가 몇이나 데리고 나올지도 모르고 그쪽에서 만약 사람이 많이 오면 한바탕 피바다가 될 거예요. 사부님은 출가인인데 어찌 그런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겠어요?”“그럼 넌 출가인이 아니고?”
미리 대비를 해두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그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나에 대한 정보를 대체 누가 줬을까?”중년 사내는 위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 배신자는 빨리 제거해야 해서 말이야.”온사는 당연히 이 시점에 김사도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주인이 워낙 겁쟁이라 좀 겁만 줬을 뿐인데 전부 말하더라고. 그걸 꼭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알아?”“쯧,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사구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참 궁금하단 말이야. 고결하신 성녀 전하는 대체 우리 아가씨한테 어떤 식으로 겁을 줬을까?”능글맞게 웃는 그의 눈매에서 위협이 느껴졌다.하지만 온사에게는 저런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도 많아서 말이야. 궁금하면 너도 경험하게 해줄 수 있어.”말을 마친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됐어. 난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고. 성녀 전하의 시련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 본론부터 얘기하지.”사구는 손을 뻗더니 소매 안에서 고급 소재의 헝겊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성녀 전하, 이게 뭔지는 알고 있지?”온사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것은 사망하신 어머니께서 입관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온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좋아. 어디 네 얘기 한번 들어보지.”그녀는 소매를 만지는 척하며 공간 안에서 뭔가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피 묻은 머리카락이었다. 딱 봐도 억지로 잡아당겨 뽑은 것으로 보였다.사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내 어머니의 물건으로 날 협박하려 하지 마. 네가 어머니를 완전한 상태로 돌려준다면 너희의 아가씨도 무사할 테니까.”물론 지금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그래도 사지 멀쩡하고 손발가락 그대로 붙어 있으니 완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사구는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호통쳤다.“이런 식으로 나에게 협박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어!”“그건 예전이고 지
“뭐라고?”온자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는 그런 그를 싸늘히 노려보고는 말했다.“거래 안 한다고. 알아들었어? 내가 다시 말해줘?”“온사, 너!”온자월이 온사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 검은 인영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놀란 온자월은 품에 간직한 비수를 꺼내려 했다.하지만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추월의 주먹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추월은 주먹으로 온자월의 얼굴을 쳤다.퍽!온자월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그가 일어나서 반격하기도 전에 추월은 그의 복부를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너… 넌 누구야? 감히 진국공가의 공자에게 무력을 휘두르다니!”온자월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신분으로 추월에게 겁을 주려 했다.온사는 그런 그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갔다. 추월이 고개를 숙이고 온사의 뒤에 섰을 때에야 온자월은 상황을 눈치챘다.“이 아이는 내 사람이야. 뭐, 불만 있어?”온사는 바닥에 쓰러져서도 소중히 연을 감싸고 있는 온자월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아들이 원수의 딸을 구한답시고 친히 만들어준 연을 거래 조건으로 들고 나온 걸 어머니가 아시면 참 후회하실 거야.”“원수의 딸이라니! 또 무슨 헛소리야!”온자월은 바닥에 쓰러져 몸도 못 일으키면서도 언성을 높여 말했다.“참, 내 정신 좀 봐. 또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온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니는 생전에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어. 네가 불효자인 걸 아셨어도 후회는 없으셨을 거야.”말을 마친 온사는 온자월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온자월 너는 후회 안 해?”온자월은 주먹을 꽉 쥐고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 넌 나와 막내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어. 하지만 착각하지 마. 혈연을 떠나서 막내는 내 동생이야!”“그래?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도 그 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랄게.”그 말을 끝으로 온사는 수월관으로 돌아가 버렸다.그녀는 더 이상 온자월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그가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온사는 그가 뭐 하러 온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온자월이 대체 뭘 갖고 왔을지 궁금했다.밖으로 나가서 온자월이 들고 있는 연을 보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연까지 가지고 왔네?”온자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 연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나도 쓸데없는 말 안 할게. 너 어머니의 물건을 원하잖아? 이 연을 너에게 줄게. 당장 막내를 풀어줘.”온사는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온모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걔를 위해서 어머니까지 버릴 생각이야?”“어머니를 버린 게 아니야!”그 말을 들은 온자월은 곧바로 반박했다.“네가 막내를 납치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머니의 물건을 꺼낼 일도 없었어!”온사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넌 결국 어머니와 외부인 둘 중에 외부인을 택했다는 거잖아!”“헛소리하지 마!”온자월은 격앙된 목소리로 호통쳤다.“막내는 외부인이 아니야. 외부인은 너지! 잊지 마, 넌 이미 진국공가의 딸이 아니야. 진국공가의 딸은 막내 한 명뿐이야. 걔가 내 동생이라고!”“그래! 양심도 없는 놈. 역시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끼리 잘 어울리네. 원래부터 너희가 일가족이었나 봐!”온사는 눈을 부릅뜨고 온자월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지금 누굴 욕한 거야?”온자월도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 내가 너한테 주먹을 못 휘두른다고 함부로 막내 욕하지 마!”온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나한테 주먹을 휘둘러? 참 대단하네. 경성의 사내들 중에 여자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너!”온자월은 발끈하며 온사에게 다가가려다가 손에 든 연을 놓칠 뻔했다. 그는 뒤늦게 연이 괜찮은지 살펴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온사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연을 외부인인 나에게 갖고 와서 거래를 하자는 사람이 뭘 그렇게 긴장해?”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설마 내가 이걸 소중히 보관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