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엉망진창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왜 손을 놓지 않느냐고요?] [왜 그런 것 같으세요?] 배미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설마, 이서 씨 때문에?” [맞아요, 이서 씨가 혼자 여기 있는데 어떻게 지환이가 안심할 수 있겠어요.] 배미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지환이의 인생에 꽃이 피었구나.”“아들아, 언제쯤이면 엄마도 네 인생에 꽃이 피는 걸 볼 수 있겠니?” 결혼을 재촉하는 배미희의 말을 들은 상언은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곧 다시 전화가 걸려 왔으나, 그 전화는 배미희가 아닌 지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었다. “너구나.”상언이 전화를 받았다.“이서 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한 거지? 이서 씨는 잘 지내. 오늘은 우리 엄마랑 바다도 갔어.” 지환이 대답했다.[고마워.]“고맙긴 뭘. 누군가가 그러더라? 우리가 형제 같다고.” 상언이 물었다.“정확히 언제 올 생각이야?”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좀 있어서 이틀 정도 늦어질 것 같아.]지환이 말했다. “아, 맞다. 너한테 알려준다는 걸 깜빡했는데, 지엽 도련님이 이서 씨가 외국에 가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너한테는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하라고 하셨어.” 지환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내일 바로 갈게.] “이틀 더 걸린다면서?”[중요한 일은 아니거든.]말을 마친 지환이 곧장 전화를 끊었다. 상언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엽 도련님이 이서 씨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운 게 분명해.’ 같은 시각.해변에서 쫓겨난 가은은 겨우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윤이서라는 여자를 좀 알아봐 주세요.”가은이 수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이서의 상세한 상황을 알렸다.“그 여자가 왜 갑자기 외국으로 나온 건지 알고 싶어요.” ‘분명 며칠 전에 하은철이랑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거지? 아무리 생
그렇다. 지엽은 이씨 가문의 고택에 있었다. 다만, 그의 방문 목적은 이씨 가문의 가족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이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상언을 마주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이서는요?”상언이 소파를 가리켰다.“그렇지 않아도 방금 물어보니까 바다로 나갔다더군요. 오후는 되어야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지엽이 소파에 앉자, 상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엽의 물 한 잔을 따르게 했다. “오후에 다시 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엽이 미소를 지었다.“오후에 다시 왔는데, 또 저녁에 오라고 하실까 봐 두려워서요.”상언이 물었다.“제가 도련님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지엽이 하인이 들고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이 선생님은 하 대표님의 친구시잖아요. 마냥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상언이 차분히 대답했다.“마음대로 하시죠. 저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상황을 지켜본 상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위층으로 올라가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그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는데,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앉은 지엽의 모습이 보였다. 지엽의 끈기에 탄복한 상언이 말했다. “이서 씨가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오시다니, 왜 본인을 궁지로 모시는 겁니까?” 상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지엽에게 물었다. 지엽이 고개를 들어 상언을 보며 웃었다.“기억을 잃은 이서가 저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상언이 대답했다. “하은철이 아주 적절한 예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엽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저는 은철이랑 달라요. 은철이는 이서에게 큰 상처를 줬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지엽이 자신 있게 말했다.“저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요.”“이 선생님도 보셨겠지만
“이씨 가문은 모든 식사 준비를 집에서 하는 편이에요.” 말을 마친 배미희가 이서에게 물었다.“이서 씨, 이서 씨의 요리 솜씨는 좀 어때요?” “뛰어나지는 않은 것 같아요.”이서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갖췄나 보군요. 이서 씨, 이서 씨가 직접 지엽 씨에게 밥을 한 끼 해주면 어떻겠어요? 나도 이서 씨의 요리 솜씨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배미희가 이서의 귓가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셰프들이 준비한 식사는 질렸거든요.” 배미희가 이렇게 말하니, 이서는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내일 모두에게 밥을 대접해 드릴게요. 하지만 맛은 보장할 수 없어요.” 배미희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감히 싫은 소리를 하겠어요. 한 달 동안 같은 셰프가 같은 방식으로 만든 식사는 징벌, 그 자체였다고요.”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지엽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야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나려 했고, 이서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특별히 그를 문어귀까지 데려다주었다. “여기까지 발걸음해 줘서 정말 고마워.” 지엽이 손을 내저었다.“이서야, 오늘 저녁에만 해도 이미 10번 이상 고맙다고 했잖아. 내가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한 건 너의 감사를 얻기 위한 게 아니었어.” “그럼?”이서의 맑고 청아한 눈동자를 본 지엽은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만 같았다. “왜 그래,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거야?”이서가 이해되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지엽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인제 그만 가볼게. 너도 어서 들어가.” “그래, 알았어.”이서는 곧장 몸을 돌려 장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엽은 제 자리에 선 채 그녀의 뒷모습이 검은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고서야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바로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미친 듯이 달려온 차 한 대가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음주 운전인가?’안색이 변한 지엽이 사고 운전자를 확인하려던 찰나, 차에서 내린 묘령의 여인이 자신을
남녀 힘의 차이는 대단히 컸기에, 가은은 지엽이 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지엽의 차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앞을 휙 지나쳐 버렸다. 가은은 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차의 후미등 불빛이 사라지자, 가은이 원망스럽다는 듯 눈앞의 장원을 바라보았다. ‘너무 짜증 나.’‘윤이서가 어떻게 이씨 가문을 꼬드긴 거지?’ ‘그 여자, 운도 좋다니까.’ 장원 안.배미희와 잠시 대화를 나눈 이서는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위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리를 떠나기 전, 상언을 흘끗 바라보았다. 배미희가 이 디테일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서가 방에 들어서자 배미희가 지체 없이 상언에게 말했다.“상언아, 이서 씨가 너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더구나.” 상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받침대를 내려놓았다. “됐어요.”“가서 한번 물어봐, 방금 보니까 이서 씨가 너를 여러 번 쳐다보더라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언이 몸을 일으켰다. “아마 지환이의 일을 묻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한번 올라가 볼게요.” 상언이 예상이 적중했다.이서는 지환의 일을 너무도 알고 싶어 했다. 다만, 지금의 그녀에게 지환은 ‘H선생님’이었다. “H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이서가 긴장한 듯 물었다. “그건...”상언 역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H선생님께서 저를 만나는 걸 원치 않으시는 거죠, 그렇죠?” 이서의 눈동자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상언이 급히 부인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H선생님도 이서 씨를 정말 만나고 싶어 하세요.” “정말요?”이서가 물었다.“그러면 왜 저를 보러 오지 않으시는 거예요?” “일이 좀 복잡해서 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서 씨,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이곳의 생활을 좀 더 즐기는 건 어떨까요?” 실망한 이서가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차린 이서가 상언에게 말했다.“정말 감사해요, 이 선생
시간이 늦지만 않았더라면, 이상언은 곧바로 시작하려는 듯했다. “네.”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굿나잇 인사를 나누었고, 상언은 그제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아래층에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배미희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지엽 도련님이 오셨다는 걸 지환이한테 알려야 할까?’방으로 들어간 상언이 고민을 하던 바로 그때,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지환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전화를 거는구나.’상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 씨를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까 봐 정말 두려운가 봐.’상언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으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졸고 있던 지환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이서는 집에 돌아왔어?]“응, 진작에 왔지. 근데 이서 씨만 온 게 아니라, 지엽 도련님도...” 수화기 너머의 숨죽인 호흡을 느낀 상언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져 갔다.“지엽 도련님도 오셨어. 이서 씨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오셨더라고.” [그거 말고 다른 일은 없었어?] 지환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었으나, 전혀 졸리지 않은 듯했다. “내일 이서 씨가 직접 준비하는 요리를 먹으러 또 오신다더라. 지환아, 너도 긴장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지환이 미간을 찌푸렸다.[너는 이 상황이 즐거운가 봐?]“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네가 무슨 긴장할 필요가 있겠어. 너는 목소리만으로 이서 씨를 구했잖아.” ‘하나 씨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지환은 상언처럼 낙관할 수 없는 듯했다. “너 지금 어디야? 왜 이렇게 조용해?”상언은 처음부터 묻고 싶었다.[비행기 안이야.]지환이 눈을 감았다. “정말 오는 거야?”상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아니, 그쪽 일은 아직 다 처리하지도 않았잖아?” [이천이 있잖아.]지환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아무래도 피곤한 것 같아. 더는 방해하지 말자.’“그래, 좀 쉬어
“길고양이? 대체 언제 길고양이한테 먹이를 주러 간다는 거니?” 이상함을 감지한 배미희가 물었다. 하지만 상언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려는 듯했다.“엄마, 신경 쓰지 마시고 5인분을 준비해 주세요.” 아들의 요구를 들은 배미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1인분은 많은 양도 아니니까.’ 오히려 이서는 흥미를 느낀 듯했다.“이 선생님께서 이렇게 정이 많으신 분인 줄은 몰랐네요.” 상언이 무슨 우스운 일이 생각난 듯했다.“길고양이를 잘 먹이지 않으면 우리 집 지붕을 뒤집어 놓을지도 모르거든요.” 놀란 이서가 물었다.“그렇게 사나운 고양이예요?”미소를 지어 보인 상언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떠났다. 이서는 오후가 되어서야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요?”“괜찮습니다, 사모님.”이서의 대답을 들은 배미희가 부엌을 떠났다. 부엌을 나선 그녀는 목을 길게 뺀 상언이 문 앞을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는 상언의 뒤로 걸어가 그를 따라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보았다.“아들아, 뭘 보는 거니?” “길고양이요.”상언이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지환이 비행기에서 내리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나, 그는 시간을 질질 끌며 나타나지 않았다. 상언은 지환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서 씨에 관한 일이라면 평소의 지환이를 생각해서는 안 돼.’ 그러나 지환은 이서가 요리를 완성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식탁에 앉은 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설마... 이서 씨가 자극받을까 봐 참고 있는 걸까?’ “이 선생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맞은편에 앉은 지엽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제가 이서를 빼앗아 갈까 봐 걱정되시는 거예요?”상언은 고개를 들어 다소 악랄하게 웃는 지엽을 바라보았으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엽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이미 말씀드렸지만, 하 대표님은 쉽게 이서 앞에 나타날 수
이서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던 배미희가 이내 식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들 왜 그래요?”“잠시 나갔다 올게요.”상언은 문밖의 지환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마중 나올 필요 없어.” 바로 이때, 문어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문어귀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어귀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지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 사람은 바로 지환이었다. 다만, 그의 얼굴에는 은색 가면이 씌워져 있었으며, 정교한 그 가면 위에는 생동감 넘치는 용이 조각되어 있었다. 지환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과 같은 고귀함과 신비로움을 내뿜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이서를 본 그는 인내심을 잃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자석과 같아서, 지환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서를 끌어당길 수 있는 듯했다. ‘이럴 수가!’지엽의 심장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H 선생님? H 선생님 맞죠?”지환의 앞에 선 이서는 온몸의 피가 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내가 왜 이러지?’ 지환은 마음이 복잡해졌다.‘드디어 이서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그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이서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이내 마이클 천의 경고를 떠올렸고 손을 거두었다. “그래요, 나예요.”그의 낮은 목소리는 아주 섹시했다. “정말 H선생님이세요? 제가 상상했던 모습이랑... 정말 똑같으세요.” 이서가 떨리는 손으로 지환의 가면을 벗겨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가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어머, 내가 무슨 짓을!’이서는 난감해졌다.“죄송해요, 얼굴이 너무 궁금해서 그만...” “내가 더 미안해요. 난 아직 Y양에게 내 얼굴을 보여줄 수 없어요.” “왜요?”“Y양은 아직 내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요.”“저 때문이라는 거예요?”지환이 이서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그럼 언제쯤 얼굴을 보여주실 수 있는 거예요?
배미희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상언이 아침에 말한 길고양이가 지환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잔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언은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런 수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그가 얼른 지환을 향해 말했다. ”형님, 형님,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식사를 마친 후에 사죄드리겠습니다.”“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보세요, 이서 씨가 정성껏 요리한 음식인데, 어서 드셔보고 싶지 않으세요?” ‘역시 이서를 빼돌리는 건 명확한 해결 방법이 아니었나 봐.’ 지환은 걸음을 옮겨 식탁으로 향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지엽을 쳐다보지 않았다.무시당한 지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지환과 경쟁 관계였으나, 은철처럼 이서가 보는 앞에서 지환을 언급할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서를 부추겨 지환의 가면을 벗기는 일을 더더욱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것만이 지환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그 덕에 저녁 식사는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끝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지엽이 SNS를 게시했다. [식사를 대접해 줘서 고마워, 이서야.]게시한 사진은 이서가 준비한 풍성한 만찬을 찍은 것이었다.지엽은 하은철의 절친한 친구 중의 하나였다.‘어차피 은철이도 이 게시글을 보게 될 거야.’ 그가 일부러 은철에게 게시글을 공유했다. ‘어차피 M국까지 쫓아오지도 못할 텐데, 뭐.’ ‘설령 온다고 하더라도 하 대표님이면 은철이를 상대할 수 있으실 거야.’“H선생님.”이서가 과일 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과일 좀 드세요.”이 장면을 본 지엽은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지환이 나타난 후, 이서의 시선이 줄곧 그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배려한다고 할지라도, 지환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더욱 다정했다. 그녀의 두 눈은 별이 박히기라도 한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질투하시는 겁니까?” 상언이 갑자기 다가와 지엽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엽은 즉시 눈길을 피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