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지엽은 이씨 가문의 고택에 있었다. 다만, 그의 방문 목적은 이씨 가문의 가족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이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상언을 마주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이서는요?”상언이 소파를 가리켰다.“그렇지 않아도 방금 물어보니까 바다로 나갔다더군요. 오후는 되어야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지엽이 소파에 앉자, 상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엽의 물 한 잔을 따르게 했다. “오후에 다시 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엽이 미소를 지었다.“오후에 다시 왔는데, 또 저녁에 오라고 하실까 봐 두려워서요.”상언이 물었다.“제가 도련님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지엽이 하인이 들고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이 선생님은 하 대표님의 친구시잖아요. 마냥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상언이 차분히 대답했다.“마음대로 하시죠. 저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상황을 지켜본 상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위층으로 올라가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그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는데,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앉은 지엽의 모습이 보였다. 지엽의 끈기에 탄복한 상언이 말했다. “이서 씨가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오시다니, 왜 본인을 궁지로 모시는 겁니까?” 상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지엽에게 물었다. 지엽이 고개를 들어 상언을 보며 웃었다.“기억을 잃은 이서가 저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상언이 대답했다. “하은철이 아주 적절한 예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엽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저는 은철이랑 달라요. 은철이는 이서에게 큰 상처를 줬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지엽이 자신 있게 말했다.“저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요.”“이 선생님도 보셨겠지만
“이씨 가문은 모든 식사 준비를 집에서 하는 편이에요.” 말을 마친 배미희가 이서에게 물었다.“이서 씨, 이서 씨의 요리 솜씨는 좀 어때요?” “뛰어나지는 않은 것 같아요.”이서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갖췄나 보군요. 이서 씨, 이서 씨가 직접 지엽 씨에게 밥을 한 끼 해주면 어떻겠어요? 나도 이서 씨의 요리 솜씨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배미희가 이서의 귓가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셰프들이 준비한 식사는 질렸거든요.” 배미희가 이렇게 말하니, 이서는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내일 모두에게 밥을 대접해 드릴게요. 하지만 맛은 보장할 수 없어요.” 배미희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감히 싫은 소리를 하겠어요. 한 달 동안 같은 셰프가 같은 방식으로 만든 식사는 징벌, 그 자체였다고요.”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지엽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야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나려 했고, 이서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특별히 그를 문어귀까지 데려다주었다. “여기까지 발걸음해 줘서 정말 고마워.” 지엽이 손을 내저었다.“이서야, 오늘 저녁에만 해도 이미 10번 이상 고맙다고 했잖아. 내가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한 건 너의 감사를 얻기 위한 게 아니었어.” “그럼?”이서의 맑고 청아한 눈동자를 본 지엽은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만 같았다. “왜 그래,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거야?”이서가 이해되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지엽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인제 그만 가볼게. 너도 어서 들어가.” “그래, 알았어.”이서는 곧장 몸을 돌려 장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엽은 제 자리에 선 채 그녀의 뒷모습이 검은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고서야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바로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미친 듯이 달려온 차 한 대가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음주 운전인가?’안색이 변한 지엽이 사고 운전자를 확인하려던 찰나, 차에서 내린 묘령의 여인이 자신을
남녀 힘의 차이는 대단히 컸기에, 가은은 지엽이 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지엽의 차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앞을 휙 지나쳐 버렸다. 가은은 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차의 후미등 불빛이 사라지자, 가은이 원망스럽다는 듯 눈앞의 장원을 바라보았다. ‘너무 짜증 나.’‘윤이서가 어떻게 이씨 가문을 꼬드긴 거지?’ ‘그 여자, 운도 좋다니까.’ 장원 안.배미희와 잠시 대화를 나눈 이서는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위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리를 떠나기 전, 상언을 흘끗 바라보았다. 배미희가 이 디테일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서가 방에 들어서자 배미희가 지체 없이 상언에게 말했다.“상언아, 이서 씨가 너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더구나.” 상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받침대를 내려놓았다. “됐어요.”“가서 한번 물어봐, 방금 보니까 이서 씨가 너를 여러 번 쳐다보더라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언이 몸을 일으켰다. “아마 지환이의 일을 묻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한번 올라가 볼게요.” 상언이 예상이 적중했다.이서는 지환의 일을 너무도 알고 싶어 했다. 다만, 지금의 그녀에게 지환은 ‘H선생님’이었다. “H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이서가 긴장한 듯 물었다. “그건...”상언 역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H선생님께서 저를 만나는 걸 원치 않으시는 거죠, 그렇죠?” 이서의 눈동자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상언이 급히 부인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H선생님도 이서 씨를 정말 만나고 싶어 하세요.” “정말요?”이서가 물었다.“그러면 왜 저를 보러 오지 않으시는 거예요?” “일이 좀 복잡해서 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서 씨,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이곳의 생활을 좀 더 즐기는 건 어떨까요?” 실망한 이서가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차린 이서가 상언에게 말했다.“정말 감사해요, 이 선생
시간이 늦지만 않았더라면, 이상언은 곧바로 시작하려는 듯했다. “네.”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굿나잇 인사를 나누었고, 상언은 그제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아래층에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배미희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지엽 도련님이 오셨다는 걸 지환이한테 알려야 할까?’방으로 들어간 상언이 고민을 하던 바로 그때,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지환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전화를 거는구나.’상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 씨를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까 봐 정말 두려운가 봐.’상언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으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졸고 있던 지환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이서는 집에 돌아왔어?]“응, 진작에 왔지. 근데 이서 씨만 온 게 아니라, 지엽 도련님도...” 수화기 너머의 숨죽인 호흡을 느낀 상언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져 갔다.“지엽 도련님도 오셨어. 이서 씨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오셨더라고.” [그거 말고 다른 일은 없었어?] 지환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었으나, 전혀 졸리지 않은 듯했다. “내일 이서 씨가 직접 준비하는 요리를 먹으러 또 오신다더라. 지환아, 너도 긴장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지환이 미간을 찌푸렸다.[너는 이 상황이 즐거운가 봐?]“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네가 무슨 긴장할 필요가 있겠어. 너는 목소리만으로 이서 씨를 구했잖아.” ‘하나 씨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지환은 상언처럼 낙관할 수 없는 듯했다. “너 지금 어디야? 왜 이렇게 조용해?”상언은 처음부터 묻고 싶었다.[비행기 안이야.]지환이 눈을 감았다. “정말 오는 거야?”상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아니, 그쪽 일은 아직 다 처리하지도 않았잖아?” [이천이 있잖아.]지환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아무래도 피곤한 것 같아. 더는 방해하지 말자.’“그래, 좀 쉬어
“길고양이? 대체 언제 길고양이한테 먹이를 주러 간다는 거니?” 이상함을 감지한 배미희가 물었다. 하지만 상언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려는 듯했다.“엄마, 신경 쓰지 마시고 5인분을 준비해 주세요.” 아들의 요구를 들은 배미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1인분은 많은 양도 아니니까.’ 오히려 이서는 흥미를 느낀 듯했다.“이 선생님께서 이렇게 정이 많으신 분인 줄은 몰랐네요.” 상언이 무슨 우스운 일이 생각난 듯했다.“길고양이를 잘 먹이지 않으면 우리 집 지붕을 뒤집어 놓을지도 모르거든요.” 놀란 이서가 물었다.“그렇게 사나운 고양이예요?”미소를 지어 보인 상언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떠났다. 이서는 오후가 되어서야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요?”“괜찮습니다, 사모님.”이서의 대답을 들은 배미희가 부엌을 떠났다. 부엌을 나선 그녀는 목을 길게 뺀 상언이 문 앞을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는 상언의 뒤로 걸어가 그를 따라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보았다.“아들아, 뭘 보는 거니?” “길고양이요.”상언이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지환이 비행기에서 내리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나, 그는 시간을 질질 끌며 나타나지 않았다. 상언은 지환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서 씨에 관한 일이라면 평소의 지환이를 생각해서는 안 돼.’ 그러나 지환은 이서가 요리를 완성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식탁에 앉은 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설마... 이서 씨가 자극받을까 봐 참고 있는 걸까?’ “이 선생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맞은편에 앉은 지엽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제가 이서를 빼앗아 갈까 봐 걱정되시는 거예요?”상언은 고개를 들어 다소 악랄하게 웃는 지엽을 바라보았으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엽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이미 말씀드렸지만, 하 대표님은 쉽게 이서 앞에 나타날 수
이서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던 배미희가 이내 식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들 왜 그래요?”“잠시 나갔다 올게요.”상언은 문밖의 지환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마중 나올 필요 없어.” 바로 이때, 문어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문어귀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어귀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지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 사람은 바로 지환이었다. 다만, 그의 얼굴에는 은색 가면이 씌워져 있었으며, 정교한 그 가면 위에는 생동감 넘치는 용이 조각되어 있었다. 지환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과 같은 고귀함과 신비로움을 내뿜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이서를 본 그는 인내심을 잃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자석과 같아서, 지환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서를 끌어당길 수 있는 듯했다. ‘이럴 수가!’지엽의 심장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H 선생님? H 선생님 맞죠?”지환의 앞에 선 이서는 온몸의 피가 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내가 왜 이러지?’ 지환은 마음이 복잡해졌다.‘드디어 이서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그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이서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이내 마이클 천의 경고를 떠올렸고 손을 거두었다. “그래요, 나예요.”그의 낮은 목소리는 아주 섹시했다. “정말 H선생님이세요? 제가 상상했던 모습이랑... 정말 똑같으세요.” 이서가 떨리는 손으로 지환의 가면을 벗겨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가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어머, 내가 무슨 짓을!’이서는 난감해졌다.“죄송해요, 얼굴이 너무 궁금해서 그만...” “내가 더 미안해요. 난 아직 Y양에게 내 얼굴을 보여줄 수 없어요.” “왜요?”“Y양은 아직 내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요.”“저 때문이라는 거예요?”지환이 이서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그럼 언제쯤 얼굴을 보여주실 수 있는 거예요?
배미희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상언이 아침에 말한 길고양이가 지환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잔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언은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런 수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그가 얼른 지환을 향해 말했다. ”형님, 형님,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식사를 마친 후에 사죄드리겠습니다.”“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보세요, 이서 씨가 정성껏 요리한 음식인데, 어서 드셔보고 싶지 않으세요?” ‘역시 이서를 빼돌리는 건 명확한 해결 방법이 아니었나 봐.’ 지환은 걸음을 옮겨 식탁으로 향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지엽을 쳐다보지 않았다.무시당한 지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지환과 경쟁 관계였으나, 은철처럼 이서가 보는 앞에서 지환을 언급할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서를 부추겨 지환의 가면을 벗기는 일을 더더욱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것만이 지환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그 덕에 저녁 식사는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끝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지엽이 SNS를 게시했다. [식사를 대접해 줘서 고마워, 이서야.]게시한 사진은 이서가 준비한 풍성한 만찬을 찍은 것이었다.지엽은 하은철의 절친한 친구 중의 하나였다.‘어차피 은철이도 이 게시글을 보게 될 거야.’ 그가 일부러 은철에게 게시글을 공유했다. ‘어차피 M국까지 쫓아오지도 못할 텐데, 뭐.’ ‘설령 온다고 하더라도 하 대표님이면 은철이를 상대할 수 있으실 거야.’“H선생님.”이서가 과일 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과일 좀 드세요.”이 장면을 본 지엽은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지환이 나타난 후, 이서의 시선이 줄곧 그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배려한다고 할지라도, 지환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더욱 다정했다. 그녀의 두 눈은 별이 박히기라도 한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질투하시는 겁니까?” 상언이 갑자기 다가와 지엽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엽은 즉시 눈길을 피
비록 심가은은 이미 지엽과의 SNS 친구를 삭제한 상황이었으나, 그녀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지엽과의 SNS 친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은과 지엽 사이의 사랑과 증오, 그리고 원수를 모르던 그 친구가 휴대전화를 든 채 가은에게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지엽 씨가 절친이라고 말하는 이서 씨가 누구야?”‘이서?’심가은은 머리가 윙윙거리는 듯했다. SNS 게시글을 확인한 그녀는 곧바로 이성을 잃고 술상을 엎어버렸다.그녀의 행동은 자연히 다른 손님들의 이목을 끌었다. “뭘 봐? 구경 났어?!” 상황을 지켜보던 손님들은 놀라서 모두 뛰어나갔고, 술집은 순식간에 매우 조용해졌다. 바로 이때, 술집에 깨진 유리 조각을 밟는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날카롭고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는 심가은을 더욱 미치게 했다. “구경 났느냐니까?!”“발버둥 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에요,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행동 해야죠.” 차가운 목소리가 술집에 울려 퍼졌다.가은이 고개를 들어 올렸으나, 불빛이 희미한 탓에, 상대가 여자라는 것 외에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볼 수 없었다. “누구세요?”가은이 경계하며 물었다. 하이힐을 신은 그 여자가 서서히 가은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마침내 희미한 빛의 힘을 빌려 상대방이 매우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여자는 가은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박예솔이라고 해요, 심가은 씨를 도와 윤이서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죠.”가은은 살짝 동요하는 듯했으나, 이내 경계하며 물었다.“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날 믿을 필요는 없어요. 단지 내 말이 일리가 있는지 없는지만 판단하면 될 뿐이죠.”가은이 멍하니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소지엽 씨, 갖고 싶지 않아요?” 가은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심가은 씨가 소지엽 씨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말을 들은 가은이 눈
그것은 지환이 이서에게 보낸 고이서에 관한 자료였다.‘이게 왜 열린 거지?’이서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그래?]이서의 목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자, 지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서의 시선은 시종일관 고이서의 자료에 머물러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고이서의 자료를 보는 중인데, 다 보고 나서 다시 전화할게요.”이서는 전화를 끊고 자료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자료의 내용은 고이서가 제공한 이력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이서는 5살 때 화재 사고를 겪은 후 해외로 보내졌다.하지만 지환이 보내온 자료에는 더욱 상세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당시 겨우 5살이던 고이서는 하룻밤 사이에 해외로 보내졌고, 병원에 도착한 후에는 병원에 있던 환자들이 차례로 퇴원하게 되었다. 딸의 치료 기간 동안, 성지영과 윤재하는 각기 다른 시점에 귀국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귀국한 후 처음으로 향한 목적지가 모두 보육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번.보육원 쪽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이 고이서를 대신할 아이를 구하러 간 것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이서였다. ‘그때 윤수정이 내가 윤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게 전부 사실이었구나.’ 모든 퍼즐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처음에 하은철이 이서와 결혼한 이유는 그녀의 신장을 위한 것이었는데, 윤재하와 성지영은 하은철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서와 하은철이 결혼하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도우려 했다. ‘하긴, 나는 윤씨 가문에 있어서 시집을 통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게 할 도구일 뿐이었어. 누가 그런 도구한테 큰 관심을 쏟으려 했겠어?’‘윤재하가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횡령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하씨 가문은 윤씨 가문에 그토록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윤씨 가문은 줄곧 재기하지 못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내가 윤씨 가문 사람들한테 배신당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어제, 이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환과 지엽이 보낸 자료를 동시에 받았다. 이서는 어떤 자료를 먼저 열어야 할지 심란해졌고, 아예 두 자료 모두 열어보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환 씨를 골라야 할까, 아니면 지엽이를 골라야 할까?’이서는 서류봉투에 있는 전화번호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이서는 갑자기 동전 던지기를 떠올렸다.‘그래,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는 동전을 던지라고 했어!’사실, 동전을 던지는 최종 목적은 선택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전을 던지는 순간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에 있었다.하지만 이서는 동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잔돈을 바꿨고, 끝내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게 되었다.이서는 차로 돌아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동전 던지기를 시작했다.짤랑.이서의 머리가 하얘지던 찰나, 동전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됐어, 한 번 더 해보자.’생각을 정리한 이서는 곧장 동전을 던지지 않고,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이 맑아지기를 기다린 후에야 동전을 위로 던졌다.동전은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이서의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이서는 어이가 없어서 동전을 다시 주워 들었다.‘이 방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 같아.’ ‘그래, 차라리 숫자나 그림으로 고르는 게 좋겠어.’ 이서는 다시 동전을 집어 들었다.‘숫자는 하지환 씨를, 그림은 지엽이를 가리키는 걸로 하자.’마음을 확실히 정한 이서는 다시 동전을 던졌다. 이번에는 동전이 그녀에게 확실한 답을 주었다.‘그림이구나.’하지만 이서는 명확한 답을 얻고도 기쁘지 않았다. 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지엽이 건넨 서류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얇은 서류 더미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이서는 손을 들어 어렵사리 서류봉투를 열었는데, 서류를 꺼내려는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환에게서
“그럼 이번 일은 구태우 씨에게 조사를 맡기를 걸로 하겠습니다.”이서가 몸을 일으키며 소지엽을 바라보았다.“세부적인 내용은 심 대표님과 직접 이야기하면 돼. 나는 돌아가서 회사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소지엽은 이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괜찮아.”이서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몸을 돌려 떠났다. 그 단호한 뒷모습과 깔끔한 마무리, 소지엽은 이서의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달갑지 않은 게 분명해.’“소지엽 씨?”지엽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심근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한편, 아래층에 도착한 이서는 주동적으로 소희 모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서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이지숙은 꽤 의아해했다.“이렇게 빨리?” “네, 구체적인 사항은 지엽이가 대표님과 상의할 거예요. 저는 여기 있어도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소희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언니, 제가 데려다줄게요.”이지숙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는 소희와 이서의 관계가 더 좋아져서 지환이라는 큰 나무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랐다. “언니, 오늘 소지엽 씨와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유인이 언니의 만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이서가 말했다.“그러게, 타이밍을 잘 맞춘 것 같아.”“참, 소희 씨의 양부모가 아직도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지?” “조금 이상하긴 해요. 꽤 오랫동안 저를 귀찮게 하지 않았거든요.”이서가 말했다. “심태윤도?”“네.”이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소희 씨에게 게임 회사의 기밀문서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운 사람이 심태윤일 가능성은 없을까?”소희는 고개를 저었다.“걔가 벌인 짓이었다면 심씨 가문 사람들이 벌써 잡아냈을 거예요.”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못 찾아내는 걸 보면, 심태윤이 벌인 짓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심태윤이 심씨 가문 사람들과 협력해서 벌인 일인 건 아닐
‘소희 씨의 심씨 가문 생활, 꽤 재미있는 것 같은데?’ “우리... 2층에 가서 얘기 좀 할까?”심근영이 2층 방향을 가리켰다. 이서는 소지엽을 한 번 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대답했다.“네.”세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용인이 차와 음료를 내려놓고 떠나자, 심근영이 입을 열었다.“윤 대표는 어떤 생각을 했길래, 소지엽 씨한테 우리 소희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한 거지?” 이서가 대답했다.“말하자면 깁니다.”시간은 주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이서는 고이서와 성지영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회사로 돌아갔고, 지환은 이서에게 구태우와 자신 중에 누가 먼저 고이서의 자료를 찾는지 비교해 보라고 했다.이서는 일요일 하루 종일 지환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가 분명히 고이서를 조사하러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환 씨... 꽤 진지한 것 같아.’이서는 약간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서도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지환이 구태우보다 더 빨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환이 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환이 이기기를 바라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복잡한 마음에 시달리던 이서는 오후 3시쯤 구태우의 메시지를 받았다.메시지를 보는 순간, 이서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는데, 그제야 자신이 지환이 이기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때, 이서는 구태우의 전화를 받았다.[회사로 가겠습니다.]“그냥 자료를 보내주시면 되잖아요.” 구태우의 말투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자료를 원하신다면 가져가겠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하시죠.]이서는 자신이 구태우를 화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고이서를 생각하면서 카페로 향했다.몇 분 후.카페에서 소지엽을 만난 이서의 구태우의 말투가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서는 잠시 생각한 후, 소지엽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왜 네가 온 거야?” “내가 구태우한테 자료를 달라고 했어. 왜, 불편하기라도 한 거야?” 이서는 소지엽의
심유인이 말하지 않자, 심근영은 소민찬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민찬은 선물에 대해 전혀 몰랐던 터라, 값싼 선물들을 보고 당황하여 얼른 설명했다.“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선물들은 제가 산 게 아니라, 전부 유인이가 산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애초에 유인이는 저한테 몸만 오면 된다고 했습니다.”“여러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소민찬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답례 선물은 안 받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소민찬은 이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심씨 가문의 저택을 떠났다. 심유인은 그의 뒤를 쫓아가려다가 심근영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유인아, 우리가 알아듣게끔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니?”심유인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촌, 숙모, 저... 저는...”“차마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네요.”소희가 심유인의 곁으로 다가가 냉소하며 말했다.“제가 대신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걸 알고, 일부러 소민찬 씨를 찾아가서 남자 친구 역할을 해달라고 한 거죠?” “소민찬 씨는 남자 친구인 척만 하면 되니까, 이 선물들도 소민찬 씨가 샀을 리 없어요.”“전부 다 언니 사비로 사신 거죠?” 심유인의 안색이 아주 어두워졌다.“그런 거 아니야...!”심유인은 아직도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소민찬 씨가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니라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난 거니?”이지숙이 물었다. ‘다른 세 가지 선물은 전혀 가짜가 아니었어. 확실히 수십억은 되는 것들이었다고.’‘회사에서 근무하지도 않는 유인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겠어?’심유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심근영은 심유인의 반응을 살피다가 집사를 불렀다.“당장 조사해, 당장!”심유인은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아 ‘털썩’ 소리를 내며 심근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삼촌, 제가 다 설명해 드릴게요. 그 선물들은... 전부
심유인과 소민찬은 그제야 제자리에 얌전히 섰다.“유인아, 네가 먼저 말해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심유인은 소민찬의 핸드폰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더 많은 비밀이 폭로되는 건 막아야 해!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겠어.’ “사, 사실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가 아니에요. 하지만 민찬 씨가 제 남자 친구가 되길 바랐고, 제가 먼저 그 말을 꺼내기는 부끄러워서 제 남자 친구인 척해달라고 한 거예요. 이번 일로 잘 지내면서 감정을 키우고 싶었거든요.” “절대 다른 뜻은 없었어요. 맹세할게요!” 심유인이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다면, 소희는 심유인을 믿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심유인의 마지막 말은 소희의 의심을 더욱 확고히 했다.‘심유인, 일부러 그런 거구나?’ ‘소민찬을 남자 친구인 척 데려온 건, 현태 오빠에게 망신을 주기 위한 거였어.’ “감정을 키우고 싶었다면서, 왜 저렇게 많은 선물을 사 오라고 한 거예요?”소희는 일부러 모르는척하며 물었고, 단번에 덜미를 잡힌 심유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주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소민찬과 심유인을 향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소민찬은 특히 소지엽의 시선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 그건...”“민찬 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지만, 소씨 가문은 아무래도 명문가 집안이잖아요. 그런 분들을 뵈러 오려면 선물 정도는 가져와야 하지 않겠어요?”심유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정 교육이 잘 되어 있어서 남의 집에 방문할 때 선물을 챙기는 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2억도 아닌 몇십억짜리 선물을 준비하는 건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소희는 비웃으며 선물 더미 옆으로 향했고, 상자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안에도 아주 비싼 게 들었겠죠?” 심유인은 곧장 소희를 막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소희는 선물 상자를 뜯기 시작했고, 이내 안에 있던 선물이 바닥에 나뒹굴었다.그 선물을 확인한 소희는 놀라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형, 안녕.”소민찬은 소지엽의 질문을 피하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소지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소민찬을 바라보았다.“민찬아,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네가 왜 여기 있냐니까?” 소민찬은 이제 마냥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분명히 실마리가 드러날 것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나만 보고 있어...’소희는 소민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의문을 제기했다.“모르셨어요? 소민찬 씨는 유인 언니의 남자 친구예요. 오늘 여기 온 이유도 사실상 저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거죠.” “심유인 씨랑 사귄다고?”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며칠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은 여자는 심유인 씨가 아니었잖아?” 소민찬과 심유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형, 아무래도 잘못 기억하는 것 같아. 그날 같이 밥을 먹은 사람도 유인이었어.” 소지엽은 지난번에 집에서 함께 식사한 여자가 심유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성이 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어렴풋이 기억나.’‘그 여자는 절대 심유인 씨가 아니었어.’ “아니, 그 여자는 심유인 씨가 아니었어!” 소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은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잖아. 지금은 왜 또 심유인 씨와 사귄다는 거지?” 소민찬은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다소 역정을 내며 말했다.“형, 이건 내 사적인 일이라, 형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부모님도 내가 여자 친구를 몇 명을 사귀는지 신경 쓰지 않으시는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야?”“그래, 나는 네 사적인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 하지만 계속 본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본사에 들어가고 싶다면 절대 스캔들을 만들면 안 돼! 그런 일은 큰 파장을 일으킬 거라고!” 소민찬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
소민찬이 비웃으며 말했다.“허, 천재다운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심근영이 말했다.“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군요.” “천재답게 생긴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런 규칙은 누가 정한 거죠?” “어차피 임현태 씨는 허풍을 떠는 거지 않습니까? 시험에 합격에서 하버드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두 사람, 문맹이거나 눈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소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현태 오빠의 소개란에 당시 오빠의 성적을 적어둔 게 있잖아요. 클릭해서 좀 보세요. 현태 오빠는 수석으로 하버드에 들어갔다고요.”“그리고 오빠에게 추천서를 써준 사람은 하버드에서 공정하기로 유명한 물리학 교수라고요.”“설마 그 교수님보다 두 사람이 더 대단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소민찬과 심유인은 그제야 상세 내용을 확인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두 사람은 확인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큰소리를 친 것을 후회했다.‘처음부터 제대로 확인했다면, 임현태를 다른 방식으로 비웃을 수 있었을 텐데.’“그게 뭐 어떻다고 그래?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보통 어리석고, 융통성이 없잖아. 하지만 우리 민찬 씨는 달라. 단순히 해외 유학파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경주, 승마, 골프도 할 줄 안다니까?”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그렇게 고상한 취미는 즐길 줄 모르지?” 현태가 말했다.“하 대표님의 곁에 있는 경호원에겐 기본인 것들입니다. 만약 그것도 할 줄 모른다면, 하 대표님은 저를 곁에 두지 않으시겠죠.”‘기본’이라는 말은 소민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완전히 짓밟는 것이었다. 자동차 경주, 승마, 골프...이런 것들은 흔히 ‘재산을 낭비하며 점차 타락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의 기본 패키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훌륭한 실력을 갖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현태에게는 그저 기본일 뿐이었다.‘감히 날 모욕해?’소민찬이 일어서서 자리를 떠나겠다고 말하려던 참에 고용인이 뛰어와 말했다.“윤 대표님
심유인과 소민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가까스로 하버드에 합격했다고?’‘허풍 떠는 거 아니야?’ “정말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라고요? 하버드 학원 출신이 아니고요?” 현태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저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 맞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되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를 검색했다.두 사람은 약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홈페이지 링크를 누르자마자 우수한 동문의 행렬에 있는 현태의 얼굴을 발견했다.이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정말... 사진 속의 사람이 현태 씨라고?!’ ‘말도 안 돼!’‘소민찬이 어느 대학교에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Y국에 있는 대학교 출신일 거야. 학문도, 능력도 없는 재벌 2세들이 어디서 신분 세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거니까.’ Y국의 학위는 이수하기가 가장 수월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사람은 분명히 알지 못해서 겁을 먹기 일쑤였다.심유인은 원래 소민찬의 학력을 빌미로 현태를 놀라게 하려 했다.하지만 놀래키기는커녕 본인이 놀라게 된 셈이었다. 심유인은 곧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버드 대학교에 체육생으로 입학한 게 아니네요? 전공은 물리학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임현태 씨는 체육에 타고난 거 아니었나요? 왜 물리학을 전공한 거죠?”“아, 시험 봐서 들어간 게 아니라, 부정 입학이었나 보네요, 그렇죠?” 소민찬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혈색을 띠며 현태의 학력을 비웃었다.“하하, 유인아, 그런 건 부정 입학이나 비리가 아니라 기부라고 하는 거야.”“임현태 씨, 입학하는 데 얼마가 필요하던가요?”“하하, 하 대표님과 대체 무슨 사이길래 그렇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거죠?” “저는 학력을 산 적도, 학력을 위해서 돈을 쏟아부은 적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시험으로 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