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면 다크 웹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거야.’ 지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어둠의 호리병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잠시 생각한 끝에야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이란 게 뭡니까?”지환이 묻자, 어둠의 호리병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말했다. “오! 그럼 내 말에 동의한 거네요? 내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면 나한테 부탁하겠다는 거죠?” “우선 효과를 지켜볼 겁니다.”지환은 여지를 남기며 슬쩍 빠져나갔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비즈니스계의 사람이 아닌 터라 그 말에 바로 반응하며 외쳤다.“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중에 딴소리할까 봐 걱정되니까 우선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줄게요.”“그러세요, 그럼.” 어둠의 호리병은 지환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고,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이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이며 지환을 쳐다봤지만, 지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그 방법, 정말 효과 있는 거 맞습니까?” “믿어 보세요. 100% 먹힌다니까요!”어둠의 호리병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지환은 고개를 저으며 반신반의했다.“못 믿겠으면 오늘 밤에 한 번 해보세요.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잖아요?” 잠시 생각에 잠긴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손해 볼 건 없겠어.’ “좋습니다. 그럼 준비해 보세요.” “오케이! 밤에 만나자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사라졌고, 지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거실로 돌아갔다. 거실에 있던 이서는 지환이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아까 그 어색했던 포옹이 떠올라 살짝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어둠의 호리병이 하지환 씨랑 같이 있으라길래 거실에 있기로 했어요. 불편하진 않죠?” 이서가 조심스레 물었고, 지환은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둠의 호리병이랑 밖에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나눈 거예요? 둘 다 꽤 즐거워 보이던데
어둠의 호리병의 목소리가 갑자기 긴장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전혀 믿지 않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의 태도는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서는 한걸음에 다가가 어둠의 호리병이 가리고 있던 것을 힐끔 쳐다봤는데, 그곳엔 온갖 약초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그게 뭐예요?” 이서는 호기심에 약초를 하나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이 재빨리 약초를 뺏으며 외쳤다. “먹으면 안 돼요!” 이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둠의 호리병을 쳐다보았고, 어둠의 호리병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서는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뭐길래 그래요??” “약초예요. 남자에게만 효과가 있는 약초인데, 여자가 먹으면 코피를 흘리기도 하고 심하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요.” 이서는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약초를 던져버렸다. “진짜 그렇게 위험하다고요?” “네.” 어둠의 호리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오늘 밤이면 알게 될 거예요.”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지만, 주방에 추연실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그래요, 그럼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저는 아주머니를 찾아서 저녁을 준비해야 하거든요.” “네, 절대 밖에 나가진 마세요!” 어둠의 호리병은 당부하듯 말했고, 이서는 대충 손을 흔들며 주방을 나갔다. 이서가 사라지자, 한숨 돌린 어둠의 호리병은 손에 쥔 약초를 모두 전기밥솥에 넣었고, 약초로 가득 찬 밥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넣었나?” 하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하 대표님 정도 되는 사람이면 이 정도는 넣어야 효과가 있을 거야.”어둠의 호리병은 물을 붓고 밥솥의 뚜껑을 닫았다. 한편, 이서는 추연실에게 저녁을 부탁한 후 거실로 돌아왔고, 지환은 소파에 앉아 회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잠시 물을 마시는 틈에 말을 걸었다.
“그깟 보잘것없는 몇몇 놈들이 날 다치게 한다고요? 허, 말도 안 되죠!”어둠의 호리병은 자신만만하게 외쳤지만, 지환은 그 확신에 찬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안 다친 거 맞습니까?”“진짜 안 다쳤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보시던가요.” 어둠의 호리병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고, 지환은 눈살을 더 찌푸렸다.‘내가 왜 남자 몸을 검사해야 하지?’ “다친 게 아니라면 약초는 왜 준비한 겁니까?” 그러자 어둠의 호리병이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약초 때문에 그런 거군요?” 어둠의 호리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 대표님을 위한 거였어요.” 지환은 어리둥절했다. “날 위한 거라고요? 왜죠?” 어둠의 호리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약초는 보약이나 다름없어요. 하도훈이 사람을 보내서 하 대표님을 시험한 것도 봤잖아요. 설마 윤이서 씨한테 하도훈이 보낸 놈들 때문에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꼴을 보이고 싶은 건 아니겠죠?” “...” 지환이 말이 없자, 어둠의 호리병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래서 보약을 준비한 거예요. 저녁 먹고 나서 꼭 한 그릇 먹어 보세요.” 지환은 미간을 더 찌푸렸지만, 딱히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어둠의 호리병은 지환이 동의한 걸로 받아들이고 씩 웃었다. “꼭 마셔야 해요!” 어둠의 호리병이 당부를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지자, 지환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미간에 잡힌 주름으로 파리도 잡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이서랑 나에 대해 말하는 저 장난스러운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니까?’ ‘하지만 이서랑 진심으로 화해하고 싶긴 한데...’거실로 돌아온 지환을 보자 이서는 궁금한 듯 물었다. “어둠의 호리병은 안 다쳤대요?” “응.” 지환이 짧게 대답하자, 이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혹시 하도훈 쪽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지환은 이서를
이서의 기대 어린 시선 속에 놓인 지환은 결국 테이블 위에 놓인 약초 달인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쓴맛이 강하게 밀려왔지만, 그 외엔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응, 괜찮아.” 하지만 이서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근데 어둠의 호리병은 그걸 다쳤을 때 먹어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환 씨는 다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걸 준비했을까요?” 지환도 이유를 몰라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밥부터 먹자.” “네...” 이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젓가락을 들었고, 식사는 조용히 끝났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이서는 욕실로 향해 샤워를 마친 뒤 지환을 보며 말했다. “나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지환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평소와 사뭇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거리가 멀었던 탓에 이서는 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지환은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서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 내내 지환은 입 안이 뜨겁고 목이 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거...’ 침실에 들어서자 지환은 몸 전체가 불타는 듯한 더위를 참을 수 없어서 이서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욕실로 향했다.“나도 좀 씻을게.” 차가운 물이 얼굴 위로 쏟아졌지만, 지환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타오르는 듯했다. 마치 몸 안에 작은 화로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물을 맞을수록 그 화로에 장작을 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지환은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문밖에 있던 이서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문 앞에 다가갔다. “하지환 씨,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이서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리자, 지환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서의 목소리는 마치 뜨거운 불길 속에서 찬물을 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다시 몸 안의 열기가 치밀어
“하지환 씨, 왜 갑자기 전기가 나간 거예요? 혹시 하도훈 쪽에서 무슨 짓을 한 거 아니에요?” 이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지환은 타월을 두르던 동작을 멈췄다. ‘혹시...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이서가 심리적으로 불안해진 걸까?’ 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고, 더 이상 타월에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문이 열리자마자 이서는 지환에게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괜찮아요? 다친 거 아니죠?” 이서가 몸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가 지환의 코끝을 자극했고, 방금 겨우 진정시켰던 욕망이 다시금 타올랐다. “이... 이서야...”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채, 지환의 몸에 닿은 끈적한 무언가를 느끼고 깜짝 놀라 외쳤다.“피잖아요! 피를 흘리고 있다고요!” 사실 그것은 지환이 스스로 낸 상처에서 흐른 피였지만, 이서는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말했다. “정말 하도훈 쪽 사람들이 온 거예요?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해요? 아니다, 우선 약상자부터 찾아올게요! 혹시 다른 데도 다친 건 아니죠?”이서는 당황한 듯 지환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는데, 주변이 온통 깜깜한 탓에 오직 손의 감각만으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이미 약초의 효과로 인해 한계에 다다른 지환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서야...” 지환은 간신히 이서의 손을 떼며 힘겹게 말했다. “괜, 괜찮아. 다친 거 아니야.” “피가 이렇게 나는데 무슨 소리예요?! 하지환 씨, 이런 상황에서도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예요? 하도훈 쪽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아니야, 하도훈 쪽 사람들이 날 공격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실수로 손을 베인 거야. 그러니까 잠깐만 나한테서 떨어져 있어 줘.” 이서는 그제야 숨을 고르며 조금 진정했다.하지만 잠시 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하지환 씨는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텐데...?’비록 방 안은 어두웠지만, 그 어둠 속에
이서는 순간 멍해졌으나,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지환의 뜨거운 피부가 자기 손등에 닿는 순간,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거... 설마...’ 이서는 지환의 단단한 가슴을 힘껏 밀며 외쳤다. “지환 씨... 정신 좀 차려봐요!”하지만 지환은 이미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어둠의 호리병이 건넨 약초가 말 그대로 ‘독’인 듯했다. 심지어 한번 효과가 나타나면 어떤 이성도 무참히 짓밟히고 본능만이 남게 되는 독약. “이서야... 너무... 힘들어...” 지환이 힘겹게 내뱉은 숨결마저 뜨거웠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찬물도 소용이 없어요?” 이서의 질문에 지환은 고개를 힘겹게 저었다. “그럼... 어떡해요?” 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지환은 침대 옆에 놓인 스탠드를 힐끔 쳐다보았고, 간신히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이서와 거리를 벌린 뒤 말했다. “저기 있는 스탠드로... 날 기절시켜 줘.” 이서는 지환의 시선을 따라 스탠드를 바라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내... 내가 힘 조절을 못하면 어떡해요? 진짜 다치면 어떡하냐고요!” 자기 입술을 세게 깨문 지환은 이미 입 안 가득 퍼지는 비린내를 느낄 수 있었다. “이서야, 제발... 빨리해 줘. 더는 못 버티겠어.”지환의 간절한 목소리에 이서는 이를 악물고 결심한 듯 스탠드를 들어 올렸다. “잠깐만요... 조금만 참아요.” 이서는 스탠드를 들고 지환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이서의 힘은 너무 약했고, 지환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린 것 같은 느낌만 받았다. “이서야!!” 지환이 다급하게 외쳤다. “미... 미안해요!” 이서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번엔 제대로 힘을 모아 스탠드를 휘둘렀다. 쾅! 쾅!스탠드가 지환의 어깨에 제대로 꽂히며 방 안에 두 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나는 스탠드가 부딪히는 소리였고,
‘여긴 고급 빌라인데... 어떻게 쥐가 나올 수 있지?’ 이서는 지환에게 서둘러 옷을 입혀주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하도훈이 꾸민 장난인 건가?’ 그 시각, 3층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어둠의 호리병은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오, 꽤 조용하게 처리하시네? 하하, 역시 명불허전이라니까.’어둠의 호리병은 원래 지환이 좀 더 ‘거칠고 야성적인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일이 이렇게 조용히 진행될 줄은 몰랐다. ‘내일 아침이 밝으면 나한테 아주 고마워하겠지?’어둠의 호리병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화해할 수 없었을걸? 이건 앞으로 내 경력에 포함해야겠어!’‘‘하 대표님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부부관계까지 회복시킨 남자’라니, 다크웹에서도 유일무이한 기록이 될 거야.’ 어둠의 호리병은 점점 더 신이 나서 입가에 미소를 띠며 혼자 생각에 빠졌다. ‘그래, 다크 웹은 경쟁이 치열하니까 이렇게라도 눈에 띄어야 해. 이미 랭킹 3위이긴 하지만, 위에 있는 그 괴물 같은 두 녀석을 실력으로 따라잡을 순 없어.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라도 다크웹에 내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혼자 생각하며 흡족한 표정을 짓던 어둠의 호리병의 귀에 갑자기 ‘삐뽀삐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어둠의 호리병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급차 한 대가 지환의 빌라 앞에 도착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어둠의 호리병은 깜짝 놀라며 3층 난간에 매달려 소리쳤다. “뭐예요?! 무슨 일이죠? 왜 119가 온 거냐고요!” 하지만 이미 차에서 내린 구급대원은 다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느라 어둠의 호리병이 외친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환자가 쓰러졌다고 해서 왔습니다!” 구급대원 중 한 명이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쓰러졌다고?’ 어둠의 호리병은 순간 굳어버렸다. ‘설마... 윤이서 씨가 쓰러진 건가?’ 어둠의 호리병은 자신이 준비한 ‘서
지환이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의사는 지환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한 번 이서에게 당부했다.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아무리 젊어도 뭐든 적당히 해야 합니다.” “...” 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심지어 옆에 있던 간호사도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힐끔거렸기에, 이서는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간호사를 지나쳐 방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나니 방 안은 조용해졌고, 이서의 얼굴에 가득했던 붉은 기운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잠시 망설이던 이서는 천천히 지환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고, 지환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지환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이서는 살며시 손가락을 뻗어 지환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렸다. “안 아파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이서는 자기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럴 리가, 당연히 아프겠지... 윤이서, 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방 안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이서는 오히려 그 적막이 나쁘지 않았다. 이서는 고개를 들어 지환을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이런 고요함이 참 좋아.’ 상대가 의식을 잃고 있을 때, 상대방이 모르게 그 사람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런 순간은 이서에게 아주 소중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지환을 바라보던 이서는 어느새 몰려오는 졸음을 느꼈다. 하지만 막 눈을 감으려던 순간,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맞다... 오늘 저녁에 어둠의 호리병이 준 약초 물을 마셨었지?’ ‘혹시 그 약초에 문제가 있었던 거 아닐까?’ 이서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설마... 어둠의 호리병이 하도훈한테 매수당한 건가? 그럼 우리 모두 위험한 거잖아!’ 잠이 확 달아난 이서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상언에게 연락하려 했다. 하지만 아직 전화를 걸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이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는데,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