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의 기대 어린 시선 속에 놓인 지환은 결국 테이블 위에 놓인 약초 달인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쓴맛이 강하게 밀려왔지만, 그 외엔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응, 괜찮아.” 하지만 이서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근데 어둠의 호리병은 그걸 다쳤을 때 먹어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환 씨는 다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걸 준비했을까요?” 지환도 이유를 몰라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밥부터 먹자.” “네...” 이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젓가락을 들었고, 식사는 조용히 끝났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이서는 욕실로 향해 샤워를 마친 뒤 지환을 보며 말했다. “나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지환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평소와 사뭇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거리가 멀었던 탓에 이서는 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지환은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서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 내내 지환은 입 안이 뜨겁고 목이 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거...’ 침실에 들어서자 지환은 몸 전체가 불타는 듯한 더위를 참을 수 없어서 이서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욕실로 향했다.“나도 좀 씻을게.” 차가운 물이 얼굴 위로 쏟아졌지만, 지환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타오르는 듯했다. 마치 몸 안에 작은 화로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물을 맞을수록 그 화로에 장작을 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지환은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문밖에 있던 이서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문 앞에 다가갔다. “하지환 씨,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이서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리자, 지환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서의 목소리는 마치 뜨거운 불길 속에서 찬물을 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다시 몸 안의 열기가 치밀어
“하지환 씨, 왜 갑자기 전기가 나간 거예요? 혹시 하도훈 쪽에서 무슨 짓을 한 거 아니에요?” 이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지환은 타월을 두르던 동작을 멈췄다. ‘혹시...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이서가 심리적으로 불안해진 걸까?’ 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고, 더 이상 타월에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문이 열리자마자 이서는 지환에게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괜찮아요? 다친 거 아니죠?” 이서가 몸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가 지환의 코끝을 자극했고, 방금 겨우 진정시켰던 욕망이 다시금 타올랐다. “이... 이서야...”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채, 지환의 몸에 닿은 끈적한 무언가를 느끼고 깜짝 놀라 외쳤다.“피잖아요! 피를 흘리고 있다고요!” 사실 그것은 지환이 스스로 낸 상처에서 흐른 피였지만, 이서는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말했다. “정말 하도훈 쪽 사람들이 온 거예요?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해요? 아니다, 우선 약상자부터 찾아올게요! 혹시 다른 데도 다친 건 아니죠?”이서는 당황한 듯 지환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는데, 주변이 온통 깜깜한 탓에 오직 손의 감각만으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이미 약초의 효과로 인해 한계에 다다른 지환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서야...” 지환은 간신히 이서의 손을 떼며 힘겹게 말했다. “괜, 괜찮아. 다친 거 아니야.” “피가 이렇게 나는데 무슨 소리예요?! 하지환 씨, 이런 상황에서도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예요? 하도훈 쪽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아니야, 하도훈 쪽 사람들이 날 공격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실수로 손을 베인 거야. 그러니까 잠깐만 나한테서 떨어져 있어 줘.” 이서는 그제야 숨을 고르며 조금 진정했다.하지만 잠시 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하지환 씨는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텐데...?’비록 방 안은 어두웠지만, 그 어둠 속에
이서는 순간 멍해졌으나,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지환의 뜨거운 피부가 자기 손등에 닿는 순간,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거... 설마...’ 이서는 지환의 단단한 가슴을 힘껏 밀며 외쳤다. “지환 씨... 정신 좀 차려봐요!”하지만 지환은 이미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어둠의 호리병이 건넨 약초가 말 그대로 ‘독’인 듯했다. 심지어 한번 효과가 나타나면 어떤 이성도 무참히 짓밟히고 본능만이 남게 되는 독약. “이서야... 너무... 힘들어...” 지환이 힘겹게 내뱉은 숨결마저 뜨거웠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찬물도 소용이 없어요?” 이서의 질문에 지환은 고개를 힘겹게 저었다. “그럼... 어떡해요?” 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지환은 침대 옆에 놓인 스탠드를 힐끔 쳐다보았고, 간신히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이서와 거리를 벌린 뒤 말했다. “저기 있는 스탠드로... 날 기절시켜 줘.” 이서는 지환의 시선을 따라 스탠드를 바라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내... 내가 힘 조절을 못하면 어떡해요? 진짜 다치면 어떡하냐고요!” 자기 입술을 세게 깨문 지환은 이미 입 안 가득 퍼지는 비린내를 느낄 수 있었다. “이서야, 제발... 빨리해 줘. 더는 못 버티겠어.”지환의 간절한 목소리에 이서는 이를 악물고 결심한 듯 스탠드를 들어 올렸다. “잠깐만요... 조금만 참아요.” 이서는 스탠드를 들고 지환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이서의 힘은 너무 약했고, 지환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린 것 같은 느낌만 받았다. “이서야!!” 지환이 다급하게 외쳤다. “미... 미안해요!” 이서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번엔 제대로 힘을 모아 스탠드를 휘둘렀다. 쾅! 쾅!스탠드가 지환의 어깨에 제대로 꽂히며 방 안에 두 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나는 스탠드가 부딪히는 소리였고,
윤이서는 결혼했다.그러나 결혼 상대는 그녀가 8년 넘게 사랑을 했던 약혼자인 하은철이 아닌 만난 지 5분도 안 된, 기본적인 정보만 대충 아는 남자였다.“후회되시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사무소 대기실에서 남자는 조금 귀찮다는 눈빛으로 윤이서를 흘겨보았다.윤이서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은 하은철의 차갑고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3일전, 줄곧 윤이서를 피했던 하은철이 직접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순간 지난 8년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정성껏 꾸미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은철뿐만이 아니라 그와 손을 깍지를 낀 채 휠체어에 앉아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수정도 함께 있었다.--그녀의 사촌 여동생!그녀가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고 있을 때, 하은철은 갑자기 폭탄발언을 했다.“네 신장을 수정이에게 주면 너와 결혼할게.”윤이서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몸이 굳어지며 믿을 수 없단 듯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맞은편 남자의 눈빛은 시종 차갑고 증오로 가득 찼다. 마치 자신을 8년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 한 약혼녀가 아닌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마치 갈 곳을 잃어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같았다.하은철과 어릴 때 약혼한 사이였고, 16살 되던 해 귀국한 후, 하은철을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이 8년 동안 그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그녀는 빨래와 밥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에게 걸맞는 아내가 되기 위해 피아노, 그림 등을 배웠으며 심지어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오직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해주기 꿈꾸며.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매몰찼다. 하은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심지어 그의 애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무슨 문제 있나요?” 하지환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벌리고 있다가 또 하지환이 오해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아니요, 가요.”어차피 언젠가 마주해야 할 문제였다.도중에 윤이서는 하은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스크린이 끊임없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윤이서는 마치 지난 8년 동안 비굴했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전에는 모두 그녀가 먼저 하은철에게 전화를 걸며 그의 관심을 끌려했다.그러나 하은철은 단 한 번도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지 않았다.설령 그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한 마디 관심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윤수정을 위해 그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정말 컸다.“안 받아요?”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던 하지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윤이서는 남자의 완벽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가 짜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입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 하은철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이서! 너 당장 병원으로 오지 못해! 지금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너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 수정이는 얼마나 괴로운지 아냐고? 너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나는 이미 너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는데, 넌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윤이서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비록 하은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은철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잖아?” 윤이서의 눈빛은 차가워졌다.“난 너의 사랑을 원하는데, 너는 줄 수 있어?”“뻔뻔한 년!”하은철은 그녀를 비꼬았다.“나는 절대로 너 같은 여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윤이서, 너 지금 오면 아직 하씨 집안 아
윤이서의 가슴은 놀라움에 줄곧 두근거렸다.마치 바다에서 떠 있다 마침내 부목을 잡은 것 같았다.고개를 들자 그녀는 마침 하지환의 눈빛과 부딪쳤다.그의 눈빛은 더 이상 장난기가 없었고, 오히려 무척 다정했다. 그 순간, 윤이서마저 하마터면 그에게 속아 넘어갈 뻔했다.그녀는 황급히 윤재하와 성지영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놀라서 소파에 주저앉았다.한참 뒤, 윤재하는 먼저 반응하여 고개를 들어 윤이서에게 물었다.“이서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윤이서는 막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하지환은 그녀를 자신의 뒤로 감쌌다.이런 전 없었던,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는 느낌은 그녀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고 이때 귓가에서 하지환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오늘 금방 혼인 신고를 했는데, 정말 너무 바빠서 두 분께 미처 알리지 못했네요.”윤재하는 화를 참으며 이성을 유지했다.“이서야!”윤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네, 저 사람 말이 모두 사실이에요. 난 결혼했고, 그 이유는 바로 하은철과 결혼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지영이 달려와 윤이서의 두 어깨를 쥐고 말했다.“이서야, 너 왜 그래? 너 줄곧 은철을 좋아했잖아, 지금 은철이 마침내 너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너 어떻게…….”그녀는 갑자기 경계하며 하지환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너 솔직히 말해봐, 누가 널 협박한 거 아니야?”성지영이 하지환을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윤이서는 얼른 설명했다.“엄마, 아무도 나를 협박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날 전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녀는 지쳤다.그리고 더 이상 그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성지영의 손톱은 윤이서의 살에 깊이 파고들었다.“이서야, 너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 네가 은철과 혼약을 맺었을 때부터 우리는 널 그의 미래의 아내로 키웠고, 네가 시집가는 것은 윤씨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지, 그 따위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야!”윤이서는 통증에
하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사람을 조수석에 앉힌 다음 운전석으로 올라왔고 문을 쾅 닫았다.윤이서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고 하지환의 보기 흉한 안색을 슬쩍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화낼 사람은 분명히 그녀인데, 왜 하지환이 그녀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지?다음 순간, 하지환은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고, 차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윤이서는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꽉 잡았고, 목소리는 바람에 의해 다르게 변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하지환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고, 검은 눈동자는 마치 어두운 밤의 야수처럼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순간, 평범한 아우디 A6는 철장에서 벗어난 맹수처럼 조용한 거리를 거침없이 질주했다.윤이서는 창백한 얼굴로 온 힘을 다해 안전벨트를 잡았고, 큰 소리로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대한 바람소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그녀의 소리를 삼켰다.그렇게 윤이서는 차츰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하고 광풍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불도록 내버려 두며 하지환이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3일 전, 그녀는 이미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자살은 너무 아파서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그리고 그때, 그녀는 부모님이 아무리 자신을 하씨 집안으로 시집가게 만들고 싶어도 하은철의 황당한 요구만 들으면 반드시 자신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것 또한 그녀가 하지환을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그러나 부모님의 눈에는 윤씨 집안을 다시 정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행복보다 훨씬 중요했다.20여 년의 모든 아름다운 기억은 지금 산산조각이 났다.바람은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향해 불었고, 그녀는 이미 눈물이 다 말랐다.마음은…… 죽었으니까.차 속도는 어느새 느려졌고 윤이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차는 해변에 도착했고, 노을에 물든 모래사장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그들은 마치 작은 검은 점처럼 움
윤이서는 임하나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너 말이야,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그냥 상담소에서 찾은 사람이야. 하씨 집안과 관계가 없고, 유일하게 엮인 것은 그가 HS 그룹에서 일한다는 거야.”“아.”임하나는 크게 실망했다.“그러니까, 그는 심지어 하은철의 부하다 이거야? 그럼 앞으로 하은철이 너를 괴롭히려고 하면 더욱 쉬운 거 아니야?”윤이서는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아마…… 아닐 거야, 하씨 집안 어르신을 봐서라도 말이야. 게다가 난 이미 결혼했으니 하은철은 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임하나는 약간 안심했다. 그러나 하은철이 한 짓을 생각하면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절친을 위해 불평을 품었다.“그때 내가 제대로 손봐줬어야 했는데. 설마 네가 얼마나 지랑 결혼하고 싶어 했는지 모르는 거야?”윤이서는 작은 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하나야, 이미 지나간 일이야. 앞으로 나와 하은철은 각자의 삶을 사는 서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그럼 그 혼약은…….” 임하나가 물었다.“어르신 쪽은 아직 모르지? 어르신께서 아시면 틀림없이 상심할 거야.”윤이서는 방금 전까지 내려놓은 근심을 다시 걱정하기 시작했다.하은철의 할아버지에 대해 윤이서의 마음속에는 양심의 가책만 남았다.그녀와 하은철의 혼약은 어르신이 직접 정한 것이었다. 윤씨네 집안이 몰락한 후, 모두들 어르신이 그 약속을 회수하며 그녀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그러나 어르신은 혼약을 취소하기는커녕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그녀만 손자며느리로 인정한다고 밝혔다.심지어 그녀 때문에 어르신은 손자인 하은철과 자주 다투곤 했다.지금 일이 이렇게 되자, 윤이서는 유일하게 미안한 사람이 바로 어르신이었다.“그냥…… 오늘 밤에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윤이서가 말했다.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 것보다 차라리 그녀가 직접 어르신께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임하나는 걱정을 금치 못했다.“내가 같이 가줄까?”“아니야.” 윤이서는 웃었다.“할아버지
이서는 순간 멍해졌으나,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지환의 뜨거운 피부가 자기 손등에 닿는 순간,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거... 설마...’ 이서는 지환의 단단한 가슴을 힘껏 밀며 외쳤다. “지환 씨... 정신 좀 차려봐요!”하지만 지환은 이미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어둠의 호리병이 건넨 약초가 말 그대로 ‘독’인 듯했다. 심지어 한번 효과가 나타나면 어떤 이성도 무참히 짓밟히고 본능만이 남게 되는 독약. “이서야... 너무... 힘들어...” 지환이 힘겹게 내뱉은 숨결마저 뜨거웠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찬물도 소용이 없어요?” 이서의 질문에 지환은 고개를 힘겹게 저었다. “그럼... 어떡해요?” 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지환은 침대 옆에 놓인 스탠드를 힐끔 쳐다보았고, 간신히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이서와 거리를 벌린 뒤 말했다. “저기 있는 스탠드로... 날 기절시켜 줘.” 이서는 지환의 시선을 따라 스탠드를 바라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내... 내가 힘 조절을 못하면 어떡해요? 진짜 다치면 어떡하냐고요!” 자기 입술을 세게 깨문 지환은 이미 입 안 가득 퍼지는 비린내를 느낄 수 있었다. “이서야, 제발... 빨리해 줘. 더는 못 버티겠어.”지환의 간절한 목소리에 이서는 이를 악물고 결심한 듯 스탠드를 들어 올렸다. “잠깐만요... 조금만 참아요.” 이서는 스탠드를 들고 지환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이서의 힘은 너무 약했고, 지환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린 것 같은 느낌만 받았다. “이서야!!” 지환이 다급하게 외쳤다. “미... 미안해요!” 이서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번엔 제대로 힘을 모아 스탠드를 휘둘렀다. 쾅! 쾅!스탠드가 지환의 어깨에 제대로 꽂히며 방 안에 두 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나는 스탠드가 부딪히는 소리였고,
“하지환 씨, 왜 갑자기 전기가 나간 거예요? 혹시 하도훈 쪽에서 무슨 짓을 한 거 아니에요?” 이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지환은 타월을 두르던 동작을 멈췄다. ‘혹시...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이서가 심리적으로 불안해진 걸까?’ 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고, 더 이상 타월에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문이 열리자마자 이서는 지환에게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괜찮아요? 다친 거 아니죠?” 이서가 몸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가 지환의 코끝을 자극했고, 방금 겨우 진정시켰던 욕망이 다시금 타올랐다. “이... 이서야...”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채, 지환의 몸에 닿은 끈적한 무언가를 느끼고 깜짝 놀라 외쳤다.“피잖아요! 피를 흘리고 있다고요!” 사실 그것은 지환이 스스로 낸 상처에서 흐른 피였지만, 이서는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말했다. “정말 하도훈 쪽 사람들이 온 거예요?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해요? 아니다, 우선 약상자부터 찾아올게요! 혹시 다른 데도 다친 건 아니죠?”이서는 당황한 듯 지환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는데, 주변이 온통 깜깜한 탓에 오직 손의 감각만으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이미 약초의 효과로 인해 한계에 다다른 지환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서야...” 지환은 간신히 이서의 손을 떼며 힘겹게 말했다. “괜, 괜찮아. 다친 거 아니야.” “피가 이렇게 나는데 무슨 소리예요?! 하지환 씨, 이런 상황에서도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예요? 하도훈 쪽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아니야, 하도훈 쪽 사람들이 날 공격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실수로 손을 베인 거야. 그러니까 잠깐만 나한테서 떨어져 있어 줘.” 이서는 그제야 숨을 고르며 조금 진정했다.하지만 잠시 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하지환 씨는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텐데...?’비록 방 안은 어두웠지만, 그 어둠 속에
이서의 기대 어린 시선 속에 놓인 지환은 결국 테이블 위에 놓인 약초 달인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쓴맛이 강하게 밀려왔지만, 그 외엔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응, 괜찮아.” 하지만 이서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근데 어둠의 호리병은 그걸 다쳤을 때 먹어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환 씨는 다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걸 준비했을까요?” 지환도 이유를 몰라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밥부터 먹자.” “네...” 이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젓가락을 들었고, 식사는 조용히 끝났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이서는 욕실로 향해 샤워를 마친 뒤 지환을 보며 말했다. “나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지환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평소와 사뭇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거리가 멀었던 탓에 이서는 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지환은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서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 내내 지환은 입 안이 뜨겁고 목이 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거...’ 침실에 들어서자 지환은 몸 전체가 불타는 듯한 더위를 참을 수 없어서 이서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욕실로 향했다.“나도 좀 씻을게.” 차가운 물이 얼굴 위로 쏟아졌지만, 지환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타오르는 듯했다. 마치 몸 안에 작은 화로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물을 맞을수록 그 화로에 장작을 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지환은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문밖에 있던 이서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문 앞에 다가갔다. “하지환 씨,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이서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리자, 지환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서의 목소리는 마치 뜨거운 불길 속에서 찬물을 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다시 몸 안의 열기가 치밀어
“그깟 보잘것없는 몇몇 놈들이 날 다치게 한다고요? 허, 말도 안 되죠!”어둠의 호리병은 자신만만하게 외쳤지만, 지환은 그 확신에 찬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안 다친 거 맞습니까?”“진짜 안 다쳤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보시던가요.” 어둠의 호리병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고, 지환은 눈살을 더 찌푸렸다.‘내가 왜 남자 몸을 검사해야 하지?’ “다친 게 아니라면 약초는 왜 준비한 겁니까?” 그러자 어둠의 호리병이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약초 때문에 그런 거군요?” 어둠의 호리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 대표님을 위한 거였어요.” 지환은 어리둥절했다. “날 위한 거라고요? 왜죠?” 어둠의 호리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약초는 보약이나 다름없어요. 하도훈이 사람을 보내서 하 대표님을 시험한 것도 봤잖아요. 설마 윤이서 씨한테 하도훈이 보낸 놈들 때문에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꼴을 보이고 싶은 건 아니겠죠?” “...” 지환이 말이 없자, 어둠의 호리병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래서 보약을 준비한 거예요. 저녁 먹고 나서 꼭 한 그릇 먹어 보세요.” 지환은 미간을 더 찌푸렸지만, 딱히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어둠의 호리병은 지환이 동의한 걸로 받아들이고 씩 웃었다. “꼭 마셔야 해요!” 어둠의 호리병이 당부를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지자, 지환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미간에 잡힌 주름으로 파리도 잡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이서랑 나에 대해 말하는 저 장난스러운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니까?’ ‘하지만 이서랑 진심으로 화해하고 싶긴 한데...’거실로 돌아온 지환을 보자 이서는 궁금한 듯 물었다. “어둠의 호리병은 안 다쳤대요?” “응.” 지환이 짧게 대답하자, 이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혹시 하도훈 쪽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지환은 이서를
어둠의 호리병의 목소리가 갑자기 긴장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전혀 믿지 않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의 태도는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서는 한걸음에 다가가 어둠의 호리병이 가리고 있던 것을 힐끔 쳐다봤는데, 그곳엔 온갖 약초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그게 뭐예요?” 이서는 호기심에 약초를 하나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이 재빨리 약초를 뺏으며 외쳤다. “먹으면 안 돼요!” 이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둠의 호리병을 쳐다보았고, 어둠의 호리병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서는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뭐길래 그래요??” “약초예요. 남자에게만 효과가 있는 약초인데, 여자가 먹으면 코피를 흘리기도 하고 심하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요.” 이서는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약초를 던져버렸다. “진짜 그렇게 위험하다고요?” “네.” 어둠의 호리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오늘 밤이면 알게 될 거예요.”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지만, 주방에 추연실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그래요, 그럼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저는 아주머니를 찾아서 저녁을 준비해야 하거든요.” “네, 절대 밖에 나가진 마세요!” 어둠의 호리병은 당부하듯 말했고, 이서는 대충 손을 흔들며 주방을 나갔다. 이서가 사라지자, 한숨 돌린 어둠의 호리병은 손에 쥔 약초를 모두 전기밥솥에 넣었고, 약초로 가득 찬 밥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넣었나?” 하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하 대표님 정도 되는 사람이면 이 정도는 넣어야 효과가 있을 거야.”어둠의 호리병은 물을 붓고 밥솥의 뚜껑을 닫았다. 한편, 이서는 추연실에게 저녁을 부탁한 후 거실로 돌아왔고, 지환은 소파에 앉아 회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잠시 물을 마시는 틈에 말을 걸었다.
‘그렇게 하면 다크 웹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거야.’ 지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어둠의 호리병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잠시 생각한 끝에야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이란 게 뭡니까?”지환이 묻자, 어둠의 호리병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말했다. “오! 그럼 내 말에 동의한 거네요? 내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면 나한테 부탁하겠다는 거죠?” “우선 효과를 지켜볼 겁니다.”지환은 여지를 남기며 슬쩍 빠져나갔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비즈니스계의 사람이 아닌 터라 그 말에 바로 반응하며 외쳤다.“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중에 딴소리할까 봐 걱정되니까 우선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줄게요.”“그러세요, 그럼.” 어둠의 호리병은 지환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고,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이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이며 지환을 쳐다봤지만, 지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그 방법, 정말 효과 있는 거 맞습니까?” “믿어 보세요. 100% 먹힌다니까요!”어둠의 호리병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지환은 고개를 저으며 반신반의했다.“못 믿겠으면 오늘 밤에 한 번 해보세요.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잖아요?” 잠시 생각에 잠긴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손해 볼 건 없겠어.’ “좋습니다. 그럼 준비해 보세요.” “오케이! 밤에 만나자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사라졌고, 지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거실로 돌아갔다. 거실에 있던 이서는 지환이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아까 그 어색했던 포옹이 떠올라 살짝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어둠의 호리병이 하지환 씨랑 같이 있으라길래 거실에 있기로 했어요. 불편하진 않죠?” 이서가 조심스레 물었고, 지환은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둠의 호리병이랑 밖에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나눈 거예요? 둘 다 꽤 즐거워 보이던데
“그게 무슨 말이죠? 하도훈과 관련된 것도 다 거짓말이라는 겁니까?”“그럴 리가요. 하도훈과 관련된 건 진짜예요. 물론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하는 것도 진짜죠.” 지환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우리를 이어주려고 하는 겁니까?” “그거야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만 행복해 보이니까 그렇죠. 행복한 나날만 계속된다면, 내 월급도 오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두 사람을 이어줄 기회가 있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죠. 설마, 내가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게 싫은 겁니까?” “...”지환은 말이 없었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알아서 한다고 해놓고 여태 아무런 진전이 없었잖아요.” “우린 지금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이게 진전이 아니면 뭐란 말이죠?”“하하, 웃기지 좀 마세요. 하도훈이 아니라면 두 사람이 같이 살 수 있었겠어요? 지금은 하도훈 덕분에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거라고요.”“나중에 이상언 씨가 다크웹의 나머지 두 명까지 찾아내면, 그땐 두 사람이 같이 살 핑곗거리도 사라질걸요?”지환은 말문이 막혔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담벼락 위에 앉아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부탁해 보세요. 그러면 윤이서 씨를 설득해서 다시는 이혼하자는 소리 안 나오게 해줄게요.” 지환은 노골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는 돼요. 하지만 하 대표님이 아직 모르는 게 있다고요.”“난 단순한 킬러가 아니라 또 다른 별명을 갖고 있어요.” 지환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뭐죠?” “‘여심 방화범’이요! 내 전 여자 친구들만 모아도 지구 한 바퀴는 돌 수 있을 거예요. 못 믿겠으면 내가 아이디어를 하나 줄게요. 그걸 써보고 효과가 있으면 그때 나한테 와서 부탁해도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지환은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어둠의 호리병은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아니다, 아이
우기광과의 통화를 마친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았지만, 곧바로 거실로 돌아가진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 하지환 씨와 단둘이 있는 건 적절하지 않아.’ 이서가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순간,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고, 무슨 일인지 반응할 새도 없이 총성이 이어졌다. 탕! 탕! 탕!거실에서 총성을 들은 지환은 노트북을 내팽개치고 곧장 달려 나왔고, 이서를 보자마자 단숨에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서 총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총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주변이 고요해진 순간, 농담이 서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언제까지 그렇게 끌어안고 있을 거죠?” 어둠 속에서 나타난 어둠의 호리병이 두 사람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급히 지환에게서 떨어지며 시선을 피했다. 반면 지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상황이죠?” “차 한 대가 집 앞을 지나가면서 사격한 것 같아요. 아마 여기에 설치된 보안 시스템을 시험하려는 의도였겠죠.”“하도훈의 짓이에요.” 이서는 바로 허도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이제 애도 생겼으니, 후손에게 그룹을 물려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잖아요.” 이서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나랑 하지환 씨가 같이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혼자였다면...’ 이서는 그다음 상황을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총성은 고요한 일상에 커다란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모든 걸 뒤흔들었다. 늘 평화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기 어렵겠지만, 하도훈은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예측 불가능한 기습’을 노렸다. 어둠의 호리병이 입을 열었다.“그쪽이 먼저 움직인 건 확실해요. 우리는 언제 또 공격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된
“지금은 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니까요. 물론 부대표님께서 윤 대표님과 친분이 깊다는 건 잘 압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회사에선 회사의 규정을 따라야죠.”고이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우기광은 더 황당해졌다.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요? 그럼 대체 어떤 규정을 근거로 날 해고하겠다는 겁니까?”고이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해고 통보서를 내놓았다. “이만 돌아가 주시죠. 더 버티시면 보안팀을 부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고이서는 책상 옆에 놓인 전화기를 잡았지만, 우기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내놓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기광은 명예직이었으나, 고이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일부러 우기광을 겨냥해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우기광은 이서와 오래된 인연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를 해고하는 건 곧 이서를 겨냥한 행동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고이서는 내선 전화를 걸며 덧붙였다. “보안팀이죠? 대표실로 와서 우기광 씨 좀 모시고 나가 주세요.” “당신...!” 분노로 가득 찬 우기광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고이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사람들 보기에 좀 그렇지 않겠어요? 괜히 보안팀에 끌려 나가는 건 보기에 안 좋잖아요.” 우기광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허,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우기광이 이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떠나자마자, 고위층 임원들이 우기광의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대체 무슨 일입니까?”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우기광을 향하자,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일들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거 같습니다.” 우기광은 그렇게 한마디의 경고를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남은 사람들은 우기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