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가온은 원래 이기적이고 거칠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아들을 잃고 희망이 사라진 그녀가 이제는 손자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미쳐 날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은서가 박지연에게 물었다.“백유미 지금 상태는 어때?”“유산도 했고 가위에 찔려서 과다 출혈로 응급실로 실려 갔어. 치료가 늦어지면 목숨도 위험할 거야. 백승엽이 곽승재한테 찾아가 백유미를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고 의사도 바꿔 달라고 부탁했는데 곽승재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대. 아마 곽승재 아버지한테 가서도 부탁하겠지. 그쪽에서 신경 써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곽현수는 백유미가 자기 일을 대신 처리해 준 적이 있으니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게다가 백승엽과의 오랜 신뢰 관계도 있으니 백유미가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아마 백유미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박지연과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민시후는 백유미의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백유미가 비참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기에 그는 따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대신 그는 고은서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너 전에 청풍이라는 밴드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 그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한데. 같이 보러 가자.”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형 만나야 하잖아. 내일도 나랑 연락할 수 있을까?”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아무리 형이라도 나를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어. 맨날 상사처럼 나한테 훈계질이야. 듣기 싫어 죽겠어. 그러니까 그냥 내일 저녁 같이 밥 먹고 공연 보러 가는 걸로 하자.”“네 형은 더더욱 내가 너한테 나쁜 영향을 준다고 확신하겠네.”“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민시후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을 빨리 인정하면 내 연애를 막아보겠다는 헛된 꿈도 빨리 포기하겠지.”“나 거절해도 돼?”“안 돼!”결국 고은서는 민시후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한편으로는 민시후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
퀸이 케이지를 할퀴자 고은서는 퀸을 안아 올려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돌볼 시간이 없으면 승연이에게 줘. 마침 심리 상담사가 승연이한테 온순한 반려동물을 키우라고 권했어.”“승연이한테는 다른 애를 선물할 거야. 퀸은 내 것이니까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거야.”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곽승재가 내 것이라고 말할 때 묘하게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퀸을 다시 케이지 안에 넣으며 물었다.“그래서 무슨 일이야?”곽승재가 공연 티켓을 내밀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청풍 밴드 좋아한다면서? 내일 해성에서 공연이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보러 갈래?”그가 내민 티켓을 본 순간 고은서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전생에서도 그녀는 청풍 밴드의 공연 티켓을 산 적이 있었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와 곽승재의 관계가 질투나 자주 울고 떼를 쓰며 곽승재를 다그쳤고 그로 인해 둘 사이는 점점 냉랭해졌다.청풍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할 때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곽승재를 보지 못해 몹시 그리워했다.마침 두 사람이 할머니 댁에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생겨 그녀는 먼저 사과하며 공연을 함께 보러 가자고 제안했었다.전미자가 자리에 있어서일까, 곽승재는 예상과 달리 거절하지 않고 그날 밤 그녀와 함께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들뜬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공연 볼 준비에 열을 올리며 입을 옷을 골랐고 응원용 스티커와 도구도 샀으며 세심하게 물과 간식까지 준비했다.마침내 저녁이 되었고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회의가 있다며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그녀는 곽승재가 바쁘다는 것을 알았기에 신이 나서 먼저 공연장으로 향해 그를 기다렸다.저녁 6시 공연이 시작될 때부터 입장이 마감될 때까지 그리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곽승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집으로
민시후가 이미 아래층에 도착했다는 말에 고은서는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민시후는 오늘 좀 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흰색 후드티와 편안한 바지를 입은 그는 평소보다 더욱 잘생기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고은서도 편안함을 위해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이거 커플 룩 아니야?”민시후의 장난에 고은서가 그를 흘겼다.“말이라도 못 하면.”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근처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은 후 해성 공연장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고은서가 어젯밤에 민시현이 그를 찾아간 일에 대해 묻자 민시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했다.“전에 했던 얘기랑 똑같아. 내가 반응 없으니까 형도 지루해져서 그냥 갔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민시현은 그렇게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고 민시후는 아마도 형한테 큰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민시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바꿀 수 없었고 민시후에게 자신에 대한 감정을 접으라고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곧 공연장에 도착했다.밴드의 팬층은 유명 가수들에 비해 적었지만 여전히 많은 젊은 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포스터를 들거나 형광봉을 흔들며 들떠 있었고 어떤 팬들은 얼굴에 밴드 이름까지 그려 넣었다. 모두 오늘 밤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형광봉을 보고 있던 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물었다.“우리도 저런 거 하나 살까?”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렇게 흥분되거나 설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좋아!”두 사람은 형광봉과 손목띠를 고른 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LED 미키 머리띠를 골라줬다.“이건 너무 유치하지 않아?”고은서가 질색하며 거절했지만 민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띠를 그녀의 머리에 씌워버렸다.“유치하긴, 내 눈엔 예쁜데!”“정말? 그럼 시후 씨가 한번 써볼래?”고은서가 머리띠를 그에게 건넸다.민시후는 당연히 써볼 생각이 없었고 고은서는 강제로 그에게 씌우려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웃으며 장난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고 드러머의 타격은 천둥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가수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끌어냈다.그 순간, 고은서는 완전히 분위기에 푹 빠져들었다. 마치 처음 밴드를 만났을 때의 설렘이 되살아난 듯, 음악의 리듬에 맞춰 형광봉을 흔들며 몸을 흔들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여유 속에서 고은서는 그저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콘서트의 분위기보다 민시후를 더 즐겁게 한 건 고은서가 온전히 음악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고은서가 주위 관중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민시후는 그녀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공연이 끝나자 고은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민시후가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배고프지? 간장게장 맛집이 있어. 한번 가볼래?”세 시간 가까이 노래를 따라 부른 고은서는 배가 고팠고 간장게장 얘기만 듣고도 침이 고여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생각이야.”사람들이 많아 출입이 불편할까 봐 민시후는 차를 경기장 뒤쪽의 한적한 주차장에 세웠다.밤하늘 아래, 도시의 네온 불빛이 부드럽게 깜빡였고 오래된 수상한 SUV 한 대가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 그 차는 그림자 속에 숨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은서와 민시후가 차에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눈부신 차 불빛이 켜졌다.두 사람이 반응할 시간도 없이 SUV가 미친 듯이 그들에게 돌진해 왔다!빠른 엔진 소리에 공기까지 진동하는 듯했고 고은서가 피하려는 순간, 차는 이미 눈앞까지 다가왔다!“조심해!”민시후가 소리치며 고은서를 힘껏 옆으로 밀쳤다.고은서는 민시후의 힘에 밀려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민시후는 공중으로 떠오르다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민시후의 머리가 시멘트 기둥에 부딪혔다.“시후 씨!”고은서가 놀란 얼굴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하얀 후드티의 모자를 빨갛게 물들였다.그때, SUV의 차주는 도망치지 않고 후진한 뒤 다시 악셀을 힘껏 밟아 두 사람을 향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은서는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갑자기 어지러움이 몰려와 머리를 감싸며 누웠다.“은서야!”귀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니 병실이었다. 눈앞에는 송민아와 박지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고은서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창문으로 비치는 강렬한 햇빛에 다시 속이 울렁거려왔다.“움직이지 마, 내가 의사 부를게!”송민아가 의사를 부르러 가자 박지연은 그녀 옆으로 다가와 급하게 말했다.“은서야, 조금만 참아.”고은서는 힘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등과 팔이 욱신거렸다. 가장 괴로운 건 머리와 가슴이었다. 마치 땅이 빙빙 도는 것처럼 아무리 가만히 있어도 현기증이 심하고 구역질이 났다.그 어지러움 속에서 고은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불편함을 참으려 했다.손을 들어보니 팔에는 상처가 여러 개 있었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고은서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송민아가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검사한 후, 별다른 문제는 없고 심한 뇌진탕 후유증 때문에 약을 먹는 것 외에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의사가 떠난 후, 박지연이 고은서를 천천히 부축해서 앉히고 약을 먹을 수 있게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베개에 기대어 잠시 쉬고 나니 고은서의 어지러움은 조금 나아졌다.그러나 이내 불안감이 그녀를 덮쳐왔다. 뭔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무엇인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겨우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다시 머리가 아파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박지연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마.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 내가 다 말해줄게!”고은서의 등에는 상처가 있었기에 박지연은 그녀를 옆으로 눕힌 후 커튼을 치고 병실의 불을 어둡게 했다.“나랑 시후 씨 같이 밴드 공연 보러 갔었던 것 같은데, 지금 왜 병원에 있는 거지?”고은서가 허약한
고은서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곽승재가 병실에 들어왔다.그는 평소와 다르게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단추 몇 개가 풀려 있고 셔츠 밑단은 허리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얼굴도 이상할 정도로 창백하고 입술엔 핏기가 없었다.“은서야, 깼어?”곽승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쉰 듯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은 것 같았다.고은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며 물었다.“당신 왜 여기 있어? 지연이는?”곽승재가 대답했다.“지연 씨가 하루 종일 너를 돌봤어. 그래서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지연 씨한테는 좀 쉬라고 했어.”고은서는 ‘지연이가 승재 씨한테 알린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지러움에 고통스러워하며 겨우 말을 이었다.“당신도 들어가 봐. 난 괜찮아. 간병인을 부르면 돼.”곽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신 물었다.“목마르지? 물 좀 마실래?”고은서는 목이 마르긴 했지만,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간호사 불러줘.”“뭐 하려고? 말만 해.”고은서는 민망한 마음에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간호사만 불러줘.”곽승재는 그녀의 표정에서 의도를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켰다. 잠시 쉬게 한 후, 그녀를 가볍게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고은서는 부끄럽고 화가 나서 발버둥 쳤지만 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머리가 어지러우니까 가만히 있어.”고은서는 너무 힘들어서 그의 말에 반응할 여유도 없었고 그저 체념하고 그에게 맡겼다.곽승재는 그녀를 화장실에 내려놓고 일어날 때 비틀거리지 않도록 의자 하나를 놓아주고 문을 닫으며 말했다.“밖에 있을게. 필요하면 말해.”피곤해서인지 곽승재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리게 느껴졌다.겨우 볼일 보고 고은서는 힘겹게 세면대에 기대어 손을 씻었다.거울에 비친 그녀의 머리에는 두툼한 붕대가 감겨 있고 얼굴이 창백했다.그 얼굴을 보자 머릿속에 사고 장면이 떠오르며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고은서는 갑자기 머리에서 통증이 밀려오면서 속이 뒤틀려 세면대에 기대고 구역질했다.“은서야!”
고은서의 부탁을 듣고 곽승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너무 늦었어. 우선 쉬어.”고은서는 고집을 부렸다.“휴대폰 좀 줘. 내가 직접 전화할게.”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민시후 씨 휴대폰은 그의 형이 보관하고 있어. 전화해도 받지 못할 거야.”고은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민시후의 가족은 전에도 그녀가 민시후한테 많은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차 사고까지 났으니 더 그녀를 싫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민시후의 휴대폰을 보관하면서 연락을 막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함에 못 이겨 다시 물었다.“시후 씨 지금 상태가 어때? 아는 거 있어?”곽승재는 잠시 침묵하다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의 형이 곁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나랑 시후 씨, 어쩌다 차 사고를 당한 거야?”곽승재가 간단히 설명했다.“누군가 음주 운전을 해서 다른 차와 충돌했어. 마침 너희가 그 근처에 있었고 불행히도 사고에 연루된 거야.”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공연이 끝난 후, 그녀와 민시후는 간장게장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그 후 주차장에서 사고가 난 것 같았다.하지만 애써 기억을 떠올려도 그날의 사고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고은서는 다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지연 씨가 여러 번 당부했어. 네가 가만히 누워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우선 누워서 쉬어. 너무 많은 생각 하지 말고.”곽승재의 목소리는 한층 더 허스키해졌다.“민시후를 보러 가고 싶으면 빨리 회복해야 하지 않겠어?”고은서는 민시후를 걱정하는 자신이 곽승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말없이 옆으로 돌아누워서 그냥 쉬었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병실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낮에는 박지연과 송민아가 와서 그녀를 챙겨주었고 이미숙은 밤낮으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밤마다 곽승재가 병실을 지켰다.고
고은서는 그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결국 눈을 감았다.입원한 지 나흘째. 다행히 어지럼증은 조금씩 나아졌고 팔과 등에 난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하지만 후두부의 부상은 여전히 심각해 붕대를 풀지 못한 채로 있었다.며칠째 민시후에게서 연락이 없자 고은서는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시후 씨의 성격상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안부 연락은 했을 텐데... 혹시 시후 씨 상태가 나보다 더 심각한 걸까?”박지연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시후 씨도 휴식이 필요해. 지금은 그의 형이 돌보고 있어서 나을 때까지 못 움직이게 하는 걸 거야.”답답한 마음에 고은서는 결국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들려오는 건 기계적인 음성뿐이었다.“전원이 꺼져 있어...”‘민시현 씨가 일부러 시후 씨 휴대폰을 꺼 둔 걸까?’‘이렇게까지 연락을 차단하는 이유가 뭘까?’한참 고민하던 고은서는 결국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민시현이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민시후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박지연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그녀에겐 알리지 않기로 했다. 마침 박지연이 약을 가지러 나간 틈을 타, 고은서는 외투를 걸치고 병실 밖으로 조용히 나섰다.그런데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두 사람이 보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경호원인가?’‘단순한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뿐인데 대체 왜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거지?’‘혹시 민시현 씨가 사람을 붙여서 나를 감시하는 걸까? 시후 씨를 찾으러 가지 못하게?’고은서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경호원들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무전으로 누군가에게 보고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연이 급히 달려왔다. “은서야, 너 왜 나왔어?”고은서가 문틀을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 경호원들은 대체 뭐야?”박지연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별거 아니야. 승재 씨가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붙여 둔 거야.”‘단순한 사고였을 뿐인데 이렇게까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