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도 절친한 친구로서 초대 명단에 포함되었다.저녁 무렵, 육현석이 차를 몰고 그녀들을 데리러 왔다.평소보다 더 격식 있는 차림을 한 육현석을 보고 고은서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육현석, 안 지 꽤 오래됐는데 이렇게 정식적인 복장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육현석은 박지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어쨌든 여자 친구의 친구를 처음 만나는 자리니까 이미지 신경 써서 좋은 인상 남겨야지.”고은서는 이전까지 육현석이 놀고먹는 것만 좋아하고 일에 관심 없는 부유한 집 자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곽승재와 사이가 좋았기에 전생에 그녀는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지만 육현석은 항상 그녀를 피했다.그러나 환생하고 나서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자 오히려 육현석이 그녀와 곽승재의 사이를 돕기 위해 많은 조언을 해줬다.그래서 고은서에게 육현석은 EQ가 뛰어나고 여성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하지만 육현석이 박지연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자신이 편견이 있었음을 느꼈다.육현석은 박지연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의 모든 행동은 EQ가 아닌 마음을 따른 결과였다.“너는 항상 멋졌어. 아름 언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박지연이 육현석을 위로했다.“지연아, 너도 항상 이뻐.”육현석도 칭찬으로 답했다.“그만 좀 해! 여기 아직 사람 있잖아.”고은서가 닭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난 그냥 혼자 운전해서 갈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다가 정말 닭이 되겠어.”박지연이 가볍게 헛기침했다.“그만하고 같이 가자.”육현석이 신사답게 두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아가씨들, 타시죠.”도아름과의 약속 장소는 해성에서 특색있는 한식당이었다.도착 후 박지연은 도아름에게 정식으로 육현석을 소개했다.육현석은 예의 바르게 도아름과 악수하며 선물을 건넸다.“나는? 왜 나는 선물이 없어?”박지연이 얼른 육현석을 감쌌다.“두 사람은 자주 만나면서 무슨 선물이야.”고은서가 불만을 터트렸다.“박지연 씨, 지금
곽 대표라는 호칭을 들은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룸 밖에서 매니저처럼 차려입은 남자가 곽승재를 예의 있게 안내하고 있었다.곽승재는 검은색 수제 정장을 입고 안에는 간단한 흰 셔츠를 매치해 섬세하고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곽승재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고은서는 지난밤 그에게 손을 댄 일을 떠올리며 시선을 피했다.“승재 형?”육현석도 곽승재를 발견하고 꽤 놀란 듯 그를 불렀다.곽승재는 육현석을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물었다.“너희들이 왜 여기 있어?”“지연이 친구들 만나러 왔어. 형도 아는 사람일걸? 도아름 씨라고.”육현석이 도아름을 소개했다.고가승재는 그제야 박지연과 도아름을 바라보며 예의 있게 인사했다.“지연 씨, 도 대표님.”박지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도아름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곽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식사하실래요?”도아름이 곽승재를 초대했다.“그래. 형. 어차피 모르는 사람도 없고 같이 먹자.”육현석도 맞장구를 쳤다.곽승재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는 고은서에게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답했다.“됐어. 고객과 약속이 있어서.”말을 마친 곽승재는 매니저의 안내를 받으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지연아, 은서야. 나 정말 형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도 형이 여기 고객 만나러 올 줄은 몰랐다고.”곽승재가 자리를 뜨자 육현석은 곧바로 해명했다.“정말?”박지연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육현석은 진지하게 답했다.“정말이야. 너랑 은서가 승재 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그런데 왜 굳이 일부러 불러서 분위기를 흐리겠어?”고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박지연이 답했다.“그래. 이번엔 믿어 줄게.”“걱정하지 마, 지연아. 네 허락 없이 먼저 승재 형을 부르는 일은 없을 거야.”육현석이 맹세하자 박지연은 그의 태도에 만족해하며 답했다.“우리도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백유미가 먼저 자살 시도를 하고 곽승재는 그 후에 수술을 받았는데 그런 졸렬한 변명이 통할 거로 생각하나?”박지연은 아무렴 믿지 않을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육현석이 머쓱한지 코를 만지며 답했다.“승재 형 그 얘기 할 때 꽤 슬퍼 보였어. 난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정말 친동생보다 더 친한 사이네.”육현석과 박지연은 티격태격 말다툼을 시작했고 그 사이 도아름은 생각에 잠겨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도아름은 T 국에서 고은서가 겪었던 일과 백유미의 몇몇 추문 그리고 그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은서야, 괜찮아?”도아름은 고은서가 슬퍼하는 줄 알고 걱정스레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곽 대표가 일부러 너를 슬프게 하려 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 그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은서야, 화해를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야. 난 네가 막다른 길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긍정적으로 앞을 바라보면 돼.”고은서가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저도 알아요.”전생에 곽승재에게 자신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상관없었다.하지만 그가 싸늘한 말투로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말한 건 사실이었고 그녀도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아름 언니, 저 회사 차리면 주주로 들어오실래요?”도아름은 흔쾌히 승낙했다.“우리 명운을 알아보고 투자했으니 나도 참여해야지.”“나도 참여하게 해 줘!”육현석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나도 할래. 난 그냥 주주로만 있을게. 경영이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그 정도로 날 믿어도 돼? 혹시 손해 보면 어쩌려고?”“그럴 리가! 난 네가 큰돈을 벌 거라는 예감이 들어!”“그럼 네 말대로 되길 빌게!”식사를 마친 후 고은서는 육현석에게 박지연을 데려다주라고 했고 그녀는 도아름과 함께 명운으로 가서 전문가들과 회사를 설립하는 일에 대해 간단
고준석은 고은서의 불쾌한 표정을 알아채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승재가 먼저 약속 잡고 나랑 바둑 두러 온 거야.”고은서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그 사람 집에 자주 와요?”‘전에는 이렇게 한가해 보이지 않더니...’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일주일에 한두 번은 와. 바쁘면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 나랑 바둑 두는 게 좋다며 굳이 오더라. 심지어 네가 싫어할까 봐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더라.”‘내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온다고?’고은서가 더 말하려는 순간 곽승재가 이미 집 안으로 들어섰다.곽승재는 그녀를 보고 약간 놀라는 듯했지만 곧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는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할아버지, 저 왔어요.”곽승재는 고준석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승재 왔니? 앉아라.”고준석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번에도 녹차로 줄까?”“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준석 옆 의자에 앉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할아버지, 저는 조향실에 좀 있다가 올게요.”“과일차 마시고 싶다며? 지금 아주머니가 준비하고 있어.”“준비되면 조향실로 가져다 달라고 해주세요.”고은서는 말을 마치고 거실을 떠났다.“애도 참.”고준석이 한숨을 내쉬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승재야, 은서 원래 저런 성격이니까 네가 이해해 줘.”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깊은 눈으로 고은서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고준석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 문제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은서의 마음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몫이지.’최근 곽승연을 위해 조향한 아로마 캔들의 효과는 괜찮은 편이었다. 기분도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인 터라 고은서는 이를 더 개선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두세 시간이 지나 있었고 어깨를 주무르며 거실로 돌아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떠나고 고준석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은
고은서는 조향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때로는 너무 늦어져 집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곽승재가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집 근처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은 작았다.나아가 고은서는 지난번 곽승재를 이유 없이 오해한 일이 떠올라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은서가 승낙하자 운전기사는 다시 곽승재를 설득하며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곽승재는 그제야 천천히 차에 올라탔고 차 안으로 밤공기와 담배 향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그는 고은서 옆에 앉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곽승재의 운전기사는 차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혁재는 바로 출발했고 차는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먼저 고은서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또한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 차가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지 동승한 것처럼 보였다.“지난번 민시후와 관련된 일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어. 오해해서 미안해.”복수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잘못도 제때 인정하는 것이 고은서의 원칙이었다.지난번 GS 그룹에서 그녀는 시시비비도 제대로 가리지 않고 곽승재를 비난했고 며칠 전 그가 찾아왔을 때도 오해하여 그에게 손찌검까지 했다.고은서의 충동임이 틀림없었다.그녀의 사과를 들은 곽승재는 살짝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현금 뭉치를 꺼냈다.“이거 받아.”지난번 M 국에서 노숙자에게 쫓기고 나서 고은서는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데 익숙해졌고 마침 쓸모가 생겼다.곽승재는 그녀가 내민 돈을 보고 눈빛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치료비에 대한 보상이야.”그녀는 곽승재를 몇 번이나 때렸고 비록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이라도 발라야 했을 테니 보상으로 돈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곽승재의 차분했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은서, 이렇게 대충 넘어가려고?”그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와 서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니면?”고은서는
민시후를 본 고은서는 약간 놀랐다.‘북성으로 가서 오늘 해성에 오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생각에 잠겨 있을 사이 민시후는 이미 그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그리고 그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보았다.민시후의 얼굴에 뚜렷한 불쾌감이 떠올랐다.“곽 대표, 왜 어디나 다 당신이 있는 걸까?”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그 말은 그대로 돌려줘야겠는데?”“곽 대표, 지나간 버스는 다시 잡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민시후는 곽승재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며 말했다.“은서에게 잘해줬다면 전 남편이 될 리가 없었겠지?”곽승재는 그 말에 화가 난 듯 얼굴이 굳어졌고 차가운 눈동자에는 분노가 서렸다.“늦었어. 돌아가.”고은서는 두 사람이 또 다툴까 걱정되어 곽승재에게 한마디 하고는 차 문을 닫으며 이혁재에게 말했다.“아저씨, 출발해 주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곽승재는 차창 너머로 나란히 서 있는 고은서와 민시후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고 그 광경에 눈이 시려왔다.어쩌면 눈뿐만 아니라 마음도 시려지는 듯했다.그는 당장 차에서 내려 고은서를 안아 들고 예원 별장으로 데려가 다시는 민시후와 못 만나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고은서가 자신을 더 미워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차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셔츠 목 부분의 단추를 풀었지만 여전히 숨이 막혀온 그는 외투를 벗으려다 포켓에 든 돈을 건드리게 되었다.문득 고은서가 치료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건넬 때의 냉랭한 표정이 떠올랐다.마치 남을 대하듯 선을 긋는듯한 모습이었다.고은서도 그가 원하는 것이 돈도 치료비도 아닌 그녀의 미소 혹은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민시후를 도와 진실을 밝힌 것도 자신이 그렇게 비열하지 않다는 것을 고은서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서 그의 이미지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듯했다.곽승
“알고 있어.”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은서야, 형이 널 찾아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리고 예전부터 너와 내 관계를 오해하도록 내버렸던 것도 내 잘못이야. 그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너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졌어. 모든 게 내 경솔함에서 비롯된 거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널 힘들게 한 점 진심으로 미안해. 우리 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너에게 다시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게. 하지만 은서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괜찮아. 그렇지만 제발 나를 네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진 말아줘.”민시후의 진지한 표정과 간절함이 섞인 목소리에 고은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우리 아직 친구잖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널 어떻게 지워.”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답했다.그 말을 들은 민시후도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부람스러워할까 봐 그런 거야. 차라리 안 보면 편할까 해서.”하지만 그들의 가벼운 대화는 결국 억지로 만들어낸 분위기에 불과했고 대화가 끝난 후에도 분위기는 가벼워지지 않았다.결국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이는 고은서가 민시후와 알고 지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두 사람은 항상 서로 투덕거리거나 웃고 떠들기에 바빴는데 지금의 침묵은 고은서를 어색하게 만들었다.“맞다. 여시은 씨가 너한테 밥 사겠대. 지난번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고은서는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민시후가 고개를 저었다.“여시은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지난번 일은 민시현이 꾸민 일이야.”고은서가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 민시후가 물었다.“이미 알고 있었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곽승재를 탓했던 일과 곽승재가 이를 조사했던 사실을 민시후에게 이야기했다.민시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차의 머리 받침에 기대며 약간 자조적으로 말했다.“나보다 더 철저히 조사했네. 나는 송민준까지만 알아냈지 민시현까지는 못 알아냈어. 은서야, 네가 날 너무 좋아하지 않는
온승준은 등산을 좋아하는 병원 주임의 권유로 산에 오르게 되었다.원래는 참여할 마음이 없었지만 주임의 무심한 한마디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온 선생, 맨날 그렇게 무뚝뚝하게 있으면 안 돼요. 가끔 바람도 쐬고 그래야지. 안 그러면 누가 그런 성격 좋아하겠어요.”온승준이 박지연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일은 병원 내에서 이미 퍼져 있었고 주임 역시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그의 농담 같은 말은 온승준으로 하여금 박지연을 떠올리게 했다.이전 박지연은 그에게 너무 무뚝뚝하다고 가끔 함께 밖으로 나가자고 했던 적도 있었다.L 국에 있을 때는 그녀와 함께 몇 번 외출했었는데 당시 박지연은 그 시간을 무척 즐거워하며 허니문 여행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결국 온승준은 주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러나 산 정상에 오르자마자 박지연이 한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그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부드럽고도 절제된 모습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태양은 이미 떠올라 있었고 산을 오르느라 땀범벅이 되었음에도 온승준은 그 장면을 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온승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키스를 마친 두 사람은 떨어졌고 박지연의 얼굴은 발그레해져 있었다.그녀의 눈은 부끄러움과 기쁨으로 반짝였고 온 신경은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남자 역시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야에는 오직 서로만이 존재하는 듯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온승준 같은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 사이에 넘치는 사랑이 주변의 모든 것을 그림자처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온승준은 자신이 어떻게 그곳을 떠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저 다리가 납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기계적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을 뿐이었다....다음 날 박지연이 출근했을 때 한 간호사가 그녀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온 선생님 어제 사직서 제출했대요. 국경 없는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