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고 그의 표정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여자는 얼굴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훌쩍이면서 말했다.“민 도련님, 저 정말 억울해요. 오늘 도련님한테 술도 권한 적이 없는데 제가 무슨 약을 먹였다는 거예요. 저는 도련님께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기에 부축만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누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임지기 싫으시면 저도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갈게요...”여자는 말하면서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는데 그 때문에 목에 있는 이빨 자국이 더 선명히 드러났다.마치 억울하게 괴롭힘이라도 당한 듯한 모습과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까지 아마 민시후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이미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책임?”그러나 민시후는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 목적으로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였어?”그는 말하면서 냉소를 흘렸다.여자는 계속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은 그저 친구랑 함께 온 거라며 우연하게 그를 만난 거라고 목적을 품고 그에게 고의로 접근한 게 아니라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민 도련님, 제가 도련님처럼 출중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를 좋아하는 남자도 적지 않게 있는데 제가 왜 이런 모험을 하겠어요.”여자가 통곡하면서 말했다.“저는 걱정되는 마음에 방까지 부축해 준 것뿐인데 도련님께서 술김에 저를 아래에 깔고 제 옷을 찢었잖아요.”“닥쳐!”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정녕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민시후는 고은서가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의 흉악한 모습에 여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훌쩍이면서 불쌍한 척했다.이내 하인이 깨끗한 새 옷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민시후는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하인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방 안에 여자한테 다 건네주었다.“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민시후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말했다.그는 카드 게임을
“죽고 싶으면 곱게 죽지, 투신자살은 왜 한대?”혐오감이 잔뜩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들 곱게 죽고 싶지 않...”고은서는 문득 곽승재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그녀가 대체 언제 투신자살했단 말이지?“사모님, 드디어 깼군요.”이때, 도우미 이미숙이 물과 약을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머리가 아프시죠? 의사 선생님께서 가벼운 뇌진탕 증상이 있다고 해서 약 처방해주셨는데 지금 드실래요?”고은서는 널찍한 침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숙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까먹었다.실내 인테리어를 봐서는 예전의 곽씨 일가 별장 같았다.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2년이 넘도록 발길이 끓긴 곳이지 않은가?설마 곽승재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단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칼로 심장을 찌른 이상 설령 살아있더라도 수술실에 실려 갔을 테니까.고은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가슴을 확인해봤는데 멀쩡하기만 했다.그리고 머리와 손목에는 의료용 거즈가 둘둘 감겨 있었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나중에 투신자살하고 싶으면 더 높은 곳에 올라가. 고작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으니까.”싸늘한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방을 나섰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기 몸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2년 넘게 정신병원에 갇혀 있으면서 안색은 이미 초췌하다 못해 창백했고, 살이 쏙 빠져 장작처럼 삐쩍 말랐지만 지금은 피부가 뽀얗고 매끈하니 탄력까지 넘쳤다.몸과 팔뚝에도 간병인과 환자들 때문에 난 상처와 멍을 찾아볼 수 없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화가 난 나머지 말을 좀 심하게 했을 뿐이에요.”이미숙은 그녀가 상처받은 줄 알고 조심조심 위로했다.“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이따가 도련님과 잘 얘기...”“아줌마! 오늘 며칠이죠?”고은서는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이미숙의 말을 끊었다.
"고은서, 이제 그만해! 대체 언제까지 소란 피울 거야?”곽승재가 버럭 화를 내며 타박하자 고은서는 말없이 냉소를 지었다.자기 와이프를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남보다 더 못할 수 있단 말인가?“승재야, 화내지 마.”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유미가 먼저 말을 꺼내더니 설명을 보탰다.“은서 씨, 승재가 오늘 내 생일 파티에 참여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야. 사실 우리 아빠가 오랜만에 보고 싶다고 해서 가볍게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집으로 초대했는데 이렇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어. 게다가 은서 씨가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걸려 서둘러 해명하러 달려왔거든. 다 내 탓이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사과하는 백유미의 모습은 진정성이 가득했다.고은서는 3년 전에도 백유미가 집까지 찾아와서 똑같은 변명을 했던 거로 기억했다.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침실이었다.당시 백유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란히 서 있는 선남선녀를 보자 열이 확 올랐다.이내 악을 쓰며 백유미에게 꺼지라고 했고, 탁자에 놓인 꽃병을 집어던지기도 했다.꽃병에 머리를 부딪힌 백유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곽승재는 노발대발하면서 곧바로 백유미를 안고 병원으로 데려가 몇 날 며칠이나 돌봐주었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화를 돋우는 말이었지만, 이제 고은서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심지어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짓는 여유까지 되찾았다.“유미 씨, 멀리서 해명하러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애썼네. 나 화 안 났어. 아버님께서 승재를 식사에 초대하셨다며? 얼른 가 봐. 연장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백유미는 고은서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살짝 당황했다.곽승재도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상황이란 말이지?자신에게 혼났는데 울고불고 떠들기는커녕 백유미와 밥 먹으러 가라고 흔쾌히 보내주기까지 하다니?분명 2시간 전만
그녀를 가장 아끼는 분이지만, 전생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반드시 곁에서 효도하여 외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은서는 몸이 만신창이라 당분간 외할아버지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결국 설렘과 간절함을 애써 억누르고 며칠 후에 찾아뵙기로 약속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고은서는 테라스에 앉아 지난 일들을 회상했다.18살이 되던 해, 사랑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사랑에 빠진 소녀는 체면 불고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남자에게 대시했지만, 끝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대학 졸업할 때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곽승재의 할머니 전미자가 둘이 혼인신고 하도록 적극 추진한 덕분에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비록 곽승재는 대놓고 그녀를 싫어했지만, 언젠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는 이름다운 환상을 줄곧 품고 있었다.결혼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나자 백유미가 귀국해서 곽승재의 회사에 입사했다.두 사람 사이의 남다른 인연은 그녀에게 어쩌면 곽승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결국 점점 초조해지면서 떼를 부리기 시작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확인받고 싶었다.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투신자살로 협박하는 바람에 곽승재과 백유미의 사이는 갈수록 돈독해졌고, 곽승재가 집에 돌아오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절망에 빠진 그녀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미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곽승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출국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하지만 출국 전날, 뜻하지 않게 집에 강도가 들어 불까지 지핀 탓에 백유미는 자칫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 심지어 범인을 붙잡았는데 다름 아닌 그녀가 시켰다고 딱 잡아뗐다.이 사건은 곽승재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입이 아프게 변명해봤자 그녀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대쪽 같이 밀어붙였다.결국 외할아버지의 설득과 전미자의 도움을 받아 옥살이는 면하게 하겠다는 대답을 어렵게 받아냈다.그
고은서가 몸을 홱 돌렸다.“누가 버리라고 했죠? 당장 주워요.”프런트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어차피 대표님은 볼 생각도 없을 텐데 굳이 헛수고할 필요 있어요? 그동안 챙겨온 물건도 다 버리라고 했거든요.”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일하는 게 힘들까 봐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음식이며, 옷이며,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마저 가져다주었다.게다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처럼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은 진심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꼴이라니.어떻게 고작 프런트 직원이 감히 그녀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냐는 말이다.고은서는 싸늘한 시선으로 프런트 직원을 노려보았다.“대표님이 보든 말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물건을 함부로 버리죠? 얼른 챙기지 못해요?”여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알겠어요, 다시 챙기면 되잖아요. 목을 매서 겨우 대표님을 만난 주제에 어디서 사모님 행세를 하는 건지, 참.”“무슨 일이죠?”그녀에게 사과를 요구하려던 찰나,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내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의 비서 주민기가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주민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색 프리미엄 맞춤 정장 차림의 곽승재였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비록 안색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지만 비주얼 자체가 워낙 훈훈한지라 오히려 남성미를 한층 더 부각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그를 만날 때마다 고은서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이름을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입도 벙긋하기 싫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주민기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득의양양한 얼굴로 잽싸게 대답하는 예전과 달리 고은서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곽승재가 인정한 아내가 아니었다.남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처세술에 불과했으니까.“무슨 일이지?”고은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곽승재는 프런트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펜 이리 줘요.”“대표님, 거래처 분들이 계약 체결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주민기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는 GS 그룹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중요한 협력 건이었는데, 자칫 고은서 때문에 망칠 뻔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무시하고 주민기와 함께 급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곽승재!”고은서가 뒤쫓아갔다.“저 여자 끌어내.”곽승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고은서를 에워쌌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워커홀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바빠지기 시작하면 오늘은 이혼하기 글렀기에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내일 오전 9시, 구청에서 봐!”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떠났다.대체 간다는 건가? 만다는 건가?하루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곽승재라면 무조건 올 텐데...이런 생각에 고은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곧이어 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메일에 접속했다.메일함에는 여러 투자은행에서 보낸 채용 제의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처럼 바로 메일을 삭제하는 대신 하나씩 클릭해 봤다.그러나 전부 기한이 지난 메일로 심지어 난다긴다하는 금융권 엘리트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투자은행도 있었다.정작 그녀는 쓰레기 같은 곽승재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차지 않았는가?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지경이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서 절대로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삶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했다.몇 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서 내일이면 곽승재와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이내 PC 전원을 끄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으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다.한창 열심히 짐을 싸고 있을 때 이미숙이 걸어 들어왔다.“사모님, 짐을 왜 싸는 거죠? 여행 가시게요?”이미숙은 곽승재가 임시 고용한 도우미로 혹시라도 두 사람의 상황을 전미자에게 보고하는
“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괜찮아.”고은서가 거절했다.“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푹!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이제 네 차례야.”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디 가!”고운서가 버럭 외쳤다.“사인 안 해?”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네가 꾸민 짓이지?”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고은서, 우리 할
민시후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고 그의 표정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여자는 얼굴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훌쩍이면서 말했다.“민 도련님, 저 정말 억울해요. 오늘 도련님한테 술도 권한 적이 없는데 제가 무슨 약을 먹였다는 거예요. 저는 도련님께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기에 부축만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누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임지기 싫으시면 저도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갈게요...”여자는 말하면서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는데 그 때문에 목에 있는 이빨 자국이 더 선명히 드러났다.마치 억울하게 괴롭힘이라도 당한 듯한 모습과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까지 아마 민시후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이미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책임?”그러나 민시후는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 목적으로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였어?”그는 말하면서 냉소를 흘렸다.여자는 계속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은 그저 친구랑 함께 온 거라며 우연하게 그를 만난 거라고 목적을 품고 그에게 고의로 접근한 게 아니라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민 도련님, 제가 도련님처럼 출중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를 좋아하는 남자도 적지 않게 있는데 제가 왜 이런 모험을 하겠어요.”여자가 통곡하면서 말했다.“저는 걱정되는 마음에 방까지 부축해 준 것뿐인데 도련님께서 술김에 저를 아래에 깔고 제 옷을 찢었잖아요.”“닥쳐!”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정녕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민시후는 고은서가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의 흉악한 모습에 여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훌쩍이면서 불쌍한 척했다.이내 하인이 깨끗한 새 옷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민시후는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하인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방 안에 여자한테 다 건네주었다.“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민시후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말했다.그는 카드 게임을
여자의 머리는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도 거의 지워져 있었으며 목에는 누군가에게 물린 듯한 이빨 자국이 있었다.민시후는 술에 취한 탓인지 미간을 어루만지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그의 상의는 이미 사라졌고 입술은 여자가 바른 립스틱과 똑같은 색을 띠고 있었고 가슴 쪽에는 손톱에 할퀸 자국들로 가득했다.여자가 이불 전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리저리 뒤엉킨 침대 시트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의 드레스, 섹시한 속옷, 그리고 민시후의 셔츠와 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여자의 드레스와 속옷은 누군가가 강제로 벗긴 듯 볼품없이 찢겨져 있었는데 현장 상황을 보아서는 아주 격렬한 일이 발생한 듯했다.시간이 늦어서 많은 손님들이 돌아가긴 했으나 방금전 비명소리를 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그들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서로 놀라움을 머금지 못했는데 심지어 흥분해 하며 폰을 꺼내 사진 찍으려는 사람도 있었다.여시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한테 손님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라고 지시하면서 자신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올려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체구는 작았으나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다.다들 호기심이 만발하긴 했으나 집주인의 말을 따르면서 고분고분 아래로 내려갔다.수군거리는 소리와 여자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민시후는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고은서와 놀라운 기색을 띤 여시은이었다.이어 그는 자신이 알몸으로 흐느끼고 있는 여자 옆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민시후는 당황해하며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옷 입고 나와. 밖에서 기다릴게.”고은서는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은서 씨, 괜찮아요? 다 오해일 거예요. 시후 씨가 은서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절대 다른 여자랑 저런 일을 할 리가 없어요.”여시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위안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시은도 더는
곽승연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곽승연은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촉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녀가 고은서가 자신을 자주 보러 못 오는 거 아니냐고 걱정한다는 건 민시후와 고은서의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는 걸 의미했다.고은서가 다른 남자와 남은 생을 약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그는 곽승연을 위안하고 있을 때 마침 주민기한테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곽 대표님, 해찬시에서 오토바이를 타면서 고준석 어르신을 치려고 했던 두 남자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기 이틀 전에 두 사람의 계좌로 불명의 거금이 이체된 걸 조사해냈습니다.”주민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런데 두 사람이 오토바이 경주 클럽 회원인 데다가 금액을 이체한 계좌도 클럽 계좌여서 제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조사해본 결과 오토바이 경주에 관심이 있는 사장 한 명이 두 사람에게 준 특별 상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장은 상금만 제공하고 계좌 이체는 클럽에 대신 맡긴 것 같습니다. 클럽에서 제공한 서류에 따라 더 자세히 조사해보았는데 북성 송씨 가문과 연관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곽승재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반 시간 후, 회사 사무실에서 봐.”“네, 대표님.”...파티는 점점 절정으로 달리고 있었다.술을 마시면서 사업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인 수다를 떠는 사람들도 있었고 함께 춤추면서 서로를 향한 호감을 표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민시후는 파티에 온 남자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가 카드 게임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는데 그는 고은서가 한창 바삐 보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고민 끝에 함께 게임하러 가기로 했다.반면 고은서는 거실에서 만난 여자들한테 향수에 관한 얘기를 해주고 있었다.진짜 향수에 관해 흥취가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서 그
여자는 블랙 튜브톱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녀린 허리와 힙업된 엉덩이, 그리고 풍만한 가슴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섹시하지만 속되어 보이지 않는 아주 요염한 여자였다.남자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쏠렸다.반면 민시후는 아주 냉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누구?”“민 도련님, 전에 저랑 자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셨잖아요. 벌써 저를 잊으신 거예요?”여자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내가 굳이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성가시게 굴지 말고 저리 가.”민시후는 그녀의 체면을 챙겨주는 대신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여자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더는 집착하지 않고 술잔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갔다.다들 이 작은 에피소드를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았다.여씨 집안의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새겨보면 거의 다 재벌가 출신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의 눈에 들려고 일부러 아는 척하면서 다가오는 여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는 고은서한테 다가가 직접 설명했다.“오해하지마. 나 진짜 저 여자랑 모르는 사이야.”“원래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기로 유명하잖아. 운전하다가도 갑자기 튀어나와 차에 치이면서까지도 네 눈에 들려고 하는 여자들이 얼만데. 게다가 술집에 갈 때마다 이 여자 저 여자랑 함께 노는데 간혹 아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지. 나 때문에 일부러 모른 척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일부러 그를 놀리려고 말했다.“진짜 모르는 여자야.”민시후가 조급해하며 설명했다.“전에도 그저 같이 앉아서 술만 마시다가 내보곤 했어.”고은서는 방금전 여자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아까 말한 거 못 들었어? 자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시곤 했다잖아. 그런데 기억 안 난다고?”민시후는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고은서 앞에서 이 여자 저 여자를 다 건들며 다녔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정말 기억 안 나.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전혀 기억나지도 않는다니까.”고은서는 긴장해 하는 민시후를 보면
곽승재는 자신이 다가가 보았자 방금전처럼 고은서의 기분만 망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방금전의 그녀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민시후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 곽승재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곤 했다.무대에서 내려온 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흥분 속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듯했다.“드럼을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내 바에도 밴드가 있는데 합류할 생각 없어? 시간 날 때면 가서 드럼 치면서 놀면 좋을 것 같은데.”민시후가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면서 말했다.“혹시 전에 경호원들을 데리고 와서 나한테 혼쭐내주겠다고 하던 바를 말하는 거야?”“...”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뒤끝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당시에 곽승재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 날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었어? 설마 진짜 날 납치해서 감금시킬 생각이었어?”민시후는 저도 모르게 찔렸다.“그럴 리가. 나처럼 착한 시민을 본 적 있어? 난 불법적인 일은 안 한다고. 기껏해야 겁만 주고 말겠지.”“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한테 겁을 준 거야?”고은서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그런 눈길로 나 보지마. 나 다른 사람 괴롭히고 다니는 양아치 아니야.”민시후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마침 판주에서 서인수를 처리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나랑 합작하겠다고 큰소리치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어. 게다가 지금 밴드 얘기를 하고 있잖아. 왜 갑자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을 따지는 거야.”사실 고은서는 일부러 민시후를 난감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그저 갑자기 억울해서 이유라도 듣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것이었다.그러나 긴장해 하면서도 후회하는 그의 반응을 보고 나니 또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아졌다.“밴드는 됐어. 음악 하고 싶다는 헛된 꿈을 꿀 나이는 이미 지났어. 지금은 그저 소소하게 큰돈만 벌고 싶거든.”“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나이가 엄청 많은 줄 알
“마실 것 가져다드릴게요.”여시은은 눈치 있게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었다.“안 추워? 숄이라도 가져다줄까?”곽승재가 고은서의 얇은 옷차림을 보고 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의외였다.곽승재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갑자기 그가 자신을 향해 춥냐고 물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낮에는 비교적 따뜻해서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됐다.해가 진 후에는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긴 했으나 추울 정도는 또 아니었다.“필요 없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사적으로 여시은 씨와 만난 적이 없어. 날 초대할 때도 네가 온다고 해서 받아들인 거야.”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고은서가 담담하게 답했다.곽승재가 입술을 달싹이면서 무언갈 더 말하려고 할 때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여기 네가 좋아하는 거 있어.”고은서는 이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알겠어. 금방 갈게.”그러자 옆에 있던 곽승재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내가 데려온 거야.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다른 사람들 기분 망치지 말고.”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시후를 향해 걸어갔다.곽승재는 선 자리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기만 했다.“여긴 또 왜 온 거야. 기분 나쁘게.”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 고은서를 향해 투덜거렸다.“두 집안끼리 협력하는 사이잖아.”고은서가 그를 달랬다.“협력은 무슨. 널 보러 온 거겠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됐어. 그냥 무시해. 내가 좋아하는 물건 있다며? 뭔데?”“오늘 파티에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밴드가 왔는데 네가 좋아하는 드럼도 있대. 내가 이미 말해뒀으니까 조금 이따 올라가서 한 곡 쳐 봐.”민시후가 흥분해 하며 말했다.드럼 광팬으로서 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방금전 많은 여자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은 그녀는 더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었다.“고마워. 그런데 나 더는 눈에 띄는
고은서와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문밖을 향했다.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원에서 곽 대표님, 곽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와 그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여시은이 아닌 그가 진짜 집주인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어머, 곽 도련님께서 오셨나 봐. 시은 씨, 곧 곽 도련님이랑 약혼한다면서요. 오늘 특별히 시은 씨가 새집으로 이사 온 걸 축하해주러 왔나 봐요.”여자 한 명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당연하죠. 시은 씨가 이사했는데 약혼자로서 축하해주러 온 게 당연한 일이 아니에요? 나중에 두 분이 결혼하게 되면 우리랑 점점 멀어지는 건 아니죠?”다른 여자 한 명이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그러게요. 집안 배경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분 엄청 어울리지 않나요? 완전히 천생연분이라니까요.”나머지 사람들도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그만 하세요.”여시은이 난감해하며 말했다.“저랑 곽 대표님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다른 분들이 우연하게 저희 아빠랑 곽 회장님한테 왜 사돈 맺지 않냐고 하면서 장난 삶아 꺼낸 얘기일 뿐인데 곽 회장님께서 좋은 생각이라고 함께 장난치실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우리 아빤 그저 곽 대표님이 능력이 출중한 인재라고 칭찬만 했는데 날짜까지 잡으라면서 떠들어 대실 줄은 생각도 못 했다니까요.”여시은은 이내 고은서의 팔짱을 끼면서 말을 이어갔다.“그저 술자리에서 한 농담일 뿐인데 이렇게 소문이 퍼질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곽 대표님께서 좋아하시는 분은 여기 있는 은서 씨에요. 그러니까 다들 소문만 믿고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요.”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고은서한테로 쏠렸다.마치 다들 옷차림이 수수한 데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퍼퓸 제작까지 직접 도맡아 하는 여자가 곽승재의 마음을 빼앗아 간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고은서도 여시은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곽승재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줄은 생각 못 했다.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고은서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
고은서는 민시후의 얼굴을 밀어내면서 답했다.“아직 더 고찰이 필요해.”“들었죠. 이게 지금 저의 상황이에요.”민시후가 여시은을 향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시은이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곽 대표님이 많이 상심해 하겠네요.”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왜 아직도 내가 곽승재랑 재결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곽씨 가문이랑 사돈 관계를 맺기로 한 거 아니었어? 곽현수 태도를 보아서는 여씨 집안에서도 이미 동의한 것 같던데. 곽승재만 동의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딸바보 여재훈이 여시은을 강요할 일은 없을 테고. 그런데 여시은도 동의한 일이라면 지금 이 태도가 말이 안 되는데.’민시후는 고은서가 대답하기 난감해하는 줄 알고 콧방귀를 뀌면서 대신 대답해줬다.“곽승재 그 인간이 상심할 만도 하죠.”여시은과 별로 친하지 않았기에 굳이 그녀의 앞에서 세 사람 사이의 원한 관계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는지라 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면서 입을 다물라고 눈짓했다.“알겠어. 안 말하면 되잖아.”민시후는 이내 사그라들었다.“먼저 들어가서 돌아보고 있어. 나 시은 씨랑 얘기 좀 나누다가 갈게.”고은서가 민시후를 쫓았다.“정자에 민시후 씨랑 비슷한 남자 손님들이 계시는데 가서 얘기 나눠 보세요.”여시은이 웃으면서 민시후에게 길을 안내해줄 하인 한 명을 붙여주면서 말했다.“전에는 곽 대표님이 이길 줄 알았는데 민시후 씨가 은서 씨 마음에 더 들었나 봐요?”민시후가 하인 따라 떠난 후 여시은이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말을 걸었다.“인테리어가 너무 이뻐요.”고은서는 나긋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우리 아빠랑 제가 다 이런 고풍적인 인테리어를 좋아하는데 해성에 꽤 오래 머물 것 같아서 이 별장으로 선택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나중에 또 해성에 와도 지낼 곳이 있게 되잖아요.”여시은이 눈에 띄게 기뻐하면서 말했다.“그런데 오늘 집들이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제 친구들이랑 그 친구들
곽승연이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향해 언니라고 불렀다.고은서는 이곳에서 곽승연과 마주칠 줄을 생각 못 했는지 약간 의아해했다.곽승연 옆에는 서연정도 함께 있었는데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모습을 본 듯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곽승재와 민시후가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 그녀는 민시후를 따로 소개하지 않고 곽승연과 서연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어머니, 동물원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승연이가 아기 동물들을 보고싶어 해서 바람도 쐴 겸 온 거야.”서연정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오늘 친구랑 함께 와서 같이 돌진 못할 것 같아요. 여기 환경도 꽤 괜찮고 한데 승연이랑 좋은 시간 보내다 가세요.”고은서가 뒤돌아 민시후를 한 번 보고는 서연정에게 말했다.“알겠어.”서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승연아, 언니가 오늘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며칠 후에 향도 갖다 줄 겸 본가에 들를 건데 그때 다시 게임하면서 같이 놀자.”“응.”곽승연은 아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고은서는 며칠 전에 산 옥토끼를 꺼내 건네주면서 그녀를 달랬다.“이건 언니가 너한테 주려고 산 선물이야.”곽승연은 이내 옥토끼를 쥐고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좋아했다.“은서야, 얼른 친구한테로 가 봐. 승연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옆에 있던 서연정이 입을 열었다.“네.”고은서는 그제서야 민시후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나 아무 사람한테 화낼 정도로 옹졸한 사람이 아니야.”민시후가 찌뿌둥해 하며 말했다.‘설마 어머니랑 승연이한테 자신을 소개해주지 않았다고 삐진 거야?’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데 굳이 소개해줄 필요 있어?”“의미가 다르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소개시켜줄게.”“됐어. 나중에 신분이 더 레벨업 되면 널 데리고 직접 곽씨 가문에 방문하러 갈 거야.”고은서는 그 광경이 차마 상상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