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자신이 다가가 보았자 방금전처럼 고은서의 기분만 망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방금전의 그녀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민시후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 곽승재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곤 했다.무대에서 내려온 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흥분 속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듯했다.“드럼을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내 바에도 밴드가 있는데 합류할 생각 없어? 시간 날 때면 가서 드럼 치면서 놀면 좋을 것 같은데.”민시후가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면서 말했다.“혹시 전에 경호원들을 데리고 와서 나한테 혼쭐내주겠다고 하던 바를 말하는 거야?”“...”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뒤끝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당시에 곽승재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 날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었어? 설마 진짜 날 납치해서 감금시킬 생각이었어?”민시후는 저도 모르게 찔렸다.“그럴 리가. 나처럼 착한 시민을 본 적 있어? 난 불법적인 일은 안 한다고. 기껏해야 겁만 주고 말겠지.”“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한테 겁을 준 거야?”고은서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그런 눈길로 나 보지마. 나 다른 사람 괴롭히고 다니는 양아치 아니야.”민시후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마침 판주에서 서인수를 처리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나랑 합작하겠다고 큰소리치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어. 게다가 지금 밴드 얘기를 하고 있잖아. 왜 갑자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을 따지는 거야.”사실 고은서는 일부러 민시후를 난감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그저 갑자기 억울해서 이유라도 듣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것이었다.그러나 긴장해 하면서도 후회하는 그의 반응을 보고 나니 또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아졌다.“밴드는 됐어. 음악 하고 싶다는 헛된 꿈을 꿀 나이는 이미 지났어. 지금은 그저 소소하게 큰돈만 벌고 싶거든.”“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나이가 엄청 많은 줄 알
여자는 블랙 튜브톱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녀린 허리와 힙업된 엉덩이, 그리고 풍만한 가슴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섹시하지만 속되어 보이지 않는 아주 요염한 여자였다.남자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쏠렸다.반면 민시후는 아주 냉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누구?”“민 도련님, 전에 저랑 자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셨잖아요. 벌써 저를 잊으신 거예요?”여자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내가 굳이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성가시게 굴지 말고 저리 가.”민시후는 그녀의 체면을 챙겨주는 대신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여자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더는 집착하지 않고 술잔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갔다.다들 이 작은 에피소드를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았다.여씨 집안의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새겨보면 거의 다 재벌가 출신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의 눈에 들려고 일부러 아는 척하면서 다가오는 여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는 고은서한테 다가가 직접 설명했다.“오해하지마. 나 진짜 저 여자랑 모르는 사이야.”“원래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기로 유명하잖아. 운전하다가도 갑자기 튀어나와 차에 치이면서까지도 네 눈에 들려고 하는 여자들이 얼만데. 게다가 술집에 갈 때마다 이 여자 저 여자랑 함께 노는데 간혹 아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지. 나 때문에 일부러 모른 척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일부러 그를 놀리려고 말했다.“진짜 모르는 여자야.”민시후가 조급해하며 설명했다.“전에도 그저 같이 앉아서 술만 마시다가 내보곤 했어.”고은서는 방금전 여자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아까 말한 거 못 들었어? 자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시곤 했다잖아. 그런데 기억 안 난다고?”민시후는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고은서 앞에서 이 여자 저 여자를 다 건들며 다녔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정말 기억 안 나.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전혀 기억나지도 않는다니까.”고은서는 긴장해 하는 민시후를 보면
곽승연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곽승연은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촉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녀가 고은서가 자신을 자주 보러 못 오는 거 아니냐고 걱정한다는 건 민시후와 고은서의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는 걸 의미했다.고은서가 다른 남자와 남은 생을 약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그는 곽승연을 위안하고 있을 때 마침 주민기한테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곽 대표님, 해찬시에서 오토바이를 타면서 고준석 어르신을 치려고 했던 두 남자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기 이틀 전에 두 사람의 계좌로 불명의 거금이 이체된 걸 조사해냈습니다.”주민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런데 두 사람이 오토바이 경주 클럽 회원인 데다가 금액을 이체한 계좌도 클럽 계좌여서 제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조사해본 결과 오토바이 경주에 관심이 있는 사장 한 명이 두 사람에게 준 특별 상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장은 상금만 제공하고 계좌 이체는 클럽에 대신 맡긴 것 같습니다. 클럽에서 제공한 서류에 따라 더 자세히 조사해보았는데 북성 송씨 가문과 연관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곽승재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반 시간 후, 회사 사무실에서 봐.”“네, 대표님.”...파티는 점점 절정으로 달리고 있었다.술을 마시면서 사업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인 수다를 떠는 사람들도 있었고 함께 춤추면서 서로를 향한 호감을 표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민시후는 파티에 온 남자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가 카드 게임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는데 그는 고은서가 한창 바삐 보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고민 끝에 함께 게임하러 가기로 했다.반면 고은서는 거실에서 만난 여자들한테 향수에 관한 얘기를 해주고 있었다.진짜 향수에 관해 흥취가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서 그
여자의 머리는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도 거의 지워져 있었으며 목에는 누군가에게 물린 듯한 이빨 자국이 있었다.민시후는 술에 취한 탓인지 미간을 어루만지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그의 상의는 이미 사라졌고 입술은 여자가 바른 립스틱과 똑같은 색을 띠고 있었고 가슴 쪽에는 손톱에 할퀸 자국들로 가득했다.여자가 이불 전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리저리 뒤엉킨 침대 시트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의 드레스, 섹시한 속옷, 그리고 민시후의 셔츠와 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여자의 드레스와 속옷은 누군가가 강제로 벗긴 듯 볼품없이 찢겨져 있었는데 현장 상황을 보아서는 아주 격렬한 일이 발생한 듯했다.시간이 늦어서 많은 손님들이 돌아가긴 했으나 방금전 비명소리를 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그들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서로 놀라움을 머금지 못했는데 심지어 흥분해 하며 폰을 꺼내 사진 찍으려는 사람도 있었다.여시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한테 손님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라고 지시하면서 자신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올려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체구는 작았으나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다.다들 호기심이 만발하긴 했으나 집주인의 말을 따르면서 고분고분 아래로 내려갔다.수군거리는 소리와 여자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민시후는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고은서와 놀라운 기색을 띤 여시은이었다.이어 그는 자신이 알몸으로 흐느끼고 있는 여자 옆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민시후는 당황해하며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옷 입고 나와. 밖에서 기다릴게.”고은서는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은서 씨, 괜찮아요? 다 오해일 거예요. 시후 씨가 은서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절대 다른 여자랑 저런 일을 할 리가 없어요.”여시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위안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시은도 더는
민시후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고 그의 표정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여자는 얼굴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훌쩍이면서 말했다.“민 도련님, 저 정말 억울해요. 오늘 도련님한테 술도 권한 적이 없는데 제가 무슨 약을 먹였다는 거예요. 저는 도련님께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기에 부축만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누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임지기 싫으시면 저도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갈게요...”여자는 말하면서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는데 그 때문에 목에 있는 이빨 자국이 더 선명히 드러났다.마치 억울하게 괴롭힘이라도 당한 듯한 모습과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까지 아마 민시후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이미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책임?”그러나 민시후는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 목적으로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였어?”그는 말하면서 냉소를 흘렸다.여자는 계속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은 그저 친구랑 함께 온 거라며 우연하게 그를 만난 거라고 목적을 품고 그에게 고의로 접근한 게 아니라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민 도련님, 제가 도련님처럼 출중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를 좋아하는 남자도 적지 않게 있는데 제가 왜 이런 모험을 하겠어요.”여자가 통곡하면서 말했다.“저는 걱정되는 마음에 방까지 부축해 준 것뿐인데 도련님께서 술김에 저를 아래에 깔고 제 옷을 찢었잖아요.”“닥쳐!”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정녕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민시후는 고은서가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의 흉악한 모습에 여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훌쩍이면서 불쌍한 척했다.이내 하인이 깨끗한 새 옷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민시후는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하인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방 안에 여자한테 다 건네주었다.“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민시후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말했다.그는 카드 게임을
민시후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았다.“은서야, 난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 너 먼저 돌아가 있어. 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둘게.”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가 일 처리를 재빠르게 했지만 이튿날 그에 관한 스캔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그와 여자가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여자는 그다지 이름 있진 않았지만 엄연한 연예계 사람이었고 또 민시후는 ZY그룹의 대표이자 북성 민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었기에 두 사람의 스캔들은 유독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곽승재는 육현석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부하의 사업보고를 들으면서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어제 집도 돌아가지 않고 회사에서 새벽까지 일했는데 아침에 주간 회의까지 여는 바람에 무척 피곤했다.전화를 받자마자 육현석의 흥분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 들었어?”“무슨 일?”곽승재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기 싫었는지라 지금이라도 전화를 뚝 끊고 싶었다.“민시후에 관한 일 있잖아. 어떤 여배우랑 잤다고 하던데.”육현석은 곽승재의 찐친으로서 예전부터 민시후를 원수처럼 여겨왔다.그래서 그는 민시후의 스캔들을 전해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곽승재에게 전화했던 것이다.“친구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여시은 씨 집들이 파티에서 그 여배우랑 술 마시고 같이 방에 들어가서 잤대. 그런데 하필 그 상황을 모르고 있던 하인이 실수로 방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거지.”육현석이 흥미진진해 하며 말했다.“두 사람이 발각되었을 때 알몸 상태로 있었대. 그리고 현장을 봐서는 아주 격렬하게 한 것 같다던데.”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어제 파티 현장에 반 시간 밖에 있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분명히 그에게 자신이 민시후를 데려온 것이라고 말했었다.‘두 사람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드럼도 치더니만 그 상황에서 민시후가 다른 여자랑
곽승재는 순간 주민기가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이혼하기 전에 한 번 찾아온 이후로 GS그룹에 찾아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호성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해준다는 걸 알고 감사 인사하러 온 건 아닐까요?”주민기는 내색하지 않고 아첨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요즘 종일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시는데 사모님을 보고 제발 기분 풀었으면. 대표님께서 기분이 좋으면 우리 직원들도 회사 생활이 그나마 편해지는데.’“사모님께서 몇 번이고 호성 경찰 측에 연락해 사건 조사 상황에 관해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 두 남자를 꼭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 조금 이따 사모님께서 물어보시면 다 조사하고 난 후에 모든 걸 알려드릴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지금까지 조사해낸 상황을 먼저 알려드릴 생각이신가요?”주민기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만약 미리 알려드릴 생각이면 사모님한테 보여줄 서류들을 다시 정리해 놓아야 하는데.’“아직 무슨 상황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다 조사하고 난 후에 알려주도록 하자.”“네, 알겠습니다.”주민기는 나가기 전에 한 마디 더 보탰다.“지금쯤 곧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실 것 같은데 커피 내갈까요?”‘사모님을 만나고 나면 피곤도 곧 풀릴 것 같은데 커피를 그만 마셔도 되지 않나?’그의 뜻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힐끗 쏘아보았다.그러나 곽승재는 그와 따지지 않고 신선한 과일을 준비해 오라고 말했다.주민기가 나간 후 곽승재는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있는 자세도 바르게 하면서 자신의 제일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이내 밖에서 고 매니저님이라고 부르는 주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은 사무실 안에 계십니다. 어제 밤새 일하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습니다.”주민기가 눈치 있게 한 마디 더 보탰다.고은서는 그를 향해 냉소를 흘리고는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어제저녁보다 더 캐쥬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위에는 간단한 흰색 티
고은서의 날카로운 지적에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그의 눈빛은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또 다른 할 말 있어?”곽승재는 평소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은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 봐. 나 바쁘니까.”고은서는 곽승재의 씁쓸한 눈빛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시후는 당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단 한 번도 뒤돌아 당신에 관한 험담을 한 적이 없어. 백유미가 정신병원에서 당했던 일도 민시후가 알려준 거야. 심지어 당신이 나 대신 화풀이 해주기 위해 범가온이 백유미를 때리는 걸 암암리에 동의했다고 분석까지 해줬어. 굳이 나한테 당신 미담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민시후는 당신처럼 수단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야. 당신보다 훨씬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야.”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사무실의 방음 효과가 꽤 좋긴 했으나 고은서가 들어가면서 문을 제대로 닫지 않는 바람에 밖에 있던 주민기는 모든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게 되었다.그는 고민 끝에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있는 고은서한테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고 매니저님, 대표님을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대표님은 어젯밤에 저랑 사무실에서 밤새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하면서 민 대표님에 관한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그러나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주민기 씨, 역시 곽승재가 가장 중용하는 직원답게 일 잘하시네요. 그런데 대신 설명해주지 않아도 돼요. 저도 보는 눈이 있어서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직접 볼 줄 알아요.”주민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디.사무실에 있던 곽승재는 또 한 번 가슴이 찢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지어 이미 산산조각이 나 피투성이 된 것 같았다....그날 오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시후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그녀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얼마 후, 민시후 대신 그의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비서
차가 본선으로 진입한 지 얼마 되지 갑자기 강하게 흔들리더니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뒤에서 고은서의 차를 박았다.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고은서는 순간 얼마 전에 민시후와 함께 겪었던 교통사고가 떠올랐다.‘이번에도 누가 날 해치려고 일부러 내 차를 박은 건가?’공포에 휩싸인 고은서는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고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언니?”고은혜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보면서 물었다.“왜 그래? 밖에 지금 누가 창을 두드리고 있어.”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차창 밖을 내다보니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남성 한 명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고은서는 떨리는 손을 애써 공제하며 차창을 내렸다.중년남성은 먼저 사과하고 이어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를 피하려다가 핸들을 급하게 돌리는 바람에 실수로 고은서의 차를 박았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을 보태었다.아직 경각심이 풀리지 않은 고은서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중년남성한테 나중에 배상금액이 나오면 연락하겠다고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길 곳곳마다 감시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에 중년남성이 이후에 책임을 회피하려고 해도 불가능했기에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중년남성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연락처를 건네주면서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아직도 긴장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고은서는 백미러를 통해 상대 차량이 시동을 거는 걸 보고 있었다.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차가 고은서의 차 옆에 멈춰 섰다.이내 기사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아가씨, 우리 대표님께서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십니다.”고개를 돌려보니 뒷좌석에는 아주 익숙한 사람 한 명이 앉아 있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송민준이었다.목적지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금방 일을 꺼내고 나오는 길인지 그는 아주 깔끔하게 블랙 정장과 흰색 셔츠를 차려입고 있었다.송민준도 그녀를 보고 약간 의아해했다.그는 이내 온화한 미소를 띠고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 씨, 이렇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고은서가 이어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말하자 안에 있던 오미나는 머뭇거리다가 끝내는 문을 열어줬다.문이 열리자 삼십 대 좌우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고은서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오버사이즈 옷을 입고 있었고 단은숙과 비겼을 때 외모가 너무 눈에 띄게 출중하진 않았지만 아주 아련한 상을 하고 있었다.또 단은숙처럼 기가 세가 총명해 보이진 않았으나 연약하면서 강인한 아주 전통적인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엔 아직도 손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고은서와 고은혜를 보고도 욕설을 퍼붓거나 냉대하는 대신 겁에 질린 듯 문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제야 왜 고국성이 이 여자한테만 무방비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너무 공격성이 없는 외모 때문에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고국성과 어울리는 면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은서가 오미나를 관찰하고 있을 때 고은혜도 똑같이 그 여자를 관찰하고 있었다.방금 집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지금 자신의 엄마보다 훨씬 젊고 기품이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당장이라도 덮쳐들어 한 대 때리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그녀의 분노를 느낀 오미나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쌌다.덕분에 고은혜의 분노가 세게 들끓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고은서가 진정하라고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오미나 씨,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고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미나는 두 사람을 힐끔 보더니 들어오라고 손짓했다.“들어오세요.”고은서는 소파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오미나 씨, 우선 우리 삼촌을 대신해 사과드리죠. 어떻든 이 일은 우리 삼촌 책임이니까요.”여자는 전혀 꿀리지 않고 답했다.“국성 씨 탓이 아니에요. 누구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치 못했으니까요.”“예상치 못한 일인 걸 알면 우리 아빠랑 깨끗하게 끝냈어야죠. 왜 아이로 우리 아빠를 협박하는 건데요!”고은혜가 분
“그럴 시간에 조금 이따 그 여자랑 어떻게 얘기할지나 생각해 봐.”고은서가 고은혜에게 주의를 줬다.그 말을 들은 고은혜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언니, 나 이런 일 못 하는 거 알잖아. 그 여자랑도 언니가 나서서 얘기해야 할 걸. 난 그저 집에 있기 싫은 데다가 언니를 응원해주러 따라가는 것뿐이야.”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오미나를 만나러 가는 도중 유성준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그는 전화가 통하자마자 사과부터 했다.“은서야, 미안해. 요즘 너무 바빠서 미처 연락하지 못했어.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저씨한테 문제가 생긴 것 같던데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고마워요, 오빠. 저도 이미 들었어요.”함부로 다른 사람한테 말을 꺼낼만한 일은 아니지만 고은서에게 있어 유성준은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녀는 숨김없이 오늘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유성준은 약간 놀라긴 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내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없어?”“아직까진 괜찮은 데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빠한테 연락할게요. 오빠, 그보다 요즘 MQ에는 별다른 일 없죠? 업무 리스트 같은 것도 다 확인했을 텐데 문제가 될 만한 곳은 없었어요?”고은서가 진지하게 물었다.유성준은 긴장해 하는 고은서의 말에 약간 어리둥절하기 했으나 현재 상황 그대로 말했다.“MQ는 정상으로 운영되고 있어. 은서야, 그건 왜 갑자기 묻는 거야? 어디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어?”성아연이 저지른 세무 사건 때문에 유성준도 덩달아 긴장되었다.“아니에요. 그저 생각나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오빠, 요즘 MQ에 좀 더 많이 신경 써주세요. 삼촌 일이 좀 많이 복잡할 것 같아서요.”고은서가 유성준에게 부탁했다.“걱정하지마.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요즘 본가에 가지 않았다며?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 거야? 몸도 챙겨가면서 해.”고은서는 전에 있었던 교통사고에 관해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필경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할 수 있는지는 고은서도 보장할 수 없었다.그러나 MQ와 고씨 집안을 위해서 꼭 찾아가 그 여자가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알아내야만 했다.“해보지도 않고 결과가 어떨지 어떻게 알아.”고은혜도 약간 자신이 없긴 했지만 여전히 참지 않고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아빠, 지금 우리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를 놓아주기 아쉬워서 일부러 우릴 보내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딸의 날이 선 질문에 고국성은 뜻밖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비록 자신의 딸과 조카에게 이런 일 처리를 맡기는 게 창피하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막부득이 한 상황에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일이 해결될 수만 있다면 누가 나서든 상관없었다.고국성은 오미나의 연락처를 고은서에게 알려주었다.“삼촌, 숙모는 삼촌이 좀 달래 봐요. 될 수록이면 이 소식이 할아버지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끔 말이에요.”고은서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예전 같았으면 고국성은 고은서의 말에 피식거리며 대꾸하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철이 든 그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체 무슨 속셈인지 가서 얘기해 보고 나한테 알려줘. 그럼 내가 해결 대책을 세울게.”고국성이 이런 태도로 고은서와 말하는 건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이었다.전에는 항상 웃어른이라면서 그녀를 향한 불만을 토로하기 바빴다.“해결 대책이 있으면 그 여자가 집까지 찾아오지 않았겠죠.”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이내 고은서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언니, 가자.”고은서는 단은숙이 화장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고은혜랑 함께 주차장으로 갔다.아까까지만 해도 안절부절못하던 고은혜는 곁에 고은서가 있다는 것만으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안전감이 생겼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고은서라면 영문 없이 믿음이 갔다.“언니, 전에는 내가 언니를 상대로 듣기 싫은 소리를 많이 했는데 정말 미안해.”고은혜가 진지하게 사과하기 시작했다.“전에 형부의 관심을 끌기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고국성은 창피하긴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자초지종을 고은서에게 알려주었다.그와 오미나는 처음에는 확실히 사업 파트너로서만 연락하다가 나중에 그녀가 여러 새로운 업무를 소개해주면서 몇 번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있었다.그러다 어느 한 모임에서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오미나랑 같은 침대 위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그러나 오미나는 화를 내는 대신 두 사람 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일어난 일이라면서 한 번의 사고라 여기고 없던 일로 치자고 하면서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죄책감이 든 고국성은 그 후로 오미나에게 적지 않은 선물을 사줬는데 또 그 일이 단은숙에게 들키면서 고준석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었다.그 이후로 고국성은 오미나와의 만남 횟수를 줄였고 그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도 없었다.그러나 오미나가 갑자기 임신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고국성은 아이를 지우라고 오미나를 몇 번이고 달랬지만 그녀는 기어코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갑자기 오늘 단은숙을 찾아와 고국성을 자신에게 주면 안 되냐고 애원하기 시작했고 단은숙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의 뺨을 후갈리기 시작했는데 옆에서 싸움을 말리려던 고국성까지 봉변을 받게 된 것이었다.단은숙이 행여나 일을 크게 만들까 봐 걱정되었던 고국성은 오미나를 먼저 보내려고 했는데 이는 단은숙의 화를 더 돋우게 되었고 끝내는 참지 못하고 그의 몸에까지 손을 댔고 따라 화가 났던 고국성도 참다못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고 한다.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고은혜도 소란 소리에 깜짝 놀라 거실로 달려 나와 보니 이미 상황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고은서가 전화를 받고 달려왔다.“삼촌, 그래서 어쩔 생각이에요?”고국성이 아무리 실수로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그의 잘못이 분명했다.그는 두 여자에게 모두 상처를 준 사람이 되었다.고국성은 물려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그 아이를 남길 생각이
문은 제대로 닫혀 있지도 않았고 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집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소파 쿠션은 이리저리 땅에서 뒹굴고 있었고 카펫 위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찻잎들이 널브러져 있었다.티 테이블 위에 있는 꽃병도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꽃잎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원래는 생기가 넘쳤던 꽃들이 볼품이 없이 되었다.벽에도 물건 던진 탓에 긁힌 자국이 적지 않게 있었다.단은숙은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고 한쪽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까지 보였다.고국성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셔츠가 찢어질 정도로 구겨져 있었고 목에도 손톱에 긁힌 자국이 가득했고 유리잔에 맞았는지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반면 고은혜는 옆에 서서 무력하게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현장 상황을 봐서는 두 사람이 아주 심하게 다툰 듯했다.“언니, 왔어?”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부랴부랴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곧 대학 졸업을 앞둔 고은혜는 비록 성인이지만 어릴 적부터 단은숙이 엄격하게 단속하는 바람에 독립적 사고 능력이 비교적 부족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맞서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씩씩거리는 고국성과 단은숙을 보며 애써 침착하게 두 사람을 불렀다.“은서야, 마침 잘 왔어.”단은숙은 그녀를 고국성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네 삼촌한테 똑바로 물어봐. 이 나이에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했는지.”고국성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호통쳤다.“단은숙, 그만해.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제삼자고 나발이고 나한테 누명을 덮어씌울 생각하지 마.”“제삼자가 아닌데 당신 아이를 임신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단은숙은 그 여자를 떠올릴 때마다 들끓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국성에 덮쳐들면서 그를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고국성의 힘이 훨씬 강한 탓에 얼마 되지 않아 밀려났다.자신의 힘으로는 고국성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단은숙은 그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그래, 힘으론 나 혼
회사의 프로젝트는 아주 순리롭게 운행되고 있었고 고은서는 이 기회에 전체 직원들에게 밥 한 끼를 사주기로 했다.밥을 먹은 후 송민아는 먼저 돌아가서 쉬라고 고은서를 달랬다.“돈도 쉬면서 벌어야지. 얼른 돌아가서 쉬어.”그러나 고은서는 뜬금없이 그녀에게 민시후에 관해 물었다.“민시후는 이미 해외 병원으로 이송되었겠지? 잘 도착했대?”송민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네가 나를 통해 민시후 소식을 알려고 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분명히 민시후한테 두 사람 사이에 관해 말했는데 왜 전혀 믿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혹시 민시후한테 뭐라고 한 거야?”고은서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말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야. 이게 제일 좋은 결과야.”송민아는 더는 캐묻지 않고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M국으로 갔어. 시아 언니랑 시현 오빠도 같이 갔고. 그리고 전에 쓰던 폰이랑 번호도 다 바꿨다고 하던데 필요하면 내가 새로운 연락처를 알아 봐줄게.”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필요 없어.”...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자비하게 흘러갔다.고은서는 매일 회사에서 바삐 보냈고 그나마 보람찬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도아름의 명운주류도 상장에 성공했고 고은서가 전에 투자했던 이백억 되는 투자금도 열 배 가까이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제인 제약까지 잘 운행되고 있는 덕분에 고은서는 투자계에서 꽤 높은 명망을 얻게 되었다.그 어느 평범하게 느껴지던 하루, 고은서가 사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을 때 고은혜한테서 연락이 왔다.“언니, 큰일 났어!”고은혜는 평소와 달리 처음부터 그녀를 부르면서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고은서도 따라서 저도 모르게 긴장되었다.“왜 그래? 설마 할아버지가 편찮으시기라도 한 거야?”마침 전생에 이맘때쯤에 고준석이 다친 다리 때문에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이번 생엔 다리를 다치지 않아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다.그러나 고은혜 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졸여왔다.“할아버지는 괜찮아.”고은서는 고은혜의 말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호기심 때문에 물어본 거예요.”서연정은 고은서가 했던 말들을 돌이켜보면서 무언갈 깨달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은서야, 이번 사고 백씨 집안이랑 연관되어 있지? 그래서 혹시 승재 아빠가 지시한 건 아닐까 하고 조사해보았는데 하필 손문호가 현장에 나타나서 두 사람 사이에 관해 묻는 거지?”아니나 다를까 서연정의 추측이 맞았다.고은서도 부인하지 않았다.“곽승재랑 경찰 측에서 다 조사해보았는데 곽 회장님과는 연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확실히 그 일 때문에 묻는 건 맞아요.”백승엽한테 일이 생겼다는 건 서연정도 듣긴 했으나 별로 깊이 캐묻진 않았었다. 그러나 고은서가 그 일에 엮여 있을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던 것이다.서연정은 무언갈 고민하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승재 아빠가 일을 하면서 고집이 세고 독단적이긴 하지만 또 자기가 한 일을 부인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기도 하거든. 손문호에 관해서는 내가 왜 그날 경마장에 갔는지 한 번 물어볼게.”“물어보지 않으셔도 돼요. 저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저를 해치려 하는 사람은 아닐 거예요.”고은서가 단호하게 거절했다.“괜찮아. 의문이 있으면 해결해야지. 단도직입적으로 묻진 않을 거야.”서연정이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를 위안했다.“고마워요, 어머니.”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반감하면서 비난할 만도 한데 자신을 이렇게 믿어줄 줄은 몰랐던 고은서는 감동받는 일면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이어 서연정은 손문호한테 연락해 곽승연에 관해 한참 얘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요즘 바쁘냐고 물었다.“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을 너무 많이 받진 않았어. 그리고 요즘 힐링할 만한 곳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해성에 꽤 괜찮은 경마장이 있더라고. 얼마 전에 한 번 가봤는데 시간 되면 승연이를 데리고 가보지 않을래?”서연정은 웃으면서 승연이가 말을 타보겠다고 고집부릴까 봐 경마장은 잠시 안 가겠다고 사양했다.스피커 모드로 통화한 덕분에 고은서도 옆에
비록 너무 큰 연관이 없는 일이지만 사실을 파헤쳐 보고 싶었던 고은서는 서연정한테 오후에 병원 옆에 있는 도자기 공방에서 만나자고 연락했다.서연정도 아주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날 오후.서연정은 곽승연을 데리고 약속대로 도자기 공방에 나타났다.일주일 동안 못 본 탓인지 곽승연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기뻐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언니라고 불렀다.고은서도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승연아, 여기 도자기 만드는 체험도 할 수 있는데 언니를 위해 선물 하나 만들어주면 안 될까?”곽승연은 거절하지 않고 기분 좋게 도자기 체험을 하러 갔다.고은서는 이내 서연정을 데리고 옆에 있는 휴식실로 갔고 직원은 두 사람을 위해 물을 따라주고 나갔다.서연정은 얼굴이 창백한 고은서를 보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야, 왜 이리 초췌해 보여?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고은서는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사고가 좀 있었어요.”“사고라니? 크게 다쳤어?”서연정은 이내 무언갈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갔다.“승재도 네가 다친 걸 알고 있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요 며칠 저녁마다 저를 케어해 주러 오곤 했어요.”“요 며칠 승재가 엄청 바삐 보내는 것 같았는데 심지어 어머니 말로는 본가에도 가지 않아서 몇 번이고 오라고 불렀는데도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네가 다쳐서 그런 거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지.”서연정이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은서야, 다쳤으면 나한테 얘기해줬어야지. 그럼 나도 승연이를 데리고 널 보러 갔을 텐데.”“어머니한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게다가 지금은 다 나았어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답했다.“오늘은 무슨 일로 날 부른 거야?”“별일 아니에요. 그저 승연이도 볼 겸 어머니랑도 얘기 좀 나누려고요.”고은서가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서연정이 온화한 눈길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어색한 기색을 띠며 자신의 의문을 제기했다.“얼마 전에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