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 것 가져다드릴게요.”여시은은 눈치 있게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었다.“안 추워? 숄이라도 가져다줄까?”곽승재가 고은서의 얇은 옷차림을 보고 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의외였다.곽승재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갑자기 그가 자신을 향해 춥냐고 물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낮에는 비교적 따뜻해서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됐다.해가 진 후에는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긴 했으나 추울 정도는 또 아니었다.“필요 없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사적으로 여시은 씨와 만난 적이 없어. 날 초대할 때도 네가 온다고 해서 받아들인 거야.”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고은서가 담담하게 답했다.곽승재가 입술을 달싹이면서 무언갈 더 말하려고 할 때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여기 네가 좋아하는 거 있어.”고은서는 이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알겠어. 금방 갈게.”그러자 옆에 있던 곽승재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내가 데려온 거야.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다른 사람들 기분 망치지 말고.”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시후를 향해 걸어갔다.곽승재는 선 자리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기만 했다.“여긴 또 왜 온 거야. 기분 나쁘게.”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 고은서를 향해 투덜거렸다.“두 집안끼리 협력하는 사이잖아.”고은서가 그를 달랬다.“협력은 무슨. 널 보러 온 거겠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됐어. 그냥 무시해. 내가 좋아하는 물건 있다며? 뭔데?”“오늘 파티에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밴드가 왔는데 네가 좋아하는 드럼도 있대. 내가 이미 말해뒀으니까 조금 이따 올라가서 한 곡 쳐 봐.”민시후가 흥분해 하며 말했다.드럼 광팬으로서 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방금전 많은 여자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은 그녀는 더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었다.“고마워. 그런데 나 더는 눈에 띄는
곽승재는 자신이 다가가 보았자 방금전처럼 고은서의 기분만 망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방금전의 그녀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민시후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 곽승재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곤 했다.무대에서 내려온 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흥분 속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듯했다.“드럼을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내 바에도 밴드가 있는데 합류할 생각 없어? 시간 날 때면 가서 드럼 치면서 놀면 좋을 것 같은데.”민시후가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면서 말했다.“혹시 전에 경호원들을 데리고 와서 나한테 혼쭐내주겠다고 하던 바를 말하는 거야?”“...”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뒤끝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당시에 곽승재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 날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었어? 설마 진짜 날 납치해서 감금시킬 생각이었어?”민시후는 저도 모르게 찔렸다.“그럴 리가. 나처럼 착한 시민을 본 적 있어? 난 불법적인 일은 안 한다고. 기껏해야 겁만 주고 말겠지.”“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한테 겁을 준 거야?”고은서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그런 눈길로 나 보지마. 나 다른 사람 괴롭히고 다니는 양아치 아니야.”민시후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마침 판주에서 서인수를 처리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나랑 합작하겠다고 큰소리치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어. 게다가 지금 밴드 얘기를 하고 있잖아. 왜 갑자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을 따지는 거야.”사실 고은서는 일부러 민시후를 난감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그저 갑자기 억울해서 이유라도 듣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것이었다.그러나 긴장해 하면서도 후회하는 그의 반응을 보고 나니 또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아졌다.“밴드는 됐어. 음악 하고 싶다는 헛된 꿈을 꿀 나이는 이미 지났어. 지금은 그저 소소하게 큰돈만 벌고 싶거든.”“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나이가 엄청 많은 줄 알
여자는 블랙 튜브톱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녀린 허리와 힙업된 엉덩이, 그리고 풍만한 가슴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섹시하지만 속되어 보이지 않는 아주 요염한 여자였다.남자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쏠렸다.반면 민시후는 아주 냉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누구?”“민 도련님, 전에 저랑 자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셨잖아요. 벌써 저를 잊으신 거예요?”여자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내가 굳이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성가시게 굴지 말고 저리 가.”민시후는 그녀의 체면을 챙겨주는 대신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여자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더는 집착하지 않고 술잔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갔다.다들 이 작은 에피소드를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았다.여씨 집안의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새겨보면 거의 다 재벌가 출신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의 눈에 들려고 일부러 아는 척하면서 다가오는 여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는 고은서한테 다가가 직접 설명했다.“오해하지마. 나 진짜 저 여자랑 모르는 사이야.”“원래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기로 유명하잖아. 운전하다가도 갑자기 튀어나와 차에 치이면서까지도 네 눈에 들려고 하는 여자들이 얼만데. 게다가 술집에 갈 때마다 이 여자 저 여자랑 함께 노는데 간혹 아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지. 나 때문에 일부러 모른 척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일부러 그를 놀리려고 말했다.“진짜 모르는 여자야.”민시후가 조급해하며 설명했다.“전에도 그저 같이 앉아서 술만 마시다가 내보곤 했어.”고은서는 방금전 여자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아까 말한 거 못 들었어? 자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시곤 했다잖아. 그런데 기억 안 난다고?”민시후는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고은서 앞에서 이 여자 저 여자를 다 건들며 다녔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정말 기억 안 나.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전혀 기억나지도 않는다니까.”고은서는 긴장해 하는 민시후를 보면
곽승연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곽승연은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촉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녀가 고은서가 자신을 자주 보러 못 오는 거 아니냐고 걱정한다는 건 민시후와 고은서의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는 걸 의미했다.고은서가 다른 남자와 남은 생을 약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그는 곽승연을 위안하고 있을 때 마침 주민기한테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곽 대표님, 해찬시에서 오토바이를 타면서 고준석 어르신을 치려고 했던 두 남자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기 이틀 전에 두 사람의 계좌로 불명의 거금이 이체된 걸 조사해냈습니다.”주민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런데 두 사람이 오토바이 경주 클럽 회원인 데다가 금액을 이체한 계좌도 클럽 계좌여서 제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조사해본 결과 오토바이 경주에 관심이 있는 사장 한 명이 두 사람에게 준 특별 상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장은 상금만 제공하고 계좌 이체는 클럽에 대신 맡긴 것 같습니다. 클럽에서 제공한 서류에 따라 더 자세히 조사해보았는데 북성 송씨 가문과 연관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곽승재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반 시간 후, 회사 사무실에서 봐.”“네, 대표님.”...파티는 점점 절정으로 달리고 있었다.술을 마시면서 사업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인 수다를 떠는 사람들도 있었고 함께 춤추면서 서로를 향한 호감을 표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민시후는 파티에 온 남자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가 카드 게임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는데 그는 고은서가 한창 바삐 보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고민 끝에 함께 게임하러 가기로 했다.반면 고은서는 거실에서 만난 여자들한테 향수에 관한 얘기를 해주고 있었다.진짜 향수에 관해 흥취가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서 그
여자의 머리는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도 거의 지워져 있었으며 목에는 누군가에게 물린 듯한 이빨 자국이 있었다.민시후는 술에 취한 탓인지 미간을 어루만지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그의 상의는 이미 사라졌고 입술은 여자가 바른 립스틱과 똑같은 색을 띠고 있었고 가슴 쪽에는 손톱에 할퀸 자국들로 가득했다.여자가 이불 전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리저리 뒤엉킨 침대 시트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의 드레스, 섹시한 속옷, 그리고 민시후의 셔츠와 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여자의 드레스와 속옷은 누군가가 강제로 벗긴 듯 볼품없이 찢겨져 있었는데 현장 상황을 보아서는 아주 격렬한 일이 발생한 듯했다.시간이 늦어서 많은 손님들이 돌아가긴 했으나 방금전 비명소리를 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그들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서로 놀라움을 머금지 못했는데 심지어 흥분해 하며 폰을 꺼내 사진 찍으려는 사람도 있었다.여시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한테 손님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라고 지시하면서 자신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올려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체구는 작았으나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다.다들 호기심이 만발하긴 했으나 집주인의 말을 따르면서 고분고분 아래로 내려갔다.수군거리는 소리와 여자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민시후는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고은서와 놀라운 기색을 띤 여시은이었다.이어 그는 자신이 알몸으로 흐느끼고 있는 여자 옆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민시후는 당황해하며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옷 입고 나와. 밖에서 기다릴게.”고은서는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은서 씨, 괜찮아요? 다 오해일 거예요. 시후 씨가 은서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절대 다른 여자랑 저런 일을 할 리가 없어요.”여시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위안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시은도 더는
민시후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고 그의 표정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여자는 얼굴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훌쩍이면서 말했다.“민 도련님, 저 정말 억울해요. 오늘 도련님한테 술도 권한 적이 없는데 제가 무슨 약을 먹였다는 거예요. 저는 도련님께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기에 부축만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누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임지기 싫으시면 저도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갈게요...”여자는 말하면서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는데 그 때문에 목에 있는 이빨 자국이 더 선명히 드러났다.마치 억울하게 괴롭힘이라도 당한 듯한 모습과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까지 아마 민시후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이미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책임?”그러나 민시후는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 목적으로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였어?”그는 말하면서 냉소를 흘렸다.여자는 계속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은 그저 친구랑 함께 온 거라며 우연하게 그를 만난 거라고 목적을 품고 그에게 고의로 접근한 게 아니라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민 도련님, 제가 도련님처럼 출중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를 좋아하는 남자도 적지 않게 있는데 제가 왜 이런 모험을 하겠어요.”여자가 통곡하면서 말했다.“저는 걱정되는 마음에 방까지 부축해 준 것뿐인데 도련님께서 술김에 저를 아래에 깔고 제 옷을 찢었잖아요.”“닥쳐!”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정녕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민시후는 고은서가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의 흉악한 모습에 여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훌쩍이면서 불쌍한 척했다.이내 하인이 깨끗한 새 옷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민시후는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하인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방 안에 여자한테 다 건네주었다.“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민시후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말했다.그는 카드 게임을
민시후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았다.“은서야, 난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 너 먼저 돌아가 있어. 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둘게.”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가 일 처리를 재빠르게 했지만 이튿날 그에 관한 스캔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그와 여자가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여자는 그다지 이름 있진 않았지만 엄연한 연예계 사람이었고 또 민시후는 ZY그룹의 대표이자 북성 민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었기에 두 사람의 스캔들은 유독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곽승재는 육현석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부하의 사업보고를 들으면서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어제 집도 돌아가지 않고 회사에서 새벽까지 일했는데 아침에 주간 회의까지 여는 바람에 무척 피곤했다.전화를 받자마자 육현석의 흥분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 들었어?”“무슨 일?”곽승재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기 싫었는지라 지금이라도 전화를 뚝 끊고 싶었다.“민시후에 관한 일 있잖아. 어떤 여배우랑 잤다고 하던데.”육현석은 곽승재의 찐친으로서 예전부터 민시후를 원수처럼 여겨왔다.그래서 그는 민시후의 스캔들을 전해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곽승재에게 전화했던 것이다.“친구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여시은 씨 집들이 파티에서 그 여배우랑 술 마시고 같이 방에 들어가서 잤대. 그런데 하필 그 상황을 모르고 있던 하인이 실수로 방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거지.”육현석이 흥미진진해 하며 말했다.“두 사람이 발각되었을 때 알몸 상태로 있었대. 그리고 현장을 봐서는 아주 격렬하게 한 것 같다던데.”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어제 파티 현장에 반 시간 밖에 있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분명히 그에게 자신이 민시후를 데려온 것이라고 말했었다.‘두 사람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드럼도 치더니만 그 상황에서 민시후가 다른 여자랑
곽승재는 순간 주민기가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이혼하기 전에 한 번 찾아온 이후로 GS그룹에 찾아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호성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해준다는 걸 알고 감사 인사하러 온 건 아닐까요?”주민기는 내색하지 않고 아첨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요즘 종일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시는데 사모님을 보고 제발 기분 풀었으면. 대표님께서 기분이 좋으면 우리 직원들도 회사 생활이 그나마 편해지는데.’“사모님께서 몇 번이고 호성 경찰 측에 연락해 사건 조사 상황에 관해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 두 남자를 꼭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 조금 이따 사모님께서 물어보시면 다 조사하고 난 후에 모든 걸 알려드릴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지금까지 조사해낸 상황을 먼저 알려드릴 생각이신가요?”주민기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만약 미리 알려드릴 생각이면 사모님한테 보여줄 서류들을 다시 정리해 놓아야 하는데.’“아직 무슨 상황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다 조사하고 난 후에 알려주도록 하자.”“네, 알겠습니다.”주민기는 나가기 전에 한 마디 더 보탰다.“지금쯤 곧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실 것 같은데 커피 내갈까요?”‘사모님을 만나고 나면 피곤도 곧 풀릴 것 같은데 커피를 그만 마셔도 되지 않나?’그의 뜻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힐끗 쏘아보았다.그러나 곽승재는 그와 따지지 않고 신선한 과일을 준비해 오라고 말했다.주민기가 나간 후 곽승재는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있는 자세도 바르게 하면서 자신의 제일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이내 밖에서 고 매니저님이라고 부르는 주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은 사무실 안에 계십니다. 어제 밤새 일하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습니다.”주민기가 눈치 있게 한 마디 더 보탰다.고은서는 그를 향해 냉소를 흘리고는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어제저녁보다 더 캐쥬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위에는 간단한 흰색 티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