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대표님, 서인수는 정말 개자식이에요. 저를 압박해 대표님에게 부탁을 하게 만들기 위해 해외에 있는 아들까지 동원했어요. 서인수를 무시할 수는 있지만, 아들에게 걱정 끼치는 건 정말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실례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대표님을 부른 거예요.”곽승재는 병실을 잠시 훑어보았다. 그 안에서는 서인수가 깨어나 있었고, 의사가 검사하고 있었다.“곽 대표님, 곽 대표님... 컥!”서인수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보자마자 급격히 감정이 격해졌다.하지만 몸이 너무 약해서 병상에서 자칫하면 떨어질 뻔했다.의사들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서인수는 이를 무시하고 비틀거리며 곽승재 앞으로 다가가 애원했다.“곽 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의로 사모님에게 손을 대려던 게 아닙니다. 다 백유미가 시킨 겁니다!”경찰과 의사들이 서인수를 다시 병상으로 밀어 넣으며 그를 제지했다.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자, 도아름은 백유미가 서인수를 부추겼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은서도 알고 있었나요?”곽승재는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도아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제가 며칠 전에 서인수를 만났어요.”“곽 대표님, 서인수는 그동안 외부에서 칭찬을 받으며 자만해졌어요. 그런 사람은 누군가에게 쉽게 이용당할 수 있는 법이죠.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서인수는 이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곽승재는 그 말을 듣고 깊은 눈동자에 냉기가 서렸다.“알겠어요. 제가 처리할게요.”“도 대표님이 저를 부르신 건, 서인수에 일에 대해 부탁이 있어서인가요?”“아니요.”도아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저 서인수가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예요. 은서 씨가 위험에 처할 뻔했으니, 서인수는 받아야 할 처벌을 전부 받아야 해요.”곽승재는 도아름을 감탄하는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도 대표님, 정말 대범하고 큰 그릇을 가지셨네요. 탄복스럽습니다.”도아름이 답하려던 순간, 그녀의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휴대폰을 확인하자, 박지연이 연속 메시지
도아름의 질문에 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도 대표님, 죄송하지만 일부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도아름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은서와 곽승재 사이의 일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고, 곽승재가 나름의 계획이나 고려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고은서는 소파에서 눈을 떴다.박지연은 이미 병원에 갔고 식탁 위에는 평소처럼 그녀를 위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었다.휴대폰을 열어보니 박지연이 어젯밤 고은서가 잠든 후 찍은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거기에 술 취한 미인이라며 놀리면서 도아름에게 그녀를 모델로 추천했다고 했다.사진을 보고 고은서는 웃었지만, 박지연이 온승준과 화해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톡 화면을 나가려던 고은서는 미확인 전화 두 통이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발신자는 유성준이었고, 시간은 어젯밤 집에 돌아온 직후였다.그제야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던 약속이 떠올라 급히 유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유성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일어났어?”“미안해요, 성준 오빠. 어제 잠들어서 전화 오는 걸 못 들었어요.”“괜찮아, 예상했어.”유성준은 이어서 말했다.“어젯밤 와인이 꽤 독했지? 나도 약간 취했어.”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고은서는 술이 독해서 취한 거지,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유성준과의 통화를 마친 고은서는 아침을 먹으며 박지연과 톡으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여시은의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나타났다.“고은서 씨, 무슨 일이세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살짝 잠겨 있었다.“별건 아니에요. 어제 술 마시고 좀 취하셨나 해서요. 저도 어제 머리가 어지러워서 바로 잠들었거든요. 제 술이 약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네요.”“아마 어제 술이 좀 독했던 것 같아요.”고은서는 유성준도 취했었다는 이야기를 여시은에게 전했다.“성준 씨가 은서 씨를 집까지 데려다줬겠네요. 성준 씨는 괜찮아요?”여시은
“업무상 횡령죄로 경찰 측 조사받으러 갔다고 하던데. GS그룹에서는 명예 훼손을 피면하기 위해 백유미 모든 직무를 정지시켰다 하더라고. 요즘 들어 백씨 가문에 구경할 거리가 많이 생기네. 백승엽 스캔들이 잠잠해지는가 했더니 불구가 된 다리를 고치기도 전에 백유미한테 또 일이 생기다니.”민시후가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은서, 너 진짜 예상 밖으로 능력 좀 있다?”민시후는 고은서와 백유미 사이의 원한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모든 걸 계획한 사람이 고은서라는 것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런데 백유미가 경찰 측 조사받으러 갔다는 건 나도 모르고 있었어.”그녀의 말을 민시후는 이내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딱 봐도 알리잖아. 곽승재 그 개자식이 네 환심을 사려고 백유미를 처리하려는 거겠지.”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민시후를 쏘아보았다.곽승재가 그녀와 재혼하려고 애를 쓰는 건 사실이지만 백유미가 했던 일을 그저 눈 감고 넘어가 준 것도 사실이었다.그가 갑자기 백유미를 처리하려는데는 꼭 고은서랑 민시후가 모르는 또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다.“그만 생각해. 무슨 이유든 모든 게 다 네가 소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잖아. 그런데 나 며칠 동안이나 회사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내가 뭐하러 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민시후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민 도련님이 어디에서 뭘 하든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너 진짜 냉정하다.”민시후는 더는 뜸을 들이지 않고 그가 며칠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은 원인을 이실직고했다.“해성에 있는 동물원 하나를 매수했거든. 수속도 거의 다 끝나가고 서운 판다 기지에 연락해서 네가 이름 지어준 아기 판다랑 엄마 판다를 함께 데려오면 돼. 때가 되면 부를게. 같이 수속하러 가면 돼.”고은서는 순간 어안이벙벙해졌다.‘그냥 장난치면서 한 말이 아니었어? 진심이었단 말이야?’“내가 말로만 하는 줄 알았어? 아기 판다한테 이름 지어준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동물원을 네 이
경찰서 접견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백유미를 바라보며 물었다.“날 만나겠다고 한 이유가 뭐야?”“내가 조사받으러 왔는데 GS그룹 대표인 널 불러서 증언해달라고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백유미는 살면서 처음으로 그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왜 날 업무 횡령죄로 신고한 건데? 난 서인수가 한 짓에 참여한 적이 없어. 그저 회사 업무 때문에 몇 번 연락한 것뿐이야. 판주 투자은행이 명운 프로젝트 때문에 손해를 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내가 서인수를 도와 일 처리를 한 것도 서인수한테 속아서 그런 거라고. 난 서인수가 진짜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틀린 판단을 내렸을 뿐이야!”“그럼 사실대로 경찰한테 말하면 되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백유미는 헛웃음을 치면서 말을 이어갔다.“승재야, 아무리 내가 책임이 있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갑자기 내 죄를 묻는다는 게 맞다고 생각해? 넌 지금 다른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곽승재는 부정하지 않았다.“또 무슨 일을 나한테 덮어씌우려는 거야? 우리 아빠가 고은서한테 당한 것도 모자라 이젠 너까지 우리 부녀를 망가뜨리려고 해?”“네가 했던 일들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곽승재는 억울해하는 백유미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를 납치하게끔 서인수를 교사한 죄. 대체 왜 그런 걸까? 네가 말한 모순만 일으키고 고은서를 해치려 한 적은 절대 없다는 게 바로 이거야?”백유미는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진정하고 부정했다.“지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난 서인수 대신 일 처리를 해준 것 빼고는 서인수랑 따로 연락한 적이 없어. 서인수가 곧 판결받게 된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어. 죄명도 꽤 크다며? 하지만 도아름 씨랑 은서 씨가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날 일부러 모함하면서 죄책감을 덜려 하거든 난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이런 억울한
“동물원을 ZY 그룹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로 만드는 것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더라고. 내가 조사해봤는데 동물원 규모가 꽤 커. 새로운 장비 추가하고 또 홍보를 제대로 하면 지금 수입 2배 정도는 얼마든지 벌어들일 수 있어.”“널 좋아한다고 준 선물을 갑자기 투자 프로젝트로 만든다고?”박지연이 물었다.“그럼 어떡해? 난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그 선물을 받는다는 것도 이상하잖아.”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틀린 말도 아니지.”박지연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거절하니까 민시후는 어떤 반응이었어? 엄청 실망해 할 것 같은데.”방금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선물을 받아달라고 하는 민시후를 고은서가 단호하게 밀어내자마자 그는 약간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냥 평범한 사업 파트너로 생각한다고 명확하게 말했어. 실망하든 말든 내가 알 바가 아니잖아.”“너 요즘 남자운 좋은가 봐? 전남편 곽승재랑 널 오랫동안 좋아하면서 널 위해 MQ로 들어간 유성준, 그리고 이젠 민시후까지 널 좋아한다고 하는데 넌 누굴 고를 거야?”박지연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다 싫은데. 난 내 사업을 선택할 거야.”고은서는 고민하는 척하더니 아주 단호하게 다 거절해버렸다.“재미없게 왜 그래. 사업한다고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어제 곽승재랑 왜 그렇게 다정하게 서 있었던 거야? 다시 시작할 생각인 거야?”고은서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지연을 쏘아보며 답했다.“아니. 그저 사고였을 뿐이야.”“더 자세히 말해 봐봐. 무슨 사고였는데 그렇게 다정하게 가까이 서 있었던 거야?”“미안하지만 거절할게요.”두 사람이 한창 수다 떨고 있을 때 고은서의 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곽승재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박지연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 아래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폰을 꺼버렸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한테서 어제저녁 더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냐고 문자가 왔다.전화벨 소리가 또다시 울렸을 때 고은서는
곽승재는 원망과 결연함으로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는 고은서를 보면서 말했다.“은서야, 네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나한테 보상할 기회를 줘.”‘보상?’고은서는 속으로 보상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으면서 순간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생에 백유미가 한 짓을 무시하며 그녀의 편을 들어준 죄, 그리고 이번 생에 고은서를 의심하면서 아이까지 잃게 한 죄.그가 그녀에게 입한 상처는 보상이라는 한 마디로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게다가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보상을 바란 적이 없었다.“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지나간 상처가 보상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야. 나한테 있어 제일 큰 보상은 당신이 나랑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자신을 향해 날을 세우는 고은서를 보면서 곽승재는 그녀가 일부러 자신의 화를 돋우면서 자신을 쫓으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화를 내지 않았다.고은서가 그를 무시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곽승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은서야,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올라가서 쉬어. 난 이만 돌아갈게.”그는 디저트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는 운전석에 올랐다.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화내면서 다신 날 찾아오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왜 저렇게 담담해 보이는 거야.’...곽승재가 육현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열심히 배구시합 해설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그저 간단한 친선 경기일 뿐인데 이렇게 신중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 누가 보면 네가 국제대회라도 나가는 줄 알겠어.”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친선 경기가 어때서! 나한테는 모든 경기가 다 최선을 다할 만큼 엄청 중요하 거든.”육현석이 불만스러운 말투로 반박했다.“지연 씨가 참가하니까 창피당하는 걸 피면하기 위해 그러는 거잖아.”곽승재가 육현석
곽승재의 경고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에도 육현석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그만큼 형한테 실망하고 상처받았으니까 그런 끔찍한 꿈을 꾼 거겠지.”곽승재의 눈빛 속의 한기가 순간 사그라들었다.다른 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보상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악몽만큼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옆에 있던 육현석은 곽승재가 자신의 말을 듣고 약간 속상해하는 것 같아 보이자 조심스레 그를 위안했다.“그래도 형수님이 형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잖아. 행동으로 형수님의 생각을 바꾸면 되지. 악몽 속에서 있었던 일이 현실에서는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믿게 만들면 되잖아. 그럼 형수님도 형을 다시 받아들이려고 할 거야.”육현석은 또 요즘 그가 했던 일들에 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백씨 가문을 도와주지 않고 백유미 직무를 정지시킨 것부터 엄청 좋은 스타트야. 형수님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신분을 막론하고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면 돼.”...며칠 후.제인 제약에서 반나절 동안 미팅을 한 고은서과 송민아는 ZY 그룹으로 돌아가자마자 또 부문 직원들과 함께 짧은 미팅 하나를 했다.송민아는 점차 자신만의 업무 템포를 찾아가고 있었고 비서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날이 갈수록 더 노련해졌다.미팅은 퇴근이 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고은서가 직원들과 함께 수다 떨면서 회사 문을 나설 때 갑자기 익숙한 사람 한 명이 회사 문밖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민시후였다.그는 흰색 정장에 은색 넥타이를 하고 손에는 아주 큰 장미꽃다발을 들고 회사 문 앞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를 보자마자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아니나 다를까, 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면서 꽃다발을 내밀었다.“고은서, 선물이야!”직원들의 와 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민시후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어제 분명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절대 사귈 리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건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회사에 들어올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맞춤 제작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우월한 기럭지와 출중한 미모 덕분에 마치 패션쇼 모델 같은 느낌을 주었다.ZY 그룹 직원들도 자연스레 곽승재를 보게 되었고 심지어 대부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꽃다발을 선물하는 민시후 하나로도 충분히 의아할 만 한데 곽승재까지 찾아오다니.평소와 별다른 바가 없는 퇴근 시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밌는 광경을 목격할 줄은 그 누구도 생각 못 했다.흥분해 하는 직원들과 달리 고은서는 머리가 아파왔다. ‘만날 때마다 다투는데 덕분에 또 구설수에 오르게 되겠네.’“곽 대표가 우리 회사엔 무슨 일이야?”아니나 다를까 민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민시후 손에 있는 장미 꽃다발을 본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퇴근했지? 집까지 데려다줄게.”‘또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집까지 왜 데려다주려는 건데?’“필요 없어. 나 차 있어.”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해버렸다.“얼른 밥 먹으러 가자.”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곽승재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걸 본 고은서는 두 사람 사이의 모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나 볼 일 있으니까 알아서들 해.”고은서가 말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민시후가 갑자기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곽승재가 따라 오르지 못하게 재빠르게 차 문을 잠갔다.“너...”고은서가 민시후를 쫓으려고 할 때 그녀의 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전에는 곽승재 일이 아니면 연락 오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게다가 지금 곽승재가 내 눈앞에 서 있는데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지?’고은서가 전화를 받고 입을 열기도 전에 육현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형수님, 얼른 온 닥터한테 전화해요!”“지연이한테 무슨 일 생겼나요?”고은서는 약간 불안해 났다.“지연이 시어머니가 지연이를 강제로 끌고 갔어요. 혼자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